엥겔스 탄생 200주년
엥겔스가 파헤친 여성 차별의 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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엥겔스는 마르크스의 동반자였을 뿐 아니라 그 자신이 위대한 사상가였다. 특히 엥겔스는 마르크스와 함께 유물론적 역사관을 발전시켜 사회주의를 과학적 기초 위에 세우는 데 기여했다. 이런 역사유물론의 방법을 적용해 엥겔스는 여성 차별의 기원도 밝혔다.
엥겔스는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1884)에서 계급이 등장하면서 여성 차별이 시작됐다고 썼는데 이것은 대단히 파격적인 주장이다. 왜냐하면 오늘날 많은 페미니스트들은 기원 같은 것은 신경 쓰지 않고 여성은 언제나 차별받아 왔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성폭력의 역사》 내지는 《우리의 의지에 반하여》라는 제목으로 번역된 책의 저자인 수전 브라운밀러는 이렇게 주장한다.
“남성이 자신의 성기를 두려움을 일으키는 무기로 쓸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일은 불의 사용과 돌도끼의 발명과 함께 선사시대에 이루어진 가장 중요한 발견으로 꼽아야만 한다. 강간은 선사시대부터 지금까지 결정적인 기능을 수행해왔다.”
여성 차별의 기원 문제는 단지 먼 과거의 역사를 설명하는 데 그치지 않고, 오늘날 여성해방의 전망과 관련해서 핵심적으로 중요하다. 여성 차별이 계급과 함께 생겨났다는 주장을 뒤집으면 계급 없이 운영되는 사회를 건설하면 여성 차별도 없앨 수 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여성 차별은 원래 존재하는 것이거나 생물학적으로 남자의 DNA에 프로그래밍 된 것이라면 차별적 욕망을 인위적으로 억누르는 것이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최대치일 것이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 여성해방론은 여성 차별이 사라진 평등한 사회가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은 백 년도 더 전에 나왔기에 세부적인 내용에서 상당한 오류가 있다. 그가 많이 인용한 모건의 《고대 사회》라는 연구는 인류학이 이제 막 시작되는 시기에 이뤄졌기에 그 뒤 인류학과 고고학의 발전에 따라 오류가 많이 지적됐다.
그럼에도 모건의 중요한 통찰에서 이끌어낸 엥겔스의 핵심 주장은 옳았다. 계급이 없는 사회에서 여성은 평등했고 여성 차별이 계급과 함께 생겨났다는 엥겔스 책의 핵심 주장은 건재할 뿐 아니라 후대의 인류학과 고고학의 연구 성과들로 오히려 입지가 더 굳건해졌다.
최초의 인간 사회: 무계급 사회(‘원시 공산주의’)
엥겔스는 인간 사회에 대한 유물론적이고 역사적인 연구를 통해 최초의 인간 사회에는 계급과 여성 차별이 없었다고 밝혔다. 그는 무계급 사회가 계급 사회로 바뀌면서 비로소 국가와 여성을 차별하는 형태의 가족도 등장했다고 주장했다.
학자들은 생물학적으로 현재의 인간이 등장한 시기를 대략 10만 년에서 20만 년 전 사이라고 예상한다. 짧게 잡아도 무려 10만 년 전의 일에 대해 엥겔스가 이런 주장을 펼친 근거는 당시 유럽인들이 북아메리카에서 발견한 이로쿼이 족의 사회에는 계급과 여성 차별이 없다는 것이었다.
이로쿼이족 말고도 지구상에는 초기 인간 사회처럼 수렵채집을 하거나 원시적 농법으로 살아가는 공동체들이 남아 있다. 엥겔스만이 아니라 많은 인류학자들은 이들을 연구하면 문명 등장 이전 사회를 유추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런 사회는 10만 년 전 사회와 똑같지 않을 것이고 그래서 논쟁도 많을 수밖에 없다. 이런 사회들은 나머지 세계와 완전히 고립돼 있지 않고 이들을 연구하는 학자들도 각종 편견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럼에도 놀라운 것은 많은 뛰어난 인류학자들이 엥겔스와 비슷한 결론에 도달한다는 것이다. 2015년 권위 있는 과학잡지 《사이언스》에 실린 연구는 콩고와 필리핀에 남아 있는 수렵채집 사회를 연구한 뒤 이렇게 주장했다.
