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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주의는 무엇인가? — 오늘날의 의미

이 글은 5월 9일(현지 시각) 헝가리계 영국인 마르크스주의자 토마시 텡글리-에번스가 한 강연을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 ] 안의 내용은 번역자가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첨가한 것이다. 녹취를 해 준 이은혜 동지에게 고마움을 표한다.

자본주의 사회가 갈림길에 와 있다는 점이 지난해 거듭 드러났다. 세계 곳곳의 정부들은 인간보다 이윤을 앞세워 팬데믹으로 사람들이 죽게 내버려 뒀다. 팬데믹은 바로 환경 파괴에서 비롯했다. 경제 대침체가 지속되고 있다. 제대로 싸우지 않으면 노동자들이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여기에 더해 기후 재앙의 위협도 지속되고 있다.

팬데믹에 대응해 국제 협력과 국제주의를 증진시켜야 마땅할 때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팬데믹은 오히려 제국주의 경쟁을 가속시켰다. 세계 제국주의 체제 하에서 핵전쟁과 유혈 충돌의 위험이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파멸과 절망만 남은 것은 아니다. 노동계급의 힘을 힐끗 보여 준 저항들도 있었다. 노동계급에 대한 공격을 막아 내고 체제 자체에 반대해 새 사회를 건설하는 데 필요할 투쟁들이 벌어졌다. 미얀마에서는 지난 몇 달 동안 쿠데타를 일으킨 군부에 용감하게 맞선 대중 항쟁이 일어났다. 강력한 거리 시위뿐 아니라 조직 노동자들의 단체 행동도 벌어졌다. 공무원 노동자들이 정부에 맞서 싸웠고, 보건 노동자들은 쿠데타 초기부터 단체 행동을 벌였다.

인도에서는 농민들이 매우 전투적인 시위를 벌였다. 시위대가 경찰을 트랙터로 밀어 버리려고 했다. 영국에서는 볼 수 없었던 광경이다. 시위대는 경찰이 친 바리케이드를 돌파했다. 이 농민 시위는 조직 노동자들과 연결될 가능성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가라앉았다. 더 많은 걸 할 수도 있었는데 그 잠재력을 실현하지 못했다. 여기에는 이유가 있다. 그 이유는 이 토론회에서 토론해 볼 것이다.

사회 개혁이냐 혁명이냐

다들 자본주의가 갈등과 투쟁을 달고 사는 체제임을 생생하게 느꼈을 것이다.

자본주의는 계급 분단에 바탕을 둔 사회다. 투쟁이 사회에 내장돼 있다. 상이한 계급들의 이해관계를 화해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지난 몇 년 새 일어난 대중 저항과 거의 혁명에 가까운 항쟁을 열거해 보면 정말 입이 떡 벌어진다. 한 나라 안에서 일어난 저항만 있었던 것도 아니다. 2019년에는 국제적인 기후 동맹휴업 등이 일어났다. 지난해에는 ‘흑인 목숨도 소중하다’ 운동이 크게 일었다. 미국 역사상 최대 규모의 사회 운동이었다.

이런 커다란 운동들에서는 언제나 중요한 물음이 제기됐다. 운동의 전망을 체제 내 개혁들을 점진적으로 쟁취하는 것으로 국한할 것인가? 아니면, 철저하고 혁명적인 변화를 추구해 그 운동을 다른 운동들과 연결하고, 체제 자체를 반대해 체제를 없애 버리는 것으로 나아갈 것인가?

레닌의 기여

러시아 혁명가 블라디미르 레닌의 정치는 이 물음에 답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

레닌에 대한 왜곡이 많다. 레닌은 교조주의자, 독재자였다고들 한다. 그래서 스탈린주의도 레닌에게서 비롯한 것이어서, 1920년대 말부터 무시무시한 독재를 자행한 동구권[옛 소련 블록]의 스탈린주의 지배체제도 레닌 때문에 생겨났다고 한다.

