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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 《누구나 다 아는 비밀은 비밀이 아니다》(변혜정 지음, 하다 출판):
성희롱·성폭력 개념 오·남용에 대한 한 여성학자의 진솔한 성찰

《누구나 다 아는 비밀은 비밀이 아니다》 변혜정 지음, 하다(HadA), 2020년, 216쪽, 14000원

여성학자 변혜정 전 한국성폭력상담소 부설 성폭력문제연구소장이 성희롱·성폭력 개념과 제도의 오·남용 현실을 돌아보는 책을 내놓았다. 신간 《누구나 다 아는 비밀은 비밀이 아니다》(부제: 성희롱에 관한 열한 가지 오해와 진실)가 바로 그것이다. 변혜정 전 소장은 문재인 정부 들어 한국여성인권진흥원 원장을 지내기도 했다.

《성폭력 2차가해와 피해자 중심주의 논쟁》(2017, 책갈피) 등을 통해 적절한 성폭력·성희롱 반대 운동의 개념과 방법을 제안해 왔던 서평자는 이 책이 다루는 질문과 사례들에 관심이 갔다.

게다가 요즈음 고(故) 박원순 서울시장의 성추행 혐의를 놓고 우파들이 “2차가해” 운운하며 일부 급진 페미니스트들과 제휴하는 요지경이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 유의미한 시사점들을 여럿 던져 주고 있다.

저자 변혜정 전 소장은 “피해자를 위해 열심히 법과 제도를 만드느라 애쓴 여성운동의 역사”와 공을 인정한다. 잘못된 통념에 근거한 피해자 유발론에도 반대한다. 저자가 성희롱·성폭력 피해자들을 위한 연구, 강의, 상담, 교육 등에 힘써 온 것을 생각하면 이는 당연한 출발점일 것이다.

동시에 저자는 현 성희롱 개념과 제도의 성과뿐 아니라 한계, 일부 부작용과 난점에 대해서도 몇몇 문제들을 솔직하게 던진다. 특히, 본인이 직접·간접으로 경험한 성희롱·성폭력 개념의 오남용 사례들을 다룬다.

저자는 피해의 구체적 내용과 맥락을 고려하지 않는 이분법적이고 단순한 접근법에 문제를 제기한다. 또한 ‘피해자 보호’라는 취지에서 시작됐지만 과도한 개념이 법과 매뉴얼에 포함되고 기계적으로 적용되면서 생겨난 역효과도 들여다 본다.

저자가 이 책을 쓰게 된 직접적 동기는 지난해 2월 여성인권진흥원 원장직에서 갑작스레 해임된 본인의 경험에서 나왔다고 한다. 진흥원 내 성희롱 사건에 적절하게 대처하지 못했다는 게 당시 이사회가 제시한 해임사유였다. 하지만 당시 〈여성신문〉 보도 등에 따르면, 해임이 제대로 된 사실 확인도 없이 속전속결로 이뤄져 당사자가 승복하기 어려웠던 듯하다.

이 책에 그 자세한 전말이 설명돼 있진 않다. 다만, 끊임없이 확장되는 “2차가해” 개념과 그에 따라 사건에 대한 진상조사 요구와 합리적 문제제기조차 “2차가해”라는 이름으로 봉쇄되는 현실을 고려하면, 해임 과정에 불합리한 요소가 있었을 법하다고 추정된다. 저자가 이 일로 받은 충격은 새로운 질문을 던지고 답을 찾아 나아가려고 “절치부심”하는 동력이 된 듯하다. 저자는 이 고통이 “새 살로 돋아나길” 바란다고 한다.

배이상헌 교사의 사례

저자는 배이상헌 교사에 대한 광주시교육청의 행정 횡포에 비판적인 목소리를 내 왔다. 이 책에서도 저자는 영화 〈더 헌트〉에 빗대어 배이상헌 교사 사례를 다룬다.

