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사과연이 번역·게재한 ‘1927년 10월 스탈린 연설’을 반박하며:
트로츠키는 진정한 사회주의 사상을 그야말로 사수(죽음을 무릅쓰고 지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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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노동사회과학연구소(이하 노사과연)의 《정세와 노동》(2021년 7/8월 호)에 1927년 10월 23일에 스탈린이 한 연설이 ‘뜨로쯔끼 반대파의 과거와 현재’라는 제목으로 번역·게재됐다(이하 ‘연설’).
1927년 10월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와 중앙규율위원회 연석 전원회의는 트로츠키를 비롯한 통합반대파1를 제거하기 위한 자리였다. 당시 스탈린은 연설에서 트로츠키를 직접 겨냥했다. 후술하겠지만, ‘연설’은 트로츠키와 통합반대파에 대한 중상으로 가득했다. ‘연설’대로라면 트로츠키는 당을 레닌주의에서 이탈시키려 하고, “멘셰비키”이자 “기회주의”이며, 심지어 백군(그리고 서방 제국주의)과 연계돼 있다고 한다.
이후 통합반대파는 패배해 붕괴했고, 끝까지 저항을 멈추지 않은 트로츠키와 좌익반대파 당원들은 이듬해 1월 유배를 떠나게 됐다.
노사과연이 90여 년 전의 이 글을 지금 꺼내놓은 이유는 아마도 미·중 갈등을 중심으로 제국주의 진영 논리가 강화돼 온 것과 무관하지 않은 듯하다. 최근 홍콩의 송환법 반대 운동, 쿠바 반정부 시위 등을 놓고 제국주의 진영 논리에 따라 이 시위들을 지지하지 않는 좌파들이 있었다. 노사과연도 마찬가지다. 예컨대, 2019년 노사과연은 홍콩 시위가 “[미국] 제국주의의 반중 전략에 이용”되는 운동이라고 봤다.
그리고 채만수 노사과연 소장은 올해 7월에 쓴 글에서 자본주의 코로나19 팬데믹으로 가속된 “자본주의의 근본적 경향·추세는 … 파국을 이미 예고”한다며, 이런 상황에서 이데올로기 전선에서 승리하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부르주아·소부르주아 이데올로그들”과도 싸워야 하지만, 특히 “제국주의의 반쏘·반공 이데올로기 전선에서의 뜨로쯔끼주의의 음흉·은밀하면서도 결정적인 역할을 폭로”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결의에 비춰 보면, 스탈린의 ‘연설’은 그들에게 지금 유익한 ‘고전’일 것이다.
그렇다면, 90여 년 전 스탈린과 트로츠키로 대표된 당시 소련공산당 지도자들은 왜 서로 충돌했던 것일까? 그리고 왜 스탈린은 이처럼 살기 등등한 ‘연설’을 한 것일까?
이는 그저 당 지도자들 간의 권력 투쟁, 여러모로 성향이 다른 개인들 간의 갈등이 아니었다. 갈등 이면에는 서로 다른 사회세력의 갈등이 있었다. 트로츠키는 1917년 혁명으로 탄생한 노동자 권력과 국제주의 원칙을 지키고자 했다. 반면 스탈린은 지배계급이 되고 있던 신흥 관료층의 화신이었다.
트로츠키가 결국 반스탈린 투쟁에 나선 까닭
트로츠키의 반(反)스탈린 투쟁은 러시아 혁명이 일어난 지 7년 후인 1924년에 시작됐다.
국제 혁명(특히 독일 혁명)의 패배로 혁명 러시아는 국제적으로 고립됐고, 오랜 내전 속에 사망하고 지친 혁명적 프롤레타리아는 거의 와해됐다.
