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영찬 노동사회과학연구소 연구위원장의:
스탈린주의 복고를 위한 애처로운 헛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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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소련이 붕괴한 지 30년이 되는 해다. 당시 소련은 심각한 위기에 빠져 있었고, 위기 대응 방향에 대한 이견으로 지배 관료 간의 쟁투가 격화됐다. 1991년 8월 보수파(특히 강경파인 소유즈 그룹)가 고르바초프를 납치하고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러나 쿠데타는 사흘 만에 실패했고, 이후 소련의 해체가 급속히 진행됐다.
그러나 1991년에 무너진 소련은 사회주의 사회였을까? 그렇다면, 1991년 소련에서는 한 생산양식에서 다른 생산양식으로의 전환, 즉 사회주의가 무너지고 자본주의가 되살아나는 퇴행이 일어난 것일 테다.
소련이 무너질 때 노동자 다수는 그 체제를 지키려고 하지 않았다. 소련 사회가 사회주의였다면, 노동자들은 그 사회를 방어하는 게 그들에게 득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소련 노동자들은 무너지는 소련 체제를 그냥 내버려 뒀고, 동정하지 않았다. 사회의 의사 결정에 관해 자신들에게 아무런 권한이 주어지지 않고, 경제력이 세계 2위이면서도 자신들에게 비누 하나 제대로 지급하지 못하는1 스탈린주의 체제에 미련을 갖지 않았던 것이다. 비록 이후 실험해 본 시장 지향적 ‘개혁’에 실망을 넘어 환멸을 느끼게 됐지만 말이다.
반면 소련의 지배계급(국가 관료)은 1991년 이후 시장 경제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대부분 민간 자본가 계급으로 변신하면서 자신의 사회적 특권과 지위를 유지했다. 국영기업 경영자는 민영화로 사기업 사장이 됐다. “가장 많은 사람들을 조사한 자료 하나를 보면, 공산당 노멘클라투라의 80퍼센트가 새로운 러시아에서 최고위급이나 그 바로 아래 자리로 이동했다.”2 1991년 소련에서 정말 사회주의에서 자본주의로의 복고나 회귀가 일어났다면, 기존 지배층은 다른 사회 세력으로 대거 교체됐을 것이다. 그러나 기존 지배층이 소련 해체 이후에도 사회를 지배했다는 것은 당시 소련에서 체제의 성격이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았음을 뜻한다.
그런데 문영찬 노동사회과학연구소 연구위원장(이하 존칭 생략)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소련이 사회주의 사회였다고 보면서, 소련을 관료적 국가자본주의로 규정한 토니 클리프를 맹렬히 비판했다. ‘20세기 사회주의의 역사적 성격’이라는 연재의 14번째 글에서 그는 이렇게 주장했다.
“토니 클리프의 쏘련 국가자본주의론은 이론이라기보다는 사실의 왜곡에 기초한 악선동 모음집에 지나지 않는다. … 이제는 쏘련 붕괴의 영향을 극복하고 20세기 사회주의의 역사적 성과를 옹호하며, 20세기 사회주의의 역사를 21세기의 새로운 사회주의 혁명을 위한 자산으로 전환시켜야 할 때이다.”3
과연 소련이 사회주의 사회였고, 토니 클리프의 주장은 그저 소련에 대한 악선동에 불과할까? 물론 소련이 사회주의 사회였다는 주장은 상식에 부합한다. 그러나 상식이 곧 진실은 아니다. 상식에 기댈 거면, 굳이 우리가 과학과 이론을 추구할 까닭도 없을 것이다.
이 글은 소련이 사회주의 사회가 아니라 자본주의의 한 변형태인 관료적 국가자본주의 사회였다는 토니 클리프의 주장이 옳았음을 보여 주려는 것이다. 그리고 문영찬이 펴는 변호론은 그 자체로 여러 이론적 결함과 오류를 내포하고 있다.
혁명과 반혁명
많은 사람들이 1917년에서 1991년까지 소련의 역사를 연속적인 것으로 여긴다. 즉, 1917년 10월 혁명으로 탄생한 사회가 그 본질적 성격을 오랫동안 유지했다가 1991년에 무너졌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레닌에서 스탈린까지 볼셰비즘의 정치 전통과 권력도 이어졌다고 보게 된다. 다만, 자유주의자들은 스탈린의 공포정치가 1917년 10월 ‘쿠데타’와 레닌의 ‘권위주의’에서 비롯했다고 주장하는 반면, 문영찬을 비롯한 스탈린주의자들은 이를 거꾸로 세운 주장을 한다.
문영찬은 옛 소련이 1917~1991년 내내 자본주의보다 우월한 사회였다고 보므로 레닌과 스탈린의 ‘연속성’을 보며 그 사회를 다룬다.
그러나 1920년대 말을 전후로 한 실제 소련의 역사는 연속적이지 않고 불연속적이었다.
1917년 러시아에서는 진정한 노동자 혁명이 일어났다. 1917년 2월 혁명으로 러시아 차르 체제가 붕괴했다. 모든 가능성이 활짝 열렸고, 러시아 사회는 엄청나게 급진화·좌경화했다. 곳곳에서 노동조합, 공장위원회, 적위대 같은 노동자 조직이 생겨났다. 무엇보다 소비에트, 즉 노동자·병사·농민 평의회가 등장해 러시아 전역으로 확산됐다.
반면 임시정부는 전쟁을 끝내지 않았고, 노동자에게 식료품을 배급하지도 못했으며, 농민에게 토지를 주겠다는 약속도 계속 저버리고 있었다. 자유주의자와 온건 사회주의자로 이뤄진 임시정부는 자신의 정당성을 스스로 약화시켰다.
결국 10월에 소비에트가 무장 봉기로 임시정부를 전복하고 정치 권력을 장악했다. 역사상 처음으로 노동자가 권력을 장악한 것이다. 현장에 특파된 미국 언론인 존 리드는 당시 분위기를 이렇게 전했다. “러시아는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으로 정신없이 빠져들었지만 … 도시의 삶은 갈수록 즐거워졌고 혁명 자체도 빠르게 확산됐다.”
그러나 이후 러시아 혁명은 내우외환으로 점차 변질됐다. 혁명 러시아가 존속하려면 특히 혁명의 국제적 확산이 절실히 필요했다. 그러나 1918~1923년 진행된 독일 혁명을 비롯한 국제 혁명은 끝내 실패했다. 러시아는 국제적으로 고립됐다.
설상가상으로 서방 열강의 침공과 국내 반혁명 세력의 준동으로 내전이 일어났다. 혁명 러시아는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분투했지만, 사회적·경제적 붕괴를 피할 도리가 없었다. 예컨대, 1917년 페트로그라드에는 공장 노동자가 40만 명이 있었지만 1921년 무렵에는 그 가운데 5만 명만이 남아 있었다. 최상의 혁명 투사들이 내전에서 승리하기 위해 수도를 떠난 것이다. 그리고 당과 국가 기구는 점차 관료화됐다.
고립된 신생 노동자 국가는 장기적으로 세계 자본주의의 경제적·군사적 압력에 어떻게 대처할 수 있었을까?
“한 가지 해결책은 군사적 준비를 하는 동시에 혁명의 확산을 계속 지원하며 국제 혁명에 의지하는 것이었다. … 그러나 국제 혁명이라는 가장 중요한 요인을 포기한다면, 소련의 생존은 오로지 군사적 방어에 달려 있을 것이다. 그러면 소련은 전통적인 군사적 위협에 전통적 방식으로 대응하는 전통적 국가처럼 행동해야 할 것이었다.”4
그 과정에서 스탈린이 이끈 관료층이 성장했다. 생의 마지막에 레닌은 이런 경향의 발전을 우려하며 투쟁했다. 이것이 이른바 ‘레닌의 마지막 투쟁’이었다. 특히, 스탈린이 레닌의 핵심 표적이었다. 레닌은 스탈린을 서기장에서 해임하라고 유언장에 남길 만큼 그를 혁명에 해악적인 존재로 여겼다.(이 당시의 레닌 글들은 《레닌의 반 스딸린 투쟁》[신평론, 1989]에 실려 있다.)