“수렵채집 사회가 더 마초적이고 남성 중심적이었다는 시각이 여전히 널리 퍼져 있다. 우리는 이후 농경이 시작돼 자원 축적이 가능해지고 나서야 불평등이 출현했다고 주장한다.”
또 다른 미국의 인류학자 엘리너 리콕은 이렇게 썼다.
“(이런 사회에는) 토지의 사적 소유를 통해 구성원마다 가용자원이 달라지는 일도 없고, 성별 분업 이상의 노동의 전문화도 없다 … 평등주의적이었던 이들 사회의 기본 원칙은 구성원들이 스스로 결정을 내리고 각자 책임을 진다는 것이다.”
이런 평등주의적 사회는 지배자와 피지배자로 나뉘지 않았다. 모든 사람들이 평등한 만큼 여성 차별도 없었다. 엥겔스는 이 사회들을 ‘원시 공산주의’라고 불렀다.
이런 사회가 평등주의를 유지하는 비결은 사회의 생산력이 낮아서 잉여 생산물이 없고 구성원들은 생존을 위해 서로 협력해야만 했다는 데 있다. 잉여 생산물이 없기 때문에 착취나 계급이 있을 수 없었다.
수렵채집 사회를 연구한 인류학자들의 연구와 고고학 연구를 모아 보면 최초의 인류는 대체로 수십 명 정도가 무리를 이뤄서 한 지역에서 살다가 먹을 것이 떨어지면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며 살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남성과 여성 모두 사냥에 나섰지만 여성은 임신, 출산을 하거나 젖을 먹이는 동안에는 사냥에 나설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여성이 채집만 하는 것은 아니지만 채집을 주되게 책임졌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런데 이런 무리 생활에서는 채집이 가장 안정적인 식량 공급원인 경우가 많다. 사냥은 실패하기 십상이지만 채집은 어느 정도 꾸준히 이뤄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성이 식량 공급의 주된 책임자이고 남성들은 이런 여성들에 기대지 않을 수 없다. 동시에 사냥으로 얻는 식량은 과일, 채소류만으로는 충당하기 어려운 고급 단백질을 보충할 방법이라는 점에서 또 귀했다.
결국 여성과 남성은 생존하려면 서로 협력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생존 조건에서 체계적인 여성 차별이 있었으리라 생각하기 어렵다.
‘선사 시대부터 남성이 여성을 지배했다’는 페미니스트들의 주장은 선사 시대 인류의 생존 조건을 고려하면 전혀 성립할 수 없는 것이다.
수렵채집 사회에서는 개인이 아니라 집단, 무리가 생존의 단위였고 그런 만큼 부부와 자녀로 이뤄진 핵가족도 존재하지 않았다. 여성이 자녀를 출산하면 아들이든 딸이든 그리고 아빠가 누구인지 따지지 않고 무리 전체 차원에서 공동으로 키웠다.
17세기에 캐나다의 수렵채집 공동체를 처음 만난 프랑스 선교사의 기록을 보면 이런 일화가 나온다. 선교사가 원주민 남성에게 누가 자기 자식인지 모르는 것은 “죄악”이라고 꾸짖자, 그는 이렇게 대꾸했다. “당신 말은 틀렸다. 당신네 프랑스인들은 자기 자식만을 사랑하지만 우리는 부족의 모든 아이들을 사랑한다.”
