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바 저항, 왜 지지해야 하나 ― 배경과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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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는 7월 29일 노동자연대 온라인 토론회 ‘쿠바 저항, 왜 지지해야 하나?(영상 보기)’에서 발표했던 내용을 다듬고 보강한 것이다.
7월 11일 쿠바인들이 대규모 반정부 시위를 벌였다. 1959년 쿠바 혁명 이래 최대 규모 반정부 시위였다. 한 통계에 따르면, 전국적으로 40군데에서 시위가 벌어졌다. 물론 1994년에도 경제난에 항의하는 비교적 큰 시위가 일어났다. 당시 시위는 수도 아바나에서만 벌어져 신속하게 제압됐다.
쿠바 반정부 시위를 두고 각국 정부들이 엇갈린 반응을 보였다. 특히, 미국 정부와 쿠바 정부가 날 선 비난을 주고받았다. 미국은 압제를 중단하라고 쿠바 정부에 촉구했다. 쿠바 정부는 미국의 제재와 미국 내 반쿠바 인사들의 선동이 시위의 원인이라고 주장했다. 러시아·중국·북한 외무부는 쿠바 정부를 거든 반면, 유럽연합은 시위의 권리를 인정하라고 쿠바 정부에 촉구했다.
좌파들 사이에서도 입장이 갈렸다. 혐의 제기를 넘어 증거도 없이 일부는 미 중앙정보국(CIA)이나 쿠바계 우익 망명자들의 사주를 받는 시위라고 주장했고, 나머지는 침묵하거나 모호했다.
쿠바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이해하려면 다음 세 가지를 알아야 한다.
첫째, 미국 국가의 구실은 무엇인가?
둘째, 쿠바 사회의 성격은 무엇인가?
셋째, 시위가 왜 벌어졌고 시위에 누가 참가했는가?
미국 국가의 구실
미국 대통령 조 바이든은 “쿠바 국민을 지지한다”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쿠바인들은 용기 있게 [자유와 민주주의의] 근본적이고 보편적인 권리를 요구하고 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미국은 쿠바 관타나모 만에서 악명 높은 수용소를 운영하고 있다. 관타나모 수용소는 “지상의 지옥,” “죽음의 수용소군도”라고 불리는 곳이다.
바이든이 평범한 쿠바인들의 처지에 관심이 있다면 쿠바 봉쇄를 즉시 해제해야 할 것이다. 미국의 봉쇄와 제재는 수십 년 동안 평범한 쿠바인들에게 커다란 고통을 안겨 줬다. 미국의 금수 품목에는 의약품·식료품·석유·원자재 등이 포함돼 있다. 이로 인해 평범한 쿠바인들이 특히 고통을 받고 있다.
그러나 바이든은 트럼프가 강화한 쿠바 봉쇄를 유지하고 있다. 트럼프는 미국인의 쿠바 국영 호텔 숙박을 금지시키고, 금수 조치도 더 강화한 바 있다.
바이든 정부는 쿠바를 계속 테러지원국과 대테러 비협력국 명단에 올려 놓고 있다. 게다가 얼마 전에 제재를 추가했다. 미국 재무부는 쿠바 국방장관(알바로 라페스 미에라)과 쿠바 내무부 특수부대를 제재 명단에 올렸다. 바이든은 쿠바 제재를 일부 완화하겠다는 자신의 대선 공약을 지키지 않고 있다.
바이든 정부는 쿠바 송금 제재 완화를 검토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로이터〉는 그 검토가 아주 오래 걸릴 것이라고 보도했다.
사실, 쿠바 반정부 시위가 벌어지자마자 바이든 정부가 내놓은 최초의 구체적인 대응은 쿠바 난민의 미국 입국 불허였다. 알레한드로 마요르카스 국토안보부 장관은 쿠바인들이 바다를 건너 미국에 입국하는 것을 막겠다고 경고했다.