1923년 11월 독일 혁명이 결국 무산되고 1924년 레닌이 사망한 후 스탈린이 지도한 소련 관료(집합명사)는 정권의 이데올로기적 전망을 변경했다. 즉, 국제 혁명을 포기하고 일국사회주의론을 채택한 것이다. 1925년 소련 공산당 대회는 이전의 주장을 뒤집고 “일반적으로 사회주의의 승리는 한 나라에서 무조건 가능하다”는 내용을 결의하기에 이른다.
문영찬은 연재의 다른 글에서 스탈린의 일국사회주의론이 레닌의 주장을 계승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사실 일국 사회주의론이라 불리는 쓰딸린의 이러한 관점은 쓰딸린의 고유한 것이 아니라, 레닌이 10월 혁명을 전후하여 밝혔던 견해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다.”5
이는 사실이 아니다. 문영찬은 레닌의 글 ‘유럽 합중국 슬로건에 대하여’를 일국사회주의론의 사례로 드는데, 그 글에 “일국에서 사회주의[의 승리]가 불가능하다는 잘못된 해석”이라는 구절이 있지만, “레닌은 이 구절의 바로 다음 문장에서 자본주의의 불균등 발전 때문에 혁명은 한두 나라에서 먼저 시작해 나머지 나라들로 확산될 것이라는 전망을 제시한다. 그리고 이 문맥에서 ‘사회주의[의 승리]’라는 용어는 노동자 국가 수립을 뜻하고, ‘일국사회주의’ 비판자들에 대한 맞비판은 세계 합중국을 위한 동시다발 혁명에 대한 비판으로 독해해야 한다. 당시에는 국제 혁명을 동시다발 혁명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았다.”6
스탈린이 일국사회주의론을 천명하기 전까지 한 나라에서 무계급 사회로서 사회주의를 성취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서구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물론이고 레닌을 비롯한 러시아 마르크스주의자들 사이에서도 공리(公理)였다. 레닌은 생애 내내 자본주의는 세계적 체제이므로 노동자 혁명이 국제적으로 확산돼 사회주의가 세계적 차원에서 실현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우리의 혁명이 고립된다면 결국 승리할 가망이 없다는 것은 불 보듯 뻔하다”고 했다. 1918년 7차 당대회에서는 러시아 혁명이 세계 노동계급 혁명으로 전환되는 것만이 혁명을 수호하는 유일한 보장책이라는 결의안이 통과됐다.
그러나 소련의 신흥 관료층이 보기에 신생 국가 소련을 ‘위험에 빠뜨릴 수 있는’ 국제 혁명보다 일국사회주의론이 ‘현실적’ 정치 노선이었다. 소련 사회의 진보가 관료 자신들의 기량과 능력에 달려 있다는 ─ 그래서 국가·당 관료의 이니셔티브를 정당화하는 ─ 일국사회주의론이 그들에게 확실히 더 매력적이었다.
일국사회주의론의 대두는 단지 이데올로기의 변화만을 의미하지 않았다. 일국사회주의론은 국제 공산주의 운동을 소련 국가의 이익에 종속시키는 것도 의미했다. 그리고 일단 정권이 국제 혁명에 기대를 걸지 않는다면 이제 선택지는 다른 자본주의 국가들처럼 군사력을 키워 강대국이 되는 것이었다.
곧 결정적 전환점이 찾아왔다. 1927년 영국이 소련과 외교 관계를 단절하며 전쟁 위협을 가했고, 국내에서는 농민이 도시에 식량 공급을 중단하면서 위기가 닥쳤다. 이런 안팎의 위기에 직면한 소련 관료는 두 위기가 가하는 압박에 끼여서 통제권을 상실할까 봐 두려웠다.
이런 상황에서 그들은 기존의 신경제정책(NEP)에 허점이 있음을 깨달았다. 군사적 방위를 위해서는 중공업 기반을 빠르게 구축해야 했는데, 당시의 완만한 경제 성장으로는 도저히 그 과제를 이룰 수 없었던 것이다.
문영찬도 대외적 조건 등으로 스탈린이 급속한 공업화, 농업 집단화 정책을 추구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7 그러나 그는 (1928년부터 진행된) 농업 집단화와 1·2차 5개년계획에 몇몇 오류와 한계가 있었지만 이로써 사회주의 생산관계가 완성돼 “쏘련[이] 국내적으로 사회주의의 승리를 선언하는 것을 가능하게 했다”고 주장한다.8 그러나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인 고故 김수행 교수는 이를 전혀 다르게 평가했다. 다소 길지만 인용할 만하다.
“레닌이 1924년 죽은 뒤에 스탈린이 추진한 ‘사회주의 건설기’(1925~1936년)에는 두 번의 5개년계획(1928~1932년, 1933~1937년)과 농업집단화(1927년 결의, 1928년 개시, 1930년 결정적 강화, 1934년 거의 완료)를 실시했습니다. 정부는 소농(소규모 자영농민)으로부터 일체의 생산수단을 빼앗아 그들을 임금노동자로 전환시켰는데, 이것은 《자본론》에서 말하는 자본주의로 가는 이행기에 필수불가결한 ‘자본의 시초축적primitive accumulation of capital’의 전형입니다. 그리고 정부는 농·공업 부문에서 착취한 잉여가치를 주로 중공업부문의 자본으로 전환함으로써, 자본주의적 착취와 축적을 통해 대공업을 건설하기 시작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볼셰비키의 당내투쟁이라는 형태로 진행된 스탈린파 노멘클라투라에 의한 국가권력의 찬탈은 1932년 전후의 위기를 견뎌내면서 완료되어, ‘노동자·농민의 국가’는 ‘소비에트(평의회)’라는 이름을 참칭하는 ‘노멘클라투라의 국가’로 최종적으로 전환하였습니다. 이리하여 1917년의 정치혁명에서 보였던 사회주의적 지향은 1930년대 초에 사라지고, 사실상 자본주의가 들어선 것입니다.”9
스탈린 치하 소련의 경제 발전은 세계 자본주의 체제의 전복이 아니라 그 틀 안에서의 성공을 목적으로 했다. 그래서 소련 공업 투자의 80퍼센트 이상이 중공업에 집중됐다. 1920년대 중반까지는 경제의 원동력이 대중의 필요를 총족하기 위한 재화 생산이었지만, 1928년 이후로는 완전히 뒤집혀 버린 것이다. 사람들이 먹고 입을 소비수단의 생산은 생산수단의 생산에 체계적으로 종속됐다. 군수산업이 경제를 선도했고, 군사적 경쟁이 급속한 경제 성장의 전반적 양상과 전략적 우선순위도 결정했다.
1928~1929년 강제 집단농장화, 강압적 공업화 이후 소련 경제는 분명 급속히 성장했다. 그러나 경제적 후진국이었던 소련이 선진국들을 단기간에 따라잡으려면 노동자·농민을 극단적으로 쥐어짜야 했다. 영국에서 300년 걸린 일을 스탈린은 20년 만에 끝내려 했으니 그 쥐어짜기가 얼마나 심했을까. “계획의 완수는 산업 노동자와 농촌 주민의 생활수준과 노동조건을 매우 잔혹하게 공격하는 것에 달려 있었다. … 이것은 빈곤과 기아를 조장하는 계획이었다.”10 이를 달성하는 방법은 오직 국가의 강압을 사용하는 것뿐이었다.
스탈린이 주도한 ‘위로부터 혁명’은 소련의 사회관계를 완전히 바꿔 놓았다.
스탈린에게 이견을 제시할 만한 사람들은 당과 국가의 상층과 기층 모두에서 제거됐다. 레닌 생전의 마지막 정치국원 모두가 (스웨덴 주재 소련 대사였던 알렉산드라 콜론타이를 제외하고) 스탈린 치하에서 살해됐다. 문영찬은 1930년대 스탈린이 벌인 대숙청이 “대중들의 비판을 기초로 관료주의자들을 걸러 내는 방식”이었다고 주장한다.11 그러나 스탈린 시대의 공포정치는 결코 1917년 혁명의 전통에서 비롯한 것이 아니었다. 도리어 자본 축적을 위해 제도와 정신, 사람 모두에서 혁명적 전통을 파괴하는 구실을 했다.
