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주의자 역사가 도니 글럭스틴 에든버러대학 교수 초청 강연:
파시즘, 어제와 오늘 ─ 역사 속 나치와 오늘의 재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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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4월 5일 〈노동자 연대〉 주최 초청 강연의 내용을 녹취한 것이다. 도니 글럭스틴은 영국사회주의노동자당(SWP)의 당원이고 에든버러대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치고 있다. 그는 《영국 노동당의 역사》, 《마르크스주의와 노동조합 투쟁》(모두 책갈피)의 공저자이자, 《Nazis, Capitalism and the Working class》(1999)와 《A People’s history of the Second World War》(2012, 국역 근간) 등을 썼다. 이날 강연은 조응주 씨가 통역해 줬다. 조응주 씨는 한국외국어대학교 통역번역대학원을 나와 동시통역사이자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 ] 안 말은 독자의 이해를 돕고자 편집부가 덧붙인 것이다.
폴란드에 있던 죽음의 공장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가스실을 보면 파시즘이 어떤 짓을 저지를 수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남녀노소 수십만 명이 기차에 실려 모든 것을 빼앗기고 옷까지 벗겨진 채 소각로에 처넣어졌습니다. 그나마 운이 좋아 불에 타 죽지 않았던 극소수는 죽을 때까지 노예처럼 일해야 했습니다.
유대인 600만 명을 포함해 1000만 명이 홀로코스트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하지만 이는 더 거대한 제국주의 갈등의 일부에 불과했습니다. [제2차세계대전 기간에] 5000만 명에서 7500만 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리고 한반도 민중도 전 세계 민중과 함께 전쟁의 고통을 겪어야 했습니다.
제2차세계대전이 끝난 후 사람들은 파시즘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다시는 안 된다’라는 슬로건이 바로 그런 뜻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유럽 여러 나라들에서 극우 정당과 노골적인 파시스트 정당이 득세하는 상황을 목도하고 있습니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첫째, 오스트리아 자유당(FPÖ)이 있습니다. 물론 이 당은 자유를 추구하는 당이 아닙니다. 오스트리아 자유당은 감옥에 갇혔던 나치 친위대(SS) 장교들이 설립한 정당입니다. 이런 당이 지금은 오스트리아 연립정부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독일에는 독일을위한대안당(AfD)이라는 정당이 있습니다. 파시스트가 굉장히 많이 속해 있는 이 당이 독일 연방의회에서 93석이나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몇 주 전[3월 20일] 네덜란드 지방선거에서 극우 정당[네덜란드자유당]이 가장 많은 당선자를 배출했습니다. 무시무시한 일입니다.
파시즘의 영향이 유럽에만 국한된 것은 아닙니다. 파시즘이 성장할 수 있는 토대가 여러 곳에서 조성되고 있습니다. 미국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를 생각해 보십시오. 트럼프 자신은 파시스트는 아니지만 파시즘의 성장을 부추기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회자가 말한 뉴질랜드 크라이스트처치시(市) 총기 난사 사건도 파시즘의 영향력을 보여 주는 사례입니다. 주목할 만한 점은, 뉴질랜드 총기 난사 사건 후 1주일 동안 제가 사는 영국에서 무슬림에 대한 공격이 600퍼센트 늘었습니다.
파시즘을 이해해야 파시즘에 맞서 싸울 수 있습니다.
파시즘이 처음 등장할 때 어떤 사람들은 파시즘이 히틀러나 무솔리니 같은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가 만들어 낸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히틀러와 무솔리니는 죽은 지 오래지만 파시즘이 다시 등장하고 있습니다.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 개인에 의존하는 운동이라는 식으로] 단순하게 설명할 수는 없는 문제인 것입니다.
교육이 부족해서, [대중의] 역사적 지식이 부족해서 파시즘이 부상한다고 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파시즘을 [역사적으로] 경험해 봐서 파시즘이 무엇인지 아는데도 파시즘이 다시 대두하고 있습니다.