이는 참말이 아니다.

레닌의 정치는 체제가 수많은 일반 대중의 삶을 지금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희생시키던 엄청난 위기 시기에 형성됐다. 지금은 팬데믹이 한창이고 국가 간 충돌의 위험이 커지고 있는데, 당시에는 제1차세계대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레닌은 전례 없는 상황과 씨름하며 새로운 사상을 발전시켰다. 레닌의 사상은 결코 허공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다. 체제에 반대한 투쟁에서 검증된 사상으로, 혁명적 변화를 가져오는 데에 중요한 구실을 했다.

레닌은 생애의 많은 시기를 제2인터내셔널에서 보냈다. 제2인터내셔널은 유럽 사회주의 정당들의 연합체로, 독일 사회민주당이나 프랑스 사회당 등이 있었다.

그러나 레닌의 볼셰비키당은 [제2인터내셔널과 결별하고] 1917년 사회주의 정당들 중 유일하게 노동자 혁명을 성공시켰다. 이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전례 없는 위기 속에서 자신의 사상을 발전시킨 레닌은 1917년 러시아혁명을 성공으로 이끌었다

이 자리에서 레닌이 마르크스주의 정치에 한 기여를 말하면 많은 얘기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전쟁, 제국주의, 차별받는 사람들의 편에 서는 문제 등등.

이 자리에서는 그의 사상 중 어떻게 운동에서 혁명으로 나아가느냐는 물음과 관련된 두 가지 측면에 집중하려고 한다.

마르크스주의 정치의 핵심이자 국제사회주의경향(IST)의 사회주의 이해에 핵심적인 것은 노동계급의 자력 해방과 권력 장악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자본가 계급이 나머지 계급들에 헤게모니를 행사하며 지배하고 있다. 반면 우리가 원하는 사회는 노동계급 대중이 직접 운영하는 사회다. 우리는 기존 국가를 통한 개혁이나 국유화를 사회주의와 같은 것으로 보지 않는다. 아래로부터의 노동자 권력이 중요하다.

레닌의 정치에서 중심적인 주제는 노동계급이 어떻게 헤게모니를 행사하는 지배 계급이 돼서 자신의 이익에 따라 사회를 운영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

하나는 국가와 혁명이다. 앞서 살펴본 운동들은 결국 국가라는 문제에 부딪혔다.

다른 하나는 혁명적 정당이다. 혁명적 당이란 광범한 노동계급 투쟁과 체제 반대 운동의 일부이면서도 별도로 조직돼야 한다는 점을 이해하고, 운동 내에서 혁명적인 견해를 독자적으로 펼 수 있는 당을 말한다. 모든 운동에서는 개혁주의적 견해와 혁명적 견해가 충돌을 빚는다.

혁명적 당은 현실의 운동에 참여하면서도 운동의 승리를 위한 주장을 독자적으로 제시하려 한다 ⓒ조승진

국가와 혁명

국가를 개혁해 사용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면, 자본주의 사회 내에서 어떻게 해야 국가에 가장 잘 맞서 싸울 수 있고, 실제로 국가 문제를 돌파할 수 있을까?

국가에 관한 레닌의 견해는 그의 저작 전반에 스며들어 있지만 그중에서도 소책자 《국가와 혁명》이 특히 중요하다. 그 소책자에서 레닌은 국가가 화해 불가능한 계급 적대의 산물이자 표현이라고 했다. 국가는 계급 대립이 객관적으로 화해할 수 없을 때 생겨난다.

국가는 계급 지배의 도구로, 한 계급이 다른 계급을 억압하는 수단이다. 즉, 국가는 분열된 사회를 초월한 중립적인 관료 기구가 아니다. 오히려 국가는 기존 질서를 지속시킨다.

의회를 보면, 의회는 선출되지 않는 거대한 관료 기구들의 바다 한가운데 있는 조그만 섬에 불과하다. 그 나머지는 노동계급 대중의 민주적 압력과, 그들에 대한 책임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다.

