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게재
유럽연합의 역사:
유로존과 유럽연합은 노동자들에게 불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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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5일 영국의 유럽연합(브렉시트) 탈퇴 방안에 대한 합의안이 하원에서 압도적 표차로 부결됐다. 그리고 영국의 기성 정치는 혼란에 빠져 들었다.
2016년 국민투표로 결정된 브렉시트는 권력 엘리트층에 의해 삶이 파탄났다고 느낀 서민 대중의 항의 투표 결과였다.
독자들이 브렉시트의 의미와 현 상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본지의 지난 기사들을 재게재한다. 아래의 기사는 본지 154호에 처음 실렸다.
〈노동자 연대〉 153호에 실린 ‘그리스 경제 위기의 대안 논쟁: 그리스 민중에게 무엇이 필요한가?’에서 기자는 그리스의 유로존 유럽연합 탈퇴(‘그렉시트’) 필요성과 이에 관한 논의를 다뤘다. 그 기사의 핵심을 말하면 이렇다. ‘유로존과 유럽연합은 노동자들에게 유해하다. ‘그렉시트’가 무조건 노동자들에게 유리할 것이라고 장담할 수는 없지만, 현실적으로 유로존 유럽연합에 남아서는 긴축을 중지할 방법이 없다. 투쟁을 상승·확대시킨다는 관점에서 ‘그렉시트’는 노동자 통제 같은 급진적 요구와 결합돼야 한다.’
이 글에서는 유럽연합의 역사를 돌아보며 왜 유로존과 유럽연합이 노동자들에게 유해한지를 더 설명하고자 한다. 또한 유럽 통합 구상에 관한 마르크스주의자들의 분석도 소개하고자 한다.
유럽 통합 과정 돌아보기
1950년대부터 시작된 유럽 통합은 당시 프랑스의 외교정책과 관련이 깊다. 제2차세계대전 종전 후 프랑스 외교정책의 목표는 독일의 부활을 억제하는 것이었다. 세계적으로 냉전 체제가 형성되기 시작하고 소련의 세력권이 확장되는 상황에서 프랑스는 유럽을 통합한다는 장기적 전망 속에 독일을 서유럽 진영에 묶어 놓자는 결론에 이르렀다. 통합된 유럽에서 프랑스는 정치적 지도력을 제공하고 독일은 경제적으로 기여한다는 것이 프랑스의 구상이었다. 이 구상은 프랑스가 제안해 1951년 설립된 유럽석탄철강공동체(ECSC)로 구체화됐다.
이런 프랑스의 구상은 당시 미국의 이해관계에도 어느 정도 맞아떨어졌다. 미국은 두 가지 이유에서 유럽의 재건을 바랐다. 첫째, 소련 블록의 성장을 저지하는 것이다. 그러려면 서유럽 경제가, 특히 독일 경제가 성장해야 했고 유럽 국가들이 재무장돼야 했다. 유럽의 재무장이라는 목표는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의 창설로 이어졌다. 그런데 서유럽 경제가 순조롭게 부활하려면 프랑스와 독일의 오랜 앙숙 관계가 어느 정도 해소돼야 했다. 1947년 6월 미국은 유럽 재건을 위한 마셜 플랜을 발표했다. 그리고 그 조건으로 유럽 국가들의 상호협력을 내걸었다.
미국이 유럽 경제의 재건을 바란 둘째 이유는 유럽 노동운동이 가하는 위협을 완화하는 것이었다. 1947년 프랑스 르노 자동차 공장들에서 격렬한 파업 투쟁이 일어났고, 프랑스 국내외 지배자들은 공산당이 집권하는 것 아니냐고 걱정하기까지 했다. 미국은 유럽 경제가 회생하면 이런 노동운동의 압력이 어느 정도 누그러질 것이라고 봤다.
유럽 통합 구상은 1957년 로마조약 체결로 이어졌다. 이 조약에 따라 유럽경제공동체(EEC)가 창설됐다. 로마조약은 1968년까지 조인국들 간 관세를 철폐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1958년 샤를 드골이 프랑스 대통령이 되며 흐름이 약간 바뀌었다. 드골은 로마조약을 찬성하지 않았다. 그는 다른 유럽 국가에 견준 프랑스의 정치적·군사적 우위를 이용해 프랑스가 주도하는 유럽 동맹을 구축하고 싶어 했다. 그리고 그 동맹이 장차 미국과도 어깨를 나란히 하고 경쟁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랐다. 그러면서 1965년에는 여섯 달 동안 EEC 위원회에 담당자를 파견하지 않았다. EEC 운영 원리를 만장일치에서 다수결로 바꾸려는 움직임에 대한 항의였다. 다수결 원리가 채택되면 프랑스는 비토권을 잃게 될 것이었다. 결국 만장일치 원리가 유지됐다.