뿌리 — 과거의 경험
파시즘에 관해 자세한 설명을 드리기 앞서 한 가지만 더 짚고 넘어가자면, ‘파시스트’라는 말을 우파나 반동적인 사람들에 대한 욕설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컨대, 1930~1940년대 일본 제국주의가 중국과 한반도에서 잔혹한 군부 통치를 시행했지만 그것은 파시즘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파시즘의 뿌리는 무엇일까요?
모든 계급 사회는 불평등, 빈곤, 불의를 만들어 냅니다. 극소수가 부를 독점하고 나머지 대다수를 착취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지배자들은] 때로 무력을 동원합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지배자들은 사기를 칩니다. 사람들을 속이는 것이죠. 그런데 그런 사기가 더는 먹히지 않을 때,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속임수가 통하지 않을 때 대중적 파시즘 운동이 등장하게 됩니다.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효과적으로 작동하는 것은 대중의 동의를 얻어 내기 때문입니다. 대중이 자본주의의 존재를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죠.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투표권, 표현의 자유, 노동조합 활동의 권리, 집회·결사의 자유 등을 보장하지만, 자본가들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착취를 계속합니다.
그런데 위기는 자본주의의 본질적 속성입니다. 위기의 시기에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대중적 동의 지반이 무너집니다. 파시즘은 [바로 그럴 때] 지배계급이 통제력을 재확립하는 방법 중 하나입니다.
고전적 파시즘의 전형적 사례인 독일의 역사적 경험을 돌아보겠습니다.
제1차세계대전은 독일 혁명으로 종식됐습니다. 당시 독일 지배계급은 독일사회민주당(SPD, 이하 사민당)과 타협해, 노동자들의 권리를 보장하는 대신 의회의 통제력을 유지하려 했습니다.
이런 일시적 타협을 모든 지배계급이 기꺼이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예컨대, 제1차세계대전 당시 독일 육군 대장이었던 에리히 루덴도르프는 히틀러와 손잡고 1923년에 ‘맥주홀 폭동’이라는 무장 반(反)혁명을 시도했습니다. 하지만 폭동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히틀러는 권력을 장악하려면 대중의 지지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선거로 눈을 돌렸습니다. 선거 제도에 대한 믿음은 전혀 없었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히틀러가 선거에서 얻었던 지지는 보잘것없었습니다.
그렇다면 나치는 무엇을 믿었던 것일까요? 이들의 사상은 지배계급의 사상과 완전히 다른 것은 아니었습니다. 나치 사상은 보통의 지배계급 사상인 민족주의, 유대인 적대, 인종차별을 과장된 방식으로 표현하는 것이었습니다. 즉, 나치는 자본가들의 사상을 일말의 타협도 없이 [일관되게] 구현한 것입니다. 민주주의 완전 철폐, 전체주의적 [계급] 독재로 말이죠.
1920년대 호황기에 이런 사상은 청중을 얻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눈여겨볼 점은, 나치당의 주요 지도자들이었던 히틀러·괴링·괴벨스는 지배계급 출신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중간계급 출신이었습니다.
지배계급은 극소수입니다. 그래서 위기 시기에 자신들을 지킬 대중 운동을 창출할 수 없습니다. 파시즘은 위기 시기에 [지배계급에게] 대중과의 연결고리를 제공할 수 있습니다. 파시즘은 기성 체제에 반대하는 척하지만, [대중의] 분노를 기성 체제를 [위기에서] 구출하는 방향으로 돌릴 수 있는 것입니다.
진정 중요했던 것은 선거가 아니라 거리 운동이었습니다. 1932년에 히틀러는 청년 20만 명 규모의 ‘거리의 군대’, 즉 나치 돌격대를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히틀러가 지배계급에 줄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반혁명을 수행할 물리적 힘 말입니다.
이 지점에서 파시즘은 보통의 정치와는 구분됩니다. 파시즘이 선거에서 좋은 성적을 거둬서가 아니라, ‘거리의 군대’를 동원해 노동계급을 물리적으로 분쇄하고 반혁명을 수행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독일에서 파시즘의 성장 과정을 살펴보겠습니다. 1928년에 독일 나치당의 득표율은 2.6퍼센트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1932년 7월에 나치당은 37.4퍼센트를 득표하면서 제1당이 됐습니다. 1928년에서 1932년 사이에 있었던 일이 바로 1929년 세계 대공황이었습니다.