그린실 스캔들[최근 영국의 집권 보수당을 둘러싸고 불거진 부패 스캔들]을 보라. 대중에게 아무 책임도 지지 않는 부자와 권력자들의 네트워크가 정책을 좌우하고 중대 사안에 입김을 넣는다는 것이 드러났다.

경찰의 진정한 구실을 드러낸 최근의 운동들을 보라. 그런 기구들은 중립적 행위자가 결코 아니며 자본주의 국가의 명실상부한 일부이다.

레닌은 《국가와 혁명》에서 국가 권력이 무엇으로 이뤄져 있는지 묻는다. 그 권력은 특별한 무장 집단과 수감시설 등으로 이뤄져 있다고 레닌은 답한다. 경찰과 군대도 자본주의 국가 권력의 중요한 도구다.

3월 26일 경찰법 개악 반대 시위 진압에 경찰견을 동원한 영국 경찰

위 사진은 영국의 경찰법 개악 반대 시위대에게 경찰견을 동원한 경찰의 모습이다. 경찰은 시위대가 경찰관들에게 폭력을 휘둘렀다고 꾸며 내고는 언론사에 있는 자기 친구들에게 이를 알렸다. 그러나 이는 모두 거짓말로 드러났다.

사라 에버라드의 죽음[영국에서 한 여성이 경찰관에게 납치·살해된 사건]에 항의하는 운동, ‘흑인 목숨도 소중하다’ 운동, 경찰법 개악 반대 운동 등은 실로 국가 기구의 진정한 성격을 어느 정도 들춰내, 레닌의 말이 옳다는 것을 보여 줬다.

이런 기구들은 노동계급에 이롭게 사용할 수 없다. 좌파 정당이 집권해도 경찰과 군대는 사회주의 경찰과 사회주의 군대가 될 수 없다. 그런 기구들은 본질적으로 노동계급의 이익을 거스르기 때문이다.

국가를 둘러싼 논쟁이 다양하게 있다. 요즘에는 레닌주의 국가론에 관해 이런 반박도 나온다. “알겠어, 토마시. 근데 레닌은 러시아 사람이었잖아. 거긴 차르가 통치하던 나라였다고! 지금 영국은 완전 달라. 의회 민주주의잖아. 게다가 신자유주의와 다국적기업 때문에 국가는 전보다 덜 중요해졌어. 또, 국가는 국민보건서비스(NHS) 같은 유익한 일도 해.”

이런 식으로 레닌주의 국가론을 조야하다고 깎아내리고 논박하려 한다. 그러나 레닌과 같은 시대를 살았던 또 다른 볼셰비키 당원인 부하린이 이런 류의 주장을 이미 반박한 바 있다. 부하린은 《제국주의 국가론을 향하여》라는 책에서 국가가 “사회적으로 유용한 활동”도 할 수 있다고 인정한다.

그러나 자본주의 국가가 그러는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장기적 자본 축적을 보장하는 것이다. 자본주의 국가와 자본가들은 건강하고 잘 교육된 노동력 인구가 필요하다. 그래서 보건과 교육 등의 분야에서 어느 정도 양보할 수 있다. 둘째, 그런 양보는 또한 지배자들이 노동계급 투쟁이 심화될 것을 두려워해 그 투쟁을 달래려는 것일 수 있다.

레닌과 부하린 등의 볼셰비키는 국가를 둘러싼 여러 물음에 답하려 했다. 그러나 부하린이 지적했듯 국가가 사회적으로 유용한 활동을 한다 해도, 그 국가가 근본적으로 자본주의적 국가로 대다수 사회 구성원들에 대한 자본의 지배를 영속시키려 한다는 점은 달라지지 않는다.