1921년 신경제정책(NEP)이 실시돼 경제가 최악의 상태에서 벗어나 한숨 돌릴 수 있었다. 그러나 신경제정책 덕분에 네프맨(개인 사업가)과 쿨락(부농)이 성장했는데, 이 세력들의 압력이 당에 영향을 미쳤다.(집권당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들로 당과 국가기구는 급속히 관료화됐고 신흥 관료층이 부상했다. 레닌은 이런 경향의 발전을 우려하며 트로츠키에게 연대를 제안하고 생애 막바지까지 투쟁했다. 바로 스탈린을 상대로 말이다.2
한편, 노동계급의 불만은 커지고 있었다. 실업률은 높았고, 직장에서 경영인의 권한과 통제가 강해지면서 그만큼 노동자의 권리 보호는 약해졌다.
실질임금도 떨어졌다. 역사학자 E.H. 카는 1923년 당시 실질임금이 많게는 40퍼센트까지 삭감됐다고 추정했다.
노동자들의 불만과 동요는 1917년 혁명을 경험한 볼셰비키 당원들이 현 상황과 당 지도부의 정책에 의문을 제기하게 된 중요한 계기가 됐다. 트로츠키를 비롯한 이런 당원들이 좌익반대파의 핵심을 이뤘다.
트로츠키의 반스탈린 투쟁에서 첫째 쟁점은 노동자 민주주의였다. 트로츠키와 그의 지지자들은 공산당과 소비에트 국가 안에서 노동자 민주주의를 옹호했다.
둘째 쟁점은 경제 정책이었다. 좌익반대파는 산업화 계획을 요구했다. 산업화는 실업을 줄이고 노동계급의 경제적·사회적 지위를 강화하는 데 필요했다. 재정은 쿨락과 네프맨들에게서 세금을 거둬 조달할 수 있을 터였다.
이 모든 제안의 반대편에 스탈린이 있었다. 스탈린은 신흥 관료층의 권력을 강화하려 애썼다. 관료가 장악한 당 기구는 좌익반대파의 목소리가 당 안팎에 전달되는 것을 가로막았고, 좌익반대파 동조자들이 당대회 대표로 선출되지 못하게 방해했다.
트로츠키 모략 운동도 이때부터 시작됐다. 스탈린의 명령에 의해 트로츠키와 레닌 사이의 1904~1915년 논쟁과 불화가 파헤쳐졌고, 이는 레닌주의에 맞서는 ‘트로츠키주의’라는 이단 신화를 조작하는 데 이용됐다.
‘연설’에서도 트로츠키를 반레닌주의로 매도하는 대목이 많다. 스탈린은 레닌이 유언에서 트로츠키의 ‘비볼셰비즘’을 규탄했다고 주장했다.
레닌은 “유언”에서 뜨로쯔끼의 “비볼쉐비즘”을 규탄하고, 10월 혁명 시기에 까메네프와 지노비예프가 저지른 잘못이 “우연”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과연 그랬을까? 레닌의 실제 유언에 포함된 관련 내용을 보면 그렇지 않다.
저는 다만,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의 [1917년] 10월의 일화3가 물론 결코 우연은 아니었음을 상기시키겠습니다. 트로츠키에 대해 그가 [1917년 이전에] 볼셰비크가 아니었다는 개인적인 지적을 해서는 안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 사건이 그들을 개인적으로 비난하는 데 이용돼서는 안 될 것입니다.
레닌은 당시 소련공산당 정치국원들을 평가하면서 1917년 이전에 볼셰비키가 아니었다는 사실로 트로츠키를 공격하면 안 된다고 말한 것이다. 사실 레닌의 이 유언은 스탈린 공격이 목적이었다(이 문제는 뒤에서 다시 다루겠다). 스탈린은 대중에게 진실이 (그 자신에 의해) 차단되고 있음을 알기에 이런 거짓말을 스스럼없이 했을 것이다.
스탈린은 ‘연설’에서 이렇게도 주장했다.
뜨로쯔끼는 10월 혁명에서 1922년에 이르는 동안 레닌과 그의 당을 반대하여 두 번의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했습니다. 1918년의 브레쓰트 강화 문제와 1921년의 노동조합 문제입니다.