나치당에 대한 지지표는 주로 중간계급에서 나왔습니다. 중간계급은 현 체제에 분노했고 지배계급에 분노했습니다. 중간계급은 나치당에 투표하는 것이 지배계급에 대한 항의 의사를 표하는 방법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나치는 대중의 분노를 자본주의로부터 다른 곳으로 돌려버렸습니다. 나치는 유대인 금융업자들을 비난하고, 사민당을 비난하고, 공산당을 비난했습니다. 지배계급만 빼고 모두를 비난했던 것입니다.
노동계급은 이런 선동에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노동계급은 대부분 여전히 사민당과 공산당에 투표했습니다. 그러나 중간계급에게는 이런 선동이 통했습니다.
그런데, 무솔리니든 히틀러든 선거에서 선출된 것이 아니라 위로부터 [지배계급에 의해] 임명됐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무솔리니는 1922년에 이탈리아 국왕에 의해 두체[총리]로 임명됐습니다. 히틀러 역시 1932년 12월에 총리로 임명됐습니다. 저는 당시 독일 총리와 군부의 수장이 히틀러를 총리로 지명하면서 나눴던 대화를 인용하고자 합니다.
“총리가 될 만한 사람은 히틀러밖에 없다고 확신한다. [히틀러가 아닌] 다른 사람이 총리가 되면, 그것이 누구든 총파업을 심지어 내전을 촉발할 것이다. 그러면 군대를 동원해 좌파뿐 아니라 국가사회주의당[나치]에도 맞서야 할 것이다. 이런 상황은 전혀 바라는 바가 아니다.”
그렇게 히틀러는 총리가 됐고, 자신의 임무를 충실하게 수행했습니다.
히틀러는 이제 40만 명으로 불어난 나치 돌격대를 이용해 좌파를 분쇄하고 노조를 파괴하고 독재를 시작했습니다. 그 독재는 제2차세계대전과 홀로코스트를 낳았습니다.
이는 불가피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나치가 가장 많이 득표할 때조차 유권자 3분의 1의 표밖에 얻지 못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히틀러 집권 전 모든 선거 결과를 봐도, 노동계급 정당들이 받았던 지지를 모두 합하면 나치 지지보다 강력했습니다. 또, 노동계급에게는 나치에 맞설 노동조합 같은 강력한 조직도 있었습니다.
문제는 노동계급이 분열해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민당과 공산당은 서로 반목하느라 나치의 위협을 간과했습니다. 결국 그 대가를 치러야 했습니다.
지금은 무엇이 다른가
그러면 오늘날 상황을 살펴 봅시다.
2008년 세계 금융 위기 이후 파시즘이 선거에서 성장하는 동학은 1929년 세계 대공황 이후의 상황과 매우 비슷합니다. 당시처럼 지금도 사람들은 기성 정당에 대한 실망 때문에 항의성 투표를 합니다. 곳곳에서 극우 정당들이 득세하는 까닭입니다.
하지만 아주 중요한 차이점도 있습니다. 과거 파시즘이 형성될 [1920년대] 당시는 세계대전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고, 러시아와 독일에서 발발한 혁명에 대한 공포가 있었습니다. [당시 독일에는] 퇴역 군인이 굉장히 많았는데, 이들은 대부분 매우 반동적이었습니다. 즉, 초기부터 반혁명[의 가능성]이 매우 뚜렷하고 실질적이었습니다. 당시 나치 당원들의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그들이 입었던] 갈색 셔츠, 검은 셔츠는 군복이었습니다.
사실 인종차별은 [파시즘에서] 부차적인 요소였습니다. 예컨대 이탈리아 파시즘은 유대인을 적대하지 않았습니다. 무솔리니의 당 안에 유대인 파시스트들이 있기도 했습니다.