문명이 등장하기 이전에 ‘원시 공산주의’가 존재했고 여성 차별이 없었다는 엥겔스의 주장은 그 중요성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이런 시기가 현생인류의 역사의 약 95퍼센트를 차지하는 만큼 생물학이나 진화론을 근거로 여성 차별을 인류의 보편적 특징으로 취급하는 주장의 기반을 무너뜨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엥겔스가 이런 사회를 낭만적으로 예찬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렇게 썼다.
“이 조직은 멸종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그것은 ... 지극히 미개발된 형태의 생산 즉, 극도로 적은 인구가 넓은 지역에 흩어져 있다는 점과 그 결과로 인간이 자신에게 낯설고, 적대적이고, 이해할 수 없는 외부 자연에 거의 완전히 지배당한다는 사실에 기초했다.”
농사의 시작과 “신석기 혁명”
약 1만 년 전부터 인류는 농사를 짓기 시작하고 새로운 사회가 등장한다. 원시농경 혹은 원예농업 사회로 불리는 사회다.
그러나 “원예”라는 말에서 보듯, 농사에 사용되는 도구는 아직 주로 뒤지개와 좀더 세련된 돌도구를 이용하는 수준이었다. 이 때를 신석기 시대라고 부른다. 하지만 이런 초보적 농업만으로도 엄청난 변화가 생겼다. 무엇보다 주기적으로 근거지를 옮길 필요가 사라졌고 그러면서 여성의 출산과 양육 방식에도 큰 변화가 생겼다.
무리 전체의 생존이 주기적으로 근거지를 옮기는 것에 달려있을 때에는 젖먹이가 많으면 그만큼 불리했다. 그래서 정착하기 이전의 사회에서는 낙태, 영아 살해, 섹스 거부 등으로 자녀 수를 제한했다. 농사를 짓고 한 곳에 정착해서 살게 되자 더는 자녀 수를 제한할 필요가 없어졌고 오히려 자녀가 많을수록 농사를 더 많이 지을 수 있었다.
이처럼 농사를 시작한 것은 사회 전체에 큰 변화를 일으켰다. 영국 인류학의 거장 고든 차일드는 이를 “신석기 혁명”이라고 불렀다.
초기 농경 사회에서도 여성에 대한 체계적인 차별이 있었다는 증거는 없다. 그러나 몇 가지 중요한 다른 변화들이 나타난다.
무엇보다 생산력이 커진 덕분에 잉여 생산물이 생겼다. 신석기 시대의 핵심 유물인 토기는 잉여를 보관하는 수단이었다. 끊임없이 이동해야 한다면 굳이 크고 무거운 도자기를 만들 생각을 하지 않을 것이다.
농경 사회로 접어들면서 생긴 또 다른 변화는 종족이 전보다 더 중요해졌다는 점이다. 분쟁이 생기면 당사자들이 무리를 떠나면 그만이던 수렵채집 사회와 달리, 정착 생활에서는 내부 갈등을 해소할 방안이 필요했다. 더욱이 공동체의 규모도 전보다 커져서 이젠 수백 명에 달했다. 또한 이제는 잉여 생산물이 있었기 때문에 재분배가 더 중요해졌다. 특히 자녀가 많지만 당장의 노동력은 적은 가구를 다른 가구들이 지원하는 것이 중요했다. 종족은 경제적 재분배를 통해 사람들을 결속하는 데서 중요한 구실을 했다.
이에 따라 지위 고하가 처음으로 등장했다. 인류학자들이 ‘빅 맨’(Big Men)이라 부른 이들이 등장한 것이다. 평등주의적이던 사회에서 타인을 지배하려는 욕망을 가진 사람들이 난데없이 부상한 것이 아니라 생산력 발전으로 인해 지위 고하가 생겨난 것이다.
그러나 ‘빅 맨’의 등장이 곧 사회의 계급 분화를 뜻한 것은 아니다. 이들은 폭력이 아니라 자신이 가진 것을 베풀어서 명망을 얻었다. 현존하는 초기 농경 사회에 대한 인류학자들의 기록을 보면, 이들 ‘빅 맨’은 높은 명망에 걸맞는 책임을 유지하려고 남들보다 오히려 일을 더 많이 했다. 그들이 타인의 잉여를 수중에 모을 때도 그것은 다시 종족 전체에 나눠주기 위한 것이었다. 착취가 아닌 것이다.
