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민 교수의 보수 여성단체 지원 유감:
목욕물 버리다 애까지 버리진 마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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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3일 서민 교수(단국대 기생충학)가 보수 여성단체인 바른인권여성연합이 주최하는 행사(제1회 ‘다시 가정으로’)에 참가한 것이 언론에 보도됐다.
그 자리에서 서 교수는 자신이 “한때 페미니스트였지만, 페미니스트들이 여성의 인권 향상보다 여성을 이용해 자신들의 잇속을 챙기는 모습을 보고 결별했다”고 밝혔다. 그리고 페미니즘이 “엄마·아빠로 이뤄진 가정을 비정상화하고, 비혼·1인 가족 등을 정상의 범주에 포함시”킨다고 비판했다. 더욱이 성소수자들에 대한 편견을 드러내며 ‘페미니스트들에게 날개를 달아 줄’ 차별금지법 제정에도 반대했다.
서 교수는 급진적 관점에서 우파 정부를 비판하고 신랄하게 풍자해 유명해졌었다. 그러나 조국 사태 이후에는 문재인 정부에 대해서도 예리한 비판을 가해 왔다.
더구나 그는 ‘남성 페미니스트’를 자처하며 여성 차별에 반대하고 동성애를 방어했었다. 글과 강연, 방송 프로그램을 통해 육아, 외모, 경력 차별 등 일상에서 여성들이 겪는 차별을 비판하며, 남성들도 이런 문제에 관심을 갖고 페미니즘을 지지하기를 촉구했었다. 심지어 더 나아가, 남성 일반을 잠재적 가해자 취급하는 급진 페미니스트들의 주장마저 수용했었다.
그러니 서 교수의 지지자들이 이번 언행을 보고 몹시 당혹스러울 법하다. 행사를 주최한 바른인권여성연합은 매우 보수적인 단체다. 개신교 우파와 함께 건강가정기본법 개정(혼인과 혈연 중심의 가족 개념 삭제)·낙태·차별금지법·동성애·동성혼 등에 반대하는 운동을 펼쳐 왔다. 정치적 우파와의 직접적 연계성은 분명히 하고 있지 않지만, 공동대표 이봉화는 이명박 정부의 보건복지가족부 차관을 지냈다.
조국 사태
서 교수의 주장을 보면, 그가 페미니스트들에게 크게 실망하고 페미니즘에 완전히 등을 돌렸음을 알 수 있다. 그 요인으로는 문재인 정부에 협력해 온 여성계 지도자들에 대한 극심한 환멸이 있는 듯하다.
사실 서 교수는 박근혜 퇴진 촛불 운동에 참가했고, 그 뒤에 출범한 문재인 정부에 기대를 걸었다. 그러나 조국 사태를 거치며 문재인 정부에 완전히 등을 돌렸다. 그래서 서 교수는 조국 사태에서 보여 준 문재인 정부와 여당의 위선과 이중잣대를 가차없이 공개 비판했다. 이는 조국 사태를 보며 문재인 정부에 실망한 대중의 심정을 대변하는 것이었다.
“지난 정권 때 총리 후보자들에게 추상같은 잣대를 적용했던 야당은 집권당이 된 지금 조국을 감싸기에 여념이 없다. [조국이 법무부 장관이 되면] 내로남불이 우리 사회의 시대정신이 돼 사회가 어지러워지지 않을까?”(2019년 8월 21일자 〈경향신문〉)
특히, 당시에 정의당·진보당 같은 진보 정당들마저 조국 옹호론을 펴고 대표적 노동조합 민주노총은 입을 꾹 다물어 사실상 정부를 비호하던 상황에서 이런 비판은 더욱 의미가 있었다. 그때 서 교수는 공직에 진출한 엔지오 지도자들이 진영논리에 갇혀 제 구실을 못하는 것에 크게 실망한 듯하다.