지배계급은 파시즘과 손잡기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무솔리니의 파시즘 정당은 1915년에 창당했는데, 불과 7년 후인 1922년에 무솔리니가 두체[총리]로 임명됐습니다. 히틀러의 나치당은 1920년에 창당했지만 1928년까지만 해도 히틀러는 전혀 중요한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불과 5년 후에 총리로 임명됐습니다.
오늘날의 파시즘은 [당시와] 다릅니다. 오늘날 파시스트들은 반혁명 세력을 대놓고 자처하지 않습니다. 오늘날 파시즘은 [고전적 파시즘보다] 인종차별에 훨씬 더 많이 의존합니다. 파시즘은 오늘날 지배계급이 위기 와중에 인종차별을 이용해 분열 지배하는 것에서 득을 얻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파시즘의 성장 과정을 좀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1990년대부터, 특히 2003년에 중동에서 제국주의 전쟁[이라크 전쟁]이 발발했는데요, 그 결과 난민들이 [전쟁을 피해] 유럽으로 많이 넘어오게 됐습니다. 그에 더해 유럽에서 테러가 여러 차례 벌어졌죠. 이런 상황을 이용해 지배계급과 언론은 끔찍한 인종차별 분위기를 조성했습니다.
그리고 2008년에 세계 경제 위기가 시작됐습니다. 대중은 분노해서 현 상황에 항의하고자 했습니다. 이 때문에 있었던 항의성 표심은 여러 갈래로 나뉘어 드러났습니다. 우파 정당, 우익 포퓰리즘 정당, 파시스트가 포함된 우파 정당, 노골적인 파시스트 정당이 등장했습니다. 1930년대보다 오늘날 상황이 더 복잡한 것입니다.
1920~1930년대에 존재했던 강력한 공산당·사민당이 오늘날에는 대부분 사라졌다는 것도 중요한 차이입니다. 공산당들은 사라졌고, 사민당들은 집권 후 대중을 실망시켜 이전보다 세가 약해졌습니다.
그렇다고 항의 표심이 꼭 오른쪽으로만 표현되는 것은 아닙니다. 왼쪽으로도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리스의 시리자가 한 사례입니다. 영국에서는 사회주의자 제러미 코빈이 노동당 대표가 됐습니다. 심지어 미국에서도 사회주의자 버니 샌더스가 지지를 많이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회민주주의의 실패 때문에 이전과 달리 [오늘날에는] 중간계급뿐 아니라 노동계급에서도 극우 정당, 심지어 파시즘 정당 지지표가 많이 나옵니다.
실로 우려스러운 상황입니다만, 우리가 주목해야 할 또 다른 차이도 있습니다. 의회민주주의에 대한 지지는 당시보다 오늘날 훨씬 강력합니다. 즉, 1930년대 같은 반혁명이 지금 당장 일어날 그런 상황에 처해 있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투표는 굉장히 수동적인 행위입니다. 파시스트들에게 훨씬 중요한 것은 ‘거리의 정당’을 건설하는 것입니다. ‘거리의 군대’가 형성될 위험은 실질적인 것이지만, [오늘날] 파시스트들은 그런 군대를 모으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거리의 군대’ 없이는 파시즘은 자신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바, 즉 물리적 반혁명을 수행하기가 굉장히 어렵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 혁명가·사회주의자·반(反)파시즘 운동이 할 수 있는 일이 있습니다.
1930년대에는 파시즘이 [집권하면] 끔찍한 세계대전과 홀로코스트를 불러올 것임을 아무도 몰랐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파시즘이 [집권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압니다. 그렇기 때문에 대중이 파시즘을 위험한 것이라고 보게 설득할 수 있습니다.
파시스트가 아니고 극단적 인종차별주의자들이 아닌 다수 대중을 조직하는 것이 반파시즘 운동을 성공적으로 건설하는 핵심 비법입니다.
