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이란 혁명 40주년 ─ 잠재력과 교훈을 돌아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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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1일은 이란 대중이 2월 봉기로 팔레비 왕조를 무너뜨린 지 40주년 되는 날이다. 사이먼 바스케터는 40년 전 이란 혁명이 미국 제국주의에 타격을 줬고 중동 노동자들의 힘을 보여 줬다고 지적한다.
미국 정부는 이란을 혐오한다. 1979년에 이란인들이 잔혹한 독재자를 타도해 중동 지역에서 미국 제국주의에 치명적인 타격을 줬던 것도 그 이유 중 하나다.
혁명 발발 전 이란은 (사우디아라비아·이스라엘과 더불어) 중동에서 서방에 대한 석유 공급의 안정성을 확고히 하는 핵심 축이었다.
이란 전제 군주 샤는 1953년에 권력을 장악했다. 미국 중앙정보부(CIA)와 영국 정보기관들에 의해 조직된 쿠데타 덕분이었다.
이란 대중의 지지를 받던 총리 무함마드 모사데크가 이 쿠데타 때문에 실각했다.
영국·미국 지배자들은, 모사데크가 영국 기업 ‘앵글로-이란 석유 회사(현재의 BP)’가 소유하고 운영했던 석유 산업을 국유화한 것에 분노했다.
1970년대 초 이래로 이란에는 “군사고문단” 2만 4000명이 배치된 CIA 중동 지부가 주둔해 있었다.
이란은 당시 세계 최대 무기 수입국이기도 했다.
영국은 샤가 몰락하기 직전까지도 샤를 지지했다.
최근 공개된 문서를 보면 이란 주재 영국 대사가 [혁명이 한창 진행 중이던] 1978년에 다음과 같이 보고했음을 알 수 있다. “샤는 이란 국가와 정부를 완전히 통제하고 있다. 군부는 효율적으로 움직이고 있으며 샤에 충성하고 있다.
“가까운 미래에는 어떤 커다란 위험 상황도 발생하지 않을 듯하다. 기복이야 있겠지만, 단기적으로 샤가 자신의 정책을 급격히 바꿔야 한다는 압박을 받지는 않을 것이고, 샤가 이란을 통치하는 한 심각하게 위험한 저항은 어디서도 일어나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이보다 더 틀릴 수도 없을 것이다.
샤는 핵 기술 개발을 포함하는 강도 높은 자본주의 발전 정책을 밀어붙였다. 이 때문에 전통적 이슬람 분파들이 [팔레비 왕조로부터] 이반했고, 빈민 수백만 명이 시골을 떠나 도시의 빈민가에서 근근이 생활하게 됐다.
한편에는 비참한 가난이, 다른 한편에는 엄청난 부가 나란히 존재했다. 정치적 반대파들은 무자비하게 분쇄됐고, 소수민족들은 쓰라린 탄압에 시달렸다.
분쇄
샤는 2만 명이 넘는 정치수를 투옥하고 고문해, 노동계급과 좌파적 반대자들을 모조리 분쇄하기도 했다.
샤가 집권한 국가는 무적인 것처럼 보였다. 첩보기관(Savak)은 어디에나 있었다. 이들이 허가한 노동조합들만 존속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75년에 이란의 주 수입원인 석유 수출 수익이 급락했다. 이는 심각한 경제 위기를 촉발했다. 이 때문에 거대한 시위가 분출했고, 결국 샤를 끌어내렸다.
[당시] 무슬림 성직자들은 빈민층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좌파는 샤 정권에 맞선 게릴라 투쟁에 집중했다.
1977년 6월, 샤에 반대하는 시위가 14년 만에 분출했다. 수도 테헤란에 사는 빈민 상당수가 시위에 참가했다.
임금 삭감 때문에 파업도 분출했다. 노동자 파업은, 제너럴모터스 노동자들이 항의의 표시로 공장에 불을 질렀던 7월에 정점을 찍었다.
노동자들과 도시 빈민들의 시위 때문에 샤는 비판을 일부 수용해야 했다.
샤는 자신의 양보로 운동의 기세가 수그러들고 사태가 심각한 문제로 번지지 않게 되길 바랐다.
오히려 샤의 양보 때문에 다른 사회 부문들도 정권에 공공연히 항의할 자신감을 얻었다. 전에는 관망하던 지식인들, 성직자들과 그 동맹 세력들인 전통 상인들, 점주들, 소자영업자들도 운동에 동참했다.
모든 위대한 자발적인 혁명이 그러하듯, 대중의 다양한 부문들이 운동에 동참했다.
공개 시 낭송회가 수십만 명 규모의 거리 시위로 분출하기도 했다. 1977년 10월에서 1978년 9월 사이, 샤 반대 운동은 매주 시위에서 매일 시위로 발전했다. 1978년 9월 7일 2백만 명 시위로 운동은 절정에 이르렀다.
샤는 계엄을 선포했고 군대는 시위 참가자들을 2000명 넘게 학살했다.
이를 규탄하며 석유 노동자들 3만 명이 파업했다. 석탄 광원들이 연대 파업을 했다.
철도 노동자들은 경찰과 군대의 수송을 거부했다.
항만 노동자들은 반정부 운동을 위한 식품·의약품·종이만 하역했다. 몇몇 군부대들도 저항에 나서기 시작했다.
운동은 항쟁으로 발전했다. 공장 관리자들은 대개 꽁지를 빼고 도망쳤다.
선출된 파업 위원회가 있는 곳에서는 이들이 공장 운영을 이어받았다. 노동계급은 수적으로는 소수였지만, 그들의 힘은 정권을 위협하는 임계점으로 [투쟁을] 끌어올리기 충분했다.