바이든은 “감염병 대유행의 비극에서 벗어나 자유를 얻고 싶어 하는” 쿠바인들을 지지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7월 초 쿠바의 코로나 하루 확진자가 7000명에 육박하고 백신 접종률은 26.7퍼센트에 그쳤는데도(옥스퍼드대학교의 통계 사이트 아워월드인데이터) 미국은 쿠바에 백신을 제공할 계획이 없다.
따라서 미국 정부가 쿠바의 반정부 시위를 지지한다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어서는 안 된다. 선의의 제국주의는 없다.
미국은 평범한 쿠바인들의 자유와 자결권에 관심이 없다. 미국은 1890년대 말에 쿠바를 침략해 식민지로 만들었다. 그때 악명 높은 관타나모 해군 기지가 설치됐다. 1950년대까지 미국 은행과 기업들이 쿠바 경제를 대부분 차지했다(광산의 90퍼센트, 공공시설의 80퍼센트, 철도의 50퍼센트, 설탕 생산의 40퍼센트, 은행 예금의 25퍼센트).
미국은 이런 수탈을 위해 쿠바 독재자 풀헨시오 바티스타를 후원했다. 바티스타는 1940년대와 1950년대에 쿠바를 경찰 국가로 만들었다.
쿠바는 사회주의 사회인가?
미겔 디아스-카넬 쿠바 대통령은 최근 시위를 “혁명에 반하는 체계적 도발”로 규정했다. 과연 그런가? 이 물음에 답변하려면 쿠바 혁명과 그 결과로 수립된 쿠바 국가의 성격을 알아야 한다.
쿠바 혁명과 카스트로 정부 수립은 아주 잘 알려진 중요한 사건이자 국제 좌파들 사이에서 논란이 큰 사안이었다.
새롭게 급진화하는 청년들이 쿠바에서 영감을 얻곤 했다. 예컨대, 1960년대 서구에서 급진화하는 청년들은 쿠바 혁명에 매료됐다.
2000년대 초 팔레스타인의 2차 인티파다(봉기)와 미국의 ‘테러와의 전쟁’ 시기에 새롭게 급진화한 청년들도 쿠바에 관심을 가졌다. 그 무렵 체 게바라의 젊은 시절을 다룬 영화 〈모터싸이클 다이어리〉가 큰 인기를 끌기도 했다. 미국 플로리다 해안가에서 비행기로 1시간 거리에 있는 작은 섬나라(인구 1120만 명)가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서 학살을 저지르는 자들에 오랫동안 맞서 왔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베네수엘라에서 우고 차베스가 ‘볼리바르 혁명’과 ‘21세기 사회주의’를 추진할 때도 쿠바가 다시 조명됐다.
한국에서도 1980년대에 급진화한 청년들 일부가 《들어라 양키들아》 같은 쿠바 혁명을 다룬 책을 읽으며 혁명의 영감을 얻으려 했다.
쿠바 혁명이 제국주의에 맞서는 데에 커다란 영감을 준 것은 맞다. 그러나 우리는 쿠바 혁명의 정확한 성격과 쿠바의 정확한 역사에 대해서도 알아야 한다.
바티스타 정권 시절 미국 기업, 갱단, 지주, 극소수의 대통령 주변 인물이 사탕수수 농장, 도박업, 관광업, 매춘 등으로 엄청난 부를 쌓았다. 그러나 쿠바 노동계급과 빈민을 비롯해 쿠바 사회의 나머지는 전혀 부를 나눠 갖지 못했고, 제국주의 세력과 독재 정부의 억압으로 크게 고통받았다.
피델 카스트로는 중간계급에 기반한 재야세력을 대변했다. 특히, 도시의 중간계급 지식인들은 제국주의가 쿠바의 발전을 지체시킨다고 보고 미국의 지배에 맞섰다. 1956년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 등 82명의 전사가 그란마 호를 타고 멕시코에서 쿠바로 건너가 게릴라전을 시작했다. 82명의 유격 전사는 모두 중간계급 소속이었다.