어떻게 맞설 것인가 — 공동전선
공동전선을 구축함으로써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공동전선에 대해서 간략하게 설명하겠습니다. 공동전선은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이 개혁주의자들과 협력하는 것입니다. 공동전선을 건설한다고 해서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이 개혁주의자들과 모든 점에서 의견이 일치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대부분의 경우 [혁명적 사회주의자들과 개혁주의자들은] 의견이 다릅니다. 하지만 단일 쟁점에 대해서는 힘을 합치자고 합의할 수 있습니다.
예컨대 영국에는 ‘인종차별에 맞서자’라는 단체가 있습니다. 혁명적 사회주의 단체인 사회주의노동자당(SWP)이 사실상 이 단체를 만들다시피 했습니다. 하지만 제러미 코빈이 이 단체의 의장을 역임했고, 현 의장 다이앤 애봇은 노동당 예비내각의 [내무부]장관입니다. 즉, 개혁주의 지도자들과 혁명가들이 한데 모인 것입니다. 이 덕분에 기층에서도 노동계급이 단결을 구축해 인종차별에 맞서 싸울 수 있게 됩니다.
이는 성공하는 전술입니다. 우리[사회주의노동자당]는 성공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세 번이나 성공해 봤습니다.
1970~1980년대에 [영국 반파시즘 운동은] ‘반나치동맹’(ANL)이라는 단체를 꾸려 당시 파시스트 조직 국민전선을 무너뜨렸습니다. 10년 후에는 [극우 정당] 영국국민당(BNP)을 박살냈습니다. 당시 영국국민당은 영국수호동맹(EDL)이라는 ‘거리의 군대’를 건설하려던 자들이었습니다.
저희는 선거를 통해 이런 일을 해낼 수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대규모 거리 시위를 벌여 파시스트에 정면으로 맞서 그들이 ‘거리의 군대’를 조직하지 못하게 했기 때문에 [그런 일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공동전선이 현실에서 어떻게 구현되는지, 제가 사는 [스코틀랜드 수도] 에든버러의 예를 한 번 들어 보겠습니다. [우리가 조직한] 거리 시위와 행진에서는 노동당 사람도 연설합니다. 3주 전[3월 16일] 글래스고에서 큰 집회가 있었는데 [스코틀랜드 정부 여당인] 스코틀랜드국민당(SNP) 소속 의원이 연단에서 발언했습니다.
제가 속한 교원노조를 비롯한 노동조합들이 ‘인종차별에 맞서자’를 강력히 지지합니다. 집회가 열릴 때면 발언자를 파견하고, 꾸준히 재정 후원을 하고, 협력적으로 운동을 건설합니다.
종교단체도 [운동에] 동참합니다. 무슬림·기독교·유대교 단체들이 집회에 참가하고, 집회에서 연설하고, 집회를 지지합니다.
에든버러의 성공 사례를 하나 더 들어보겠습니다. 시리아에서 에든버러로 온 난민 한 명이 인종차별적 우파에게 칼로 찔리는 일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즉각 행동을 조직해, 사건 발생 후 24시간 만에 수백 명이 규탄 시위를 벌였습니다. 의원들, 난민들, 피해자 가족들이 이날 시위에서 발언했습니다. 이 시위 덕분에, 같은 날 저녁 스코틀랜드 자치정부 수반이 의회에서 [이 범죄를 규탄하는] 연설을 했습니다.
최근 도널드 트럼프의 전 수석 전략관 스티브 배넌이 에든버러를 방문했습니다. 저희는 이번에도 24시간 만에 항의 시위를 조직했습니다. 언론이 우리 시위를 대서특필해 배넌이 환영받지 못했음을 널리 알렸습니다.
지난 토요일[3월 31일] 파시스트들이 에든버러에서 거리 시위를 벌이려 했습니다. 우리는 파시스트 시위보다 열 배나 큰 대항 시위를 조직했습니다. [10대 1이] 적절한 비율인 것 같습니다.
파시스트들이 대중의 대변자인 척할 때마다, 그들이 대중의 대변자가 아님을 보여 준 것입니다. 대중 행동으로 파시즘과 인종차별에 맞서면 저들의 사기를 꺾고 저들을 약화시킵니다. 그럼으로써 대중이 실제로 느끼는 분노를 파시스트들이 엉뚱한 데로 돌리지 못하게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문제도 있습니다. 첫째, 공동전선 전술이 [파시즘이 성장하는] 모든 곳에서 시행되고 있지는 않습니다. 유럽에는 영국의 사회주의노동자당처럼 하는 좌파가 없는 나라들도 많습니다.
