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차 산업혁명론은 사회가 정보통신기술의 발전에 따라 변동한다는 가정을 전제하고 있다. 이처럼 기술 발전이 저절로 사회 변동을 가져온다는 생각을 기술결정론이라고 한다. 마르크스주의를 기술결정론으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마르크스는 이런 견해를 배격했다.
많은 사회학자들과 미래학자들, 심지어 일부 좌파들도 정보통신기술의 발전으로 현대 사회의 경제와 노동의 성격이 근본적으로 변할 것이라고 가정한다. 디지털 기술의 발전 때문에 독점과 위계가 지배하던 자본주의가 분권화된 네트워크형 경제로 변한다든지, 노동에 바탕을 둔 사회가 종말을 고하게 된다는 것이 그런 주장들이다.
그러나 정보통신 분야 산업을 보더라도 분권화된 네트워크는커녕 고도로 집중된 경제를 목도하게 된다. 마이크로소프트, 구글, 애플, 페이스북 등 거대 기업이 이 분야 산업을 지배하고 있다.
인터넷은 누구에게나 동등하게 개방된 공간처럼 보이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소수 대기업들이 디지털 플랫폼을 지배하며 엄청난 수익을 올린다. 그들의 사업 운영 방식은 전혀 개방적이지 않다. 마이크로소프트가 윈도라는 운영체제를 개발하고 시장을 지배하는 방식은 이 점을 잘 보여 주는 사례다.
정보통신 분야를 지배하는 대기업들은 기득권을 유지하고자 자신이 보유한 플랫폼을 폐쇄적으로 운영한다. 애플이 자사 제품들만 서로 연동되도록 폐쇄적인 플랫폼을 구축한 것은 유명하다. 흔히 구글은 반대 사례로 알려져 있다. 안드로이드(스마트폰 운영체제)를 개방해 휴대폰 개발자들의 참여를 허용한 것이 성공 비결이라고 말이다. 그러나 구글도 극히 일부 영역만 개방했을 뿐, 안드로이드 플랫폼의 핵심을 폐쇄적으로 관리하기는 마찬가지다.
물론 오픈소스 프로그래밍이 소프트웨어 혁신에 도움이 되기는 했다. 하지만 시장을 지배하고 이익을 거둔 것은 대기업들이다. 대기업의 이윤 추구를 우회해 개인간 “공유”를 가능하게 하고 새롭고 개방적인 경제 질서를 만들 것으로 기대됐던 기술들은 얼마 못 가 기존 체제에 짓밟혀 사라지거나 기존 체제로 흡수됐다.
음악파일 공유 서비스가 그런 경우다. 4차 산업혁명의 대표 기술 하나라는 블록체인은 또 다른 사례다. 블록체인은 기존 금융기관을 통하지 않고 개인간 직접 거래가 가능하도록 개발된 혁신 기술로 알려졌다. 그런데 최근에는 기존 금융기관들이 여러 금융기관들 사이의 결제 시간을 줄이고자 블록체인을 채택하고 있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는 혁신 기술을 가진 기업이 어느 때보다 빠르게 대기업을 추월할 수 있다고들 하지만, 이것은 신화일 뿐이다. 미국에서 창업한 지 5년 미만인 신생 기업의 비율은 1978년 14.6퍼센트에서 2011년 8.3퍼센트로 더 줄었다. 한국에서는 신생률이 이보다 조금 높지만 생존률은 훨씬 낮다. 무역협회 보고서를 보면 한국 신생 기업의 5년 생존률은 27퍼센트에 불과하다(2015년 기준). 과학·기술형 창업의 경우도 33퍼센트로, 별 차이가 없다.
대기업은 혁신 기업의 기술을 빼앗거나 아예 그 기업을 인수·합병하면서 지배력을 키우고 있다. 정보통신 분야도 마찬가지다. 페이스북의 왓츠앱 인수나 구글의 유튜브와 안드로이드 인수가 그런 사례다. 사물인터넷, 인공지능 기술 흡수를 위한 인수·합병도 수없이 진행되고 있다.
요컨대, 권력이 분산되기는커녕, 강한 기업이 약한 기업을 집어삼키며 독점으로 향하는 경향이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