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정증보판
9로 끝나는 해에 세계적 격변이 많이 벌어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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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구정 연휴를 앞두고, 9로 끝나는 해에 벌어진 유의미한 역사적 사건을 간략히 설명하고 관련 〈노동자 연대〉 기사와 글들을 소개한다. 개정증보판에서는 한국에서 벌어진 격변에 관한 소개를 추가했다.
1월
쿠바 혁명 승리 — 피델 카스트로가 쿠바 수도 아바나에 입성하다 (1959년 1월 1일)
1958년 12월 31일 밤 쿠바의 부패한 친미 독재자 풀헨시오 바티스타가 도미니카공화국으로 도망쳤다. 바로 다음 날인 1959년 1월 1일 피델 카스트로의 게릴라 부대가 수도 아바나로 입성했다. 쿠바 혁명은 인구 800만 명의 작은 섬나라에서, 미국 제국주의에 맞서 미국이 선호하는 지배자를 거꾸러뜨린 대사건이었다.
그러나 쿠바 혁명은 “어떤 의미에서도 임금노동 대중 대 자본가의 투쟁이 아니었다.”(C 라이트 밀스, 《들어라 양키들아》) 노동자 투쟁은 기껏해야 게릴라 투쟁의 보조물일 뿐이었다. 그럼에도 바티스타가 거의 모든 사회 세력의 반발에 직면해 미국 제국주의도 그를 지킬 수 없게 된 까닭에 카스트로의 투쟁은 승리할 수 있었다.
- 관련 기사: ‘쿠바 혁명 ─ 진정한 변화를 위한 교훈’
독일공산당 창당 (1919년 1월 1일)
독일 혁명이 발발하고 군주제가 타도되고 난 후인 1919년 1월 1일, 독일공산당이 창당했다. 수천 명 규모로 시작한 공산당은 혁명 와중에 당원이 50만 명이 넘는 대중 정당으로 성장했다. “1920년 이후 독일 혁명의 역사는 독일공산당의 역사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 창당은 뒤늦은 것이었다. 열정적이지만 경험 없는 투사들이 혁명 한복판에서 훈련되면서 입증되고 지도력을 획득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최고의 혁명가 로자 룩셈부르크가 사망한 후, 공산당은 수시로 동요했고 재앙적 실수를 거듭했다. 결국 혁명의 패배를 대가로 치러야 했다.
- 관련 기사: ‘독일 혁명을 기억하며’
로자 룩셈부르크 사망 (1919년 1월 15일)
100년 전 1월 15일 우파적 준군사 조직 자유군단이 개혁주의 정당인 독일사회민주당(SPD, 이하 사민당)의 명령에 따라 혁명가 로자 룩셈부르크를 살해했다.
단호한 혁명 투사이자 최고의 마르크스주의 이론가 중 한 명이었던 로자 룩셈부르크의 사망은 독일 혁명에 커다란 비극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남긴 훌륭한 기여는 후대 혁명가들에게 중요한 성과로 남아 있다.
- 관련 기사: ‘로자 룩셈부르크 사망 100년: 혁명 투사 로자 룩셈부르크’
마틴 루서 킹 주니어 탄생 (1929년 1월 15일)
미국 시민평등권 운동의 주요 지도자 중 한 명이었던 마틴 루서 킹 주니어 목사가 90년 전 1월 15일에 미국 조지아주 애틀랜타에서 태어났다.
시민평등권 운동가로 출발한 킹 목사는 온건한 자유주의자였지만, 개혁의 가능성이 점차 줄어드는 것에 환멸을 품으며 서서히 급진화했다. 마침내 킹 목사는 빈곤·전쟁·인종차별에 맞서 노동자 총파업을 호소하는 급진주의 활동가가 됐다. 미국 지배자들은 공포에 떨었고, 마침내 그를 암살했다.
- 관련 기사: ‘마틴 루서 킹의 급진성을 재조명하다’
2월
이란 혁명 — 2월 봉기로 팔레비 왕조 붕괴하다 (1979년 2월 11일)
이란 대중은 1979년 혁명으로 당시 미국 제국주의의 주요 동맹이었던 전제 군주 샤를 타도했다. 거의 모든 사회 세력이 샤의 통치에 진력이 나 있었고, 이들은 ‘억압’을 비난하는 이슬람의 언어로 단결했다.