터키 차탈회위크, 차외뉘 유물
잉여생산물과 지위의 높낮음이 생겼지만 그것이 자동적으로 계급과 착취를 낳지는 않았다. 오히려 농경을 시작한 이래 수천 년 동안 무계급 사회, 여성 차별이 없는 사회가 유지됐다.
약 1만 년 전에 존재했을 고대 도시가 터키에서 발견됐는데 차탈회위크라 불린다. 약 5000명이 모여 살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만큼 농경이 상당히 발전했을 것이다. 학자들은 발견된 집터의 크기가 대동소이하고, 시신과 함께 매장된 유물의 빈부 차이가 없고, 큰 집터도 있지만 거기서도 다른 집들과 비슷한 노동 도구들이 발견된다는 점 등을 근거로 평등주의적 사회였을 것이라고 본다. 또한 이 사회에서는 새로 태어난 아이들을 키우는 일이 종족 전체의 책임이었음을 강하게 암시하는 증거가 있다. 각 집안에서 발견되는 해골 유물의 DNA를 분석해 보니 아동과 성인이 혈연 관계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래서 학자들은 “남녀 모두 공동노동, 공동육아를 했을 것”이라고 본다.
한편, 베른하르트 브로지우스가 2005년에 발표한 한 논문은 차탈회위크 인근의 차외뉘라는 도시를 다루는데 그 내용이 인상적이다. 차외뉘는 차탈회위크와 비슷한 시기에 존재한 도시였지만 빈부격차가 있었다. 그런데 약 9200년 전 어느 날 큰 집과 제단이 불타고 차탈회위크와 비슷한 도시로 거듭났다. 즉 혁명이 일어난 것이다.
이는 생산력의 발전이 자동적으로 계급 발생으로 이어지지는 않았음을 보여 주고, 많은 사람들이 평등주의적인 사회를 유지하려 했음을 말해 준다.
계급의 등장
하지만 일부 농경 사회에서는 지위가 높은 사람들이 끝내 지배계급으로 변신했다. 생산력의 한계 때문에 봉착한 위기를 벗어나는 과정에서 평등주의가 깨진 것이다.
이 배경에는 농경 사회의 모순이 있다. 일단 정착을 시작하면 인구가 더 많아지는 경향이 있지만, 당시 생산력이 낮았기 때문에 감당할 수 있는 인구에는 한계가 있었다. 기후 등이 변하면 생산력을 혁신적으로 높이지 않는 이상 기존 방식으로는 사회를 유지하기 어려워진다.
학자들은 이것이 인류 초기 문명의 발상지였던 메소포타미아에서 실제로 일어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 지역에는 배수와 관개수로를 건설하면 아주 많은 식량을 재배할 수 있는 비옥한 땅이 있었다. 그런데 그러려면 노동력을 대규모로 조직해야 했을 것이다.
지위가 높았던 ‘빅 맨’들이 나서서 이처럼 농업생산성을 높이는 데 성공을 거두면서, 이들은 잉여 생산물을 자신이 통제하는 것이 사회 전체에도 이롭고 자신을 사회 진보의 화신이라고 생각했을 수 있다. 그리고 사회에 닥친 위기가 클수록 이들은 평등주의를 깨뜨려서라도 자신의 지위를 지키는 것이 사회 전체에 유리하다고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앞서 소개한 터키 차외뉘의 사례는 이에 대한 저항도 있었을 것임을 말해 준다. 따라서 잉여 생산물에 대한 통제력을 쥔 집단이 그 통제력을 놓치지 않으려고 억압 기구(즉, 국가)와 이를 뒷받침하는 이데올로기를 만들어 냈을 것이다. 일단 그런 구조와 이데올로기가 구축되자 그 집단은 더는 생산력 발전에 기여하지 않더라도 계속해서 잉여를 통제하게 됐다.