스탈린의 언행에 일관성이 있을 것이라고 기대해서는 안 된다. 당시 스탈린은 통합반대파에 맞서 부하린과 동맹을 맺고 있었다. 그런데 부하린은 특히, 1918년 독일과의 강화 문제에서 트로츠키보다 더 극단적으로, 심지어 당을 거의 쪼갤 기세로 레닌과 의견 충돌을 빚었다. 레닌은 즉각 강화를, 트로츠키는 독일 혁명 승리까지 시간 벌기를 위해 전쟁도 강화도 아닌 ‘홀딩 작전’(권투에 비유하자면)을, 부하린은 ‘혁명 전쟁’을 주장했다.
‘노동조합 문제’로 당내 논쟁이 벌어졌을 때 부하린은 레닌의 의견(노동조합의 독립성 보장)에 반대해 트로츠키의 잘못된 입장(노동조합을 국가에 종속시키기)을 지지했다.
볼셰비키 당의 역사는 토론과 논쟁으로 가득 찬 역사였다. 레닌이 이끈 당에서는 공공연하고 격렬한 논쟁이 자주 벌어졌고 당 지도자들의 견해는 쟁점에 따라 바뀌었다. 레닌이 소수파로 몰린 적도 많았다. 1917년 트로츠키 입당 이래 당 내에서 레닌과 트로츠키는 때로 격렬하게 논쟁했고, 자주 의견 일치를 봤다. 이런 토론과 논쟁은 당원이 모두 자유롭게 의견을 교환하고 민주적으로 정책을 결정하는 과정이었다.
그러나 스탈린은 레닌과 트로츠키가 벌인 토론과 논쟁 중 일부를 취사선택하고 거두절미하고 곡해해 트로츠키의 반레닌주의를 입증하는 수단으로 썼다. 이는 자신을 비롯한 당 지도부만이 레닌주의를 옳게 해석할 수 있고, 이에 조금치라도 이견을 제시하는 자는 모두 반레닌주의자라는 것이었다.
1927년까지 스탈린은 부하린과 함께 산업화의 길을 가로막고 기존의 경제 정책(네프)을 고수했다. ‘연설’에서 스탈린은 기존의 농업과 공업 정책이 낳은 성과를 자화자찬했다. 자신의 농업 정책으로 경작 면적이 “전쟁 전 수준”으로 회복됐고 농촌의 평화를 얻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농촌에서 자본주의 요소에 공세를 취할 조건과 나아가 우리나라에서 성공적으로 사회주의를 건설할 여건을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산업 설비를 다시 갖추는 사업을 성공적으로 추진하고 있[습니]다”고 했다.
그러나 당시 소련 산업의 후진성은 1925년 트로츠키가 국가경제위원회에서 한 꼼꼼한 조사·연구로 드러난 바 있다. 당시 소련 산업의 생산성은 미국의 10퍼센트 수준에 불과했다. 무엇보다 스탈린이 연설한 1927년 10월에 이미 곡물 위기 등 소련 경제에 위기가 오고 있었고, 이로 인해 사회적 긴장이 높아지고 있었다. 즉, 스탈린의 연설은 이런 진실을 가리는 거짓과 기만으로 가득 차 있었다.
당시 스탈린과 부하린은 통합반대파가 산업화를 위해 농민을 약탈하려 한다는 ‘가짜뉴스’를 퍼뜨리고 있었다. 스탈린 연설에도 이 주장은 똑같이 되풀이된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농촌에서 내전을 다시 불러일으키는 정책입니다.”
그러나 당시 통합반대파는 쿨락에게서 세금을 더 받자고 주장했을 뿐이지, 그들의 땅을 즉각 빼앗자고 한 게 아니었다. 통합반대파의 강령을 보면, 농촌에서 집단농장화는 장기적이고 점진적으로 농민을 설득하며 이룩할 과제로 설정돼 있었다. 오히려 통합반대파는 산업화를 통해 값싼 공산품에 대한 농민의 수요를 충족시키고, 농민 소득을 비롯한 전체 소득수준이 높아지기를 원했다.