이보다 더 큰 문제도 있습니다. 설령 공동전선이 성공을 거둔다 해도, 그 성공이 영원히 유지되지는 않습니다. 이는 자본주의[에 내재된] 위기 때마다 파시즘과 인종차별이 계속 되살아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공동전선을 구축하는 것도 매우 중요하지만, 우리가 해야 할 중요한 일이 또 있습니다. 파시즘을 끝장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바로 자본주의를 끝장내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혁명적 당을 건설해야 합니다.
자본주의 위기가 닥칠 때마다 파시즘이 [대중의] 분노를 엉뚱한 데로 돌리지 못하게 해야 하지만, 위기를 만들어 내는 자본주의 체제 자체를 끝장내야 합니다.
정리 발언
‘파시즘’과 ‘나치즘’ 두 용어의 차이에 관한 질문이 나왔습니다. 청중 토론에서 답변이 나오기도 했는데요, 한 가지만 덧붙이겠습니다.
나치가 제2차세계대전에서 패배했을 당시, 독일에서 나치에 맞선 거대한 운동이 벌어졌습니다. 그 운동은 스스로를 ‘안티파스[반(反)파시즘]’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니 두 표현을 구분하려고 애쓸 필요는 없습니다. 반(反)파시즘과 반(反)나치는 같은 표현입니다.
인종차별[적 우익]이 어떻게 파시즘으로 비화될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도 있었습니다.
독일 나치와 이탈리아 파시스트 모두 평범한 사람들을 경멸했음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파시스트들은 자신들의 반혁명 계획을 성공시는 데에 필요한 대중적 지지를 얻고자 무엇이든 내어 줄 태세가 되어 있었습니다.
독일 나치의 사례를 들어 보겠습니다. 저는 나치당이 집권 전 2년 동안 발행했던 신문을 [모두] 읽는 고역을 치른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신문에서 유대인 관련 기사는 겨우 5퍼센트에 불과했습니다. 나머지는 모두 정부 정책 비판, 실업 문제, 공산당 비판 기사들이었습니다. 대중의 분노를 사는 쟁점이라면 무엇이든 다룬 것입니다.
나치에게 중요한 것은 특정 단어를 이용하는가 여부가 아니었습니다. 대중의 분노를 자신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돌릴 수 있는지 여부였습니다.
마지막 발언자가 해 주신 질문, 제2차세계대전 관련 질문에 먼저 답하겠습니다. 아주 중요한 질문입니다. 제가 제2차세계대전에 관해 쓴 책은 한국에 아직 출판되지 않았다고 알고 있습니다만, 핵심만 말하면 제2차세계대전은 지구 전체에 대한 지배권을 두고 제국주의자들이 서로 벌인 전쟁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완전히 별개의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평범한 사람들이 파시즘에 맞서 민중 항쟁을 벌였던 것입니다.
[영국 총리였던] 처칠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내가 만약 이탈리아에서 태어났다면 나는 파시스트였을 것이다.” 제2차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처칠은 파시스트의 지지를 받던 스페인의 프란치스코 프랑코를 비호했습니다. [그래서] 프랑코는 1975년에 죽을 때까지 권좌를 지킬 수 있었습니다.
반면 레지스탕스 운동은 프랑스·이탈리아·그리스 등 곳곳에서 파시즘에 맞서 자유와 민주주의를 쟁취하기 위한 진정한 전쟁을 벌였습니다. 이들은 제국주의자들이 아니었습니다. 자신들의 생명과 미래를 위해 싸운 사람들이었습니다.
공동전선에 관한 논의로 이어가겠습니다.
공동전선을 건설할 때 어디서 선을 그어야 하는지, 누구와 함께 공동전선을 맺어야 하는지에 관한 질문이 있었습니다. 그 기준에 대한 제 답은 ‘계급’입니다.