엥겔스는 지배계급이 어느 순간부터는 공공의 잉여를 자신의 ‘사유 재산’으로 취했고 이에 저항하는 사람들을 억압할 목적으로 ‘국가’를 세웠다고 봤는데, 여러 연구 성과를 종합해 볼 때 타당한 논리다.
여성 차별의 기원
또한 엥겔스는 계급이 등장하면서 여성 차별도 시작됐다고 주장하고 이를 “여성의 세계사적 패배”라고 불렀다. 엥겔스의 책 제목이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인 이유이다. 계급이 없었던 사회가 오랫동안 유지됐고 계급과 함께 여성 차별이 등장했다는 엥겔스의 주장은 완전히 옳았다.
그러나 엥겔스는 왜 여성이 아닌 남성이 권력을 잡았는지에 대해서는 설명을 내놓지 않았다. 이에 대해서는 후대 인류학자들과 크리스 하먼 같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보충했다.
계급은 단번에 등장하지 않았다. 초기 농경 사회에서 최초의 계급 사회까지는 적어도 수천 년이 소요됐는데 그 기간 동안 농업 기술에서 중대한 변화가 생겼다. 특히 금속과 동물을 다룰 수 있게 된 것이 중요한 변화를 가져 왔는데 바로 쟁기를 사용하게 된 것이다.
쟁기는 이전까지 쓰던 괭이 같은 농기구보다 훨씬 더 무겁고 위험한데 임신 중인 여성에게는 더 말할 나위가 없었다. 그런데 농경 사회에서는 자녀가 많을수록 종족 전체에 더 이로웠으므로 고고학 유물을 보면 쟁기질은 거의 대부분 남성이 맡았다.
그 결과 남성이 이제 식량 생산의 핵심 책임자가 됐다. 수천 년을 거치면서 이는 종족 안에서 남성의 영향력이 커지는 효과를 냈다. 사회의 다른 변화, 즉 전쟁이 잦아지고 장거리 무역이 발전한 것도 임신과 출산을 하는 여성에게 불리하게 작용했고 이 분야에서도 남성들이 우세해졌다.
그래서 부계제, 즉 아버지를 따라서 조상을 따지는 제도가 점차 일반화했다. 여성이 임신과 출산을 한다는 생물학적 특성이 특정한 생산력 발전 국면과 맞물리면서 남성이 생산의 주역으로 부상했고, 이는 다시 재생산 제도의 변화로 이어진 것이다.
약 7000년 전 최초의 지배계급이 등장할 무렵 사회는 부계제 사회였다. 지배계급의 등장과 함께 바뀐 것 중 하나가 결혼제도다.
이전까지 결혼은 두 종족이 서로 호혜 관계를 맺는 방식이었고, 종족 차원에서 결혼 관련 대소사를 결정했다. 여성, 특히 나이든 여성도 종족에서 나이든 남성과 똑같은 발언권을 누렸으므로 특별히 여성차별적이라고 보기 어려웠다. 그러나 이제 지배계급은 자기 혈통의 남성에게 더 많은 자원을 집중시키는 수단으로 결혼을 이용했고 여성은 그에 따라 거래되는 지위로 격하됐다.
지배계급은 피지배계급 가구의 남성에게 세금(잉여)을 바칠 책임을 지웠다. 피지배계급 남성은 이런 요구를 가구 전체에 전달하기 위해 가구 안에서 명령하고 소비를 통제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초기 계급사회에서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 가족에서 모두 가부장제가 자리잡았다.
한 가지 유념할 것은 대부분의 남성은 지배계급이 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무거운 쟁기질을 하는 남성이 아니라 오히려 그런 쟁기질을 하지 않는 남성이 지배계급이 됐다. 계급의 등장으로 모든 남성이 권력을 갖게 되기는커녕 남성의 다수는 전보다 지위가 낮아졌다.