얼마 안 지나서 정작 농민을 상대로 내전을 일으키고 약탈한 자는 스탈린이었다. 1928년부터 스탈린은 엄청난 속도의 중공업 성장을 촉구하며 이를 위해 농촌을 급속하게 강제로 집단농장화했다. 이 과정에서 적어도 수백만 명이 희생됐다.
‘일국사회주의’(러시아 한 나라에서만도 무계급 사회를 건설할 수 있다는 이데올로기)
반스탈린 투쟁의 셋째 쟁점은 일국사회주의였다. ‘일국사회주의’론이야말로 국제주의인 마르크스주의와 레닌주의에서 결정적으로 이탈하는 것이었다. 레닌을 비롯해 볼셰비키는 러시아 혁명이 생존하려면 다른 나라, 특히 독일로 혁명이 확산돼야 한다고 봤다.
그러나 레닌 사후 스탈린은 부하린의 주장을 차용해 소련 한 나라에서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해야 하고, 건설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즉, 국제 혁명 없이도 소련에서 계급 없는 사회를 건설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로써 스탈린은 국제주의 전통을 걷어차 버렸다.
‘일국사회주의’론은 국제공산당 코민테른에도 악영향을 줬다. ‘일국사회주의’는 국제 혁명을 러시아 혁명의 성공을 위한 보너스 또는 프리미엄 정도로 만들었다.
외국의 군사 개입만 없다면 소련에서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할 수 있다는 스탈린에게는 각국 공산당이 소련의 국경수비대 구실을 해 주는 게 중요했다. 후진국들인 식민지·반(半)식민지에서도 노동계급이 혁명으로 권력을 잡을 수 있다는 생각은 아예 포기돼야 했다. 이에 따라 코민테른의 정책은 소련의 대외 정책에 종속되게 됐다.
트로츠키는 이렇게 비판했다.
새로운 교리[‘일국사회주의’]는 개입만 없다면 국민국가의 토대 위에서 사회주의가 세워질 수 있다고 선언한다. 이런 생각에 따라 … 개입을 막기 위해 외국 부르주아지와 협조하는 정책이 수립될 수 있고 수립될 수밖에 없다. 그 교리에 따르면, 이런 정책이 주된 역사적 문제인 사회주의 건설을 보장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코민테른 정당들의 임무는 보조적 성격을 갖게 된다.
스탈린이 코민테른을 소련 대외정책의 수단으로 삼은 것은 국제 노동계급에 재앙을 가져다 줬다. 그 대표적 사례 중에 1926년 영국 총파업과 1925~1927년 중국 혁명의 패배가 있다.
1926년 영국에서 총파업이 일어났지만, 투쟁이 정점에 올랐을 때 영국 노총(이하 TUC)의 좌파적 집행부는 총파업이 더 나아가기를 원하는 현장조합원들을 배신했다.
그런데도 스탈린과 부하린의 코민테른은 영·소노동조합위원회를 통해 TUC를 지지했고, 영국 공산당도 그렇게 하라고 설득했다. 결국 총파업은 패배로 끝났다.
노사과연의 인식과 달리 당시 스탈린은 서방 제국주의와 타협을 모색하고 있었고 이 때문에 영국에서 노동자 투쟁을 결정적으로 망쳐 먹었다.
그러나 1927년 영국 정부는 소련과 외교 관계를 단절했고, 그러자 소련에서는 전쟁에 대한 두려움이 커졌다.(이 점은 1928년 스탈린이 국가자본주의 반혁명으로 나아가도록 자극한 대외적 요인이었다.) 정작 스탈린이 환심을 사려 했던 TUC는 영국 정부를 지지해 영소위원회에서 탈퇴하고 소련을 비난했다.
한편, 우방이 필요했던 스탈린은 중국 국민당과 손잡았다. 그리고 국민당을 코민테른의 “동조 정당”으로 받아들였다. 스탈린은 소련과 국민당의 동맹을 위해 중국공산당이 국민당에 묵종하기를 원했다.