앞서 살펴본 운동들, 예컨대 미얀마·벨라루스·수단의 항쟁들에서는 국가와 어떻게 대결해야 하는지, 국가에 맞서 어떻게 조직해야 하는지 하는 문제가 거듭 제기됐다. 그러려면 노동계급 대중은 자신의 민주적 기구를 건설해서 실제로 정치 권력을 갖기 위해 노력해야 하고, 그 권력으로 기존 국가를 분쇄한 뒤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사회를 운영해야 한다.

혁명적 당

레닌 사상의 또 다른 측면은 바로 혁명적 당에 관한 것이다. 애당초 당이라는 조직 자체가 필요하냐는 주장이 한동안[특히 2000년대 초반부에] 있었다. 이런 주장은 다양한 사회운동 내에서 지금도 제기된다. 예컨대 ‘멸종반란’이나 경찰법 개악 반대 운동에서, ‘정당은 필요하지 않아. 모두가 평등한 수평적 네트워크만 있으면 돼’ 하는 주장이 흔히 나왔다.

지금은 논쟁이 변하기 시작했지만 이런 사상[자율적 사회운동이라는]이 한때 꽤 우세했던 것은 세계적으로 사회민주주의 정당과 스탈린주의 정당이 실패했기 때문이다.

그들의 실패와 위기는 지금도 볼 수 있다. 올해 5월 영국 지방선거에서 노동당이 자기 텃밭인 하틀풀에서 거둔 처참한 성적을 보라. 장기적으로 노동당은 자신의 노동계급 기반을 지속적으로 잃어 왔다.

그러나 이제 위기는 노동당 같은 주류 사회민주주의 정당들만이 겪는 게 아니다. 몇 년 전[좌파적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이 부상하던]을 떠올려 보자. 스페인에서는 포데모스가 연립 정부에 참여했고, 그리스에서는 시리자가 집권했으며, 영국에서도 제러미 코빈이 노동당 정부 수립 가능성을 넘볼 수 있었다. 미국에서는 버니 샌더스가 대선에 도전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떤가? 포데모스 안에서 벌어지는 위기를 보면, 포데모스는 체제의 포로가 됐고, 자신이 약속한 변화를 이뤄내지 못했음이 분명하다. 집권한 시리자는 대중의 변화 염원을 배신하고 직접 가혹한 긴축 정책을 시행했다.

국가와 의회 정치를 지향하며 이를 위한 책략에 몰두하는 개혁주의 정당과는 다른 대안이 무엇이냐는 중요한 물음이 제기된다.

레닌주의 정치가 혁명적 당의 필요성을 제기하는 이유는, 단지 국가가 조직돼 있으니 혁명가들도 조직돼야 한다는 선에서 그치지 않는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주장한다. “그래, 레닌이 혁명적 당이 필요하다고 주장한 것은 옳아. 무시무시한 차르 체제를 상대하고 있었으니까. 수단이나 이집트에서도 그런 조직이 필요할지 모르지. 하지만 의회 민주주의 하에서는 혁명적 당이 필요 없어.”

이런 주장은 혁명적 당이 필요한 핵심적 이유를 오해한 것이다. 혁명적 당은 현실에 존재하는 모순 때문에 필요하다. 마르크스주의자인 우리는 아래로부터의 사회주의를 꿈꾼다. 노동계급의 해방은 노동계급 자신의 행동이라고, 노동계급이 스스로 해방돼야 한다고 본다. 해방은 위에서 누군가가 하사해 주는 게 아니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어느 시대든 지배적 사상은 지배 계급의 사상이라고도 했다.

그렇다면, 노동계급은 지배계급의 사상에 의해 체제에 예속된 상태에서 스스로 해방돼야 하는 것이다. 그런 노동계급이 어떻게 전체 사회에 헤게모니를 행사하며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사회를 운영하는 위치로 올라설 수 있는가?

이 물음에 답하려면 노동계급의 사고가 어떻게 바뀌는지 살펴봐야 한다.