1930년대 공포정치의 효과 하나는 스탈린 중심의 권력을 강화하고 그에 대한 도전과 이견이 일절 허용되지 않는 사회적 분위기를 만든 것이었다. 당시 검찰총장 안드레이 비신스키(1917년 7월 사태 때 레닌에게 체포영장을 발부한 임시정부 실무자였다. “저항하면 사살해도 좋다”는 단서와 함께.)는 이렇게 떠들었다. “과거의 마지막 찌꺼기와 쓰레기가 깨끗이 치워진 길 위에서 우리 인민은 경애하는 스승이자 지도자인 위대한 스탈린을 따라 공산주의를 향해 쉼 없이 전진할 것이다.”
권력 강화와 자본 축적을 뒷받침하기 위한 스탈린의 공포정치로 1917년 이전부터 형성돼 1917년 10월 혁명을 이끈 한 세대의 혁명가들이 완전히 말살됐다. 당시 공포정치 수준은 처형 규모만 봐도 알 수 있다. 정권이 규정한 명백한 정치범죄 혐의로 처형된 사람만 해도 79만 명에 이르렀다. 볼셰비즘과 스탈린주의 사이에는 트로츠키의 말 그대로 “피의 강물”이 흘렀다.
볼셰비키 선임 당원뿐 아니라 기층 노동자와 농민도 스탈린 반혁명의 희생자가 됐다. 정치적 테러도 중요했지만, 공포정치의 진정한 핵심은 사회적 테러였다. 스탈린 정권은 광범한 계층의 주민들에게 잔인한 폭력을 휘둘렀고 수많은 사람들을 엄청나고 극심한 착취와 억압에 종속시켰다.
“테러와 탄압의 사회적 기능을 보면 스탈린의 형벌 제도가 겉보기에 불합리하고 분별없고 동기가 모호했던 이유를 알 수 있다. 사회적 수단인 테러는 협소하게 특정 개인들을 겨냥할 수 없었다. 그것은 폭력적 변화의 수단이었고, 수많은 사람들의 생활·노동 조건에 영향을 미쳤고, [강제 노동 수용소] 재소자 수백만 명의 노예노동까지 포함한 최악의 사회적 억압 형태를 강요했다.”12
중공업과 군비 증강에 우선순위가 놓이는 바람에 대중의 생활 조건은 악화됐다. “1933년은 유사 이래 평화시에 진행된 생활수준의 가장 급격한 하락이 그 정점에 도달한 해”였다. “대규모 참상과 굶주림”의 여파가 소련의 인구 변동으로 드러날 정도였다.13
문영찬은 ‘사회주의적 원시 축적’을 제안한 경제학자 예브게니 프레오브라젠스키가 농민을 수탈해 공업화를 하자고 주장했지만 “스딸린은 농민을 수탈하여 공업화의 재원을 마련한 것이 아니었다”고 주장한다. 스탈린 정권의 농업 집단화 과정에 일부 관료주의적 오류가 있었다고 덧붙이지만 말이다.
그러나 1929년 스탈린에게 투항하기 전 프레오브라젠스키가 처음에 주장한 것은 농민에게 폭력을 사용해 강제 집산화하자는 것이 아니었다. 내전과 신경제정책 시기에 해체되다시피 하고 힘이 약화된 노동계급을 성장·강화시키려면 공업화가 필요한데, 그 공업화를 위해 부등가 교환 방식으로 농촌의 잉여를 도시로 가져오는 방안을 제안했던 것이다. 이는 당시 해외에서 공업화 재원을 끌어오기가 불가능한 상황에서 나온 방안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건설된 공업으로 값싼 공산품에 대한 농민의 수요를 충족시키고 농민 소득을 비롯한 전체 소득 수준도 높일 수 있으리라고 기대했다.(물론 그의 제안이 실제로 성공했을지는 불확실했고, 그의 예상과 다른 상황이 펼쳐졌을 수도 있다.) 무엇보다, 국제 혁명에 기대를 걸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 애쓰는 것이 이 제안의 전제였다.
반면 스탈린은 농민의 의사에 반해 강제로 토지를 집산화했다. 강력한 억압 조치를 동원해 급속히 추진한 집산화 과정에서 부농, 중농, 빈농을 가리지 않고 농민의 엄청난 희생이 뒤따랐다.(부농은 실제로는 극소수였다.) 또, 강제 집산화의 여파로 끔찍한 기근이 닥쳐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됐다.
스탈린 정권은 강제 집산화로 더 많은 곡물을 확보해 도시에 식량을 공급했을 뿐 아니라 곡물 수출도 늘려 그 수익으로 서방에서 플랜트와 기계설비를 수입할 수 있었다. 1928~1931년 해외 시장에서 소련의 곡물 판매는 56배나 증가했다.14 그리고 집산화 과정에서 많은 농민이 도시로 이주하게 돼 도시에 새로운 노동력이 대거 공급됐다. 모스크바의 산업 노동자들은 1928년 18만 6500명에서 1932년 43만 3900명으로 늘었다. 단기간에 이뤄진 이런 대규모 이촌향도는 국가의 억압 없이는 불가능했다.15
노동자들도 스탈린의 ‘혁명’에 희생됐다. 경영자의 권력이 강화되고 노동법이 노동자들에게 가혹하게 바뀌었다. 이른바 “사회주의적 경쟁”이라는 미명 하에 성과급 도입, 스타하노프 운동 등으로 착취가 강화됐다.
문영찬은 이런 사실들에 대해 전혀 다르게 주장했다. 예컨대 그는 소련에서 임금이 “관료적인 조정”으로만 결정되지 않고 “노조의 의견을 반영하여 결정”됐다고 한다. 그리고 “노조는 파업권을 비롯한 권리를 보유하고 있었고, 이에 따라 임금과 단체 협상에서 상당한 발언권을 가질 수 있었다.”16
그러나 실제 현실은 이와 달랐다. “[스탈린 시절에] 노동조합에서는 오랫동안 선거 비슷한 것조차 없었으며, 전조합적 규모의 노동조합대회는 1932~1949년 내내 한 번도 소집되지 못했다. … 노동조합 중앙부는 사실상 정부의 한 부서가 되어 버렸다.”17
노동조합의 진짜 임무는 노동자 착취를 지원하는 것이었다. 이는 다음과 같은 노조 규약에 명시돼 있었다. “노동조합의 주요 임무는 대중의 주도력과 참여를 고무하고 장려해서 경제력을 강화하고 계획을 초과 달성하고 비축 자원을 동원하고 노동자들의 물질적·문화적 수준을 높이는 것이다.” 스탈린 사후에 심지어 소련 노동조합 중앙평의회 의장을 보안경찰인 KGB 국가보안위원회 위원장 출신인 알렉산드르 셸레핀이 맡은 적도 있다.18
문영찬은 스탈린이 실시한 제1차 5개년계획으로 노동자 임금이 5년 동안 100퍼센트 증가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명목임금이 늘었더라도 높은 인플레이션, 형편없는 배급제, 소비재 부족 등이 그런 효과를 상쇄하고도 남았다. 실질임금은 오르지 않고 대폭 떨어졌고, 노동자들의 생활 수준은 크게 후퇴했다. 알렉 노브는 1928년을 기준 연도로 했을 때(즉, 1928년=100) 1932년의 물가지수는 255, 평균임금은 226으로 올랐다는 당시 조사 결과를 인용했다. “이에 근거하면 [1932년의] 실질임금 지수는 88.6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미 보았듯이 1932년에 자유시장 가격은 훨씬 더 빨리 올랐었다. 그러므로 … 정확한 실질임금 지수는 88.6을 훨씬 밑돌 것이다.”19
더 많은 연구들은 제1차 5개년계획 동안 실질임금이 반토막이 났다고 지적한다. “인플레이션을 감안하지 않는다면 제1차5개년계획 마지막 해의 대폭 인상으로 임금은 1차계획 기간 동안 거의 두 배 올랐다. 그러나 물가가 4배 올랐기 때문에 노동자의 실질임금은 절반으로 떨어졌다. 이 수치는 그 기간의 실질임금에 관한 여러 연구들과 일치한다.”20
문영찬은 노동자 간의 ‘사회주의적 경쟁’이 “상호 간[의] 동지적 경쟁”이라고 강변한다.21 성과급 도입 등을 통한 경쟁 유도가 “동지적 경쟁”이라고? 성과급은 생산을 늘리고 노동자끼리 서로 경쟁하게 만들려는 사용자의 전통적 방식이다. 이는 노동자들이 사용자에 맞서 단결하기보다 원자화되도록 부추기고 임금 수준도 전반적으로 낮출 수 있게 해 준다.