그 결과는 파멸적이었다. 1925년부터 중국에서 노동자 혁명이 시작됐다. 국민당의 장제스는 민족주의 부르주아지에 기반을 뒀으므로 노동자와 농민의 혁명에 적대적이었다. 하지만 중국공산당은 장제스를 비롯한 동맹들이 놀라지 않게 노동자들의 자제를 촉구하는 역할을 해야 했다.
결국 1927년 4월 장제스의 국민당 군대는 노동자들을 공격했다. 엄청난 대학살이 일어났고, 도시 노동자 조직들이 파괴됐다. 이 사건이 일어나기 일주일 전 트로츠키는 장제스가 쿠데타를 준비할 것이라며 오직 노동자위원회만이 그의 쿠데타 시도를 막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미 실권을 잃은 트로츠키로서는 중국 혁명의 패배를 막을 수 없었다.
영국 총파업 패배, 특히 중국 혁명의 패배는 당시 스탈린과 부하린이 코민테른에 관철시킨 우경 기회주의 노선의 결과였다.
그러나 1927년 10월의 ‘연설’에서 스탈린은 뻔뻔스럽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의 대외 정책의 목표는 부르주아 국가들과 외교 관계를 염두에 둔다면 평화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 우리가 성취한 것은 좋든 나쁘든 평화를 유지했다는 것입니다. … [통합반대파의] 지노비예프와 다른 사람들이 되풀이하여 예언하였지만 우리는 아직 전쟁이 없습니다. … 그리고 이것은 우리에게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평화 상태에서만 우리가 원하는 속도로 우리나라 사회주의 건설을 추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
오직 눈먼 자만이 공산당이 중국에서 미국까지, 영국에서 독일까지 전 세계에 걸쳐 성장하는 것을 부정하고 있습니다.
중국 혁명의 패배로 중국공산당은 도시 노동계급의 기반을 거의 다 잃게 됐다. 영국 총파업 패배는 이후 영국에서 개혁주의가 만연하게 된 계기가 됐다.
그런데도 “공산당이 중국, 영국 등지에서 성장한다”고? 그리고 영국과의 관계 단절로 전쟁 위험이 점차 커지는데 “평화가 유지되고 있다”고?
‘연설’의 동기
이런 배경을 알아야 스탈린의 1927년 10월 연설의 진정한 목적과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1927년 중국 혁명 패배, 영소위원회 해체는 스탈린-부하린의 대외 정책이 완벽히 실패했음을 보여 줬다. 대외 정책의 실패는 당시 스탈린의 권위를 약화시켰다. 특히, 트로츠키가 이 문제들을 놓고 스탈린을 강력하게 비판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은 스탈린이 트로츠키를 비롯한 통합반대파를 국내에서 확실히 제압해 버리기로 마음먹은 계기가 됐다.
게다가 같은 시기에 국내에서 경제 위기가 고조되고 있었다. 스탈린과 부하린이 고수한 신경제정책의 실패로 도시에서 식량 위기가 도래하고 있었다. E.H. 카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묘사했다.
[1927년] 볼가와 북카프카스, 카자흐스탄에서 곡물의 자유 시장 가격이 공식 가격보다 크게 올랐다. 시간이 한참 지나 일반적인 부족 현상이 모스크바와 다른 대도시의 식료품 가게에서도 감지됐다. 1927년 가을까지 그 도시들에서 식량 부족이 널리 퍼졌고 만성적이 됐다.
엄청난 식량 부족, (생필품 구매를 시장에 의존함에 따라 발생한) 물가 상승, 실업 증대 등에 따른 노동자들의 불만이 증가하는 시점에서 반대파의 영향력이 증대하는 것을 보며 스탈린은 크게 우려했다.
1927년 12월 15차 당대회가 예정돼 있었다. 이때까지 스탈린이 장악한 당 지도부는 트로츠키의 주장이 대중에게 닿지 않게 차단할 수 있었다. 당 중앙위원회는 통합반대파의 강령을 당대회 사전 토론자료의 일부로 출판하는 것을 거부했다. 게다가 통합반대파가 자체적으로 강령을 인쇄해 회람케 하는 것조차 금지했다.