공동 시장
드골은 1960년에는 두 번에 걸쳐 영국의 EEC 가입에 비토권을 행사했다. 영국이 참가하면 EEC가 장차 미국과 대등하게 경쟁할 수 있는 기구가 되기보다는 그저 커다란 자유무역 지대가 될 공산이 크다고 봤기 때문이었다. 정치적으로는 미국에 의존하면서 커다란 공동 시장을 구축하고 확대해 나갈 것이냐, 아니면 세력은 비교적 작더라도 정치적으로 미국으로부터 더 독립된 기구를 건설할 것이냐는 지금도 논쟁되는 주요 쟁점이다.
1970년대에 두 가지 중요한 변화가 일어났다. 첫째는 1971년 브레튼우즈 체제의 종식이고 둘째는 1974~75년에 다시 시작된 경제 위기였다. 이 두 변화 때문에 그 전 20년 동안 추진된 유럽 통합이 물거품으로 돌아갈 뻔했는데, 각국이 두 사태에 각자도생식으로 대응했기 때문이다.
브레튼우즈 체제는 금본위제와 고정환율제를 중심으로 했다. 이것이 무너지면서 유럽 국가들은 서로 자기 화폐의 가치를 떨어뜨리려 했다. 그러면서 외환시장의 변동도 심해졌다. 이 때문에, 그전에는 환율이 안정된 상황에서 EEC 회원국들의 국경을 넘나들며 사업을 하던 유럽 기업들이 곤경을 겪었다. 1970년대 경제 위기도 마찬가지 효과를 냈다.
이에 EEC 회원국들은 1972년 ‘스네이크’ 체제라고 불린 통화정책 조율 조처를 실시했으나 곧 실패했다. 프랑스는 유럽 통합을 진전시키려면 독일이 환율상의 부담을 더 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를 반영해 1979년에 탄생한 것이 유럽통화제도(EMS)이다. 이 때문에 독일은 달러의 가치가 급속히 떨어지는 상황에 대응해 자국 통화인 도이치마르크의 가치를 더한층 떨어뜨리는 조처를 취하지 못하게 됐다. 이는 비교적 약한 통화를 배려한 조처였다. 이처럼 가치가 서로 다른 통화들의 균형을 어떻게 이룰 것이냐 하는 논쟁은 1970년대 이래 유럽 통합 과정에서 두드러지는 특징이었고, 2010년 유로존 위기가 발생한 이후 지금까지도 본질적으로 마찬가지의 논쟁이 이어지고 있다.
한편, 1970년대는 전후 장기 호황(1940년대부터 60년대까지)의 부산물로서 독일·일본에 견줘 미국 경제의 상대적 비중이 눈에 띄게 쇠퇴한 시기이기도 했다. 이에 대응해 미국은 군비 지출을 줄이고, 관세를 대폭 인상하는 등 보호무역주의 조처를 도입하고, 노동자들의 생활수준을 공격했다. 이와 함께 기축통화인 달러 발행국으로서의 지위도 이용했다. 즉, 달러의 가치를 떨어뜨려 수출 경쟁력을 향상시키려 한 것이다.
수출에 크게 의존해 성장한 독일이 미국의 달러 약화 정책에 대응해 택할 수 있는 수단은 별로 없었다. 국내 수요를 억제하고, 생산 ‘합리화’와 기술 발전을 촉진하고, 노동비용이 비교적 낮은 곳으로 생산을 이전해 경상수지 흑자를 계속 유지하는 것 말고는 다른 도리가 없었다.
이처럼 변화된 국제 경쟁 상황에 대처하는 데서 유럽 지배자들에게 통화정책 조율 수단인 EMS만으로는 불충분했다. 유럽 각국의 경제정책을 더 깊게 조율·통합해야 했다. 그리고 그 중심은 독일의 경제정책이 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이제 독일은 유럽에서 가장 큰 경제가 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럽 각국의 경제정책을 조율·통합한다는 구상은 1983년 프랑스 대통령 미테랑이 ‘현대화’ 진영이 주장한 신자유주의 처방을 따르기로 결심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마스트리히트 조약
당시 프랑스 정부 내의 ‘현대화’ 진영을 이끈 인물은 자크 들로르였다. 들로르는 나중에 유럽연합집행위원장을 지내며 1986년 유럽통합법(SEA) 제정을 촉진했다. 유럽통합법은 1992년까지 유럽 역내 시장의 무역장벽을 모두 폐지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그 뒤 1992년에는 마스트리히트 조약이 체결되며 유럽 단일 통화 도입의 길이 닦였다. 마스트리히트 조약에 따라 EEC는 1993년 유럽연합으로 탈바꿈했다. 1998년에는 유럽중앙은행(ECB)이 창립됐고, 1999년에는 유로화가 도입됐다.
