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 / 북·미 정상회담의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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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 정상회담에 이어, 5월 북·미 정상회담까지 열린다는 소식에 많은 사람들이 놀랐다. 더군다나 지난해 수시로 서로 전쟁 위협을 가했던 두 사람(트럼프와 김정은)이 만나겠다고 결정했다니 말이다.
지난해 내내 트럼프는 대북 대화는 부질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8월에 “미국은 북한과 25년 동안 대화해 왔다. [그러나] 대화는 답이 아니다” 하고 말했고, (최근 그가 경질한) 국무장관 틸러슨이 대북 협상을 추진하자 “[협상은] 시간 낭비”라고 일축했었다.
극적인 변화 때문에, 한반도에 항구적 평화 체제를 구축할 수 있다는 기대감도 커진 듯하다. 지난 10년 동안 북한과 미국, 한국 등이 공식 외교 협상 한 번 제대로 하기 어려운 시절을 보내다 보니, 사람들은 지금 정세가 근본적으로 바뀌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겠다.
이 와중에 우익은 정상회담 자체를 마뜩잖아 하며 헐뜯기 바쁘다. 그들은 보통 사람들의 평화 염원 정서와 확실히 괴리돼 있다.
평화 정착을 바라는 평범한 사람들의 바람에 공감해야 한다. 그러나 지금의 해빙 무드가 얼마나 지속될 수 있을지, 또, 정상회담이 항구적 평화 정착에 얼마나 영향을 끼칠 수 있느냐 하는 문제를 회피할 수는 없다.
온건 진보진영에서는 북·미 대화를 이끌어 낸 문재인 정부의 외교력을 칭찬하는 얘기가 무성하다. 그러나 남북, 북·미 정상회담이 모두 불안정한 국제 정세에 연동될 수밖에 없음을 외면하지 말아야 한다. 정상회담 계획들이 발표되자마자 중국·일본·러시아가 모두 주판알을 재빨리 튕기면서 협상 과정에 관여하겠다고 선언했다. 이런 움직임만 봐도 한반도가 주변 열강과의 관계의 영향을 크게 받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강대국들의 갈등과 경쟁이 낳은 불안정은 한반도 정세가 긴장에서 일시적 해빙으로, 다시 긴장으로 휙휙 바뀌게 하는 결정적인 요인이다.
2000년의 경험
과거 경험을 돌아봐야 한다. 특히, 2000년 남북 정상회담 전후의 경험을 봐야 한다.
2000년 남북 정상회담은 1998~1999년의 긴장이 일시 이완되면서 성사될 수 있었다.
1990년대 중엽 북한의 “고난의 행군”이 끝나고 2대 세습이 안정화되는 듯하자 1998년에는 험악한 긴장 국면이 재개됐다. 미국은 동아시아에서 자국 패권을 다지기 위한 수단으로 북핵 의혹을 다시 거론하며 북한을 다시 압박했다.
이 긴장은 1999년 일본이 미국의 미사일방어체계(MD)에 참여하기로 하면서 풀리기 시작했다. 북한 미사일 ‘위협’은 일본이 미국 MD에 참여한 주된 명분이었다. 이로써 미국은 냉전 종식 이후 불안했던 미·일 동맹을 다잡으며 동아시아 패권 문제에서 한시름 놓게 됐고, 이를 배경으로 북·미 간에 긴장이 풀렸다.
2000년 남북 정상회담은 이런 상황 속에서 가능했다. 그 뒤 북·미 간 특사가 교환되고 북·미 정상회담 제안이 오갔다.
그러나 미국이 미·일 동맹을 다지고 패권을 재확인한 것은 결국 중국·러시아와의 갈등을 예고했다. 2002년 미국 대통령 조지 부시가 중국을 견제하려는 수단으로 북한을 ‘악의 축’의 하나로 지목하면서 한반도의 해빙 국면은 끝나 버렸다.
이번에는 북·미 정상회담 개최가 확실시됐으므로 당시와 다를까? 안타깝게도 오늘날 동아시아 상황은 2000년보다 훨씬 더 악화돼 있다.
서로 공공연히 ‘경쟁자’, ‘적’이라고 부르는 제국주의 국가들 간에 핵무기 경쟁을 포함한 지정학적 경쟁과 경제적 경쟁이 줄곧 점증해 왔다. 올해 2월 미국은 새 핵태세검토 보고서를 발표하면서 중국과 러시아의 도전에 맞서기 위해 최강의 핵 능력을 확보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미국의 관세 인상으로 “무역전쟁” 얘기도 나온다.
각자 자국이 핵무기와 첨단 무기를 경쟁적으로 늘리는 것을 지지하며 서로 우위를 확보하려고 골몰하는 각국 외교관들이 한 테이블에 앉아 있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 이런 국가들의 관여 속에 한반도 평화가 정착될 기회가 올 수 있기를 기대하는 것은 지나친 낙관론이다.
