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램지어 역사 왜곡 망언을 계기로 보다:
위안부 문제의 본질은 무엇인가?

존 마크 램지어 교수는 미국 하버드대학교 로스쿨 교수로, 일본법 전공자이다. 그리고 알려졌다시피 일본 전범기업 미쓰비시의 후원을 받아 왔고, 일본 정부와 우익의 입장을 학술적으로 대변해 온 학자다. 램지어 교수는 그 ‘공로’를 인정받아 일본 정부의 훈장도 받았다.

논란이 되고 있는 그의 논문 ‘태평양 전쟁에서의 성매매 계약’은 위안부 문제를 법경제학적으로 접근했다고 한다. 그러나 전문을 읽어 보면 1990년대부터 위안부 피해를 부정해 온 일본 우익의 논리를 긁어모은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게다가 이 논문은 이미 여러 학자와 언론이 비판했듯이, 근거가 부족하고 왜곡투성이에 일부 내용은 출처마저 불분명하다.(익명의 우익 블로그를 참조했다고 한다.)

램지어 교수는 게임이론을 들먹인다. 게임이론이란 한 사회의 행위자들이 자신의 효용을 극대화하려는 일정한 전략을 가지고 있어서 각자 최고의 보상을 얻기 위해 거래한다는 극도로 개인주의적인 이론이다.

이 우파적 이론을 위안부 문제에 적용한다는 것은 위안부 피해자들이 위안부 생활에서 얻은 이득이 있었음을 주장한다는 뜻이다.

1999년 출간된 《위안부와 전장의 성》이라는 책으로 유명한 일본 우익 학자 하타 이쿠히코는 같은 주장을 두고 “[위안부와 매춘업자 사이의 관계는] 상거래의 가는 정, 오는 정”으로 봐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램지어 교수는 하타 이쿠히코를 비롯한 일본 우익들의 글들을 주로 인용했다.

그래서 램지어 교수의 주장을 살펴보는 일은 전통적으로 일본 우익들이 위안부 문제를 어떻게 왜곡해 왔는지를 살펴보는 일과 거의 비슷하다.

위안부 피해를 부정하는 핵심 논리 세 가지

램지어의 주장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핵심은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계약이다. 위안부 피해자들이 대개 “예비 매춘부”로서, 매춘업자와 “상호 이해관계를 충족하는” 자유계약을 맺었다는 것이다.

둘째, 급료와 보수에 관한 것이다. 위안소 생활이 ‘고위험’이었던만큼 ‘고수입’이 보장됐다는 것이다.

셋째, 위안부를 모집하는 과정에서 일본 국가는 관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첫째로 언급된 자유계약 주장에서 자연스럽게 파생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선, 램지어 교수는 자유계약의 증거를 제대로 제시하지 않는다. 램지어 교수가 제시한 “근거”는 1910년대와 1920년대 중국으로 보내진 일본인 위안부의 표준계약서와 일본인 위안부의 사례다.

일본에는 국가가 관리하는 성매매 제도(이른바 “공창 제도”)가 일찍이 존재했고, 군인들의 회고 등에 따르면 1894~1895년 청일전쟁이나 1904~1905년 러일전쟁 때 그 제도에 기초한 민간 주도의 군 ‘위안소’가 전쟁터에 존재했다. 램지어는 일본에서 일반적인 매춘부와 달리 전장에 보내진 경우 급료가 더 높았다는 것을 증거로, 1930~1940년대 전쟁터에 보내지기 위해 대거 “모집”된 조선인 위안부도 높은 급료를 받았을 것이라고 일반화한다. 이에 대한 실제 계약서나 사례는 제시하지 않으면서 말이다.

램지어가 비약하는 방식과 달리, 우리는 1910~1920년대 민간이 주도한 일본인 ‘위안소’와 1930~1940년대 일본 국가가 체계적인 계획 하에 식민지 여성들을 강제로 동원한 전쟁범죄를 구분해야 한다. 위안부 문제라고 할 때는 후자를 가리키는 것이다.