혁명적 당이 필요한 본질적인 이유는 자본주의 하에서 노동계급 압도 다수의 사고가 불균등하다는 데에 있다.

소수 노동자들은 일관되게 반동적이다. 이들은 줄곧 사용자 편을 들고 지독한 편견에 찌들어 있다. 한편, 다른 소수 노동자들은 혁명적이다. 이들은 자본주의 체제를 완전히 끝내고 싶어 한다.

압도 다수의 노동자는 둘 사이 어딘가에 있다. 개혁을 위해서 싸울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체제 자체를 없애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무지해서 그렇게 생각하는 게 아니다. 개혁주의 정당들이 그들더러 개혁주의자가 되라고 해서 그런 것도 아니다. 사람들의 사고가 형성되고 바뀌는 방식 때문이다.

노동자들의 의식은 어떻게 변하는가?

사람들의 사고는 지배자들의 영향을 지대하게 받는다. 지배자들은 예컨대 언론을 통해 온갖 쓰레기 같은 관념들을 퍼뜨린다.

그러나 사람들의 사고는 지배자들이 퍼뜨리는 헛소리에 휘둘리기만 하지 않는다. 사람들의 경험도 그들의 사고에 영향을 미친다. 특히 집단적 투쟁 경험이 사고를 변화시킨다. 사람들은 신문에서 이민자를 헐뜯는 온갖 헛소리를 읽는 데 그치지 않는다. 이민자들과 이웃사촌으로 지내며 겪는 경험 등이 이민자에 대한 견해에 영향을 미친다.

계급투쟁을 경험하며 사람들은 체제 내에서 개혁을 쟁취할 수 있음을 배우게 된다. “그렇구나! 투쟁을 하면 양보를 얻어 낼 수 있어!” 하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단지 사업장 쟁점에서만 그런 것도 아니다. 얼마 전 영국의 ‘흑인 목숨도 소중하다’ 시위대가 17세기 영국 노예무역상 에드워드 콜스턴의 동상을 무너뜨린 것을 생각해 보자. 그것은 매우 구체적인 개혁이었다. 얼마나 의미심장한 사건이었던가!

물론 시위대는 더 많은 변화를 이끌어 내려 했다. 그러나 그런 변화를 이루려면 체제 전체와 대결할 자신이 있어야 한다. 예컨대 경찰을 아예 폐지한 사회를 만들자는 발상은 혁명적인 사상이며 여전히 극소수의 것이다. 그래서 혁명적 당은 체제 자체를 일소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결집시켜 혁명적 단체로 조직하고자 한다.

그러나 혁명적 당은 투쟁과 동떨어진 조직이어서는 안 된다. 혁명적 당은 현재 벌어지는 투쟁에 참여하고 그 일부가 돼야 한다. 그러면서도 별도로 조직돼 있어야 한다. 그래야, 운동 내에서 중요한 논쟁 — 국가 기구의 도전에 직면해 물러설 것인가, 전진할 것인가? ‘너무 지나친’ 요구를 하기 전에 요구 수준을 낮춰야 하는가? 등 — 이 벌어질 때 실제로 체제에 반대해 운동을 전진시킬 수 있는 주장을 관철시키고, 그 운동을 다른 투쟁과 연결시켜 더 큰 혁명적 변화로 나아갈 수 있다.

레닌주의 당은 엘리트적인가?

이 대목에서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는 주장이 하나 있다. 레닌이 말한 혁명적 당은 엘리트적이라는 주장이다. 혁명적 당이 ‘우리는 모든 것을 다 안다. 노동계급에게 과제를 일러 주겠다. 우리는 대중을 지도할 전위다’ 하는 식의 태도를 취한다는 것이다.