대중 파업과 무장 봉기에 직면한 샤는 1979년 1월 16일에 이집트로 도망쳤다. 이란은 피억압 대중의 축제의 장이 됐다. 노동자들은 공장을 접수해 운영할 공장위원회, 이른바 “쇼라”를 건설했다. 그러나 혁명 후 이란의 주도권을 두고 각 세력이 피비린내 나는 내전을 벌였고, 결국 아야톨라 호메이니와 그 분파가 승리를 거둬 이슬람 국가를 건설했다.
- 관련 기사: ‘1979년 이란 혁명에서 배운다’
찰스 다윈 탄생 (1809년 2월 12일)
올해는 자연과학자 찰스 다윈 탄생 210주년인 동시에 다윈의 역사적 저작 《종의 기원》 출판 160주년인 해이다.
기독교 우파는 다윈을 끊임없이 왜곡하고 그 유산을 부정해 왔다. 좌파 일부는 다윈의 연구가 인종차별을 합리화하는 이론으로 사용됐다는 의혹을 품기도 했다. 그러나 다윈은 인종차별주의자가 전혀 아니었다. 그의 이론의 핵심에는 단지 인간뿐 아니라 모든 생명체가 진화 과정 속에 “하나로 연결돼” 있다는 생각이 자리잡고 있다. 카를 마르크스는 다윈을 비판하기도 했지만 《종의 기원》이 “계급 투쟁을 위한 자연과학적 기초를 제공해 준다”며 호평했다.
- 관련 글: ‘다윈과 진화론’
3월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코민테른) 창립 (1919년 3월 2일)
1917년 러시아에서 시작된 사회주의 혁명의 기운이 유럽 전역으로 급속히 퍼져 나갔다. 곳곳에서 공산당이 만들어지고 투쟁에 나섰다. 러시아 혁명가 레닌과 볼셰비키는 혁명을 전 세계로 확산시키고 승리로 이끌고자 했다.
1919년 3월 창립한 ‘공산주의 인터내셔널’, 줄임말로 코민테른은 국제 노동계급이 전 세계에서 승리하도록 이끌 국제 공산당으로서 출발했다. 코민테른은 매우 짧은 기간에 여러 나라에서 공산당을 대중 정당으로 성장시키는 놀라운 성과를 거뒀다.
그러나 코민테른은 그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다. 유럽에서 혁명의 물결이 퇴조하고 러시아에서 스탈린이 이끈 반혁명이 승리한 후 코민테른은 소련 외교정책의 도구 구실을 하는 기구로 전락했다.
6월
중국 정부, 톈안먼(천안문) 항쟁 학살로 진압하다 (1989년 6월 4일)
30년 전, 위대한 민중 항쟁이 중국을 뒤흔들고 지배자들을 떨게 했다. 흔히 학생 시위로 알려진 톈안먼 항쟁은 몇 달간 중국 전역에서 벌어진 학생·노동자 대중의 반란이었다. 이들은 수도 베이징을 사실상 통제했다. 대중의 힘 앞에 정부는 한 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덩샤오핑은 항쟁을 잔혹하게 진압했다. 수천 명이 학살당했다. 그러나 그 항쟁을 촉발한 불만과 저항 정신은 아직도 살아, 새 세대의 투쟁을 만들고 있다.
- 관련 기사: ‘1989년 톈안먼(천안문) 민중 항쟁의 진정한 유산’
스톤월 항쟁 (1969년 6월 28일)
1969년 6월 28일 새벽, 뉴욕 경찰이 ‘스톤월 인’이라는 성소수자 술집에 쳐들어와 손님과 종업원들을 체포하려 했다. 성소수자들은 물건을 던지며 격렬히 저항했다. 이 저항은 곧 경찰에 맞선 거리 항쟁으로 확대됐다. 그들은 가난한 유색인종이거나, 집에서 쫓겨난 젊은 동성애자, 트랜스젠더, 드래그퀸[여장 남자] 같은 사람들이었다. 항쟁은 6일 동안 계속됐고, 많은 좌파들이 연대했다.
스톤월 항쟁은 전투적·급진적 성소수자 운동의 출현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전쟁과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운동이 몇 년째 미국을 뒤흔들던 상황의 영향을 받았다. 스톤월 항쟁 이후 탄생한 성소수자 운동은 체제에 급진적으로 도전하는 방향으로 분출했고 제국주의에 반대했다.