〈더 헌트〉는 한 어린 아이의 즉흥적인 거짓말로 시작된 파문이 한 유치원 교사를 성범죄자로 낙인찍고 배척하는 데까지 나아간 과정을 담았다(자세한 줄거리는 이 책과 김도훈의 영화평 참고). “아이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근거없는 믿음 속에, 아이와 인터뷰하는 아동심리 전문가는 ‘유도 질문’을 던지고 아이의 ‘예스’를 받아 낸다(175쪽). 아이는 나중에 거짓말을 바로잡으려 하지만, 이미 그 유치원 교사가 성범죄자라고 결론 내린 어른들은 곧이곧대로 듣지 않는다. 자신이 “듣고 싶은 대로 들은 것”이다.

배이상헌 교사의 사례도 유사한 문제점을 보여 준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배이상헌 교사는 성인지 교육용 영화 〈억압받는 다수〉를 학교 성평등 수업 시간에 상영했다는 이유로 성비위범으로 낙인찍혔다. 수업을 들은 일부 학생이 수치심과 불편함을 느꼈다며 민원을 넣자, 광주시교육청은 제대로 된 진상조사도 없이 교사를 직위해제하고 심지어 수사기관으로 넘겼다.

저자는 학생들이 그 수업에 불편함을 느낀 이유와 맥락이 무엇인지, 즉 피해의 내용이 뭔지 제대로 조사하지도 않은 채 성비위 사건으로 넘긴 과정을 돌아봐야 한다고 지적한다.

“이상하게도 성 관련 사건들은 ‘답’이 있다. 소위 피해/피해자에 관한 통념이 상식처럼 돌아다닌다. 피해자에 대한 불신과 비난에 대항해, 다른 한편에서는 피해자의 진술을 믿으라고 한다. 또 ‘이럴 것’이라는 믿음 아래 상황을 자세하게 확인하지 않는다. 2차 피해를 줄 수 있다고 묻지 않는다. … 피해자를 블랙박스에 보관해 놓은 결과, 피해는 드러나지 않는다.”(176쪽)

이런 식의 “피해자 지원”은 그 순간 피해자에게 공감해 준 것으로 느낄 수 있으나, 또 다른 피해자가 생길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지난 1년간 배이상헌 교사와 그 지지모임의 노력으로 이 사건이 성비위와 무관하다는 사실이 널리 알려지게 됐다. 행정 편의주의적인 광주시교육청 방침과 매뉴얼에 대한 문제의식도 확산됐다. 최근 전교조 대의원대회에서 배이상헌 교사 방어 활동을 전교조의 공식 사업계획에 포함시킨다는 제안이 통과되어 결정되기도 했다.

하지만 여전히 페미니즘 진영 일각에서는, “백래시”에 대한 방어막으로 ‘피해자 중심주의’에 기초한 매뉴얼을 고수해야 한다고 믿는 듯하다. 그래서 명백한 부작용과 오남용을 직시하지 않는 듯하다.

다른 한편, 전교조 광주지부장 출신인 교육감에게 타격을 줘선 안 된다는 생각에서 진실을 외면하고 성평등 교육 억압이 낳을 심각한 폐해를 간과하는 문제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 성평등 교육·상담 경험이 풍부한 저자의 솔직한 성찰이 돋보인다. 이 책이 배이상헌 교사 사건의 교훈과 기존 성평등 교육의 개선을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2차 피해” 개념에 대한 성찰

저자는 성 관련 사건에서 종종 사용되는 “2차 피해” 개념에 관한 문제도 제기한다. 물론 저자는 “피해자, 피해자 가족 및 3자의 인격권을 침해하는 ... 인적사항 공개는 금지해야 한다”는 점을 전제로 한다. 하지만 피해의 내용을 조사하고 알리는 것 자체를 2차피해로 규정하는 것에는 반대한다.

저자에 따르면, “성 관련 범죄는 타 범죄보다 피해자를 비난하거나 귀책하는 경향이 많아서 그것을 제지하기 위해 만든 것”이 “2차 피해” 개념이다. 하지만 종종 “2차 피해”라는 이름으로 당사자와 조력자들이 사건의 내용을 알 수 없게 만드는 난점도 드러났다.