또, 일본 국가가 체계적으로 벌인 일이라는 점에서 위안부 문제는 전쟁터에서 벌어지는 (성매매는 물론) 일부 병사나 군 부대에 의한 성범죄들과도 구분된다.

이런 구분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지 않으면 위안부 문제의 역사적 특수성과 일본 국가의 책임이 흐려지기 때문이다.

한편, 램지어 교수는 딱 한 명의 조선인 위안부의 증언을 제시한다. 바로 고 문옥주 할머니(1924~1996)의 증언이다. 고 문옥주 할머니는 고 김학순 할머니의 최초 증언 이후 두 번째 증언에 나섰던 분이다.

램지어 교수는 문옥주 할머니의 증언 중에 위안소에서 일하면서 군인에게 받은 급료나 팁으로 저축을 하고 시장에 나가 귀금속을 구입했다는 부분을 똑 떼어 내어 인용했다.

《반일 종족주의》를 쓴 뉴라이트 이영훈 전 서울대 교수도 이 부분을 인용해 위안부 피해를 부정한 바 있다.

그러나 보편적인 위안부 피해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급료나 팁을 받은 사례는 극소수였다. 위안소에는 이용 요금 규정이 있었지만 군인들은 돈이 아니라 표로, 그것도 관리자에게 지불했다. 그랬기 때문에 위안부 피해자들이 관리자에게 급료를 제대로 정산받을 수 있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문옥주 할머니는 일부 군인이나 관리자와의 친분 덕분에 호의(라지만 사실은 호의라고 할 수 없는 돈)를 받은 경우였다. 게다가 문옥주 할머니가 미얀마 전쟁터에서 겨우겨우 모은 우편 저금은 전후에 일본 국가의 재산으로 간주돼 실제로는 할머니 손에 들어오지도 못했다.

무엇보다 강제로 끌고가서 강간과 학대를 가하고 난 뒤 돈을 준다 해서 범죄가 아닌 “자유로운 상거래”가 되는가?

게다가 램지어 교수는 문옥주 할머니의 증언 중에 자신의 자유계약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부분을 의도적으로 외면했다. 문옥주 할머니의 증언 전체를 보면, 할머니는 16살에 일본 경찰과 헌병에게 강제로 끌려가서 한 번, 겨우 풀려나온 뒤 취업 사기로 또 한 번 위안부로 살아야 했다. 할머니는 지옥 같은 생활에 자살 기도까지 했고, 고향에 돌아와서도 위안부 생활을 숨긴 채 병든 몸을 견뎌야 했다.

문 할머니의 이러한 증언은 누구나 쉽게 확인할 수 있는데도 램지어 교수는 문 할머니를 마치 떼돈이라도 번 고급 매춘부인 양 묘사했다.

‘말단 연행자’ 문제로 초점 흐리기

위안부 피해자들의 증언과 당시 연합군의 포로 심문 기록 등 자료에 따르면, 피해자 대부분은 취업 사기와 폭력에 의해 연행됐다. 후자는 군인과 경찰이 수행한 경우가 많았고, 민간인에 의한 것은 극소수였다. 그런데 전자의 경우, 말단 연행자 중에는 민간인이 적잖았다.

이를 근거로 일본 정부와 우익은 강제 연행이 아니었다거나 강제 연행이 있었다 해도 일본 국가의 책임은 아니라고 말한다.

이 부분에서 함께 짚어 볼 수 있는 것은 《제국의 위안부》라는 책으로 알려져 있는 박유하 교수의 주장이다. 박유하 교수는 램지어 논문 논란이 일자, 자신이 램지어와 도매금으로 비판받는 것을 억울해 하고 있다.

