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라틴아메리카 우파 쿠데타를 도운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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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수엘라에서 같은 일이 되풀이돼선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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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28일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존 볼턴은 파병 계획을 암시하는 메모를 유출해, 베네수엘라 우파의 정권 탈취 시도를 지원할 군사 개입을 시사했다. 미국은 자신들이 “자유와 법질서”를 위해 행동한다고 주장하지만, 그들은 자기 이해관계를 위해 라틴아메리카를 피투성이로 만든 오랜 역사가 있다. 데이브 수얼이 미국이 개입한 라틴아메리카 우파 쿠데타를 돌아보며, 제국주의와 우파에 맞선 저항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우파는 베네수엘라에서 벌어진 혼돈이 사회주의가 절대 불가능함을 보여 주는 증거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국제 사회”가 “무언가 조치를 취해야만 한다”고 경고한다.
하지만 라틴아메리카에서만 예외인 듯하게 존재하는 좌파 정부들의 가장 큰 문제는 계속해서 외세의 개입으로 실각해 왔다는 것이다.
라틴아메리카에서 미국은 잔혹한 개입을 거듭해 왔다.
사회주의가 성공하려면 제국주의자들이 손을 떼도록 만들어야 한다.
아래에서 미국이 뜻대로 한 사례와 그렇게 하지 못한 사례를 소개한다.
1954년 과테말라
원조 “바나나 공화국”이던 20세기 초의 과테말라는 미국이 소유한 유나이티드프루트컴퍼니가 지배했다.
유나이티드프루트는 과테말라 토지의 40퍼센트를 소유하고, 여러 군사 독재자들과 협력해 날로 빈곤을 심화시켰다. 백악관 고위층과 CIA의 비밀 요원들이 이 기업과 긴밀히 연결돼 있었다.
1940년대 중반부터 후안 아레발로 정부와 그 후임자인 하코보 아르벤스 정부가 온건한 개혁들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노동자 파업과 농민 운동의 힘 때문이었다.
그 개혁은 노동조합 권리를 보장하고, 제한적이나마 토지를 재분배하고 토지세를 부과하는 것 등이었다.
CIA는 무장 단체에 돈과 무기를 대고 무장 단체를 훈련시켜서, 1954년 아르벤스 정부를 전복했다. 이 무장 단체가 온두라스에서 침략해 들어오자, [이를 구실로] CIA의 폭격기가 공중에서 과테말라시티를 폭격했다. 아르벤스는 일주일 만에 사임했다.
이 쿠데타는 민주주의를 끝장냈다. 40년간 잇따른 독재 정권들은 공포 정치를 펼쳤고 수많은 사람을 학살했다.
이 쿠데타는 급작스럽게 일어난 일이 아니었다. 미국과 그 동맹들이 몇 달 전부터 쿠데타를 선동했다.
아르벤스는 군 장성들이 자신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는데도 노동자·농민을 무장시키길 거부했다. 그래서 그는 속수무책이 됐다.
아르벤스 정부의 일원이었고 힘을 키우고 있던 과테말라노동당(공산당)은 스스로 저항을 결집하기보다는 아르벤스의 행동에 동조했다. 비극이었다.
1965년 도미니카공화국
미국 정부는 도미니카공화국을 자기 맘대로 좌지우지할 수 있는 나라로 여겼다.
미국은 1914~1926년 도미니카공화국을 점령했다.
당시 미국 국무부 장관 코델 헐이 소름 끼치도록 악독한 도미니카공화국 라파엘 트루히요 정권을 두고 한 말은 유명하다. “그는 개자식일 거야. 그런데 우리 개자식이지.”
나중에 트루히요가 골칫거리가 되자 CIA는 1961년 그를 암살했다.
하지만 평범한 도미니카인들은 [트루히요의 자리에] 더 점잖은 우파 지도자를 앉혀 질서 있게 전환하려는 각본을 따르지 않았다. 도미니카인들은 후안 에밀리오 보스크를 선출했고, 보스크는 사회민주주의적 개혁을 시행하려 했다.
부자들은 보스크에게서 등을 돌렸다. 고위 장성들, 트루히요에게 협력하던 자들은 쿠데타를 일으켰다.
하지만 군대 내에서 반란이 일어나 보스크가 복권됐다. 이 반란은 처음에는 꽤나 성공적이었다. 당시 미국 대통령 린든 존슨은 군대 4만 명을 파견해 이 저항이 혁명으로 바뀌는 것을 차단했다.
미국 군대는 도미니카공화국을 점령하고 트루히요 정부의 관료였던 엑토르 가르시아-고도이를 임시 대통령으로 앉혔다. 그는 미국 기업들이 도미니카공화국의 부를 나눠 갖는 것을 도왔다.
점령군은 트루히요 정부의 장관이었던 호아킨 발라게르가 당선한 선거를 “감독”하고 나서야 떠났다.
1973년 칠레
전 칠레 대통령 살바도르 아옌데는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정치적 순교자 중 한 명이다. 그는 3만 명을 죽인 군사 쿠데타의 포화 하에서 마지막 저항의 연설을 남겼다.
이 쿠데타는 장기간의 “불안정” 이후에 벌어진 일이었다. 오늘날 베네수엘라와 매우 비슷하게 우파는 반정부 시위를 조직했다. 중간계급과 사용자들은 경제를 멈춰 세우려 애썼다.
CIA는 그들의 조직을 지원했고, 미국 기업들이 이들을 도와 “경제가 울부짖게 만들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CIA는 장성들이 “군사적 해결책”을 시행하도록 압박했다.