스탈린은 내전 중에 (불가피성과 일시성을 전제로) 이뤄진 당내 분파 금지 결정에 따라, 자신의 조처가 정당하다고 주장했다.
레닌은 제10차 당대회 결정서 “[당의] 단결에 관하여”에서 “강령”을 갖는 것은 분파 활동의 기본 징표 중 하나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도 반대파는 “강령”을 작성하고 공표할 것을 요구하여 제10차 당 대회 결정을 위반하였습니다.
또한 당원 회합에서 반대파 사람이 연설을 한다고 하면 스탈린 측이 보낸 당원들이 가서 그 회합을 방해하고 무산시켜 버리기 일쑤였다. 게다가 15차 당대회가 열리면 트로츠키와 지노비예프 같은 통합반대파 지도자들이 자신들의 주장을 공개적으로 연설할 기회를 잡게 될 것이었다. 스탈린으로선, 그전에 반대파를 완전히 금지하고 분쇄해야 했다. 그래서 스탈린은 1927년 내내 통합반대파를 집요하게 공격했다. 그해 6월 저명한 통합반대파 성원인 스밀가가 만주 전선으로 떠나는 날 역 앞에서 통합반대파 사람들의 환송집회 개최를 이유로 스탈린은 수많은 반대파 사람들을 당에서 추방해 버렸다.
통합반대파는 강령 회람 금지에 불복해, 강령 지지 서명을 받고 비밀리에 강령 인쇄를 시도했다. 그러자 스탈린의 보안경찰 OGPU는 인쇄소를 급습해 관련자들을 모두 체포했다. 그리고 통합반대파 사람들이 반혁명 세력과 공모했고, 백군 사령관 브랑겔의 장교였던 자가 반대파를 위해 인쇄소를 차려 줬다고 주장했다. 이로 인해 몇몇 반대파 지도자들이 즉각 당에서 축출됐고, 그중 1명은 투옥됐다.
이런 상황이 스탈린의 ‘연설’에 고스란히 반영돼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1921년 10차 당대회에서 당 역사상 처음으로 분파 결성이 금지된 바 있다. 그러나 당시는 내전 상황이었다. 경제는 붕괴됐고, 크론시타트 반란은 농민들의 불만이 노동자 정권을 위협할 정도로 커졌음을 보여 줬다. 레닌은 이런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에서 당이 와해될까 봐 염려했다. 그러나 이때의 분파 금지는 불가피하고 일시적인 후퇴였지, 무제한의 절대 금지 조처로 여겨지지는 않았다.
당시 레닌은 서로 다른 의견그룹들을 바탕으로 중앙위원을 선출하는 방식을 배제하자는 주장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반대하며 당내 민주주의를 옹호했다.
근본적 쟁점들에 대한 이견이 있을 때 당에 호소할 권리를 당과 중앙위원들한테서 박탈할 수 없습니다. … 예컨대, 우리가 브레스트리토프스크 강화조약 체결 같은 문제에 부딪히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 그런 상황에서는 강령을 바탕으로 선출하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스탈린이 언급한 레닌의 저술 “당의 단결에 관하여”에서도 레닌은 이견이 있는 사람들이 토론용 특별 자료집이나 당 언론 매체에 견해를 표명하도록 요청했다.
그러나 스탈린은 분파 결성 금지를 상시적이고 절대적인 원칙으로 격상해, 이를 자신에 대한 이견과 도전이 당 내에서 제기되지 못하도록 억제하는 무기로 삼아 버렸던 것이다. 스탈린은 이런 억압을 정당화하려고 레닌의 말과 글을 아전인수격으로 가져다 썼다. 레닌은 일찍이 《국가와 혁명》에서 혁명적 지도자가 죽으면 어떤 일을 겪을 수 있는지를 썼는데, 불행히도 그 말은 스탈린 때문에 레닌 자신에게도 적용돼 버렸다.