스탈린은 성과급 도입 외에 스타하노프 운동도 벌였다. 이는 경쟁과 착취를 강화하는 효과를 냈다. “1935년 말에 있었던 스타하노프 운동의 시작은 뒤이어 모든 산업에서 생산 기준량의 변화를 가져왔다. 새로운 기준은 평균적인 노동자의 생산량에 따라 결정된 것이 아니라 ‘스타하노프상을 받은 노동자들의 생산량을 다른 노동자들의 평균치와 합산해 평균을 내’서 결정됐다.”22 작업량과 속도가 높아지는 데 분노한 노동자들은 스타하노프상을 받은 노동자들을 증오했고 심지어 살해하기도 했다. 이것이 바로 문영찬이 동지 간에 자극과 협력을 나타냈다고 한 소위 ‘사회주의적 경쟁’의 실상이었다.
1928년 이후의 소련은 1917년 혁명 때와는 완전히 다른 사회였다. 스탈린 이래 소련 지배자들은 레닌을 신격화했지만, 정작 레닌을 다룬 저작의 출판은 엄격히 제한했다. 공산당 간부들도 레닌을 잘 몰랐다. “공산당 지도자들로 말하자면 … 내가 아는 지도자들의 다수는 ‘당이 요구하는 최소한의 수준’ 외에는 레닌의 글을 결코 읽지 않았다.”23 ‘사회주의’를 표방하고 ‘레닌주의’를 계승했다는 정권이 혁명의 기억을 조작하고 레닌을 비롯한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저작에 대한 자유로운 열람과 토론과 탐구를 막았다는 점은 그들의 공식 선전과 다르게 1917년 혁명과 분명한 단절이 있었음을 시사한다.
1927~1928년 반혁명으로 스탈린이 재편한 소련 사회는 서방 자본주의와 본질이 다르지 않은 (관료적) 국가자본주의 사회였다. 물론 관료적 국가자본주의는 미국과 서유럽의 자본주의와 그 형태가 달랐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형태상의 차이(사기업이 거의 없음, 중앙 ‘계획’경제, 낮은 대외무역 수준 등)만을 보고 소련이 서방 자본주의와는 질적으로 다른 사회였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여기서 핵심 물음은 그 국가와 생산수단을 누가 통제하느냐다. 노동자인가 아니면 다른 사회 집단인가? 소련 노동자들은 국가를 전혀 통제하지 못했다. 국가와 생산수단은 모두 노동자와 유리된 사회집단인 관료의 수중에 있었다.
사실 국가가 경제에 적극 개입하고 생산을 책임지는 것은 20세기 중반 자본주의의 추세였다. 이런 국가자본주의 경향은 1930년대 대불황에 의해 가속돼 1970년대까지 세계 자본주의의 유력한 경향이었던 것이다. 특히, 남한 같은 후발 국가들은 미약한 민간 자본들을 대신해 국가가 자본 축적 과정을 진두지휘했다. 따라서 옛 소련을 비롯한 동구권의 국유 경제 체제는 1930~1970년대 세계 자본주의의 추세 속에서 유별난 게 아니라 그저 극단적(전면화된) 형태였을 뿐이다.
가치법칙과 소련
문영찬은 세계 자본주의와의 연관성 속에 소련 사회에 가치법칙이 결국 관철된다는 토니 클리프의 주장을 비판하며, 가치법칙이 자본주의의 근본 법칙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는 이렇게 썼다.
“가치법칙은 상품의 등가교환을 규정하는 법칙이고 가치법칙이 관철된다는 것은 그 사회가 상품생산 사회라는 것을 가리킨다. 그런데 상품생산은 노예제 사회에도, 봉건제 사회에도 부분적으로 존재했었다. 그러면 가치법칙은 이들 사회와 자본주의 사회의 공통점을 가리키는 것이지, 자본주의의 고유한 특성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24
그래서 문영찬은 소련 사회에서 가치법칙이 부분적으로 관철된다고 해서 소련 사회가 자본주의임을 입증하는 건 아니라고 한다.
그러나 이는 가치법칙을 유통 과정에서 비로소 적용되는 것으로 보는 관점인데, 마르크스·엥겔스의 이론과 전혀 맞지 않는다. 그들은 가치법칙이 자본주의를 다른 모든 경제체제와 구별해 주며, 가치법칙에서 다른 모든 자본주의 법칙들이 파생된다고 봤다. 따라서 진정한 사회주의 사회에서는 가치법칙이 적용되지 않는다. 엥겔스는 가치법칙이 사회주의에 적용된다는 듀링의 생각을 비판하며 이렇게 썼다. “그때에는 사람들이 이름 높은 가치의 신세를 지지 않고도 이 모든 것을 매우 간단하게 해 나갈 것이다.”25
문영찬은 자본주의의 “규정적 동력”은 “이윤 추구를 통한 자본의 축적 욕망”26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 욕망은 어디서 비롯한 것일까? 그리고 이 욕망은 자본주의 이전 사회의 지배자들, 예컨대 봉건 영주들의 욕망과 어떻게 다른 것일까? 가치법칙을 자본주의의 구성적 법칙으로 인정하지 않는 문영찬이 이를 어떻게 설명할지 자못 궁금하다.
자본주의의 주된 동역학은 경쟁적 축적이 개개의 자본에 외적 강제 법칙으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이런 경쟁 압력 때문에 개별 자본가들은 노동생산성을 증대시키려고 지속적으로 노력해야 한다.
노동생산성이 증가한다는 것은 상품을 생산하는 데 들어가는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이 줄어든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사회적 필요노동시간에 견줘 덜 효율적인 생산자의 추가 노동은 가치를 창출하지 못한다. 따라서 가치법칙은 서로 다른 활동들 사이에 노동이 배분되고, 비효율적 생산자들이 불리해지는 과정을 반영한다.
경쟁 때문에 자본가들은 자본주의 생산의 내재적 법칙을 외부적 강제로 느낄 수밖에 없다. 자본가는 끊임없이 이윤을 재투자하지 않을 수 없고, 이렇게 축적하지 않는 자본가는 경쟁에서 밀려나기 십상이다. 따라서 자본주의적 경쟁은 자본들이 생산 효율을 서로 비교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가치법칙 때문에 자본가들은 다른 자본들과의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노동자들을 더욱 착취해야만 한다. 따라서 “가치법칙 자체가 착취를 설명하는 것은 아니다”라며 가치법칙과 착취를 분리시키려는 문영찬의 주장은 잘못됐다.
그리고 가치법칙의 압력을 반영해 자본가들은 자기 기업 내부에서 생산을 계획한다. 따라서 가치법칙은 개별 기업과 국가의 관료적 통제나 계획과 상충하지 않는다.
19세기 말, 자본의 집적과 집중으로 대기업들이 등장했다. 자본이 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클수록 그 자본이 가격에 미치는 영향력도 커진다. 즉, 가격과 가치가 필연적으로 조응하지 않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또한 대기업들은 시장 진입 장벽을 높이거나 비시장적 방법(국가 관료와의 유착, 유통망 독점 등)으로 잠재적 경쟁자들을 물리치려 했다. 특히 국가의 경제 개입이 중요해졌다. 국가는 경제 성장을 위해 또는 대기업 파산으로 인한 경제 붕괴를 막기 위해 경제에 개입했다. 국가 개입 덕분에 대기업들은 경쟁 압력을 덜 받고, 운신의 폭이 어느 정도 넓어졌다. 국가 개입은 가치법칙의 작용에 영향을 줬다. 국가 개입으로 가치법칙이 부분적으로 변형된 것이다.
그러나 독과점이나 국가 개입 등으로 서방 자본주의에서 가치법칙이 부분적으로 변형되긴 했지만, 법칙 자체가 폐기된 것은 아니었다. 경쟁의 형태가 변한 것이지, 자본주의적 경쟁 자체가 사라진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는 소련 경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문영찬은 소련에서 (진정한) 계획 경제가 실현됐다고 본다. 그가 보기에, “[소련 같은] 사회주의 사회에서 경제의 참된 조절자는 가치법칙이 아니라 프롤레타리아 국가의 ‘계획’”이었다. “쏘련에서 경제 계획은 단순한 관료적인 지령이 아니”며 소련의 계획은 민주적이었고 각 부문과 영역의 균형 발전을 도모했다고 한다.27
그러나 외부의 경쟁(특히 군사적) 압력과 무관하게 소련 관료들이 계획을 세울 수 있었을까? 서방 자본주의에서 가치법칙이 기업(또는 국가) 내부에 계획을 강요한 것과 마찬가지로, 소련 관료들도 세계적 수준의 가치법칙 때문에 소련 내부에 계획을 강요했다.