저자는 이렇게 반문한다. “조직문화 개선이나 예방 등의 교육적 목적을 위해 어떤 사건에 대해 분석하는 것이 2차 피해인가? 호기심으로 성적인 정황을 알려고 하는 것이 아닌 사건 조사 과정을 정확히 알려고 하는 것이 어째서 2차 피해인가?”

또한, “피해자의 말을 지지하지 않는 그 어떤 것도 2차 피해로 규정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그렇게 되면 성폭력 사건의 성차별적 특성이 삭제된다. 결국 1차 피해는 블랙박스로 사라지고 2차 피해 해결 절차만 남는다.”(158쪽)

사실 “성폭력”이라고 규정하고 비난하면서도 정작 관련자들이 사건의 실체는 묻지도 따지지도 못하게 하는 일각의 행태는 불합리하다. 이런 “2차 가(피)해” 개념은 피해 호소 여성의 감정과 진술만으로 성폭력 여부를 판단하는 “피해자 중심주의”의 방호벽 구실을 하면서 때로 심각한 부작용을 낳았다. 단적으로 말해, “피해자가 성폭력(성희롱)이라면 성폭력(성희롱)이지 누가 감히 토를 다느냐”는 식이다. 그래서 피해호소인 진술에 대한 사실 확인과 해명, 피해 여부의 조사까지 2차가해로 모는 일이 흔히 벌어진다.

“2차가(피)해” 개념과 그 적용이 합리적 질문 제기에 재갈을 물리는 함구령이 돼, 꼭 필요한 토론마저 위축시키거나 봉쇄하는 역효과도 있어 왔다. 최악의 경우 정치적 경쟁상대나 이견자를 제거하는 수단으로 악용되기도 한다.

서평자가 보기에, 위와 같은 난점을 극복하려면 결국 피해호소 여성 개인의 감정과 진술에만 의존하는 주관주의적 접근법을 재고해야 한다(이 책이 피해자 중심주의 문제를 본격 다루고 있진 않지만). 물론 ‘피해자 중심주의’의 애초 취지를 살려 ‘피해자 유발론’에 반대하고 피해호소인의 진술을 가장 중요한 증거의 일부로 존중해야 한다. 동시에 피해호소인 진술의 신빙성과 합리성, 일관성도 검토해 봐야 하고, 사건 관련자들의 진술과 정황, 물증 등도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한다.

그런데 저자는 “성 관련 폭력으로 나타나는 특성을 1차, 2차 피해 구분 없이 1차 피해로 포함시켜 성차별적 특성을 강조할 것”을 제안한다. 그러나 “2차가해” 개념의 오남용을 극복해보려는 저자의 취지에는 공감하지만 이 구체적인 제안이 저자의 애초 취지에 부합하는지는 의문이다.

저자의 제안대로라면 원사건과의 구별이 흐려질 우려는 없을까? 성적 가해를 한 당사자와 부적절하게 대처한 제3자(또는 기관)의 문제는 서로 구분해야 하지 않을까? “성폭력 2차가해” 개념은 성폭력을 직접 자행하지 않은 사람들까지 “성폭력 가해자”로 취급함으로써 그동안 혼란과 반발을 가중시키지 않았나? 1-2차가해 개념의 통합은 저자의 의도와 무관하게 현재의 “2차가해” 개념이 자아낸 이러한 혼란을 지속시킬 우려가 있는 건 아닐까?

한편, 저자는 피해 내용에 대한 비밀주의에는 반대하지만 가해자와 피해자가 누구인지 드러내는 것은 주의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강력한 법적 처벌과 별개로 가해자를 만천하에 공개해 수치심을 느끼도록 하는 처벌에 대해서는 많은 고민을 해야 한다”.(111쪽)

저자는 대중과 언론들이 가해자나 피해자가 누구인지에만 온통 관심을 쏟고, 심지어 사건과 무관한 신상털이를 하는 현실에 일침을 날린다. 이는 “폭력의 심각성에 대한 감수성이라기보다 사생활에 대한 관심일 수 있다”는 것이다.