억압 계급은 위대한 혁명가들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끊임없이 그들을 괴롭히고, 그들의 이론을 가장 악랄하게 취급하고 가장 격렬하게 증오하고 가장 뻔뻔하게 중상모략했다. 그리고 그들이 죽은 뒤에는 그들을 전혀 해롭지 않은 우상으로 변질시키고, 그들을 성인의 반열에 올리고, 말하자면 그들의 이름을 신성하게 만들어서 피억압 계급을 어느 정도 ‘위로’하고 기만함과 동시에 그들의 혁명적 이론에서 그 핵심을 제거하고 혁명적 예리함을 무디게 하고 혁명적 이론을 조야하게 만들려고 애쓴다.
‘연설’에서 스탈린은 인쇄소 사건 등을 언급하며 다시 한 번 통합반대파와 반혁명 세력의 연계 혐의를 (기정사실로) 주장했다. 그런데 앞서 언급된 인쇄소 준비에 관여한 전직 백군 장교는 사실 스탈린 보안경찰 OGPU의 밀정이었고, OGPU가 그에게 하달한 임무는 바로 통합반대파를 염탐하는 일이었다. 이는 당시 OGPU의 수장인 멘진스키가 인정한 사실이었다. 그런데도 이런 자를 앞세워 스탈린은 ‘연설’에서 “반대파가 부르주아 지식인들의 도움을 받아 그들과 짜고 반당 음모를 꾸며 왔[다]”고 주장한 것이었다.
‘연설’에서 스탈린은 백군 장교 출신자가 OGPU의 밀정임을 부인하지 않으면서도, 뻔뻔스럽게 이렇게 말했다. “전직 브랑겔 장교가 반혁명 음모를 색출하는 쏘비에트 정권에 조력하는 것이 무슨 잘못이겠습니까?”
이 무렵 스탈린은 “체임벌린[영국 보수당 지도자]에서 트로츠키에 이르는 공동전선” 운운하며 트로츠키가 백군은 물론이고 서방 제국주의와 공모한다고 모략하고 있었다. 위에 언급된 인쇄소 사건은 이런 모략을 더한층 강화하는 계기가 됐다. 그리고 이런 식의 공격은 훗날 여론조작용 모스크바 재판(1936~38)에서 절정에 이른 유혈 숙청의 원형을 보여 준 것이었다.
노사과연은 아마도 이런 대목에 주목했을 성싶다. 트로츠키주의 운동이 그 뿌리부터 제국주의와 반혁명 세력의 벗이었다고 주장하는 근거로서 말이다. 그러나 오히려 이 대목은 스탈린주의의 트로츠키 비판이 뿌리부터 프락치 공작과 날조에 근거하고 있음을 보여 줄 뿐이다.
‘연설’에서는 레닌의 유언 공개 문제도 쟁점이었다. 1927년 ‘연설’에서 스탈린은 레닌 사망 후 그의 유언이 바로 공표되지 않은 건 “레닌이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당시에는 트로츠키도 이에 동의했다고 말했다.
1927년에 레닌의 유언이 쟁점이 된 것은 그 내용이 스탈린에게 매우 불리했기 때문이다. 1922년 레닌은 조지아 민족 문제, 노동자·농민 감사부(라브크린)를 통한 권력 오·남용 문제, 대외무역 통제 문제 등에서 스탈린과 대립했다. 레닌은 스탈린이 레닌이 우려하는 관료라는 암적 요소의 화신임을 직감하고 그와의 투쟁에 사활적으로 노력했다. 레닌은 유언장에서 스탈린을 서기장직에서 해임해야 한다고 명확히 썼다.