- 관련 기사: ‘미국 성소수자 운동의 간단한 역사’
7월
프랑스 대혁명 발발 — 프랑스 민중, 바스티유 감옥 습격하다 (1789년 7월 14일)
파리의 상퀼로트들[민중]이 프랑스 절대왕정의 상징인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면서, 위대한 혁명의 서막이 올랐다. 프랑스 대혁명은 1000년 넘게 지속된 봉건제에 돌이킬 수 없는 균열을 냈고, 유럽과 전 세계로 퍼져 나가 근대 세계를 여는 씨앗이 됐다.
프랑스 대혁명은 억압받던 사람들이 역사의 전면에 나선 사건이었다. 부르주아들이 혁명을 이끌었지만, 수많은 대중의 영웅적 투쟁이 혁명을 수놓았다. 그들은 수많은 정치 팸플릿을 읽고 혁명의 방향을 토론했고, 반혁명 세력에 맞서며 직접 역사를 만들었다. 이들의 투쟁은 더 나은 세계를 쟁취하기 위한 불굴의 기상으로 오늘날에도 많은 영감을 준다.
- 관련 기사: ‘노예의 삶을 거부해 온 끈질긴 저항’
8월
독일 사회민주노동당 창당 (1869년 8월 9일)
아우구스트 베벨과 빌헬름 리프크네히트가 1869년에 창당한 ‘독일사회민주노동당’은, 그로부터 6년 후인 1875년 5월 독일 중부 고타에서 ‘독일노동자협회’와 통합해 오늘날의 독일 사회민주당(이하 사민당)이 된다(당시 명칭은 독일사회주의노동자당).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사민당은 세계에서 가장 크고 영향력 있는 사회주의 정당이었다. 그러나 1914년 제1차세계대전이 터지자 사민당은 지배계급과 같은 편에 섰고, 이후 독일 혁명을 패배로 이끈 주역이 된다.
- 관련 기사: ‘독일 혁명을 기억하며’
9월
제2차세계대전 발발 —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다 (1939년 9월 1일)
아돌프 히틀러가 폴란드를 전격적으로 침공하면서,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람이 사망한 전쟁인 제2차세계대전이 시작됐다. 군인과 민간인이 6000만 명 가까이 사망했고, 전쟁 내내 끔찍한 대량 학살과 야만이 만연했다.
히틀러는 인종 ‘청소’한 독일을 세계 강대국으로 만들려던 미치광이였지만, 그렇다고 이 전쟁이 (널리 알려진 것처럼) ‘파시즘 대 민주주의’ 전쟁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각국 지배자들은 파시즘을 증오하는 평범한 사람들을 부추겨 세계적 경쟁에서 자신들의 우위를 점하는 쟁투로 밀어넣었다.
10월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1949년 10월 1일)
일본이 제2차세계대전에서 패전하자마자 벌어진 국민당군과 공산당군 사이의 내전이 3년간 이어졌다. 그 내전 끝에 중국은 새로운 사회로 재편됐다. 중국 혁명으로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된 것이다.
이 혁명은 도시 출신 지식인들이 지휘한 농민 군대가 옛 지배계급을 타도하고, 일본과 서방 제국주의 권력을 축출하고, 새로운 사회 질서의 토대를 놓은 진정한 혁명이었다.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도 노동계급의 자력 해방을 도모한 사회주의 혁명은 아니었다. 건국 이후 마오쩌둥 하의 중화인민공화국은 노동자 대중을 가혹하게 착취하며 자본을 축적하는 국가자본주의 체제였다.
- 관련 기사: ‘1949년 중국 혁명은 사회주의 혁명이었나?’
“검은 목요일” — 사상 최악의 세계 대공황 시작되다 (1929년 10월 24일)
1929년 10월 24일 미국의 주가는 거의 3분의 1이나 폭락했다. 이후 3년 만에 세계 산업 생산량은 3분의 1이 줄었고 미국의 생산량은 반토막 났다. ‘황금시대’는 끝장났다.
미국과 서유럽의 경제 공황은 세계 자본주의 체제의 결함을 전례 없는 방식으로 드러냈다. 전 세계 곳곳이 황폐해졌고 비참함이 도처에 만연했다. 공황은 절망에 찬 광기가 유례가 드문 야만으로 치달아 제2차세계대전으로 가는 길을 열었다.