많은 사람들이 자본주의 국가들의 군사적 경쟁을 자본주의적 경쟁이 아닌 것으로 여긴다. 그러나 이는 정치와 경제를 분리시키는 잘못된 관점이다. 국가를 지배하는 자들은 군사적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경제력이, 따라서 노동생산성이 경쟁국보다 뒤처지는 것을 막으려 애쓰게 된다. 경쟁국이 노동자들에 대한 착취율을 높여 더 많은 잉여를 투자할 것이므로 자신들도 마찬가지로 착취율을 높여야 한다. 경쟁국들이 항상 신규 기계설비류와 기술혁신에 투자하므로 자신들도 그렇게 해야만 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그 나라의 구체적 노동이 세계적 수준의 추상 노동과 연관을 맺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자본주의 하에서는 군사적 경쟁을 통해서도 생산성 향상을 위해 각국 내부의 노동과정을 재편해야 한다는 압력이 끊임없이 형성된다. 마치 경제적 경쟁이 각 기업 내부의 혁신을 추동하는 것처럼 말이다. 19세기 제정 러시아가 군사 경쟁에서 영국·프랑스 등에 뒤처지자(1853~1856년 크림전쟁 패배) 뒤늦게 자본주의를 육성하려고 애를 썼다는 점을 상기해 보라. 마찬가지로, 세계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여러 해 동안 군사적 압력을 받으며 서방 강대국들과 경쟁해 온 소련은 국내의 노동과정과 생산관계를 변화시킬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소련의 ‘계획’은 언제나 외부 압력에 따라 사후적으로 계속 수정돼야 했다. 자본주의 경쟁의 역동성으로 말미암아 경쟁 압력의 수위가 계속 바뀌었기 때문이다.
1937년 스탈린에게 충성하는 한 소련 경제학자는 이렇게 지적했다.
“선진 자본주의 나라들의 기술적·경제적 수준을 따라잡고 앞질러야 한다는 과제는 결코 모종의 고정된 목표를 달성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 목표 자체가 역동적이다. 자본주의의 전반적 위기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 나라들의 경제는 결코 완전히 정체 상태에 있지 않다.”28
소련 관료들은 외부의 역동적인 경쟁 압력에 대응해 경제 목표를 세워야 했고, 그에 따른 문제가 잇따랐다. 따라서 소련을 비롯한 동구권 사회에서 진정한 의미의 ‘계획’은 결코 존재하지 않았다. 지배 관료의 정책적 고려에서 우선순위는 군사 경쟁에서 살아남고 이기는 것이었을 뿐이다. 이 때문에 소련 경제는 세계적 수준의 가치법칙에 종속됐다.
문영찬은 소련에서 “경제 공황”은 없었고 소련 경제의 “불협화음, 불균형”은 대수로운 일이 아니었다고 치부한다.29 과연 그랬을까? 그러나 “제1차부터 시작하여 쏘련 해체 전까지” 5개년계획들이 진행되면서 큰 부침 없이 성장을 지속했다는 것은 순전히 착각이다.
경쟁적 축적 논리는 소련에서 낭비, 비효율, 성장의 불균형을 낳았다. 소련에서도 서방과 마찬가지로 경쟁 압력 때문에 경제 성장기에 가용 자원을 넘어서는 수준으로 생산을 확대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면 경제 전반에서 병목 현상이 나타나고 과잉생산 위기를 막기 위해 국가가 나서서 사후적으로 계획을 수정해야 했다. 이때마다 항상 타격을 받는 것은 소비재 생산 계획이었다.
이처럼 소비를 희생시켜 투자를 확대하는 일이 반복되고, 앞서 언급했듯이 경제의 불균형도 심화됐다. 소련 총생산물 중 소비로 가는 비중이 1928년에 60.5퍼센트였는데, 1940년에는 39퍼센트, 1985년에는 불과 25퍼센트였다.
소련 국가자본주의도 모든 자본주의 경제가 겪는 고전적 문제에 직면했다. 즉, 축적 과정에서 노동력보다 총투자가 더 빨리 증가함에 따라 축적 자체가 축적을 잠식하는 경향을 보인 것이다. 소련에서 자본 대비 산출 비율은 1951~55년 2.4에서 1956~60년 1.6으로, 1961~65년 1.3으로 계속 하락했다. 즉, 신규 생산물 한 단위를 생산하는 데 필요한 불변자본의 양이 계속 증가했다.
그래서 소련에서 투자한 루블당 산업 생산량의 연평균 증가율은 1951~1955년 6.4퍼센트, 1956~1960년 5.1퍼센트, 1961~1965년 4.7퍼센트로 감소했다. 1985년 국민생산 대비 투자율은 적어도 1965년만큼 높았지만, 산업 성장률은 50~60퍼센트 감소했다.
즉, 소련도 불황을 피할 길이 없었다. 1991년 이전에 이미 소련 경제는 만성적인 성장 정체로 인한 심각한 위기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위기가 1991년 소련 붕괴의 가장 주요한 요인이었음은 물론이다.
1985년에 집권한 고르바초프가 페레스트로이카(경제 구조조정)를 추진한 것 자체가 소련 경제의 만성적 정체와 위기를 반영한다. 즉, 지배 관료 다수가 경제 위기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위로부터의 ‘개혁’으로 그동안 소련 경제에 누적된 모순과 정체를 타파하려고 했던 것이다. 비록 그 시도가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소련 관료는 지배계급이 아니었는가?
문영찬은 소련의 당·국가 관료가 지배계급이었다는 토니 클리프의 주장에 반대하며, “계급은 생산수단에 대한 소유 여부에 의해 규정”되고 따라서 “관료는 생산수단의 소유자가 아니라 단지 관리자에 지나지 않[았다]” 하고 주장한다.30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산수단을 지배하는 사람들이 자본가 계급이다. 그런데 주의할 점은 생산수단의 지배를 그것의 법률적 소유 여부로 규정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김수행 교수의 지적을 언급할 만하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생산수단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된 임금노동자들이 생산과정에서 생산수단을 타인의 것, 자본가의 것으로 상대하며, 여기에서 법적 관점에서 보면 ‘자본주의적 사적 소유’는 개개의 자본가가 각각 사적으로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있다는 의미를 가지지만, 본질적 관점에서 보면 ‘자본주의적 사적 소유’는 자본가계급이 생산수단을 노동자계급으로부터 분리하여 독점하고 있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어느 사회가 자본주의인가 아닌가를 판단할 때는 ‘사적 소유’ 또는 ‘국가 소유’라는 표층의 ‘법적 표현’을 볼 것이 아니라, 표층의 배후에 있는 생산의 심층에서 누가 생산수단을 노동하는 개인들로부터 분리하여 독점하고 있느냐 아니냐, 노동하는 개인들이 생산수단에 대해 타인의 것으로 상대하고 있느냐 아니냐, 그리고 생산수단이 노동하는 개인들을 지배·착취하고 있느냐 아니냐를 보아야만 합니다.”31
마르크스도 계급이 법률적 소유 여부라는 형식적 개념이 아니라 생산관계에서 차지하는 위치에 따라 결정된다고 봤다. 계급은 생산과 착취에 대한 관계 때문에 다른 인간 집단에 맞서 함께 집단적으로 행동할 수밖에 없는 인간 집단이다.32
역사를 돌아보면, 유사한 유형의 착취적 생산관계들이 상이한 소유 형태들과 공존할 수 있었다. 예컨대 중세 유럽 가톨릭교회는 광대한 면적의 토지를 소유했고 수많은 농민이 교회의 토지를 경작했지만, 주교나 추기경 등은 개인적으로 토지를 소유하지 않았다. 그러나 생산관계 때문에 교회의 농민도 영주의 농노와 마찬가지로 착취당했다. 교회와 농민의 관계는 봉건 영주와 농노의 관계와 똑같이 봉건적 생산관계였고, 따라서 교회는 봉건적이었다.