영국의 현 상황을 봅시다. 안타깝게도 영국 노동계급은 브렉시트에 대한 태도를 두고 분열해 있습니다. 하지만 노동계급 사람들과 여러 노동조합들, 좌파 정당들은 공동전선 ‘인종차별에 맞서자’에서는 함께 행동하기로 합의했지만 브렉시트에 대해서는 서로 의견이 다릅니다.
제가 사는 스코틀랜드에서 노동당은 스코틀랜드 독립에 반대하지만 스코틀랜드국민당은 독립에 찬성합니다. 이 둘이 어깨를 나란히 하는 유일한 경우는 ‘인종차별에 맞서자’ 행동에서입니다. 사회주의노동자당 당원으로서 저는 노동당과 스코틀랜드국민당 모두와 이견이 있지만, ‘인종차별에 맞서자’에서 정한 요구들에는 이들과 저 모두 동의합니다.
공동전선은 매우 구체적인 사안에 관한 것임을 유념해야 합니다.
공동전선 안에서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에 관한 질문으로 넘어가겠습니다. 우리가 공동전선 안에 있다고 해서 다른 모든 점을 두고 가진 이견을 감춰야 하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공동전선을 하면서도 〈소셜리스트 워커〉 신문을 팔고 당원 가입 호소도 합니다. 공동전선으로 힘을 합쳐 운동을 건설하면서 그런 일을 하는 것입니다.
예컨대 영국에서 저희는 노동당원들과 공동전선 활동을 함께하면서, 노동당이 지방의회를 주도하는 곳에서 복지와 재정을 삭감하는 것을 공개적으로 강력하게 비판합니다.
‘법률로 혐오 발언을 규제해 파시즘을 저지할 수 있지 않는가’ 하는 질문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유념해야 할 사실은, 그런 법률이 제정되면 우파보다 좌파가 훨씬 더 자주 그 법에 의해 공격받는다는 것입니다. 팔레스타인 연대 운동을 벌이는 좌파가 인종차별 극우보다 법에 저촉될 가능성이 훨씬 높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주제로 넘어가서 ‘누구와 한 편에 설 것인가’ 하는 질문에 답해 보겠습니다. 대개의 경우 혁명가들은 소수인데 파시즘의 거대한 위협에 어떻게 맞설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 점에 관해서는 역사적 경험에서 배울 수 있습니다. 1930년대에 민중전선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스탈린은 독일의 위협으로부터 소련을 방어하기 위해 민중전선 전략을 제시했습니다.
민중전선 전략은 스페인에서 끔직한 결과를 낳았습니다. 스페인에서 혁명이 발발했는데, 스페인의 혁명적 좌파는 독일에 맞서 영국·프랑스·러시아 간 동맹에 누가 되지 않으려다가 혁명의 패배를 대가로 치러야 했습니다. 스페인 혁명이 패배하면서 전 세계 좌파가 약해졌습니다.
반대 사례가 러시아 혁명 당시에 있었던 공동전선이었습니다. 당시 러시아 장성 코르닐로프는 파시스트 반란을 일으키려 했었습니다. 이에 대해 레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러시아 임시정부 수반] 케렌스키의 어깨를 소총 거치대로 삼아[서 코르닐로프를 향해 총을 쏴]야 한다.”
[그 얼마 전] 케렌스키가 볼셰비키를 불법화하고 탄압했던 것 때문에 볼셰비키는 지하로 잠적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레닌은 러시아 민주주의를 위해서는 파시즘에 맞서 케렌스키와도 단결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단결한 덕에 [러시아 노동계급은] 코르닐로프를 패퇴시킬 수 있었고 그로부터 두 달 뒤에 러시아 노동계급이 권력을 잡았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사회주의자로서 할 일이 참 많은 것입니다. 파시즘의 위협이 있는 곳이면 어디서든 공동전선이라는 중요한 전술을 시행해야 합니다. 그러면서도 사회주의자들의 본업인 자본주의 분쇄라는 과제도 포기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