- 관련 소책자: ‘1929년 대공황’
러시아 혁명가 레온 트로츠키 탄생 (1879년 10월 26일)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마르크스주의자 중 한 명인 레온 트로츠키가 1879년 10월 26일(신력으로는 11월 7일)에 우크라이나의 한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트로츠키는 레닌과 함께 러시아 혁명을 이끈 지도자였으며, ‘시대의 어둠’ 속에서도 진정한 마르크스주의 전통을 사수한 불굴의 투사였고, 위대한 이론가였다. 오늘날 자본주의를 극복하기 위해 투쟁하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모두 그의 혁명적 유산에 빚지고 있다.(최근 출판된 《파시즘, 스탈린주의, 공동전선》(책갈피) 외에도 수많은 저작들이 국내에 번역돼 있다.)
관련 기사: ‘[연재] 레온 트로츠키의 혁명적 유산’
11월
혁명가 크리스 하먼 사망 (2009년 11월 7일)
국제사회주의경향(IST)의 주요 이론가이자 다방면에서 탁월한 이론적 기여를 한 위대한 마르크스주의자 크리스 하먼이 10년 전 11월 7일 이집트 카이로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사망 직전까지도 그는 이집트의 사회주의자와 반전 운동가들이 주최한 포럼에서 연설했다.
여러 차례 방한해 연설하기도 한 크리스 하먼의 성취는 국내에도 여러 저서들이 번역돼 잘 알려져 있다. 그는 대표적 저작 《민중의 세계사》(책갈피), 《좀비 자본주의》(책갈피) 외에도 많은 분야에서 두드러지는 기여를 했다. 동시에 그는 무엇보다도 혁명가였으며, 운동의 중요한 지도자였다. 그의 사망은 국내외 좌파·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커다란 안타까움으로 다가왔다.
베를린 장벽 붕괴 ─ 동유럽 몰락이 시작되다 (1989년 11월 9일)
20년 전인 1989년 11월 9일, 전후 냉전의 상징이던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 그리고 동유럽에서 일당독재 정권들이 도미노처럼 연쇄적으로 붕괴했다. 동유럽 혁명은 마침내 옛 소련의 운명을 결정했다.
동유럽 사람들이 파업과 대중 항쟁으로 정권들을 붕괴시켰다. 그러나 이 붕괴는 ‘사회주의에 맞선 자본주의의 승리’가 아니라 국가자본주의의 몰락이었다. 잇따른 항쟁 이후 동구권 전체의 몰락은 그후 수십 년 동안 세계 정세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고, 그 일부는 오늘날까지도 영향을 주고 있다.
- 관련 기사: ‘[이슈] 베를린 장벽 붕괴 20년’
12월
미국 와이오밍준주(準州), 세계 최초로 여성 투표권 법제화 (1869년 12월 10일)
1840년, 당시 24세였던 강경한 노예제 폐지론자 미국인 여성 엘리자베스 스탠턴은 영국 런던에서 열린 ‘세계노예제폐지대회’에 참가했다. 거기서 평등주의에 깊게 감화된 스탠턴은, 8년 후 퀘이커교 신자 약 300명과 함께 뉴욕주에서 여성 참정권을 요구하는 집회와 행진을 조직했다. 미국 최초의 성 평등 요구 집회였다.
국가는 이 행진을 잔혹하게 탄압했다. 행진이 “여성답지 못하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이렇게 시작된 운동은 약 20년 후인 1869년에 와이오밍준주(準州)에서 여성 투표권을 법제화하는 씨앗이 됐다.(당시 와이오밍준주뿐 아니라 비슷한 시기 투표권을 법제화한 유타, 콜로라도, 아이다호는 개척 중이던 지역으로, 인구의 압도 다수가 남성이고 투표권을 행사할 여성 자체가 많지 않았다. 여성 투표권 법제화에는 투표권에 매력을 느낀 여성 인구의 유입을 기대하는 의도도 있었다.)
그러나 미국과 세계에서 실질적으로 여성 참정권을 쟁취하기까지는 수십 년 후 대중적 노동계급 투쟁이 벌어지길 기다려야 했다.