계급에 대한 이런 이해는 현대 자본주의의 지배계급을 이해하는 데도 필요하다. 예컨대 오늘날에는 기업에 고용된 사장, 즉 전문 경영자가 많다. 그런데 생산수단을 소유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들을 자본가 계급의 일부로 보지 않는 것은 오류다. ‘고용된’ 경영자가 자본 축적의 대리인인 한 그들은 자본가이고, 자본 소유자와 마찬가지로 이윤 논리에 따라 노동자들을 쥐어짠다.33
반면 문영찬은 이렇게 주장한다. “자본주의 기업에서도 공장과 기업을 운영하는 많은 경영자 혹은 관리자들이 있지만 그들은 단지 경영 전문가일 따름이며, 그들은 공장과 기업을 실질적으로 소유하는 자본가에 의해 조정되고 움직여지는 존재일 뿐이다.”34
문영찬이 말한 “관리자” 중에는 신중간계급에 해당하는 사람들도 많겠으나, 그중 기업 최상층에서 전략적 통제권을 행사하는 최고 경영자는 분명 신중간계급과 구분되는 자본가 계급의 일원이다. 오늘날 굴지의 다국적기업들을 보면 이른바 오너 경영보다 전문 경영인 체제인 곳이 훨씬 많다. 그 경영자들은 주식 ‘개미’들보다는 기관 투자자들의 이익에 더 잘 반응하며, 생산수단에 대한 통제권을 이용해 오너 경영자 못지않게 노동자들을 착취한다. 문영찬은 소련 지배 관료가 지배계급이 아니라며 사적 소유와의 차이를 강조하다 보니 서구 사회의 계급 분석에서도 잘못된 판단을 하고 있는 것이다.
소련은 서방 못지않게 사회적 불평등이 심한 사회였다. 관료들은 지위에 걸맞게 노동자들에 견줘 수십 배의 소득을 얻을 수 있었다. 서방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지배계급 성원들의 소득을 정확히 계산하기는 어렵지만, 한 조사를 보면 소련에서 가장 가난한 가구 10퍼센트가 전체 소득에서 3.4퍼센트를 차지한 반면 상위 10퍼센트의 가구가 24.1퍼센트를 차지했다. 이런 격차는 1970년대 말 이후 더 벌어졌다. 1960년 전체 소매 매출의 3분의 1은 일반 대중이 이용할 수 없는 특별 상점에서 이뤄졌다.35
권력이 있으면 얼마든지 특권을 누릴 수 있었다. 보리스 옐친은 자서전에서 소련 공산당 정치국원들이 어떤 특권을 누렸는지를 보여 줬다. 그들은 전용 식당에서 최고급 요리사들이 만든 음식을 먹었고, 가사도우미가 있는 넓은 집에서 살았다. 정치국원들은 정원, 테니스코트, 당구장, 개인 극장까지 갖춘 별장에서 주말을 보냈다. 정치국원과 그 가족들은 개인 비행기도 이용할 수 있었다.36 그러나 이것은 단지 개인적 일탈이 아니라, 체계적으로 구조화된 불평등과 특권의 산물이었다.
지배 관료의 이런 특권은 그들이 국가와 생산수단을 지배하는 데서 비롯했다. 지배 관료는 축적 과정을 통제하는 국가자본가가 된 반면, 노동자와 농민은 가차없는 축적 압력에 종속됐다. 이것이 소련에서 지배계급 권력의 객관적 토대였다.
자녀에게 상속도 못하는 관료가 무슨 지배계급이냐고 반문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문영찬도 그렇게 생각하는 듯하다. 그러나 오늘날 서구 자본주의 사회에서 국가 부문의 경제를 보면, 얘기가 사뭇 달라진다. 공기업에서는 당연히 법률상의 사적 소유가 없다. 그래서 공기업은 어떤 개인에게 상속되지도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공기업에서 계급 지배와 착취가 없는 게 아니다. 서구 자본주의의 국가 관료와 공기업 경영자들은 기업을 소유하지는 않지만 분명히 자본 축적 과정을 통제한다.
또, 서구 사회에서 지배계급 사람들은 직접적 상속 외에도 특권적 교육 등을 이용해 자기 자녀에게 노동자 자녀들은 꿈도 못 꿀 기회를 제공한다. 소련도 본질적으로 마찬가지였다. 소련에서 지배계급의 재생산은 상속보다는 더 광범한 공식·비공식 사회제도에 의지했다.
문영찬은 1928년 스탈린주의 변혁으로 1인 경영이 확립된 것은 과거 레닌이 공장장 1인 체제를 주장한 것과 본질적으로 같은 것이라고 주장한다.37 그러나 이는 맥락과 목적의 차이를 무시한 주장이다. 러시아 내전 때는 생산의 붕괴와 혼란상이 정말 심각했다. 이로 인한 산업의 완전한 붕괴를 막기 위해 레닌은 불가피하게 1인 경영을 강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레닌은 경영 전문가들이 노동자들, 노동조합, 소비에트 정부의 압력에 복종해야 한다는 점도 강조했다. “‘경영’을 자본가에게 맡기더라도 오직 관리 기능만을 맡겨야 한다. 작업장의 노동조건은 소비에트 권력이 결정해야 한다. 소비에트 권력이 노동조건을 폐기하거나 수정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내전 이후 레닌이 소련이 ‘관료적으로 일그러진 노동자국가’라면서 노동조합이 국가에서 독립적으로 노동자들의 권리를 옹호하는 것을 지지했다는 점도 생각해 봐야 한다.
반면 스탈린은 국가자본주의 반혁명을 추진하면서 기업에서 트로이카 체제(당세포, 노동자 공장위원회, 전문경영자)를 더는 용인할 수 없었다. 자본 축적 드라이브에 노동자들을 종속시키는 데 방해가 됐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때 확립된 ‘1인 경영’은 공장의 완전하고 유일한 책임자로서 경영자의 무제한 통제권을 확립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스탈린의 측근인 미하일 카가노비치는 이렇게 말했다. “공장장이 공장에 들어오면 땅이 흔들릴 정도여야 한다.” 즉, 공장의 모든 피고용인들은 공장장에게 복종해야 한다. 이런 1인 경영이 서구 기업 내부의 관료적 독재와 본질적으로 뭐가 다른가?
소련에 노동 시장이 존재했는가?
문영찬은 토니 클리프가 “노동력이 상품이라면 반드시 있어야 할 노동 시장의 존재에 대해 침묵을 지킨다”면서38 이렇게 주장했다. “쏘련에 노동 시장이 존재했다는 것이 입증된다면, 쏘련이 자본주의 사회라는 것은 입증되게 된다.” 그런데 노동시장의 존재가 확인되지 않았으니 소련이 자본주의 사회임이 입증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문영찬의 지적대로 자본주의와 임금노동은 불가분의 관계다. 봉건제나 노예제 사회 같은 전자본주의 사회와는 구분되는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고유한 특징(경쟁, 기술 혁신, 상대적 잉여가치 생산 등) 때문에 자본주의에는 임금노동이 필수적이다.
노예나 농노 등과 달리, 임금노동만이 경쟁이 개별 기업에 강요하는 끊임없는 노동과정의 혁신에 적합한 노동력을 제공할 수 있다. 임금노동을 통한 잉여가치 추출은 노예나 농노를 일하게 만든 물리적 강제가 아니라, 경제적 강제에 주로 의존한다. 그래서 임금 형태, 임금률 등은 노동자들이 일을 더 열심히, 더 잘하려고 애쓰는 직접적 동기로 작용한다.
그래서 노동시장을 통해 노동력은 자본의 필요에 따라 경제 전체에 배분된다. 임금률의 편차는 상이한 부문에서 노동자의 수요·공급 상의 변화를 나타내며, 기술 변화나 경기 변동에 따라 실업이 발생해 산업예비군이 형성된다.