독일은 유럽 단일 통화의 안정성을 보장하고 공동의 재정·경제정책을 수립하기 위한 다섯 가지 기준을 제시했다. 그 다섯 가지 기준은 1997년 체결된 ‘안정 및 성장 조약’에 담겼다. 그중 유명한 것이 정부 예산 적자를 국내총생산(GDP)의 3퍼센트 이내로, 국가 부채를 GDP의 60퍼센트 이내로 억제한다는 조건이다. 1990년대 유럽 국가들은 이 기준을 충족시키기 위해 긴축 정책을 시행했다. 이에 노동자들의 저항이 일어났고, 유럽 통합에 대한 회의론과 반감이 일었다. 2005년 프랑스와 네덜란드 국민투표에서 유럽헌법이 부결된 것은 그런 정서가 반영된 결과였다.1(이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좀더 자세히 설명하겠다.)
1980년대 말과 1990년대 초의 소련 해체도 중요한 변화였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소련 블록에 속해 있던 국가들의 유럽연합 가입이다. 2004년에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슬로바키아, 슬로베니아, 에스토니아, 체코, 폴란드, 헝가리가 가입했고, 2007년에는 루마니아, 불가리아가 가입했다. 2013년에는 크로아티아가 가입했다. 이 과정에서 유고슬라비아 내전과 뒤이은 나토군(미국을 중심으로 한 유럽연합 국가들이 포함된 군사기구)의 세르비아 폭격 같은 끔찍한 야만이 일어났음을 기억해야 한다.
한편, 소련 블록 해체 과정에서 통일을 이룬 독일은 강력한 경제력에 더해 정치적 영향력도 강해졌다. 이제 독일은 유럽 기구들 안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한다.
앞에서 말했듯이 2005년 프랑스와 네덜란드의 좌파들과 다수 노동자들은 신자유주의적이고 비민주적인 유럽헌법을 거부했다. 유럽헌법 부결은 “20년 넘게 유럽 사회를 지배한 신자유주의 정책 때문에 여러 해 동안 고통을 겪은 사람들의 승리였다.”2
일부 좌파는 착각 속에 유럽헌법 찬성을 주장했지만, 전체로 보아 유럽헌법은 유럽 노동자들에게 해로웠다. 당시 한국 진보진영의 유럽헌법 찬성론자와 논쟁을 벌인 김인식은 이렇게 설명했다. “[유럽]헌법은 여성의 자유롭고 합법적인 낙태 선택권을 부정한다. 포르투갈·아일랜드·폴란드에 만연해 있는 야만적인 여성 억압 상태를 용인하는 것이다.
“또, 회원국 거주자 중 3분의 1이 시민권(투표권을 포함해)을 인정받지 못한다. 이것은 난민들에게 굳게 닫혀 있는 “요새화한 유럽”을 건설하겠다는 뜻이다.
“헌법은 회원국들의 다국적인 성격을 부인하고, 영토보전 원칙의 이름으로 피억압 국민의 자결권과 국가 없는 국민을 거부한다.
“또, 준독재적이고 비민주적인 유럽 공동체를 만들려 한다. 진정한 정치 권력은 정부들과 선출되지 않는 위원회 같은 기구들의 수중에 집중돼 있다.
“유럽중앙은행은 ‘독립성’ ― 그 권한은 시민이나 민중에게서 나오지 않는다 ― 을 유지할 것이고, 기업과 주주들을 제외한 나머지에게는 아무 책임도 지지 않을 것이다.”
해마다 난민 수천 명이 유럽으로 들어가려다 지중해에 빠져 죽는데도 오히려 단속을 강화하고, 압도 다수가 반대를 거듭 표명하는 데도 그리스에 긴축을 계속 강요하는 오늘날 유럽연합의 모습은 당시의 이의제기가 옳았음을 보여 준다.
비록 유럽 지배자들은 반대에 부딪혀 ‘헌법’이라는 이름을 쓰지 못하게 됐지만 그럼에도 그 본질적 내용은 2007년 체결된 리스본 조약으로 이어졌다.