1959년 1월 바티스타 정권이 전복됐다. 미국은 쿠바 혁명으로 지정학적으로 큰 타격을 입었다. 그래서 미국은 쿠바의 새 정부를 전복하려고 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피그스 만 침공이었다. 1961년 4월 CIA가 훈련시킨 1500명의 쿠바 망명자가 카스트로 정권을 전복하려고 쿠바에 상륙했다. 그러나 처참하게 실패했다. 100여 명이 사살되고, 1000여 명이 체포됐다.
반면, 평범한 쿠바인들에게 쿠바 혁명은 진보였다. 새 정부는 대중의 지지를 받았다. 피그스 만 침공이 완전한 재앙으로 끝난 것도 대중이 카스트로를 지지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대중의 삶은 혁명으로 향상됐다. 1950년대 아동 취학률은 56퍼센트였는데 1980년대에는 100퍼센트로 증가했다. 기대수명은 1950년대 61세에서 1980년대 74세로 늘어났다.
그러나 쿠바 혁명은 사회주의 혁명은 아니었다. 미국 제국주의와 그에 협력하는 현지 독재 정권에 맞선 반제국주의 민족해방 혁명이었다.(이 점에서 진보적인 대사건이었던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혁명의 성격을 붉게 색칠해 주는 것은 그릇된 일이다.)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사회주의 혁명을 노동계급이 자체의 민주적 기관들을 통해 권력을 잡은 뒤 아래로부터 사회를 운영하기 시작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따라서 그 사회에는 사장·은행가·지주가 필요 없다.
카스트로와 그의 조직 ‘7월 26일 운동’의 전략과 강령은 전혀 사회주의적이지 않았다.(‘7월 26일 운동’이라는 이름은 1953년 7월 26일 피델 카스트로가 주도해 몬카다 병영을 습격한 사건에서 딴 것이다. 습격은 실패로 끝났고 카스트로는 수감됐고 그 뒤 멕시코로 망명했다.)
쿠바 혁명 과정에서 전략을 둘러싼 정치적 논쟁이 있었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핵심 쟁점은 “시에라”와 “야노” 사이에 있었다. 시에라는 산맥이라는 뜻으로, 마에스트라 산맥에 있던 카스트로의 게릴라 부대를 가리켰다. 야노는 평야 또는 도시라는 뜻으로, 주요 도시에 있는 쿠바 노동자와 학생의 광범한 운동을 가리켰다.
논쟁의 핵심은 야노와 시에라 중 어디가 투쟁의 중심인가였다. 다시 말해, 누가 반정부 운동을 지도해야 하는가 하는 논쟁이었다. 이런 논쟁에는 권력을 장악했을 때 등장하게 될 사회의 씨앗이 반드시 들어 있기 마련이다.
요컨대, 사회 변화의 진정한 동력이 어디에 있는가 하는 문제가 쟁점이었다.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는 게릴라 군대를 변화의 핵심 수단으로 봤다. 사회운동은 게릴라들을 지원하는 구실만 하는 것으로 돼 있었다. 게바라는 도시의 정치를 개혁주의와 동일한 것으로 여겼고, 게릴라들의 전투와 혁명을 같은 것으로 생각했다.(그럼에도 마에스트라 게릴라 투쟁 시기에 게바라와 카스트로 사이에 정치적 차이가 있었는데, 게바라는 혁명을 옹호한 반면, 카스트로는 자유주의적 성격의 사회 개혁을 지향했다.)
그러나 1950년대 쿠바에는 상당 규모의 노동자 운동이 있었다. 소수의 노동계급 투사들이 바티스타 정권과 그에 협조하던 노조 관료에 맞서 비공인 파업을 조직했다. 노동계급 투사들은 지하 신문을 발행하고, 혁명적 노동자 대회를 조직했다.
특히, 1959년 1월 1일 총파업이 쿠바 혁명의 승리를 굳히는 구실을 했다. 이 총파업은 카스트로의 요청에 부응한 것이었다.
그러나 결국에는 게릴라 전략이 노동자·학생의 대중 행동보다 우위를 차지했다. 노동계급이 스스로 권력을 잡은 것이 아니라 게릴라들이 대중을 대신해 권력을 잡은 것이다.