“저는 시민운동하던 이들이 정치권에 진출하는 게 나쁘다고 보진 않았어요. 그들이 얻은 권력을 이용해 원래 하던 일을 더 효율적으로 추진할 수도 있는 일이니까요. 그런데 우리나라의 경우 시민단체의 정계진출은 곧 그 단체의 정체성이 흔들리는 결과로 끝나더군요. 참여연대 보세요. 정치인들의 비리가 있을 때마다 쓴 소리를 하곤 했는데, 그 단체에 있던 사람들이 정치권에 우르르 들어가고 나니까, 그다음부터 진보인사의 비리에 침묵하잖아요, 조국 사태가 대표적이죠.”(《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나라》, 271쪽)
윤미향 의원 사태
서민 교수는 2019년 10월 《윤지오 사기극과 그 공범들》이라는 책을 냈다. 그 책에서 그는 상세한 정황증거가 뒷받침된 논증과 추정으로 ‘고 장자연 사건의 유일한 증인’을 자처한 윤지오가 사기꾼일 뿐임을 폭로했다. 그리고 윤지오를 도운 언론과 정치인들도 비판했다. 그러나 그때까지만 해도 그는 윤지오를 도운 여성단체들은 공개 비판하지 않았다.
그러다 결정적으로 2020년 봄, 윤미향 의원 사태를 거치며 페미니스트들과 단절해야겠다는 마음을 굳혔다. 여성단체 지도자들이 (정의기억연대 리더로 민주당의 공천을 받은) 윤미향 의원의 정치적 부패 의혹을 두둔했기 때문이다.
“회계 부정을 지적하는 건 시민운동이 더 발전하기 위해서 당연히 받아들여야 하는데 34개 여성단체가 윤미향을 지지했다. 회계 부정에 관한 이야기는 위안부 단체를 모욕하는 것도 아니다. 외부세력이 얘기한 것도 아니고 이용수 할머니가 먼저 얘기를 했다. 그런데 할머니 편이 아니라 권력자인 윤미향 편을 들더라. 진영논리에 입각해서 이러는구나 생각했다.”(2020년 8월 20일자 〈중앙일보〉)
“윤미향 의원과 정의연이 위안부를 이용해 돈과 권력을 취해 왔다고 보는데, 알고 보니 페미도 여성의 낮은 지위를 이용해 돈과 권력을 취해 왔던 것이죠.”(2020년 8월 11일자 〈미래한국〉)
윤미향 의원이 위안부 운동 과정에서 시스템에 포섭돼 “돈과 권력을 취한” 것이 각별히 대중의 환멸을 샀다. 여기에는 (재정이 부족하지 않을 잠재력이 있는데도) 대형 엔지오가 국가와 기업에 재정을 의존하는 관행, 그리고 민주당 정부에 의존하는 개량주의 전략의 약점이 크게 작용했다.(관련 기사: 본지 323호, ‘윤미향과 정의연 스캔들 ①: 부정의 본질적 성격은 무엇인가’)
그러나 윤미향 의원은 부정 의혹에 대한 설득력 없는 해명과 오만한 대응으로 대중에게 더 큰 환멸감을 줬다. 정부와 여당은 조국 논란 때와 마찬가지로 윤미향 의원을 옹호하기에 바빴다. 여권뿐 아니라 진보계 지도자들도 이 문제에 침묵하거나 어물어물하는 태도를 보였다.
당시 〈노동자 연대〉 신문은 이런 ‘제 식구 감싸기’ 식 태도가 진보계를 도매금으로 불신받게 해 우파가 이를 이용해 성장할 수 있다고 경고한 바 있다.(관련 기사: 본지 327호, ‘윤미향·정의연 사건은 마녀사냥으로 볼 수 없다’)
여성계 일부 지도자들은 윤미향을 대놓고 감쌌다. 나머지는 침묵의 카르텔을 형성했었다. 윤미향을 공개 옹호한 여성계 대표들 — 한국여성단체연합 김영순 상임대표, 한국여성민우회 강혜란 대표, 한국여성의전화 고미경 대표 등 — 은 당시 정의연의 이사였다.