그래서 1924년 초 레닌 사망 후, 정치국에서 스탈린과 그의 동조자들은 레닌의 유언이 공개되기를 반대했다. 아쉽게도 트로츠키는 제때 이 문제를 제기하지 않고 한동안 침묵해 버렸다. 심지어 1925년 맥스 이스트먼이 《레닌 사후》라는 책에서 레닌의 유언 일부를 공개했을 때, 트로츠키는 정치국의 압력을 받아 이를 부인하는 성명을 내기도 했다.4 이 성명은 이후 스탈린이 계속 인용해 먹었고 심지어 1927년 ‘연설’에서도 언급돼 있다. 아마도 1925년 당시까지 트로츠키는 당 내의 어떤 분파 투쟁도 정당하지 않다고 봤기에 그렇게 머뭇거리거나 침묵했던 것 같다. 또, 레닌 사후 그의 후계직을 탐하는 자라는 비방에 수세적으로 움츠러들었다.
레닌의 유언을 공개하지 않기로 한 결정을 주도한 것은 스탈린과 그 동조자들이었다. 스탈린은 그렇게 해서 자신의 권력을 더 강화할 수 있었다.
이처럼 ‘연설’에서 보듯이 스탈린이 당내 이견에 대처하는 방식은 볼셰비키의 전통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반대파가 자신의 정견을 펼칠 기회를 박탈하고, 중상모략 운동을 전개하며, 경제적 압박과 물리적 탄압을 주저 없이 실행했다. 그래서 진실을 대중이 알지 못하게 가리고 왜곡했다.
신흥 관료층을 대표해 스탈린은 혁명적 프롤레타리아 운동을 지키려는 트로츠키와 그 반대파에 맞섰다. 그 과정에서 공산당은 1917년의 볼셰비키당과는 전혀 다른 당으로 변질돼 갔다.
마무리하며
통합반대파가 해체되고, 남은 좌익반대파마저 제거한 후 스탈린은 본격적으로 반혁명을 주도하기 시작했다. 기존의 경제 노선을 뒤집고 강제적 집단농장화와 강제적 산업화를 위해 대중의 막대한 희생을 강제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반혁명 과정에서 스탈린을 비롯한 소련 관료층은 지배계급으로 완전히 자리 잡게 됐다.
이제 스탈린에게 저항하거나 이견을 제시하는 사람들에게는 그전보다 더욱더 혹독한 처벌이 가해졌다. 스탈린의 공포 정치로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그 희생자 중에는 심지어 트로츠키는 물론이고, 1927년까지 스탈린의 동맹이었던 부하린도 있었다.
1923~1927년 소련에서 벌어진 반대파 투쟁에서 스탈린이 승리한 것은 내전과 제국주의 외세의 제재, 경제 붕괴로 러시아 노동계급의 힘이 소진한 상태에서 스탈린이 더 강력한 사회세력(신흥 관료층)을 대변했기 때문이었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을 승리로 이끈 혁명적 노동계급은 내전 과정에서 사실상 사라졌고, 그 후에 당에 들어온 사람들은 투쟁 전통과 단절된 채 대체로 수동적이었다.
트로츠키의 저항은 패배했다. 트로츠키는 어느 시점에 이르러 반대파가 승리하기 어렵고 심지어 자신은 죽을 수 있다고 깨달은 듯하다.
그러나 그는 투쟁을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트로츠키의 투쟁은 역사적으로 대단히 중요했다. 그가 스탈린주의에 맞서 싸우지 않았다면, 그의 국제주의 수호가 없었다면, 사회주의를 소련의 점령군이나 농촌 게릴라 전략이나 좌파 국회의원들에 의해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아래로부터 노동계급의 자력 해방으로 이해하는 고전적 마르크스주의 전통은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추천 책
- 《트로츠키의 마르크스주의》, 던컨 핼러스 지음, 최일붕 옮김, 책갈피, 2010.
- 《트로츠키 1927~1940: 고전적 마르크스주의 전통을 사수하다》, 토니 클리프 지음, 이수현 옮김, 책갈피, 2018.
- 《Trotsky, Vol. 3: Fighting the Rising Stalinist Bureaucracy, 1923-1927》, Tony Cliff, Bookmarks, 19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