이제 소수 혁명가들이 쿠바의 새로운 지배자가 됐다. 그러나 노동계급은 새 사회에서 아무런 권력을 갖지 못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하고 의아해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역사에서 이런 모순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가령 영국과 프랑스의 부르주아지는 봉건 왕정에 맞서 혁명을 일으켰다. 역사적으로 진보적인 구실을 하던 바로 그 상황에서 부르주아지는 동시에 끔찍하게 야만적인 짓도 저질렀다. 부르주아지는 인클로저를 통해 농민을 토지에서 무자비하게 내쫓아 도시 빈민과 부랑인으로 만들었다.
우리는 카스트로가 세운 체제에 대해 있는 그대로 정직하게 말해야 한다.
쿠바 혁명은 냉전 시기에 일어났다. 미국과 소련 사이에 제국주의적 경쟁이 치열했다. 소련은 사회주의 사회를 자처했지만, 실제로는 전면적(관료적) 국가자본주의 사회였다. 국가 관료가 지배계급이었고, 노동계급은 생산수단을 통제하지 못하고 사회 운영을 결정할 수 없었다. 스탈린주의 관료는 서방과의 경쟁, 특히 군사적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노동계급을 국가를 통해 착취했다.
쿠바는 미국 제국주의의 공격에 직면하자 점점 소련의 영향권에 들어갔다. 쿠바 지배 관료의 입장에서 보면, 냉전 상황에서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를 통해 쿠바는 사회주의가 아니라 국가자본주의 사회로 나아간 것이었다. 우선순위는 인간의 필요가 아니라 자본 축적의 필요에 종속됐다. 이는 자본주의 사회의 특징이지, 사회주의 사회의 특징이 아니다.
저항은 왜 일어났고, 누가 참가했는가?
그때 이래 반세기 동안 미국의 봉쇄와 제재가 쿠바 노동계급을 타격했다. 그러나 쿠바 대중의 고통은 단지 미국의 제재 때문이 아니다. 쿠바 국가 관료가 선택한 결정도 크게 관계있다.
특히, 소련이 붕괴하자 쿠바 관료는 경제를 서방에 개방했다. 그리고 복지를 삭감했다. ‘전면 무상’ 정책은 ‘소규모 자영업 육성 정책’으로 대체됐다. 민영화(사영화)를 통해 해외 자본과 협력했다. 특히 관광업 유관 분야 181개를 민영화했다. 관광업에 대한 의존이 다시 크게 증대했다. 이것이 쿠바 정부가 선포한 “평시 특별 기간”의 대책들이었다.
쿠바 관료의 이런 대응은 북한 관료가 핵무기를 개발해 미국의 압박에 대응하는 것과는 차이가 있었다. 국제적으로 좌파들이 쿠바에 관심을 갖는 이유의 하나일 것이다.
그러나 쿠바 정부의 “평시 특별 기간” 대책들은 불평등을 심화시키며 대중의 불만을 키웠다. 한 시위 참가자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집도 없고 아무것도 없지만, 정부는 호텔 지을 돈도 있고 우리를 굶주리게 합니다.”
이런 불만이 물가 폭등과 코로나 팬데믹으로 더욱 고조됐다. 게다가 연초에 단행한 화폐 개혁으로 물가는 더 치솟았다. 앞으로 몇 달 안에 쿠바 물가가 500퍼센트에서 900퍼센트까지 오를 것이라는 예측마저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오랫동안 쿠바 자부심의 원천이던 공중보건 시스템도 심각한 위기다. 그 결과, 소련 붕괴 직후처럼 식량 배급 줄이 길게 늘어서고 기본 의약품조차 구할 수 없는 상황이 됐다.
이것이 가난한 쿠바인들의 삶을 강타하고 정부에 대한 불만을 자극했다. 콜롬비아·남아공 등 다른 제3세계 나라들에서 벌어지는 최근의 저항과 본질적으로 다를 바 없는 생존형 반정부 시위다.