이런 비판을 하는 사람들은 레닌의 소책자 《무엇을 할 것인가?》를 붙들고 늘어진다. 레닌은 그 소책자에서, “노동자들의 정치적 의식은 오직 노동계급 외부에서만 들여올 수 있다”고 썼다. 그래서 레닌주의자들은 뭐든지 자기가 가장 잘 안다고 생각하면서 노동계급에게 이래라저래라 하려 한다고 한다.

그러나 레닌의 글은 언제나 당대에 벌어진 구체적·정치적 논쟁 속에서, 그 논쟁에서 이기기 위해 쓴 것이다. 레닌이 그런 말을 쓴 맥락을 봐야 한다. 당시 레닌은 ‘경제주의자’라고 불린 사람들과 논쟁하고 있었다. 혹시 ‘경제주의자’라는 명칭을 보고 ‘경제 분석에 몰두하는 사람을 뜻하나?’ 하고 생각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경제주의자들은 임금이나 일자리 같은 나날의 문제를 둘러싼 일상적 투쟁들을 하다 보면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으로 조금씩 앞으로 나아갈 것이라고 주장한 조류였다.

레닌은 경제주의가 노동자 운동을 특정 부문의 이해관계를 지키는 투쟁들로 체계적으로 제약한다고 비판했다. 레닌이 정치 의식을 “외부에서만 들여올 수 있다”고 한 것은 “경제주의자들이 한 극단으로 나아갔기 때문이다.” 레닌은 “사태를 바로잡으려면 누군가가 반대 방향에서 잡아당겨야 했다”고 썼다.

레닌은 노동계급이 억압과 차별을 받는 사람들 모두의 옹호자가 돼야 한다는 맥락에서 이런 주장을 했다. 우리는 물질적 생활 수준 향상 문제에 갇혀서는 안 된다. 누구를 겨냥한 것이든, 어디서 비롯한 것이든 모든 억압과 차별 사례에 반대해야 한다. 노동계급 속에 퍼진 반동적 관념에 이의를 제기하고 그런 관념들을 노동계급에게서 씻어 내야 한다. 그리고 그 모든 억압과 차별 사례들을 일반화해 국가 폭력과 자본주의 착취라는 하나의 커다란 그림을 제시해야 한다. 이것이 레닌의 요지였다.

다시 말해, 레닌은 혁명적 당을 그저 노동계급 바깥에서 노동계급에게 지시나 내리는 조직으로 여기지 않았다. 레닌이 보기에 혁명적 당은 노동계급의 일부, 더 광범한 투쟁의 일부여야 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그 안에서 개혁주의적인 사상과 반동적인 사상에 맞서 싸우고 체제 전체에 반대하는 방향으로 투쟁을 이끌 수 있어야 했다.

그러면, 이제 혁명적 당이 어떻게 사태를 바꿀 수 있고 왜 필요한지를 놓고 최근의 구체적 사례를 들어 보겠다. 1917년 러시아 혁명 때도 많은 사례가 있었고, 당시 러시아와 유럽 정치에 관해서라면 정말 하고 싶은 얘기가 많지만 여기서는 훨씬 최근 사례를 들어 보겠다.

수단에서 일어난 일이 매우 좋은 사례다. 수단에서는 알바시르의 독재 정권에 맞서 거대한 대중 항쟁이 일어났다. 항쟁은 독재자를 몰아낸 뒤에도 멈추지 않고 더 나아가, 군부가 지배하는 질서 자체를 무너뜨리려 했다. 수도 하르툼과 여러 도시에서 수많은 시위대가 군 본부와 가까운 광장들을 점거했다.

혁명으로 나아갈 잠재력을 실현하지 못한 2019년 수단 항쟁은 혁명적 당의 중요성을 보여 준 최근 사례다. 2019년 4월 하르툼의 군사 본부 인근을 점거한 시위대 ⓒ출처 Esam Idris

사람들은 광장에서 혁명 위원회를 설립했다. 목격담을 들어 보면, 당시 노동계급 권력이 탄생할 가능성이 생겨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항쟁 참가자들은 자본주의 국가에 맞서 싸우며 그 국가 없이도 스스로 사회를 운영하고 조직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좌파 신문도 아닌 〈파이낸셜 타임스〉가 이렇게 쓸 정도였다. “1917년 러시아에서 차르가 타도됐을 때 러시아의 분위기가 어땠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분명 2019년 4월 수단의 수도 하르툼과 같은 분위기였을 것이다.” 기업주들의 신문조차 당시의 수단을 두고 ‘혁명이란 이런 것일 테다’ 했던 것이다.