하지만 이 끔찍한 쿠데타는 아옌데가 이끈 개혁주의적 민중연합 연립정부만 노린 것이 아니었다. 대중 행동의 물결도 분쇄하려 했다.
당시 농민과 빈민들은 [우파의 저항에 맞서] 토지를 점유했다.
노동자들은 파업을 벌이고 “코르돈”을 결성했다. 코르돈은 생산을 조율하고 사용자들의 사보타주를 무찌를 조직이었다. 코르돈들은 우파의 폭력을 격퇴하기 위해 자기 방어 위원회를 세웠다.
하지만 아옌데는 자신의 유일한 희망이 (부자와 우파를 포함해) 모두를 헌법 앞에 단결시키려 애쓰는 것에 달려 있다고 여겼다. 이는 재앙으로 판명났다.
아옌데를 살해한 장군 아우구스토 피노체트를 군대의 수장에 앉힌 게 아옌데였다. 그리고 아옌데는 사력을 다해 노동자들이 흩어지도록 했다. 특히 임금을 지키기 위해 강력한 파업을 벌이던 광원들에게 그랬다.
공산당은 노동계급 내에서 진정한 영향력이 있었지만, 인내하고 자제하라고 주장하는 데만 그 영향력을 사용했다. 사태 전개의 주도권을 최악의 적들에게 넘겨 주는 꼴이었다.
2009년 온두라스
온두라스는 중앙아메리카에서 일어나는 반란을 진압하기 위한 미국의 핵심 기지였다.
[2005년 당선한] 대통령 마누엘 셀라야는 비록 우파 정당인 자유당 출신 인물이긴 했지만, 베네수엘라와 볼리비아 좌파 정부들과의 대안적 동맹 맺기를 타진하기 시작했다.
셀라야는 최저임금을 대폭 인상했다. 그 뒤 헌법의 민주화를 위한 비공식 국민투표를 실시했다. 당시 헌법은 [1982년 통과된 것인데,] 1980년대 니카라과에서 잔혹한 반혁명 전쟁을 벌인 미국에 의해 도입된 것이었다.
군부는 투표함을 압류하고 이에 항의하는 셀라야를 체포했다.
이 쿠데타는 거대한 시위를 촉발했다. 하지만 당시 미국 국무장관 힐러리 클린턴은 온 힘을 다해 온두라스 군부를 지지했다.
미국 국무부는 [쿠데타 후 치러진] 엉터리 선거를 적법하다고 인정했다. 이는 클린턴이 말했듯, “셀라야 문제를 논란거리로 만들기” 위해서였다.
온두라스는 폭력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수년간 살인율이 비전쟁 지역 중 세계 최고로 높았다. 경찰, 군대, 국가의 후원을 받는 준군사 조직들에게 책임이 있다.
클린턴은 이에 대응해 온두라스의 경찰과 군대에 대한 미국의 원조를 늘렸다. 그 원조에는 2000만 파운드어치 맞춤형 선전 프로그램도 포함돼 있었다.
… 그리고 두 번의 실패
제국주의 국가들은 강력하지만, 전능하지는 않다.
미국은 어떤 나라를 지배하려 할 때, 혼자 나서기보다는 대체로는 그 나라의 반동적 세력(부자, 정치적 우파, 군대)를 뒤에서 돕는다.
그 반동적 세력의 악독함과 미국에 대한 의존은 그들이 가난한 사람들의 힘을 얼마나 두려워하는지를 보여 준다. 그 힘은 도시 노동계급의 성장과 함께해야만 증대됐다.
미국이 당한 두 번의 굴욕은 미국의 힘의 한계를 드러낸다.
1961년 쿠바
1959년 혁명은 평범한 쿠바인들의 자신감을 북돋았고 부자와 우파는 사기저하됐다. 혁명 지도자 피델 카스트로는 처음에 커다란 지지를 누렸다.
이는 CIA가 후원한 침공 시도가 극적으로 실패하고, 카스트로 암살 시도가 거듭 실패한 이유의 하나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볼 때 미국의 복수를 저지한 요인은 쿠바가 소련과 불평등한 동맹을 맺은 것이었다.
그러나 그 동맹이 좋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소련과 동맹을 맺은 대가로 쿠바는 거의 핵전쟁으로 이어질 뻔한 초강대국 간 갈등에 끼게 됐다.
소련과의 동맹은 카스트로 정부의 가장 권위주의적 측면을 강화시켰다. 소련은 그 전에 미국이 부과한 것과 무서울 정도로 비슷한 경제적 지배력을 행사했다.
2002년 베네수엘라
가장 좋은 사례는 베네수엘라이다.
[2002년] 미국의 지원을 받아 좌파 대통령 우고 차베스를 체포한 쿠데타 모의자들은 수많은 사람들이 들고 일어나 차베스의 귀환을 요구하며 대통령궁을 에워쌀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그 대중은 2002~2003년 사용자 파업을 무찌르기 위해, 2004년 국민투표로 차베스를 쫓아내려 한 시도를 무찌르기 위해 대거 일어섰다.
하지만 좌파 정부조차 차베스 자신이 “부르주아 국가”라고 부른 것에 기초한다. “분쇄”되는 그날까지 노동자 착취를 감독할 국가 말이다.
그 국가를 통치하기 위해 차베스는 (아르벤스, 보스크, 아옌데, 셀라야 등 많은 이들처럼) 노동자들을 동원하기보다는 점점 더 자본가들과 동맹하게 됐다.
차베스의 후임자 니콜라스 마두로가 지금 이토록 큰 곤경에 처한 이유다.
노동자들이 그러한 국가에 맞서 자신의 힘을 발전시키는 것이 대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