성희롱의 기준 문제

저자는 성희롱 개념의 오남용 사례를 들어, 현재 성희롱의 법적 판단기준(“업무, 고용관계 등과 관련하여 상대방에게 성적 굴욕감이나 혐오감을 주는 성적 언동”)에 몇 가지 물음을 던진다.

저자는 ‘임이자 의원 성추행’ 논란을 화두로 꺼낸다. 지난해 4월 ‘패스트트랙’ 여야 대치 정국에서 여성인 자유한국당 임이자 의원이 문희상 국회의장을 막아서는 “수비대”로 나섰다. “[여성을] 손대면 성희롱”이라고 외치면서 말이다.

이 촌극을 보면서 저자는 “맥락과 관계없이 여성을 손대면 성희롱인가?” 하고 묻는다. 성차별을 금지하기 위해 만든 성희롱 제도를 오남용하고 정쟁을 위해 “성희롱을 설계”한 사례인 것이다. (물론 저자는 남성 국회의장이 여성 의원의 볼을 동의 없이 만진 것은 잘못이라고 비판한다.)

저자는 성희롱 예방 교육 과정에서 자신이 겪은 사례들도 든다. 저자는 보수적인 일부 수강생들한테서 ‘강의 내용이 불쾌하니 성희롱’이라거나 ‘강사의 옷차림이 불경스러우니 성희롱’이라고 항의 받거나 진정 당하는 일을 겪었다고 한다.

반면 얼마 전 논란이 된 ‘레깅스 판결’의 경우, 레깅스를 입은 여성의 하반신을 몰래 촬영한 것 자체가 문제인데도 재판부는 성적 욕망을 유발하는 신체 부위와 복장이 무엇이냐는 협소한 잣대를 들이대어 이 행위가 무죄라고 판결했다.

이런 혼란은 (성희롱으로 인한) 노동권 침해나 성차별과의 관련성보다는 성적인 언동이 곧 성희롱이라고 종종 해석되거나, 성적 굴욕감이나 수치심, 혐오감 같은 주관적 감정이 성희롱·성폭력 판단 기준이 되다 보니 생긴 문제라고 저자는 지적한다.

또한 저자는 평소의 구체적 관계에 따라 같은 성적 대화라도 불쾌하지 않을 수 있다는 점, 품격 없는 막말과 불쾌한 언행들은 물론 문제이지만 이를 모두 성희롱으로 규정하는 것은 성희롱의 진정한 특성을 흐려 또 다른 부작용을 낳을 수 있다고 지적한다.

위와 같은 저자의 문제제기는 성희롱·성폭력 개념을 무한정 확장하는 주관주의적 방식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생각해 볼 만한 내용이다.

물론 현실에서 여성들은 성희롱 개념을 남용하기보다는, 오히려 일자리를 잃거나 불이익을 당할 위험 때문에 여전히 성희롱을 당해도 참고 넘기는 경우가 많다. 저자도 이 점을 알기에, 여성이 불이익 당할 두려움 없이 성희롱 피해를 신고할 수 있으려면 노동권 보장이 반드시 뒷받침돼야 한다고 강조한다.

서평자가 첨언을 하자면, 법제도 개선만으로는 현실에서 한계가 크므로 직장 내 성희롱에 대한 노동조합의 집단적 대응이 매우 중요할 것이다.(관련 기사: ‘직장 내 성희롱 문제를 노동조합이 중요하게 다뤄야 하는 이유’, 〈노동자 연대〉 230호)

이 책은 몇몇 다른 토론거리들도 제공한다. 성희롱·성폭력의 근본 원인과 그 해결책, 성범죄를 낳는 구조와 개인들의 관계 등등의 쟁점에서 여성학자인 저자의 접근법과 마르크스주의 여성해방론자인 서평자의 접근법에는 차이도 있다.

그러나 앞서 살펴봤듯, 이 책은 성희롱·성폭력 문제에 대한 각종 일면적 접근법들을 재고해 보도록 질문을 던진다. 그래서 성희롱·성폭력 개념이 오남용되는 현실을 돌아보면서 그 개선책을 고민해 보는 데 도움이 된다. 이 점에서 이 책을 읽어 보기를 권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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