자본주의에서 더 커진 모순
엥겔스는 한 가지 주장을 더 펼쳤다. 생산 수단이 더 발전함에 따라 가족의 형태와 여성 차별의 양상도 계속 변한다고 봤다. 계급 사회 안에서도 가족의 본질과 여성 차별의 양상이 다양했다는 통찰이다.
이 전반적인 과정은 오늘날 페미니스트 이론가들이 흔히 시도하듯 “가부장제”라는 단일한 항목으로 포괄될 수 없다. 착취 계급과 피착취 계급의 가족은 언제나 서로 어마어마하게 달랐다. 로마 시대 노예 소유주 가족과 노예 가족을 똑같이 볼 수 없고, 마찬가지로 중세 봉건 영주의 가족과 농노 가족을 똑같이 볼 수 없다. 또한 한 사회의 지배계급 가족은 다른 사회 지배계급과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지배계급 여성이 종속적이지만 공적 생활에 참여했던 사회가 있었고 지배계급 여성이 그런 활동에 전혀 참여할 수 없었던 사회가 있었다.
이를 지적하는 것은 여성이 차별받았다는 것을 가볍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여성 차별이 인간 본성의 발현이 아니라 구체적인 역사 발전의 산물이고, 향후 역사 발전을 통해 철폐할 수 있음을 이해하기 위한 것이다.
엥겔스는 자본주의 등장으로 생겨난 여성해방의 잠재력에도 주목했다.
“대공장 산업은 여성을 집에서, 노동시장과 공장으로 옮겨 놓았고 종종 여성이 가구의 생계를 책임지도록 만든다. 그 결과, 프롤레타리아 가정에 남아있는 남성 지배의 마지막 흔적들은 그 기초를 모두 잃었[다.]”
그러나 엥겔스는 이처럼 자본주의에서 여성이 해방될 잠재력을 얻었지만 동시에 자본주의 때문에 그런 잠재력이 실현되지 못한다고도 지적했다.
“그녀[프롤레타리아 여성]가 사적 영역[가정]에서 맡겨진 임무를 완수하는 한 그녀는 공적 생산 영역에서 배제되고 소득을 벌 수 없다. 그녀가 공적인 산업에 참가해서 독자적인 소득을 벌고자 하면 그녀는 맡겨진 임무를 완수할 수 없게 된다.”
비록 엥겔스가 노동계급 가족이 사라질 것이라 예측한 것은 오류였지만 엥겔스가 지적한 이런 모순은 오늘날 훨씬 더 커졌다. 예컨대 오늘날 홈스쿨링을 고수하는 소수 가정을 제외한다면 대부분의 아이들은 집이 아닌 학교에서 교육을 받고 가사를 처리해 주는 기계나 서비스 산업도 훨씬 더 발달했다. 그런데도 여성들의 일상은 해방과는 거리가 멀다.
이런 모순은 이윤 체제인 자본주의가 유지되는 한 사라지지 않는다. 자본주의 발전으로 국가가 재생산 일부를 사회화해도 각 가정이 재생산을 최종적으로 책임져야 한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또한 국가나 자본이 재생산 기능을 일부 부담할 때조차 그 목적은 여성해방이 아니라 여성 노동력을 더 효율적으로 착취하기 위해서다. 또한 지배계급은 노동계급을 분열시키려고도 여성 차별을 조장한다.
엥겔스는 노동계급이 혁명적 투쟁을 통해 자본주의 체제를 제거한다면 여성해방을 실현할 수 있다고 봤다. 엥겔스의 책은 여성 차별의 기원을 유물론적으로 설명하면서 여성해방이 몽상이 아니라 실현 가능한 이상임을 보여 줬다.
이 글은 필자가 크리스 하먼의 논문 ‘엥겔스와 인류 사회의 기원’을 기초로 11월 16일 노동자연대 토론회(영상 보기)에서 발표한 내용을 일부 수정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