이런 일련의 사건을 경험하며 서 교수는 문재인 정부와 여성단체 지도자들에게 자연스레 환멸감을 느낀 듯하다. 서 교수뿐 아니라 적잖은 진보 염원 청년들이 그런 심정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배신당한 심정은 십분 공감해도, 여성·성소수자 차별을 방어하는 보수주의에 동조하는 것으로까지 나아간 것은 크게 오버 하는 것이다. 분노와 환멸이 너무 큰 나머지 균형감각을 잃은 것이 아닌지 우려스럽다.
진영논리와는 다른 대안
물론 “돈과 권력에 취해 왔다”는 서 교수의 비판은 여성 엔지오 주요 지도자들에 대한 뼈아프고 예리한 지적이다.
한국의 여성단체 지도자들은 대부분 말로는 급진 페미니즘 경향이지만, 실천으로는 대부분 김대중-노무현 정부 10년간 정부와 국회 등 자본주의 국가 기구로 진출해 정책 수립에 영향을 미치고자 하는 ‘성주류화 전략’을 추구해 왔다.
그 과정에서 그 지도자들은 명백한 친자본주의 정당인 민주당과의 연계를 통해 자본주의 시스템 안으로 포섭돼 왔다. 여성부나 국가인권위원회, 지자체 등의 국가 관료로 편입되거나 정부와의 거버넌스 사업 등을 맡으면서 그렇게 해 왔다. 민주당 등이 영입해 총선에 공천되는 것도 그 일부다.(관련 기사: 본지 258호, ‘여성운동 지도자들과 자본주의 국가의 밀접한 관계’)
그들은 자유주의자들과 긴밀한 연계를 맺고 그 정부·정당의 일원이 되면서 이들과 더 일체감을 느끼고, 여성 운동의 애초 목표와 원칙, 대의에는 둔감해졌다. 그래서 여성단체 지도자들의 윤미향 비호는 개량주의적인 성주류화 전략에 담긴 핵심 난점을 보여 준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관념적 급진 페미니즘이나 성 주류화 전략의 문제점을 비판하다가 성평등 사상과 운동 자체에 등을 돌리는 것은 목욕물을 버리다 애까지 버리는 격이 될 수 있다.
오늘날 ‘페미니즘’이라는 말은 단지 서 교수가 반대하는 종류의 급진 페미니즘만 협소하게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오늘날 ‘페미니즘’은 성평등 또는 여성의 권리를 지지하는 사상·운동 전반을 가리키는 매우 느슨한 용어로 쓰인다.
그래서 페미니즘은 결코 단일하지 않다. 복수의 페미니즘‘들’이 존재한다. 여성단체 지도자들과 그들이 자신들의 보루로 여기는 국가 기구들이 다양한 페미니즘들과 여성의 요구를 모두 대변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문재인, 조국 등 여권 인사들, 여성단체 일부 지도자들의 부패와 위선에 반감이 생겼다고 해서 보수적 운동과 조직에 동조하는 것은 완전히 길을 잃은 것일 뿐이다.
서 교수가 그토록 비판해 온 종류의 진영논리는 민주당 아니면 우파 둘 밖에 선택할 수 없다는 이분법에 근거한다. 이 전제에 따라 여권 인사들은 서민 교수 같은 진보적 지식인들과 진보운동가들에게 여권의 위선과 부패에도 눈을 감으라고 강요했다.
그러므로 서 교수가 진영논리를 벗어나겠다며 보수파와 잘 지내려 애쓰는 것은 결국 자본가 계급의 양당 외에는 선택지가 없다는 이분법 구도 안에서 좌충우돌하는 것일 뿐이다.
보수파의 페미니즘 비판은 그저 반사이익을 얻어 사회 전반에서 보수적 호감을 강화해 보려는 위선과 책략일 뿐이다. 그들은 여성 차별을 유지하고 강화하려 해 왔고, 거기서 득을 본다. 이 지점에서 보수파가 우파가 되는 건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인 것이다.
서 교수의 최근 행보는 문재인 정부와 급진 페미니즘에 대한 진보·좌파 측의 진정한 대안이 부재하고 화급히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 공백을 사회적 보수파와 정치적 우파가 이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대안은 지금까지처럼 중간계급 여성의 지위 향상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노동계급·서민층 여성의 조건을 실질적으로 개선하기 위해 계급투쟁과 융합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