- 관련 기사: ‘여성 참정권 투쟁의 진정한 역사’
9로 끝나는 해에 한국에서도 격변이 벌어지다
1919년 3·1운동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이 발표한 독립선언을 지지해 열린 만세 시위가 전국적 항쟁으로 발전했다. 식민지 당국에 자진 구속된 명망가들과 달리, 기층 대중은 일본의 통치기관과 하수인들을 공격했다. 구속자의 절반 이상이 농민이었고, 교사·학생, 상인 등이 그 뒤를 이었다. 소수지만 노동자들은 파업을 벌이며 참가했다. 식민지 당국은 진압을 위해 본토에서 병력 지원을 받아야 했다.
당시 러시아와 독일에서 노동자 혁명이 일어나 식민지 쟁탈 전쟁(제1차세계전쟁)과 그것을 이끌던 군주제 국가를 타도했다. 러시아 혁명은 민족 자결을 지지했다. 이런 국제적 배경 속에서 일제의 억압과 수탈에 시달리던 한반도 민중이 마침내 반제 민중 항쟁을 폭발적으로 벌인 것이다. 이후 독립 운동은 분화했고, 항쟁이 남긴 토양 속에서 본격화한 노동운동이 진정한 주력이 됐다.
1929년 원산 총파업(1~4월)
1929년 1월 14일 함경남도 원산에서 노동자 동맹 파업이 시작됐다. 사장들이 그 전 해에 조선인 차별과 구타 때문에 벌인 파업 때 한 약속을 어겼기 때문이었다. 원산노동연합회 주도로 관리자 파면, 단체계약권 확립, 최저임금과 8시간 노동 실시 등을 요구한 파업은 4월 6일까지 지속됐다. 원산 총파업은 식민지 시기에 벌어진 최대 규모의 파업이었다.
노동자들은 술과 담배를 끊으며 파업 기간 생활 기금을 마련했다. 국내는 물론 일본, 중국, 러시아 등지에서도 후원이 왔다. 조선인 자본가들이 일제 편을 든 반면, 일본인 노동자들 일부는 파업에 동참하거나 대체 근로를 거부했다.
일본 제국주의와 사용자들은 지도부를 대거 검거하고 군대와 폭력배를 동원해 계엄 분위기를 조성했다. 노조 지도부가 대거 검거된 후 새 지도부가 교섭을 원했지만, 그건 희망에 불과했다. 일제의 총공세를 버티기에는 힘이 달렸다. 그럼에도 원산 총파업은 제국주의 지배와 계급 문제가 계급을 중심으로 결합돼 있음을 드러냈다. 노동자들은 투쟁력과 조직력을 보여 줬지만 아직 승리하기엔 모자랐다.
1949년 김구 사망(6월 26일)
좌우를 가리지 않고 많은 사람들이 김구를 위대한 독립 운동가이자 ‘민족의 (정신적) 지도자’로 찬양한다. 김구가 전투적 항일 투사였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는 철저한 극우파 정치인이었고 평생 노동자 대중 스스로의 운동을 뼛속 깊이 혐오했다.
해방 후 김구는 이승만과 우파 동맹을 건설하기 위해 친일파 청산을 회피했고, 노동운동 활동가와 좌파에 대한 테러를 일삼았다. 김구가 “38선을 베고 죽겠다”며 통일 운동에 나선 것도 그가 이승만과 미군정으로부터 버림받은 후의 일이었다.
- 관련 기사: ‘‘중간파와 김구의 길’이 대안이었을까?’
1979년 부마항쟁과 독재자 박정희 사망(10월)
1979년 10월에 겉보기에 철옹성 같았던 유신 독재가 무너졌다. 이때 박정희 정권을 흔든 저항의 중심에 선 사회세력은 노동계급이었다. 10월 부산에서 학생들이 주도한 시위로 촉발된 부마항쟁은, 노동자들이 대거 참여하면서 정권을 위협했다. 이에 놀란 박정희 정권은 계엄령을 선포하고 군대를 투입했지만, 항쟁은 마산으로 번지고 더 격렬해졌다.
이처럼 유신 독재에 대한 민심 이반이 뚜렷해지고 노동자들이 대거 합류한 반정부 시위가 터진 와중에, 10월 26일 박정희가 궁정동 술자리에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게 사살됐다. 남한 지배자들은 노동자 대중의 저항이 혁명적 대중 항쟁으로 커질까 두려움에 떨었다. 박정희 사살은 민중 반란에 대한 대응을 놓고 지배자들이 분열한 결과였다.
- 관련 기사: ‘박정희의 18년 독재를 무너뜨린 민중 항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