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파 속 캄보디아 여성 이주노동자 사망 이후:
문재인 정부는 땜질 처방만 내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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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2월 경기도 포천의 한 농장에서 일하던 캄보디아 여성 이주노동자 속헹 씨가 한파 속에 숙소에서 사망했다. 농장주가 제공한 숙소는 비닐하우스 내에 샌드위치 패널로 만든 가건물이었다. 이 때문에 이주노동자의 열악한 숙소 문제가 도마 위에 올랐다.
사건 직후 문재인 정부는 숙소를 농지 위에 설치한 사용자에게 이주노동자 고용 허가를 내주지 않겠다는 대책을 내놨다. 그러나 설치 위치가 농지만 아니면 여전히 조립식 패널·컨테이너 등으로 만든 가건물을 열악한 숙소로 사용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등 실효성이 떨어진다.
〈BBC〉, 〈워싱턴 포스트〉 등 해외 언론에도 해당 사건이 보도되고 논란이 계속되자, 3월 2일 정부는 고용허가제 이주노동자의 사업장 변경 사유를 일부 확대해 주는 방침 등 추가 대책을 내놨다. 고용허가제는 이주노동자의 사업장 변경을 원칙적으로 금지하고 예외적인 경우에만 허용하고 있다.
일부 언론은 정부의 방침이 큰 개선인 것처럼 보도했다. 그러나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 사업장 변경 사유에 해당하는지 입증할 책임이 이주노동자에게 있기 때문이다. 한국의 법, 제도, 언어에 익숙하지 않은 이주노동자가 이를 입증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확대 범위도 매우 제한적이다. 예컨대 정부는 “숙소 용도가 아닌 불법 가설 건축물”을 숙소로 제공한 경우를 사유에 추가했다. 그러나 이 경우 ‘불법’인 것은 주로 농지에 설치한 경우를 뜻하는 것으로 숙소에 걸맞는 설비 등을 요구한 것은 아니다.
사용자가 산업안전보건법을 위반해 사업장에 중대재해가 발생한 경우, 이주노동자가 3개월 이상의 휴업이 필요한 신체적·정신적 부상을 입거나 질병에 걸린 경우도 사유에 추가했다. 이는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바꿔 말하면 이주노동자가 위험하다는 판단이 들어도 산재가 실제로 발생하기 전에는 그만둘 수 없다는 뜻이다. 고용허가제가 얼마나 잔인한 제도인지 보여 준다.
게다가 산재 은폐가 만연한 현실에 비춰 보면 사용자의 과실이 확인돼야만 사업장 변경을 허용하겠다는 대책은 한계가 크다. 2016년부터 2019년 7월 말까지 산재가 발생했음에도 보고를 하지 않아 과태료 처분을 받은 건수는 3841건에 달했다(더불어민주당 한정애 의원실).
정부는 이번 대책에서 농축산·어업 이주노동자의 건강보험 가입 조건과 보험료를 완화했다. 그러나 이는 다른 업종의 이주노동자 수준으로 맞춘 것에 불과하다.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보험료 지원 사업의 일부 예산도 내년에나 확보할 예정이라 올해는 이주노동자가 여전히 매달 10만 원이 넘는 보험료를 내야 한다.
농축산·어업 이주노동자들은 긴 노동시간 때문에 병원 이용 자체가 쉽지 않다. 2018년 이주노동자 약 1200명을 대상으로 한 실태조사를 보면, 농축산·어업에 종사할 경우 주당 평균 노동시간은 61.2시간, 휴일은 0.7일로 나타났다. 이런 조건이 개선되지 않으면 건강보험에 가입되더라도 의료 사각지대에 놓일 가능성이 크다.
솜방망이
한편, 숙소를 농지 위에 설치한 사용자에게 이주노동자 고용 허가를 내주지 않겠다는 기존 대책에서 후퇴하는 내용도 포함됐다. 일부 사용자에게 “숙소 개선 이행기간”이라는 명분으로 6개월의 유예 기간을 주기로 한 것이다. 사용자가 숙소를 신축하겠다고 하면 그 기간은 1년까지 늘어난다. 사용자는 이 기간 동안 열악한 숙소를 위치만 바꿔 다시 설치하면 노동력 공백 없이 계속 이주노동자를 고용할 수 있다.
벌써부터 이렇게 보잘것없다니, 정부가 6개월~1년 후 여론이 잠잠해지고 나서 숙소를 개선하지 않은 사용자를 실질적으로 제재할지 의문이다.
사실 고용허가제의 목적 자체가 노동자들이 기피하는 열악한 곳에 노동력을 공급하는 데 있다. 이런 목적에서 이주노동자가 취업할 수 있는 업종을 제한한다. 그래서 농업 사용자들은 이런 쥐꼬리만한 개선에도 반발하고 있다. 이렇게 생산된 저렴한 농산물은 노동력 재생산 비용 증가 즉, 임금 인상 압력을 억제함으로써 전체 자본가들에게 도움이 된다.
이번 대책과 같은 땜질식 처방으로는 열악한 숙소를 비롯해 이주노동자의 노동조건을 제대로 개선할 수 없다. 원칙적으로 사업장 변경을 금지해 놓은 상태에서 예외적인 허용 사유를 조금 확대하는 것도 큰 소용이 없을 것이다. 설령 사업장 변경 사유에 해당된다 해도 고용허가제의 업종 제한 때문에 양질의 숙소를 제공할 수 없다고 반발하는 사용자들 사이에서 새 사업장을 골라야 한다. 게다가 3개월 안에 이직을 못하면 출국해야 하는 압력도 받는다.
정부는 고용주가 이주노동자에게 안전하고 쾌적한 주거시설을 저렴하게 제공하도록 실질적인 조처를 취해야 한다. 또한 고용허가제를 폐지하고, 이주노동자가 자유롭게 출입국하고 체류기간, 취업 가능 업종 등의 제한 없이 직장을 선택할 수 있게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