그렇다면, 소련에서 노동력은 상품이었고 노동 시장이 존재했을까? 결론부터 밝히자면 그렇다. 처음에 토니 클리프는 소련에서는 고용주가 한 명(국가)밖에 없으니 노동자의 “주인 바꾸기”가 불가능하다고 봤다. 그러나 이는 소련을 하나의 공장으로 여기고 노동시장의 자유화 정도를 과소평가한 것이었다. 클리프가 《소련 국가자본주의》39를 집필하던 1947년 당시 입수할 수 있는 정보의 한계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후 알렉스 캘리니코스 등이 이를 바로잡았다.40 일단 소련은 하나의 공장이 아니었다. 국민 경제에서 상이한 생산 과정들이 접합된 체제였다. 따라서 경제의 상이한 부문과 영역에 노동력이 적절히 배분되는 게 중요했다. 그런데 이것이 단순한 지령이나 강압에 의해 처리됐다면 소련의 노동자는 사실상 노예나 농노와 다를 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노예 노동으로 미국을 비롯한 서방과 노동생산성 경쟁을 벌이는 것은 불가능했다. 스탈린 시대에 강제 노동이 많이 늘었지만, 소련에서는 단 한 순간도 강제 노동이 임금노동보다 주된 노동 형태였던 적이 없다.
소련의 지배 관료도 서방 자본가처럼, 노동자에게 열심히 일하라고 독려하고 설득해야 했다. 이를 위해 성과급 같은 인센티브 제도도 도입됐다. 소련 노동자들은 정치적 권리가 극도로 제약당했지만 ‘자유’ 노동자로서 이직이 가능했다. 상이한 소련 관료들은 자기 부문에서 가능한 한 많은 노동력과 자원을 확보하려고 했다. 주로 중앙에서 생산량 증대를 요구할 것에 대비해서 그랬다. 이런 상황은 노동자들의 높은 이직률에 영향을 줬다. 노동자들은 이직을 통해 조금이라도 유리한 조건을 확보하려고 했다.
따라서 노동자들이 기업을 옮겨다닐 수 있고, 기업 책임자들이 인센티브를 통해 노동력을 붙잡아 두려고 하면서 소련에서 고도로 발전된 노동 시장이 창출됐다. 알렉 노브는 이런 과정이 이미 국가의 강압이 두드러진 제1차 5개년계획 기간에도 작용하고 있었다고 설명했다.
“이런 상황에서 시장 압력(즉, 상이한 종류의 노동에 대한 수요와 공급)은 두 가지 방식으로 상대적 소득에 영향을 미쳤다. 첫째, 그것은 정부의 결정에 영향을 미쳤다. 따라서 만일 주어진 임금률로 기계공, 목수, 광원, 컴퓨터기사나 혹은 북극권에 기꺼이 일하려는 사람이 충분히 없다면 공식적인 소득 등급은 공급 반응을 확보하기 위해 변경될 수 있다(그리고 종종 변경된다). 둘째, 공식 등급은 잘 변경되지 않고 현지 사정에 맞지 않을 수도 있으므로, 기업 관리자들은 공식 등급을 피해 나가는 방법들을 찾으려고 한다.”41
이처럼 소련의 임금과 그 편차는 자의적으로 결정되지 않았다. ‘계획’되기는 했지만 임금은 현실의 수요·공급을 반영했고 경제 전반에 노동력을 배분하는 구실을 했다. 이것은 바로 자본주의 경제에서 임금의 전형적 기능이다.
물론 소련 노동자들이 무제한으로 이직할 수는 없었다. 법적 제약이 분명 존재했고, 앞서 언급했듯이 소련의 기업 경영자들은 대체로 당장 실적이 저조해도 훗날 생산을 늘려야 할 것에 대비해 대량 해고보다는 불안정하나마 고용을 유지하는 것을 선호했다.
그러나 당대에 서방의 대다수 나라에서도 완벽한 노동시장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았고, 모두 국가와 기업의 필요에 따라 제약됐다. 제2차세계대전 종전 후의 호황기에 일본, 서독 등 많은 선진국에서 대기업 노동자들의 이직률은 매우 낮았다. 자본가들은 호황기에 숙련 노동자들을 붙잡아 둬야 했다. 일본 대기업의 ‘평생 고용’이나 여타 서방 대기업들의 각종 복리후생은 그런 배경 속에서 제공된 것이었다. 따라서 문영찬이 말한 “철밥통” 노동자가 그저 소련에만 존재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노동시장은 자본주의 경제 부침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소련에서는 사실상 완전고용 상태를 유지했지만, 실업이 없는 건 아니었다. 그리고 소련 경제가 가라앉으면서 실업은 더는 감출 수 없는 문제가 됐다. 고르바초프의 최고 경제 자문이었던 아벨 아간베기얀은 1965년 주요 도시의 실업률이 8퍼센트였고 소도시의 실업률은 20~30퍼센트였다고 지적한 바 있다.
왜곡과 오류
문영찬의 글에는 터무니없는 왜곡과 오류가 너무 많다. 단지 토니 클리프를 비판한 부분뿐 아니라, 그의 연재 기사 전체에서 많이 발견할 수 있다. 일일이 다 지적하고 반박하는 것은 시간과 노력의 낭비일 뿐이지만, 몇 가지는 짚고 넘어가야겠다.
우선, 트로츠키주의자들이 나치와 결탁했다는 비방이다.42 문영찬은 트로츠키주의자들이 이 때문에 “궤멸적 타격을 받았고 역사에서 소멸될 위기”에 처하자 토니 클리프가 소련 국가자본주의론을 내놓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나치와의 결탁’ 운운은 스탈린 정권이 트로츠키를 비롯한 반대파에게 가한 대표적인 중상모략이었다. 1936~38년 모스크바 재판에서 스탈린 정권은 트로츠키가 히틀러와 손잡고 소련을 전복하려는 음모를 꾸몄다는 터무니없는 거짓말을 했다. 재판에 나온 피고인들(볼셰비키 선임 당원들)이 그 음모가 사실이라고 ‘인정’했지만, 이는 스탈린 정권의 회유와 강압에 따른 거짓 자백이었을 뿐이다. 그리고 실상 재판에서 제출된 증거는 이런 ‘자백’ 외에는 없었다.
트로츠키가 히틀러와 거래했다는 중상은 스탈린주의 반혁명으로 불만에 찬 소련 노동자들과 트로츠키파가 연결되는 것을 차단하려는 목적이 있었다. 그리고 모스크바 재판과 그 전후로 진행된 대숙청은 한 세대의 혁명가들을 절멸시켰고, 트로츠키와 그 가족 구성원 대부분의 목숨도 빼앗았다.
1937년 미국의 유명한 철학자이자 교육학자인 존 듀이를 위원장으로 하는 조사위원회가 구성됐다. 이 조사위원회는 수차례의 청문회 끝에 트로츠키에 대한 중상이 근거 없다는 평결을 내렸다. “모든 증거를 바탕으로 … 우리는 1936년 8월과 1937년 1월의 [모스크바] 재판은 조작된 것이었음을 발견했다. … 우리는 레온 트로츠키와 레온 세도프가 무죄임을 선언한다.”
정작 나치와 ‘결탁’한 것은 스탈린 자신이었다. 1939년 스탈린은 히틀러와 독소불가침조약을 체결했다. 뒤이어 나치는 폴란드를 침공해 서부를 점령하고 소련은 동부를 점령했다. 소련은 독일과의 무역협정에 따라 석유·철강·텅스텐 등 전략 물자를 나치 정권에 넘겨 줬을 뿐 아니라, 심지어 나치의 탄압을 피해 소련으로 도망쳐 온 독일과 오스트리아 공산당원 800여 명도 히틀러에게 넘겨 줬다. 소련과 독일의 조약 체결을 보며 당시 유럽 좌파들은 혼란에 빠지고 사기저하했다. 그런데 2년 뒤 나치의 소련 침공으로 스탈린은 히틀러한테 제대로 뒤통수를 맞았다.
둘째, 트로츠키주의가 농민을 “반혁명적 세력”으로 본다는 문영찬의 주장도 마찬가지로 터무니없는 억지다. 이는 ‘트로츠키가 농민을 과소평가했다’는 스탈린 정권의 거짓 선전을 거의 그대로 이어받은 주장이다.
1917년 이전에 트로츠키는 러시아에서 노동자와 농민의 동맹 문제를 소홀히 다루지 않았다. 농민 반란은 러시아에서 거대한 힘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농촌을 도시에 종속시켰고, 이는 혁명 운동에도 적용됐다. 러시아에서도 농민은 부농, 중농, 빈농 등으로 분화돼 있었다. 게다가 개인주의적 토지 분할을 목적으로 하는 농민 반란은 자신의 독립적인 정치 강령을 만들 수 없었다. 트로츠키는 농민을 노동자 혁명의 편에 서게 하려면 노동계급이 자신의 계급투쟁 방식으로 결연하게 지배계급에 맞서 투쟁해야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면 농민들은 부르주아지가 아니라 프롤레타리아를 지지하게 될 것이다.