레닌의 통찰
20세기 초 러시아 혁명가들이 ‘유럽합중국’ 슬로건을 두고 논쟁을 벌였다. 이에 1915년 8월 레닌은 ‘유럽합중국 슬로건에 대하여’라는 글을 발표했다.
레닌은 유럽합중국 슬로건이 “독일 오스트리아 러시아 군주제의 혁명적 전복”을 수반하는 요구라면 정치적으로는 반대하기 힘들다고 인정하면서도, 경제적 측면에서는 실현 불가능한 것이거나 심지어 반동적인 것이라고 지적했다.
강대국들이 서로 경제적·지정학적 경쟁을 벌이며 전쟁도 불사하는 것이 자본주의 체제의 본질적 속성이므로 유럽합중국이 실현될 수가 없다는 것이 레닌의 설명이었다. “자본주의에서 다른 조직 방식은 가능하지 않다. 식민지, ‘세력권’, 자본수출을 포기한다? 이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일요일마다 부자들에게 기독교의 고상한 도의를 설교하고, 1년에 수백만 루블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수백 루블은 가난한 자들에게 적선하라고 눈물로 호소하는 성직자 수준으로 전락하는 것을 뜻한다.”
물론 레닌은 “자본가 간에, 국가 간에 일시적인 협정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유럽합중국은 유럽의 자본가들 사이의 협정으로 가능하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무슨 목적에서인가? 오로지 유럽에서 사회주의를 공동으로 진압하기 위해, 그리고 일본과 미국에 맞서 식민지 전리품을 공동으로 보호하기 위해서일 뿐이다. … 현재의 경제적 기초에서, 즉 자본주의 하에서 유럽합중국은 오직 미국의 더 빠른 발전을 막기 위한 반동적 기구가 될 것이다. 민주주의와 사회주의라는 대의가 오로지 유럽과만 관련 있던 시대는 이제 완전히 지나가 버렸다.”(강조는 레닌) 즉, 유럽합중국은 미국·일본과의 경쟁에서 유럽 국가들의 이익을 보호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연합을 뜻할 것이므로 반동적이라는 것이다.
크리스 하먼의 분석
2009년 작고한 영국 마르크스주의자 크리스 하먼은 1971년, 유럽 통합 구상에 관한 분석을 내놓았다.3 하먼은 몇 가지 중요한 사항을 지적했다. 그중 첫째는 유럽 통합이 국제 경쟁과 미국 자본이 가하는 압박에 대한 반작용이었다는 것이다.
규모가 큰 데다가 기술력도 뛰어난 미국 경제는 유럽 자본들이 서로 결속하도록 하는 압력으로 작용했다. 한 나라 범위의 자원만 이용해서는 미국과 경쟁할 수 없었던 유럽 자본들은 자신들 사이에 놓인 무역과 투자에 대한 장벽을 걷어 내야 했다.
미국 경제의 압력이 아니더라도 자본은 시간이 지나며 집중되는 경향이 있다. 1991년 하먼은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국가를 분석하며 자본의 집중이 세 가지 수준에서 이뤄진다고 설명했다.4 일국 수준, 지역 수준, 세계 수준이 그것이다. 하먼은 이렇게 설명했다. “한 국가가 제공하는 자본 활동의 기반이 너무 협소하면, 다른 국가들과의 동맹이나 합병을 통해 그 기반을 넓혀야 한다. 그래서 장기적으로 보면 지역 블록이 두드러지는 추세가 나타날 수 있다.”
하먼의 지적은 현실에서 어느 정도 입증된다. 유럽의 1천대 기업의 인수·합병 통계를 보면, 1960~70년대에는 자본의 집중이 주로 일국 수준에서 나타났다. 그러다 1970년대 중반의 경제 위기를 거치며 점차 유럽적·국제적 수준의 자본 집중 현상이 두드러졌다. 1980년대 초에는 인수·합병의 65.2퍼센트가 일국 수준에서, 18.7퍼센트가 유럽 수준에서, 16.1퍼센트가 세계 수준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1980년대 말에는 47.7퍼센트가 일국 수준에서, 40퍼센트가 유럽 수준에서, 12.6퍼센트가 세계 수준에서 일어났다.
집중과 분열
이처럼 자본의 집중 경향이 유럽 통합 진전의 이면에 있었다.