그리고 노동자들이 거기서 매우 중요한 구실을 했다.

당시 수단에 혁명적 당이 있었다면 이런 주장을 해야 했을 것이다. “우리들이 세운 혁명 위원회들을 보시오. 이제는 노동자 평의회를 세웁시다. 그렇게 해서, 생산을 장악해 군사 정권한테서 경제적 권력을 실제로 빼앗아오고, 사회를 운영하는 완전히 다른 방식에 관한 논의를 시작합시다.”

그러나 수단에는 혁명적 당이 없었다. 그 대신, 반란을 이끈 개혁주의 지도자들이 군부와 형편없는 합의를 했다. 물론 그래도 투쟁은 끝나지 않았다. 그러나 국가의 성격을 제대로 이해하고, 노동계급 자신이 스스로 해방되는 것이 핵심이며, 개혁주의 지도자들에 기대서는 이를 성취할 수 없음을 이해하는 혁명적 조직이 있었다면 사태는 완전히 다르게 흘러갔을 것이다.

21세기에도 왜 여전히 레닌주의 조직이 중요한지를 생생하게 보여 주는 사례다.

혁명적 당은 미리 준비돼야 한다

혁명적 당은 하루아침에 건설할 수 없다. 하루아침에 세워진 그런 당이 “여기 좀 봐 봐. 우리는 혁명적 당이야. 현 정세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어. 우리 지도를 따라 줘” 하고 선언해도 그 영향력은 결코 클 수가 없다.

레닌은 혁명이 일어나기 전에 볼셰비키 당을 건설했다. 볼셰비키 당은 수많은 전투를 통해 시험을 치르며 실수도 했지만 옳은 판단을 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광범한 노동자 운동과 당대에 벌어지던 운동들의 신뢰를 얻었다. 그래서 혁명이 일어났을 때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었다.

혁명적 당을 건설하는 과정은 결코 일방향적이지 않다. 노동계급의 자력 해방, 국가의 성격 등을 잘 이해하는 ‘똑똑이’ 집단이 리더십을 제공하기만 하는 그런 과정이 결코 아니라는 말이다. 혁명적 당은 노동계급 투쟁의 경험에서 배운다.

1905년과 1917년 러시아 혁명을 보자. 그 혁명에서 핵심적 구실을 했던 것은 ‘소비에트’라는 노동자 평의회였다. 소비에트는 레닌이나 볼셰비키가 머릿속에서 만들어 낸 것이 아니다. 소비에트는 노동자들이 투쟁을 조직하려고 자발적으로 만든 것이었다. 레닌은 소비에트의 중요성을 깨닫고는 이런 기구들이 혁명적 권력 기구가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처럼 혁명적 당과 노동계급의 관계는 일방적이거나 엘리트주의적이지 않다.

내가 속한 정당[사회주의노동자당]도 현재 벌어지는 광범한 투쟁들의 일부가 되려 한다. 그러면서도 그 투쟁들을 연결하고 체제에 반대하는 혁명적 방향을 가리키려 한다.

레닌주의 정당은 완제품이나 기성품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가 항상 옳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투쟁과 혁명의 승리 가능성을 높일 수 있는 혁명적 당이 되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이런저런 쟁점을 둘러싼 운동의 승리에 그치지 않고(물론 그 승리는 그 자체로도 중요하다), 인류를 재앙으로 몰고가는 시스템 전체를 제거하기 위해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