판문점
이번에 해빙이 찾아온 것도 근본적으로는 미국이 아직 해결하지 못한 어려움과 관계 있다. 트럼프 정부는 북·미 대화로 북한의 핵·미사일 개발 상황을 확인하고 그 개발 속도를 늦춰 시간을 벌 수 있다. 오바마 정부 내내 북핵 협상이 거의 정지돼, 미국은 북한 핵시설이 정확히 어디에 얼마나 있는지 파악하지 못했다. 폭격하고 싶어도 어디를 폭격해야 할지 모른다. 시리아를 중심으로 갈수록 불안정해지는 중동 정세도 미국의 군사력 집중을 어렵게 하는 요인이다.
또한 트럼프는 국내 정치에서 각종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 그는 김정은과의 정상회담이라는 큰 이벤트로 정치적 이득을 일거에 얻으려는 것 같다.
그러나 미국 정부 안팎에서 북·미 정상회담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상당하다. 미국의 권력자들은 북한 ‘위협’론을 고리로 동맹을 강화해 중국을 견제해 오던 틀이 자칫 흔들릴까 봐 우려하는 것이다. 물론 트럼프도 이 틀을 근본적으로 흔드는 일은 하지 않으려 할 것이다.
판문점이든 어디든 5월 트럼프는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만나서, 비핵화와 평화협정 등을 큰 틀에서 합의할 수도 있다.
그러나 진정한 문제는 그 이후부터 시작될 것이다. “검증 가능하고 돌이킬 수 없는” (북한) 비핵화의 과정은 험난할 수밖에 없다. 누가, 언제, 무엇을, 어떻게 검증할지부터 합의하기가 쉽지 않다. 합의에 이르더라도, 대북 제재 완화 등 북한이 원하는 반대급부를 미국이 제공할 의지가 있는지도 의문이다. 미국은 번번이 이 약속을 뒤집으며 분위기를 반전시켜 왔다.
북·미 협상은 위기와 해소가 갈마드는 불안정한 과정일 것이다. 특히, 미국은 다른 제국주의 국가와의 경쟁 속에서 자국의 필요에 따라 얼마든지 협상 과정을 중단시킬 수 있다. 남북 관계도 이 과정에 연동될 수 있다.
지난해 문재인 대통령은 베를린에서 북핵 폐기와 평화체제 구축을 포괄적으로 해결하자고 제안했다. 그래서 이번 남북 정상회담에서 종전 선언 제안 등이 거론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그러나 제국주의 간 경쟁이 점증하고 엄청난 군사력과 군비 경쟁이 지속되는 한 종전 선언은 말 그대로 선언에 그칠 공산이 크다.
문재인 정부는 군사적 긴장을 해소하는 데 필요한 조처를 단행할 생각이 없다. 비록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을 명시적으로 지지하지는 않았지만,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에 대한 협력을 이어 오고 있다. 지난해 사드 배치를 용인한 데 이어 올해 국방부는 처음으로 미국의 MD 해상훈련인 님블타이탄 훈련 참가를 공식화했다.
또한 대대적인 군비 증강에 나섰다. 이미 한국은 매년 지속적으로 군비를 늘려 육중한 군사력을 자랑하는 국가이지만, 문재인 정부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국방비 증가율을 대폭 높이겠다고 공언해 왔다.
이런 점들은 모두 불안정의 요인이 되고 북한을 자극할 테지만, 문재인 정부가 이런 데서 양보할 것 같지 않다.
동아시아 강대국 간 갈등과 현 대화 국면 사이에 명백히 괴리가 있다. 그래서 일각에서는 아예 이 문제를 북한과 미국의 동맹 체결로 풀자는 발상마저 나온다. “이익이 되면 미국의 항공모함이 원산이나 흥남항으로 들어오지 말라는 법도 없다”(김연철 인제대 교수, 3월 12일 〈한겨레〉 칼럼), “북·미 군사동맹은 북한의 군사적 위협 해소와 체제안전보장을 가장 확실하게 해 줄 수 있다.”(이근 서울대 교수, 3월 9일 〈경향신문〉 칼럼)
실현되기 쉽지 않은 구상임은 제쳐 놓겠다. 설사 미국이 북한을 포용하고 심지어 군사 협력 관계를 맺더라도 진정한 한반도 평화는 아닐 것이다. 그런 협력은 결국 중국을 겨냥하는 것일 테고, 한반도와 그 주변에서 제국주의 갈등은 지속될 것이기 때문이다.
제국주의는 “자본주의의 최신 단계”이고, 자본주의 강대국들의 경쟁 체제이다. 자본주의 지배자들 간의 협상과 타협으로는 제국주의가 낳는 불안정이 항구적으로 해소될 수 없다. 이미 100여 년 전부터 고전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지적해 온 이 통찰은 지금도 유의미하고 적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