램지어 교수의 주장이 일본 우익의 전통적인 주장이라면, 박유하 교수의 주장은 일본 내 자유주의 지식인들의 지지를 받는다. 그 핵심 내용인즉, 일본 국가에 책임이 있긴 한데 도덕적인 수준에서 사과하면 될 일이고, 법적 책임은 일본 국가가 아니라 말단에서 위안부를 모집한 민간 업자들에 있었다는 것이다.

결국 램지어의 주장이든, 박유하의 주장이든 모두 말단 연행자의 존재에 사람들의 주의를 돌림으로써 일본 국가의 법적 책임을 부정한다.

그러나 1938년 일본군 문서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모집 과정에서의 소요를 막기 위해 모집을 맡을 자의 선정에 신중을 기할 것.” 즉, 말단 연행자들이 민간인인 경우일지라도 그것은 군의 계획과 선정 하에 있었던 것이다.

더욱이 민간업자가 취업 사기로 끌고갔다 할지라도 결국 위안부 피해자들은 군이 관리하는 군용 트럭, 배, 기차를 타고 군이 운영하는 위안소에 보내져 군과 함께 끌려다니며 피해를 당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위안부’는 일본 육군성 주도 하에, 조선·일본·만주·대만·중국·필리핀에서부터 미얀마·인도·동티모르·파푸아뉴기니·미크로네시아(태평양 군도)에 이르기까지 일본 제국의 모든 점령지에 치밀하게 배치됐고, 위안소를 설립하기 어려운 지역에는 이동식 위안소를 만들어 여러 기지를 순회하기까지 했다.

일본의 조선총독부는 징용·징병 과정에서 애국반이라는 말단 조직에서 시작해 정동리·읍면·부군도·도연맹을 통해 중앙에 이르기까지 치밀한 동원 조직망을 갖고 있었다. 이런 조직망이 수십만 명 규모에 이르는 조선인 위안부를 동원하는 데서도 활용됐을 것이다.

위안부 제도의 기원

일본 제국은 1890년대부터 대만을 식민 지배했고, 1910년부터는 조선을 합병해 식민 지배했다. 1914년에 제1차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연합국 편에 가담해 산둥반도의 이권과 함께 만주·내몽골의 일부 지역을 조계지로 챙겼다. 이로써 일본은 아시아의 독보적인 강대국으로 급부상했다.

그러나 1920년대 말에 경제 상황이 나빠졌다. 세계경제 대불황의 짙은 암운이 드리웠던 것이다. 1930년 일본의 수출과 무역은 전년도에 견줘 각각 32퍼센트, 30퍼센트 폭락했다.

일본은 침략 전쟁의 확대로 위기를 타파하려 했다.

1931~1932년 일본은 만주를 침략해 경제적으로 수탈했고 이후 4개월 동안 일본 국토의 3배에 해당하는 중국 영토를 점령했다.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켰다. 일본군은 난징을 점령하고 30만 명을 학살하고 약탈, 방화와 더불어 수만 건의 강간 범죄를 저질렀다(난징 대학살). 그러나 이런 잔악 행위에도 불구하고 중일전쟁은 쉽게 끝나지 않는 장기전으로 이어졌다. 영토가 넓은 데다 무엇보다 중국 내에서 무장 저항이 계속됐던 것이다.

일본 병사들은 지치고 굶주리고 불만에 찼다. 그럼에도 군은 병사들에게 충분한 식량과 물자, 병력을 제공할 수 없었다.

한편, 일본군은 광활해진 점령지에서 일부 군인들이 민간인을 대상으로 벌이는 범죄를 통제해야 했다. 1938년 6월 중국에서 한 일본군 장교는 이렇게 쓰인 통첩을 발표했다. “각지에서 일본 군인들의 강간사건이 상상 외의 반일감정을 불러옴. 강간 사건에 대해서는 주민들이 죽음을 각오하고 보복함. 이것은 치안유지와 군 전반의 작전행동을 저해하여 국가에 해로움을 가져오는 중대한 반역행위로 발생을 멸할 필요가 있음. 신속하게 성적 위안시설을 정비하는 것이 긴요함.”