1978년 6월까지만 해도 샤는 이렇게 으스댔다. “아무도 나를 무너뜨릴 수 없다. 70만 군대와 국민 다수와 모든 노동자들이 나를 지지한다.”
그러나 고작 몇 달 후인 1979년 1월 16일에 샤는 이란에서 도망쳐야만 했다.
무장 민병대가 마지막 남은 샤 충성파 군부대를 격파했다. 감옥문이 열려 정치수들이 석방됐고, 혁명 승리 선언이 라디오에서 흘러나왔다. ‘쇼라(파업위원회)’가 공장 안에서 다시 만들어졌다.
소작농들도 자신들의 쇼라를 만들고 지주의 토지를 몰수하기 시작했다.
쇼라는 노동자 권력의 맹아였다.
시위들
소작농들은 토지 개혁을, 여성들은 권리 증진을, 소수 민족들은 자결권을 요구하며 싸웠다.
혁명 때문에 제국주의가 중동에서 크게 한 방 먹었다. 사람들은 거리로 쏟아져 나와 환희의 축제를 벌였다.
어떤 기성 정치인이 신임 총리가 되었으나, 그의 사임을 요구하는 대중 시위가 분출했다.
1979년 2월 1일, 국외 망명 중이던 아야톨라 호메이니가 귀국해 국가 수반을 자처했다.
호메이니는 1960년대 초 이래로 샤에 맞서 선전 활동을 벌인 최고위 종교 지도자였다.
그러나 호메이니는 운동을 모조리 통제하는 것은 아니었다. 혁명의 진로와 샤의 독재를 대체할 새로운 사회의 성격을 두고 격렬한 쟁투가 벌어졌다.
국가자본주의 지지자들은 질서 회복을 추구했다.
“자유주의적” 상층 중간계급, 소상공인들과 연계된 고위 성직자들이 좌파 견제를 위해 손을 잡았다.
호메이니는 쇼라의 권력이 커지는 것에 반대했다. 그는 쇼라가 성직자 권력에 대한 위협의 상징임을 알았기 때문에 쇼라를 인정하기를 거부했다.
새 임시 정부는 노동자들의 경영 참여가 “비이슬람적”이라고 선포했다.
임시 정부는 자본주의 체제를 재확립하려 들었다. 쉽지 않은 싸움이었다.
석유 기업 셸에서 일하던 한 노동자는 이렇게 말했다. “노동자가 종교와 무슨 상관인가? 노동자들은 항상 착취당한다.
“우리 피를 빨아먹던 빌어먹을 관리자들이 갑자기 ‘좋은 무슬림’이 되고 우리를 종교로 분열시키려 한다. 쇼라로 단결해야 승리할 수 있다.”
1979년 테헤란에서 열린 메이데이 집회에서 노동자 운동의 힘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실업자들과 아이들이 150만 행진 대열의 선두에 섰다.
이날 메이데이의 구호는 다음과 같았다. “아이들에게 노동이 아니라 교육을!”, “모든 산업을 국유화하라!”, “남녀 동일 임금 쟁취하자!”, “참된 단결과 쇼라여 영원하라!”, “제국주의에 죽음을!”.
호메이니는 반격에 나섰다. 정치 깡패를 조직해 좌파를 공격했고 히잡 착용을 거부하는 여성들을 대상으로 “도덕”을 강요했다.
공세
같은 시기, 쿠르드족과 혁명 중에 자치권을 획득한 다른 소수 민족들에 대한 군사 공격이 시작됐다.
그러나 호메이니는 전술을 바꾸고 나서야 운동을 통제할 수 있었다. 일부 소상공인들과 호메이니 지지 성직자들은 좌파를 분쇄하는 한편 미국으로부터 독립을 유지하고자 했다.
그들은 대중으로부터 스스로 고립되는 것을 두려워하기도 했다. 대중은 여전히 혁명으로부터 성과를 얻길 바라고 있었다.
그래서 호메이니는 미국 대사관 점거를 지시하는 한편, “온건파”로 간주되는 동맹들을 공격했다.
이 때문에 혁명 이후 등장한 국가에 대한 호메이니의 지배력이 확고해졌다.
호메이니와 그의 동맹들은 미국을 무찌르기 위해 민족 단결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반대자는 누구든 혁명의 적으로 간주됐다. 좌파는 어찌 대응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좌파들은 대부분 이란이 사회주의로 나아갈 준비가 안 되었고, 사회주의 혁명 전에 자본주의 혁명이 필요하다고 믿었다.
이는 노동자·빈민들이 “진보적” 자본가들과 연합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이런 주장 때문에 좌파들은 민족 단결을 위한 주장에 손쉽게 말려들었다.
게릴라 투쟁에 몰두하고 있었던 것도 좌파들이 대중에게서 고립되는 결과를 낳았다. 그들에게는 이를 극복할 전략이 없었다.
새 정권이 [노동자] 조직들을 차례로 탄압한 것 때문에 노동자들이 치른 대가는 어마어마했다.
이라크가 이란을 침공해 두 국가 사이에 8년 간의 전쟁이 시작된 후, 이슬람 정부는 반대 세력을 모조리 진압해 권력을 장악했다.
이것은 불가피한 일이 아니었다. 혁명의 미래는 수개월 동안 결정돼 있지 않았다.
좌파는 사회주의를 쟁취하기 위해 노동자·빈민 사이에서 독립적으로 조직하는 데 실패했다. 이 때문에 호메이니가 권력을 장악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1979년 이란 혁명은 전 세계에 충격을 줬다.
이란 혁명은 아래로부터 혁명이 서방 제국주의가 지지하는 독재자를 타도할 수 있음을 보여 줬다.
이란 혁명은 중동 노동자들의 힘을 보여 줬고 노동자들이 사회를 통제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