그러나 하먼은 반대 경향도 있다고 지적했다. 앞에서 말한 자본 집중의 세 가지 유형에 어울리는 정책은 각각 다르고 때로는 서로 충돌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각국 정부들은 유럽 수준의 자본 집중 경향과 어긋나는 행보를 취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2008년 이탈리아 정부는 에어프랑스가 이탈리아 국영 알리탈리아 항공사를 인수하는 것을 반대하며 이탈리아 금융기업에 팔아 버렸다.
유럽 통합의 틀 안에서도 여전히 각국은 각자의 이익을 추구한다. 유럽 수준에서 사업을 하는 다국적기업들도 여전히 특정 국가에 기반을 둔 자본가 집단이 지배하는 경우가 흔하다. 그래서 각국 정부는 유럽연합의 정책이 자국에 기반을 둔 자본에 유리하게 되도록 애쓴다. 가장 분명한 사례가 공동 통화인 유로에 관한 정책이다. 독일과 네덜란드는 강력한 유로를 원하는 반면, 프랑스와 이탈리아는 유로 강세 기조에 계속해서 불만을 나타내 왔다.
그러므로 전체로 보아 유럽 통합은 통합의 경향과 분열의 경향이 모두 내포돼 있는 모순된 과정 속에 있다.
결국 유럽연합을 어떻게 봐야 하는가?
지금까지의 논의를 바탕으로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릴 수 있다.
- 유럽연합은 세계 경쟁에서 유럽 자본의 이익을 지지하기 위한 기구로 출발했고 지금도 그렇다. 노동력 착취 증대가 유럽연합의 핵심 운영 원리로 돼 있는 데서 확인할 수 있다. 각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구체적 정책에 관해서는 의견이 다소 엇갈릴 수 있지만, 노동자를 공격하는 데서는 한통속이다. 예를 들어, 그리스의 채무 부담을 일부 완화해 줄 것이냐 말 것이냐를 두고는 설왕설래가 있지만, 그리스가 계속해서 고강도 긴축을 하며 빚을 갚아 나가야 한다는 데서는 유럽 지배자들 사이에 이견이 없다.
- 유럽연합을 노동자의 이익에 맞게 활용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은 착각이다. 유럽연합의 진정한 권력은 유럽중앙은행 같은 ‘독립적인’, 즉 대중의 통제를 전혀 받지 않는 기구들에 있다. 그리고 이 기구들은 경제 위기에 대응해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부보다는 자신들이 임명한 전문관료(테크너크랫)의 통치를 더 좋아한다. 예를 들어 2011년 그리스에서는 루카스 파파데모스가, 이탈리아에서는 마리오 몬티라는 은행가 출신의 관료들이 선거를 통하지 않고 각국의 총리가 됐다.
- 반노동자적이고 비민주적인 유럽연합의 약화나 해체를 좌파가 안타까워할 까닭은 없다. 일부 좌파는 유럽연합을 유럽 노동계급 연대의 기초로 보지만, 유럽연합은 각국 지배자들이 경쟁적으로 자국 노동자들을 공격하도록 만들고, 유럽 바깥의 노동자와 천대받는 사람들은 배척한다. “요새화된 유럽”이라는 이민 통제 정책이 그것을 잘 보여 준다. 또, 이런 정책들로 말미암아 강화되는 이민자 배척 정서와 인종차별 사상은 극우와 파시즘이 성장하는 비옥한 토양이 되고 있다. 즉, 유럽연합은 오히려 국제주의를 훼손한다. 유럽(더 나아가 세계) 노동계급의 진정한 연대와 단결은 유럽연합의 틀을 벗어나야 가능해진다.
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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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헌법을 둘러싼 논의와 운동에 관해서는 다음 글들을 참고하시오. 닉 바레, ‘신자유주의를 강타하다’, 〈다함께〉 57호(2005.6.8); 알렉스 캘리니코스, ‘유럽 극좌파의 부상’, 〈다함께〉 57호(2005.6.8); 김인식, ‘유럽연합은 대안 모델이 아니다’, 〈다함께〉 58호(2005.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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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식, ‘유럽연합은 대안 모델이 아니다’, 〈다함께〉 58호(2005.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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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ris Harman, ‘The Common Market’, International Socialism (1st series) 49(Autumn 1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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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ris Harman, ‘The state and capitalism today’, International Socialism 2(Summer 1991). 국역: ‘국가와 오늘의 자본주의’, 《오늘의 세계 경제: 위기와 전망》, 갈무리, 1994.?
추천 책
브렉시트, 무엇이고 왜 세계적 쟁점인가?
알렉스 캘리니코스 외 지음, 김영익·김준효 엮음, 책갈피, 156쪽, 6,5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