‘농민의 지지를 받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트로츠키의 공식은 1917년 러시아 혁명에서 실천의 검증을 거쳐 올바름이 입증됐다. 농민 정당인 사회혁명당 지도자들은 임시정부의 기반인 부르주아지와의 동맹을 중시하면서, 자신의 강령을 실천하는 것을 주저했다. 그 바람에 사회혁명당은 좌우로 분열해 버렸고, 좌파 사회혁명당과 토지를 원한 농민들은 볼셰비키를 지지하게 됐다.
농민이라는 사회집단이 사회주의 세력은 아니라는 것은 혁명적 마르크스주의 전통에서 트로츠키만의 생각이 아니었다. 마르크스는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에서 농민의 원자화된 특징(“자루 속의 감자”)을 강조하며, 혁명 운동에서 농민은 도시의 양대 계급(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 가운데 어느 한 계급의 주도성과 지도력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다.43
레닌의 견해도 마찬가지였다. 그도 농민을 여러 계층으로 분화된 집단으로 이해했고, 그래서 1917년 ‘4월 테제’에서 빈농 대표 소비에트를 따로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17년 이전에 레닌은 러시아 사회에서 농민의 비중이 너무 커서 혁명이 부르주아적이고 민주주의적인 한계를 뛰어넘지 못할 것이라고 봤지만, 1917년에는 ‘노동계급과 농민의 혁명적 민주주의 독재’라는 자신의 정식이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라고 인정했다. “이렇게 해서 레닌이 주장한 전략과 일찍부터 혁명의 ‘지도적’ 역할은 노동자계급에 속하는 것으로 생각해 온 트로츠키의 일관된 사상 사이에 새로운 화해가 이루어졌다.”44
마지막으로, 토니 클리프가 소련을 국가자본주의라고 비난한 것은 “영국인이었던 토니 클리프[가] … 영국 제국주의의의 이익에 충실히 복무”한 것이라는 문영찬의 주장도 무지와 왜곡의 소치다. 영국 제국주의는 팔레스타인 사람인 토니 클리프에게 시민권조차 허용하지 않아서 클리프는 평생 국적 없이 살았다(마르크스도 그랬다). 이는 위키피디아 검색만으로도 간단히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이다. 클리프는 1917년 영국 식민지였던 팔레스타인에서 태어났고, 제2차세계대전이 시작됐을 때 영국의 전쟁 노력에 반대하는 투쟁을 벌이다 식민 당국에 의해 투옥된 바 있다. 종전 후 영국으로 이주했으나 당시 노동당 정부는 클리프를 아일랜드로 추방해 버려서 한동안 이산가족으로 지내야 했다.
‘영국 제국주의에 복무’ 운운은 클리프의 이후 정치적 실천과도 전혀 맞지 않는다. 그는 일찌감치 “워싱턴도 모스크바도 아니다”를 모토로 내걸었는데, 언제나 이 구호에서 순서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서방의 혁명적 좌파는 미국 제국주의와 그 동맹인 자국 지배계급에 대항하는 게 우선적으로 중요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의 말대로 평생 영국 제국주의에 일관되게 반대했다.
토니 클리프가 스탈린주의 체제를 비판한 내용은 서방 제국주의자들의 소련 비판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영국을 비롯한 서방 제국주의는 자본주의 체제를 수호하고자 한다. 그러나 클리프를 비롯한 국제사회주의경향은 자본주의 체제 전복을 목표로 한다. 따라서 소련 스탈린주의 체제에 대한 비판의 방향이 정반대다. 문영찬은 바로 이런 본질적 차이를 무시하면서 조잡한 흑백 논리로 클리프의 주장을 왜곡한 것이다.
마치며
소련이 붕괴된 지 30년이 지났지만, 옛 소련 사회의 성격 문제는 좌파가 여전히 무시할 수 없는 중요한 쟁점이다. 소련 사회가 어떤 사회였는지는 ‘사회주의란 무엇인가’ 하는 물음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여전히 중국과 북한이 건재하다.
국가자본주의론은 미국과 영국처럼 신자유주의 선도국에서도 국가 부문이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3분의 1이 넘는 현대 자본주의를 이해하는 데도 중요하다. 그리고 소련 사회의 성격 이해는 ‘불황, 팬데믹, 기후 위기라는 복합 위기에 빠진 자본주의의 대안은 어떤 것인가’ 하는 물음과도 관련 있다.
문영찬처럼 일당 독재의 국유 경제를 사회주의라고 오해하고 이를 대안으로 제시한다면, 마르크스·엥겔스 등 고전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사회주의관을 곡해하는 것이고 자본주의의 근본 대안을 찾는 새 세대를 엉뚱한 길로 안내하는 꼴일 테다.
마르크스와 엥겔스, 레닌 등이 생각한 사회주의는 노동계급의 자력 해방, 즉 노동자들이 정치적 지배력을 획득해서 사회 생활의 모든 측면을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었다. 이는 당연히 소비에트 같은 노동자들의 민주주의 기구들을 통해 이뤄진다. 마르크스가 1871년 파리 코뮌을 보고 코뮌이 생산수단 국유화 같은 조치를 취하지 않았는데도 프롤레타리아 독재(노동자 국가)의 모습을 보여 준다고 한 까닭이다. 이것은 러시아 혁명과 혁명기 볼셰비즘의 이상이기도 했다. 서구 혁명의 패배로 고립된 러시아 혁명이 스탈린주의 체제에 의해 최종 교살되기 전까지는 말이다.
우리는 100여 년 전 러시아 혁명의 이상을 회복하고 계승해야 한다. 그러려면 옛 소련 사회의 진정한 성격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
※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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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영찬 2020b, ‘20세기 사회주의의 역사적 성격(4)’, 노동사회과학연구소(http://lodong.org/wp/archives/13633).
- 문영찬 2021, ‘20세기 사회주의의 역사적 성격(14)’, 노동사회과학연구소(http://lodong.org/wp/archives/154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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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eiman, Michal 1987, The Birth of Stalinism: The USSR on the Eve of the “Second Revolution”, Indiana University Press.
- Volkognov, Dmitri 1994, Lenin: Life and Legacy , Harper Collins.
-
1989년 시베리아 광원 파업의 주요 요구 하나가 일이 끝난 뒤 몸을 씻을 비누를 제공하라는 것이었다.↩
-
헤인스 2021, pp409~410.↩
-
문영찬 2021.↩
-
헤인스 2021, pp124~125.↩
-
문영찬 2020a.↩
-
이정구 2017.↩
-
문영찬 2020b.↩
-
문영찬, 같은 글.↩
-
김수행 2012, p151.↩
-
Reiman 1987, p89.↩
-
문영찬 2021.↩
-
Reiman 1987, p118.↩
-
노브 1998, p235.↩
-
캘리니코스 1993, pp57~58.↩
-
Murphy 2005, pp187~188↩
-
문영찬, 같은 글.↩
-
노브 1998, p234.↩
-
헤인스 2021, pp340~341.↩
-
노브 1998, p233.↩
-
Muphy 2005, p187.↩
-
문영찬, 같은 글.↩
-
클리프 2011, p23.↩
-
Volkognov 1994, p4.↩
-
문영찬, 같은 글.↩
-
F. 엥겔스 1989, p392↩
-
문영찬, 같은 글.↩
-
문영찬, 같은 글.↩
-
헤인스 2021, p166.↩
-
문영찬, 같은 글.↩
-
문영찬, 같은 글.↩
-
김수행 2012, p153.↩
-
김하영 2017, pp53~54.↩
-
김하영 2017, p54.↩
-
문영찬, 같은 글.↩
-
헤인스 2021, pp294~295.↩
-
헤인스 2021, pp320~321.↩
-
문영찬, 같은 글.↩
-
문영찬, 같은 글.↩
-
클리프 2011.↩
-
클리프 2011에 부록으로 실린 ‘임금노동과 국가자본주의’를 보시오. 필자도 알렉스 캘리니코스의 이 글을 많이 참조했다.↩
-
Nove 1987, p203.↩
-
문영찬, 같은 글.↩
-
드레이퍼 1986, p249.↩
-
리브만 2007, p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