일각에서는 시위대의 일부가 “공산주의의 종식,” “독재 타도,” “자유”를 외쳤다며 의심의 눈초리로 본다. 1980년대 우리 나라도 그랬지만, 일당 국가 하에서는 경제적 불만에서 비롯한 투쟁이 흔히 정치화하는 경향이 있다. 또, 지배계급과 국가가 사회주의, 공산주의 운운하고 국가 공식 이데올로기로 내세우는 상황에서 적잖은 시위대가 “공산주의”나 “사회주의”를 불신하는 것도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옛 소련에서도 강제수용소 위에서 펄럭이던 붉은 깃발을 본 적이 있는 노동자들에게 적기는 억압의 상징이었지, 해방의 상징이 아니었다.
물론 미국은 쿠바 시위에서 자국의 목적에 이용할 수 있는 요소를 찾으려 할 것이다. 실제로 쿠바 정부를 반대하는 우익 반동 세력도 있지만 아주 소수다. 따라서 쿠바 시위대를 그저 CIA나 우익 마이애미 망명자들의 보병 취급하는 것은 매우 나쁜 설명이다.
신뢰할 만한 현지 관측에 따르면, 쿠바 반정부 시위 참가자의 대다수는 쿠바 노동계급과 빈민이다. 그리고 성소수자 운동, 흑인 쿠바인에 대한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사람들, 반정부 좌파 그룹들도 참가했다. 쿠바 정부는 성소수자를 탄압해 왔고, 흑인 쿠바인은 백인 쿠바인보다 소득이 더 적다. 정부 고위직에도 흑인이 거의 없다.
따라서 미국이 지지를 표했다는 이유로 쿠바 시위를 친미 시위로 곡해해서는 안 된다.
그런 식이면 1987년 6월 항쟁도 친미 시위가 될 것이다. 1987년 6월 19일 주한 미 대사 제임스 릴리가 전두환을 만나 레이건의 친서를 전달했다. 그날 전두환 정권 내부에서는 군 병력 출동 문제가 긴박하게 논의되고 있었다. 레이건의 친서에는 정치범 석방, 권력을 남용해 탄압한 관리 처벌, 자유 언론 신장 등을 요구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레이건은 한국의 시위 상황을 지켜본 뒤 ‘민주화 쪽으로 방향을 틀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6월 항쟁이 미국의 영향력에 좌우된 친미 시위인가? 아니다. 6월 항쟁은 반독재 민주주의 운동이었다.
박근혜 탄핵과 관련한 미국의 태도도 또 다른 사례가 될 것이다. 2017년 3월 헌법재판소가 박근혜 탄핵을 결정하자 미국 국무부는 “한국 국민과 민주적 기관[의] … 결정을 존중한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해서 박근혜 정권 퇴진 운동이 친미 운동이 되는 것은 아니다.
사려 깊은 좌파라면, 기성 체제에 반대하는 운동이 처음에는 뒤죽박죽이고 모순으로 가득할 수 있음을 이해할 것이다.
최근 사례로 2018∼2019년 프랑스를 흔든 노란 조끼 운동이 그런 경우였다. 노동자, 실업자, 영세 자영업자, 연금 생활자, 학생들이 유류세 인상에 반대해 도로 봉쇄 투쟁을 했다. 이 운동은 빈곤·저임금·불평등 문제를 정치적 초점으로 만들었다.
그런데 당시 극우파가 노란 조끼 운동을 이끌고 있다는 오해가 많았다.(신나치 정당의 지지 성명이 한몫했다.) 프랑스노동총동맹(CGT) 지도부는 극우와 함께 행진하고 싶지 않다며, 대체로 효과가 없던 행동의 날 집회를 따로 잡았다.
물론 노란 조끼 운동 안에 극우가 있었지만, 그와 동시에 그 운동은 내부에서 의식적으로 파시스트들을 솎아 내고 있었다. 무엇보다, 투쟁을 통해 노란 조끼 운동의 전반적 추세는 왼쪽을 향했다.
결론을 말하면, 우리는 미국의 제재와 개입을 반대한다. 그러나 미국 제국주의에 반대한다며 쿠바 정권을 편들 것이 아니라 평범한 쿠바인들의 자발성과 염원을 지지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