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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크 쿠르드 독립 무산:
미국 제국주의에 토사구팽당하다

10월 29일 이라크 내 쿠르드인의 독립을 추진하던 쿠르드 자치정부 수반 마수드 바르자니가 사임을 발표했다. 독립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이라크 중앙정부의 압력에 굴복한 것이다.

쿠르드인들의 오랜 독립 염원은 다시 한 번 짓밟혔다. 역사적으로 서방 제국주의에 이용만 당해 온 쿠르드인들은 자신들이 다시 한 번 같은 함정에 빠졌음을 발견했다. 서방은 1920년에도 쿠르드의 독립을 약속했다 손바닥 뒤집듯 뒤집은 바 있다.

이번에 사임한 바르자니는 미국의 제국주의 정책을 지지하며 부상한 인물이다. 그의 병력은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지원했고, 그 후 미국이 수립한 새 이라크 국가 하에서 2005년 쿠르드 자치정부 수반으로 등극했다.

미국은 이라크 쿠르드인들을 자신의 용병처럼 부렸으나 그들의 독립 염원은 외면했다 올해 8월, 미국 국방장관 매티스와 쿠르드 자치정부 수반 바르자니

2014년 이라크 정규군이 ‘이라크·시리아 이슬람국가’(ISIS, 이하 아이시스)에 맞서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퇴각한 반면, 바르자니의 쿠르드 병력은 상대적으로 나은 전투 역량을 과시했다. 그는 아이시스에 맞서 싸우면서 주요 유전 지역인 키르쿠크 등을 자신의 세력권으로 포함시켰다. 이전까지 이라크 중앙정부와 관할권을 놓고 다투던 주요 지역들을 군사적으로 차지한 것이다. 이 때문에 수년 동안 이라크 중앙정부와의 갈등이 커져 왔다.

아이시스를 주요 거점(이라크 모술, 시리아 락까)에서 몰아내는 미국의 작업이 거의 마무리되는 듯하자, 바르자니는 이후의 세력 재편을 앞두고 자신에게 기회가 왔다고 판단했던 듯하다. 그동안 미국의 전쟁을 충실하게 지원해서 성과를 냈으니, 자신과 이라크 중앙정부와의 갈등에서 미국이 (적어도 어느 정도는) 자신을 두둔할 것이라고 본 듯하다. 쿠르드 운동이 이란의 영향력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롭다는 것도 유리한 점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미국은 바르자니를 철저하게 외면했다. 이라크 정규군과 시아파 민병대는 다름 아닌 미국산 무기를 갖고서 키르쿠크의 쿠르드 병력을 공격했다. 바르자니가 미국의 중재와 개입을 애처롭게 호소했지만 미국의 답변은 ‘독립 추진 시점이 적절하지 않다’는 것뿐이었다. 바르자니는 토사구팽이라는 말에 딱 들어맞는 처지가 돼 사임했다.

미국의 제국주의적 셈법

지난 수년 동안 중동은 미국의 이라크 점령 실패와 아랍 혁명으로 불안정해졌고 그와 함께 미국의 중동 패권이 흔들려 왔다. 미국에 적대적인 러시아, 이란 등의 영향력이 커진 반면, 미국의 전통적 동맹국인 터키, 사우디아라비아 등은 과거보다 미국의 요구에 소극적으로 반응하고 때때로 미국과 엇박자를 내기도 한다.

미국은 이런 중동 상황에 변화를 주고 싶지만 자신이 통제할 수 없게 불안정해지는 것은 피하려고 한다. 그런데 쿠르드 독립은 후자의 가능성을 높인다.

단적으로, 이라크, 이란, 터키는 쿠르드가 독립을 실제로 감행하려 들면 군사적 행동에 나설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이미 시리아 내전, 예맨 내전, 사우디아라비아-카타르 갈등, 이라크 내 종파 갈등으로(이 모든 게 현재 진행 중이다!) 패권 재확립에 골머리를 썩는 미국으로서는 쿠르드 독립 요구가 추가적인 긴장을 가져오는 것이 반갑지 않다.

쿠르드 독립은 또한 미국이 동맹들을 관리하는 데도 어려움을 준다.

예컨대, 터키는 남한과 함께 사드가 배치된 몇 안 되는 국가다. 미국이 러시아를 견제하는 데서 중요한 구실을 맡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미국은 쿠르드 문제를 놓고 이미 터키와 껄끄러운 관계에 놓여 있다. 미국은 시리아에서 러시아·이란을 견제하려고 쿠르드 병력을 이용하는 반면, 터키는 자국에서 쿠르드 독립 운동과의 전쟁을 선포했을 뿐 아니라 시리아에서 쿠르드를 견제하려고 러시아·이란과도 협력한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이 이라크 쿠르드 독립을 지지하면 터키와의 관계는 더한층 나빠질 것이고 반대로 터키는 러시아에 더 가까워질 수 있다.

또한 미국은 이란을 견제하려고 수년 동안 이라크 안정화에 공을 들여 왔다. 그런데 쿠르드가 독립하면 이라크 중앙정부가 크게 흔들리며 원심력이 커질 수 있다. 미국은 내년 4월로 예정된 이라크 총선에서 친이란 세력의 성장을 최대한 견제해야 하는 처지이기도 한데, 쿠르드의 독립을 지지하면 이라크 내 파트너들의 반발을 살 수 있다.

또 다른 핵심 동맹국 이스라엘이 비(非)아랍계 친서방 국가 수립을 바라며 쿠르드 독립을 지지하고 나서는 것도 미국에게는 골치가 아프다.

이렇듯 미국 제국주의자들의 눈으로 볼 때, 쿠르드인들의 오랜 독립 염원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자신의 중동 패권을 유지하는 데서 쿠르드인들이 어떤 구실을 하느냐만이 중요하다. 미국이 쿠르드를 외면한 것은 이런 맥락에서 봐야 한다.

실제로 미국은 쿠르드 독립에 관한 투표 자체를 “강력하게 반대”했고 투표가 실시된 뒤에는 “심히 유감”이라고 불쾌함을 표시했다. 프랑스, 독일, 영국 등 주요 제국주의 열강도 독립에 반대했고, 자국 내 쿠르드 독립 운동이 없는 사우디아라비아 같은 지역 강국들도 쿠르드 독립에 반대했다.

이라크 내 쿠르드인들이 미국 제국주의 편에 서 온 것은 분명 잘못이다. 그러나 오늘날 쿠르드의 독립은 미국의 중동 패권을 강화하기보다는 모든 제국주의와 그 현지 파트너 국가들(이라크든, 이란이든, 터키든, 시리아든)을 약화시킬 잠재력이 있다. 사회주의자들은 쿠르드인들의 민족자결권을 지지해야 한다.

이번에 다시 드러났듯 제국주의 세력은 쿠르드 독립에 전혀 진지하지 않고 믿을 만한 동맹이 못 된다. 이집트와 시리아, 이라크, 터키 등지에서 저마다 투쟁하고 있는 노동자·민중과 연대하며 현재의 중동 질서 자체에 반대하는 것이 쿠르드 독립에도 더 유리한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