이에 따라 지역마다 산발적으로 시행되던 일본군 위안소는 1937년 중일전쟁 발발과 함께 제2차세계대전 내내 체계적으로 운영됐다. 그리고 이 시기에 위안부 피해자의 수가 급증했던 것이다.

이런 역사적 배경을 이해한다면 위안부 문제의 본질이 자유계약도, 가부장제 문제도 아니라는 점도 이해할 수 있다. 위안부 문제는 일본 국가가 1930년대 후반부터 침략 전쟁의 확대와 원활한 수행을 위해 고안하고 수행하고 관리했던 전쟁범죄이다. 그리고 그 범죄는 중일전쟁과 뒤이은 제2차세계대전이라는 비극 속의 비극이었다.

제국주의 반대

끝으로, 고전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서 제국주의는 식민 지배나 민족 억압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자본주의 세계 속에서 강대국들의 경제적·지정학적 경쟁과 그에 따라 형성되는 세계 질서를 의미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세계화된 경제적 경쟁, 특히 경제 위기 속에서 강대국들이 결국 경쟁과 싸움의 최종 심판을 군사력이라는 힘의 논리에 맡기게 된다.

바로 그러한 제국주의 질서가 옛 일본 제국 시절이나 일본이 군사대국화를 향해 박차를 가하고 있는 현재나, 양상만 달라졌을 뿐 근본적으로 여전하다. 일본이 위안부 문제를 집요하게 인정하지 않으려 하는 이유도 여기에서 찾아야 한다.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고 다시는 그러한 끔찍한 전쟁범죄가 일어나지 않도록 하려면 제국주의 질서에 반대해야 한다는 것을 위안부 문제의 진실은 알려 준다.

램지어 망언, 단지 일본 측의 로비 때문일까?

램지어 교수 외에도 미국 학계와 싱크탱크에 일본의 대외 정책에 우호적인 사람들이 꽤 있다. 언론은 그 배경에 일본의 막강한 로비가 있다는 사실을 예시한다. 미국이 한·일 갈등에서 일본에 더 우호적인 것은 일본 측의 로비 덕이라는 것이다.

램지어 교수의 공식 직함은 “일본법 연구 미쓰비시 교수”(미쓰비시의 기부금으로 만들어진 교수직)인데, 하버드대학교에 ‘삼성 교수’나 ‘현대차 교수’가 있었다면 상황이 달라지지 않았겠냐는 말도 나온다.

물론 로비가 일정한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일본 정부는 자신의 이익을 대변해 줄 일본역사학자들을 발굴하는 데 돈을 투자하고 있다.

미국의 구실

그러나 좀 더 넓은 시야로 볼 필요가 있다. 특히, 위안부 문제나 한일관계 문제에서 미국의 위치를 중립적인 제3국 정도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현재 문재인 정부의 외교부 장관이나 여성가족부 장관도 최근의 한일 갈등을 해소하기 위한 한 방안으로 미국에 중재를 요청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미국은 동맹인 한·일 양국이 화해하길 바란다면서도 실천에서는 한 번도 위안부 문제 해결에 진정으로 도움을 준 적이 없었다. 훨씬 더 중요한 동맹인 일본의 의사를 더 중시했기 때문이다.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과 2015년 한일위안부합의에서 모두 그랬다.

현재 미국의 바이든 정부는 한·미·일 동맹 강화를 매우 강조하고 있다. 경쟁국인 중국을 인도·태평양 지역에서 견제하기 위함이다.

바이든 자신이 2015년 한일위안부합의 때 부통령으로 적극 관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 국무부에는 앤터니 블링컨, 웬디 셔먼 등 한일위안부합의 때 앞장섰던 인물들이 포진해 있다.

이것이 미국 정부와 주류 정치권의 분위기다. 램지어 교수 같은 자가 미국의 학계에서 대단한 존재인 양 용인된다는 것 또한 이런 맥락 속에서 봐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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