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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편지 포항 강진:
안전이라는 소박한 염원마저 실현 못 하는 자본주의 체제

11월 15일 낮, 규모 5.4의 강진이 돌연 포항 북쪽 땅을 뒤흔들었다. 소식을 듣자마자 바로 포항에 살고 있는 가족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웬걸, 통화량이 폭주해서 전화가 먹통이었다. 전화기를 들고서 발을 동동 구르기만 할 뿐,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3년 전, 자식이 탄 배가 침몰한다는 소식을 듣고도 일터에 발이 묶인 채 애를 태우던 부모의 마음이 이랬었을까. 황급히 켠 페이스북의 뉴스피드에는 내가 알던 건물이 균열을 일으키고 무너진 모습, 놀라서 어쩔 줄을 몰라 하는 사람들의 표정이 피할 길 없이 눈에 들어왔다. 순간 나를 덮친 그 무기력감이란.

다행히도, 별일 없으니 걱정 말라는 문자들이 곧 도착했다. 아버지는 노동자들의 대피와 태업으로 공장 업무가 마비돼 일찍 퇴근했다며 나를 안심시켰다. 진앙지는 포항 북구였고, 남구에 위치한 내 집과는 거리가 꽤 있긴 했다. 그런데 도대체 다행으로 여겨야 하는 건지 불행으로 여겨야 하는 건지 혼란스러웠다. 오랜 친구들, 세월호 특별법 개정 서명을 함께 받았던 지역 활동가들, 투쟁하던 한동대학교 청소노동자들과 그에 연대했던 학생들 등의 얼굴이 어른거렸기 때문이다.

가족들과 연락이 닿은 직후에는, 자동적으로 핵발전소 뉴스를 뒤졌다. 산업부와 한수원 등은 핵발전소 이상 없다는 언론플레이에 바빴고(어쩌면 나보다 더 자동적이고 자연스러운 그들의 반응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언론들도 일제히 받아 적은 듯한 기사들을 내보냈다. 세월호 참사 당시 모든 언론들이 짠 듯이 ‘전원 구조’ 오보를 낸 것이 문득 생각났다. 문재인 정부의 탈핵 공약을 사실상 폐기하라고 주문한 공론화위원회의 발표를 "숙의민주주의"라며 칭찬했던 〈한겨레〉도 여러 어려운 말들을 써가며 국내 핵발전소 내진 설계를 뽐내는 듯한 기사를 올렸다.

하지만 이들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가 없다. 핵발전소 내진 설계라면 세계 최고라고 통하던 일본에서 최악의 핵발전소 사고가 일어난 게 불과 몇 년 전이다. 핵발전소가 밀집한 경주와 울산은 활성단층대로 애초에 지진의 위험이 높은 지역이며, 내진 설계가 소용이 없을 정도의 강진이 이 지역에서 발생할 수 있다는 학자들의 지적이 있어 왔다(핵발전소: 거짓말, 속임수, 은폐에 근거한 위험한 산업).

역대 정부들은 이러한 지적들을 무시하고 크고 작은 설비 문제나 사고들을 은폐하면서 핵발전 확대를 강행해 왔다. 문재인 정부의 신고리5·6호기 건설 재개 결정 또한 그 연속선 상에 있다. 문재인 정부는 사실상 탈핵은 60년 뒤로 미루고, 그 미뤄진 60년 동안 핵발전의 위험성과 사고의 잔혹함에 노심초사하며 고통 받을 이 땅의 사람들의 수명은 크게 앞당겨버린 것과 것과 다름 없다(문재인, 탈핵을 60년 뒤로 미루다).

세월호 참사, 가습기 살균제 참사, 독성 생리대 사태 등을 통해 우리의 생명과 안전을 국가가 사실상 책임지지 않으며, 그 본질 상 그럴 능력도 없다는 것을 평범한 사람들은 어느 정도 경험적으로 인지하고 있다. 지난해 9월 경주 지진 직후에 개봉한, 핵발전소 사고를 다룬 영화 〈판도라〉의 인기는 그러한 평범한 사람들의 너무나 절실하면서도 (안타깝지만) 공허할 수밖에 없는 염원이 반영된 것이었다.

자본주의 체제는 그저 무사하고 안전하고자 하는 평범한 사람들의 소박한 염원마저 실현할 수 없는 비합리와 모순의 극치를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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