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 연대

전체 기사
노동자연대 단체
노동자연대TV
IST

그리스 혁명가의 공산당 반박:
우리의 전략과 그들의 전략

노동사회과학연구소(이하 노사과연)는 《정세와 노동》 173호(2021년 7/8월)에 그리스 공산당 이론지 《코메프》(공산주의 평론) 2006년 제6호(11/12월)에 실린 “기회주의 운동으로서의 트로츠키주의”를 번역해 실었다. 이하는 그리스에서 그 글이 나오고 얼마 후(2007년 1월) 그리스 사회주의노동자당 활동가인 레안드로스 볼라리스가 발표한 반박문이다.

[  ] 안의 내용은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번역자가 첨가한 것이다. 볼라리스 자신이 첨가한 경우에는 그렇다고 특별히 밝혔다.

그리스 공산당 이론지 《코메프》 [2006년] 12월호에 “트로츠키주의라는 기회주의 조류”라는 논문이 실렸다. 글 서두와 말미에서 저자는 “트로츠키주의” 일반과 그리스 사회주의노동자당을 두고 “무시할 만한 세력”이라고 한다[《정세와 노동》에는 “공산주의 운동에 위협의[이] 되기에는 매우 협소한 규모”라고 의역돼 있다]. 그렇다면, 뭐 하러 30쪽이나 되는 빽빽한 글을 쓴 것인가?

파산한 스탈린주의 전략을 극복하고 궁극적으로 자본주의를 끝장낼 길을 찾는 새로운 좌파가 수십 년 만에 처음으로 등장했다. 그러나 《코메프》에 실린 이 글은 그저 그리스 공산당 지도부의 불안감을 드러낼 뿐이다.

이 글은 트로츠키와 그의 삶, 사상에 관한 뻔뻔스러운 거짓말과 왜곡으로 시작한다. 인류 역사상 가장 중요한 혁명의 저명한 지도자였던 트로츠키가 부당하게 취급된다. 이 글의 저자는 맥락에서 떼어 낸 몇몇 인용으로 트로츠키를 거의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왜곡하고 그러는 과정에서 레닌도 심하게 왜곡한다.

이 글의 저자는 “따라서 트로츠키는 1917년 7월 볼셰비키당에 가입했다”고 반쯤은 반어적으로 쓴다. 그러나 트로츠키가 볼셰비키 제6차 당대회[1917년 8월]에서 레닌 다음으로 [두 번째로] 많은 표를 받고 중앙위원이 됐다는 사실은 “망각”한다. 더 중요하게는, 그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하는 것을 “망각”한다. 당시 레닌은 “4월 테제”를 제출하고 “구(舊)볼셰비키”(스탈린도 그 일부였다)와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 구볼셰비키는 혁명이 아직 “부르주아적·민주주의적” 단계에 있기 때문에 러시아 노동계급이 스스로 정치 권력을 장악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볼셰비키의 우파는 레닌에게 “트로츠키주의자냐,” “아나키스트냐”는 비난을 했다. 러시아 혁명이 “중간” 단계 없이 사회주의적 혁명으로 나아갈 것이라는 트로츠키의 주장을 레닌이 실천적으로 수용했기 때문이다.

레닌

《코메프》 논문의 필자는 이렇게 쓴다. “그러나 트로츠키는 볼셰비키에 입당한 후에도 자율성을 고수하고 레닌에 대항하는 투쟁을 지속했다.” 첫 번째로 지적하고 싶은 점은, 레닌이 살아있을 때 — 스탈린이 레닌의 시신을 미라로 만들어 유리관 속에 안치해 놓기 전 — 에는 볼셰비키 당원들 사이에서 사상과 견해가 자유롭게 토론됐다는 것이다. 혁명과 내전 기간 동안에도 볼셰비키 당원들은 앞으로의 진로를 두고 공공연히 논쟁했다. 그러나 《코메프》 필자는 마법의 펜으로 이 모든 것을 감쪽같이 사라지게 한다. 남는 것은 레닌을 방해하는 트로츠키와, 불가사의한 이유로 트로츠키에게 “한직”을 “용인”하는 레닌뿐이다. 물론 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 의장, 국방인민위원이자 혁명군사위원회 의장(적군의 수장)을 “한직”이라고 한다면 말이다.

“엘리트주의자” 트로츠키가 “무지한 대중”의 지지를 얻지 못할 것이라는 이유에서 “사회주의 건설”에 반대했다는 식의 서술은 대꾸할 가치도 없다. 일국에서 실제의 사회주의 사회[무계급 사회의 초기 국면]를 건설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트로츠키의 견해는 1924년까지는 볼셰비키 내에서 상식으로 통했다. “부르주아지를 타도하는 것은 한 나라에서의 노력으로도 가능하다. 우리의 혁명이 이를 입증한다 ⋯ 사회주의적 생산을 조직하기 위한 사회주의의 최종 승리를 거두는 것은 한 나라의 노력으로 충분치 않다. 특히, 러시아처럼 농촌이 지배적인 나라에서는 더욱 그렇다. 따라서 여러 선진국 노동계급의 노력이 필요하다.” 이것은 트로츠키가 한 말이 아니다. 혁명의 무덤을 파는 자가 되기 한참 전에 스탈린 자신이 한 말이다.[1924년 초에 출판한 《레닌주의의 기초》에서 이렇게 말했다. 몇 달 후 발간한 개정판 《레닌주의의 문제들》에서는 이와 정반대 주장을 폈다.]

소위 “그리스 트로츠키주의 운동의 비열한 역사”를 다룬 대목도 비열하다. 개명(改名) 후 그리스 공산당의 첫번째 총서기이자 1943년 6월 6일 파시스트들에 의해 처형된 [트로츠키주의자] 판텔리스 풀리오풀로스를 단 한 번도 언급하지 않은 것은 정말 놀랍다. 당시 레지스탕스 운동이 승리할 전략이 있었을까? 누구의 전략이 승리할 전략이었나? [스탈린주의자이자 풀리오풀로스를 축출한] 그리스 공산당의 “아르히고스”(최고지도자) 자카리아디스의 전략이었나, 풀리오풀로스의 전략이었나?

지배계급과의 “국민적 단결,” 제국주의 “연합국”과의 타협을 위해 1944~1945년 동안 레바논 협정, 카세르타 협정, 바르키자 협정을 맺으며 강력한 혁명적 운동을 정치적·군사적으로 무장 해제시킨 그리스 공산당의 전략은 결코 승리로 나아가게 해 줄 전략이 아니었다.(그리스 레지스탕스의 투쟁에 관해 더 자세히 알고 싶다면 도니 글럭스틴의 책 《제2차세계대전의 민중사》에 대한 나의 비판적 서평을 보라.)[국역: “《2차 세계대전의 민중사》 — 두 개의 전쟁?,” 《마르크스21》 39호] 이미 1943년에 트로츠키주의 신문인 〈프롤레타리오스〉는 이렇게 논평했다. “영국과 미국 제국주의자들은 해방자가 아니라 또 다른 점령자로서 그리스에 오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 공산당 지도부는 트로츠키주의자들이 아니라 영국군을 두 팔 벌려 맞이했다.

《코메프》 논문의 저자는 그리스 사회주의노동자당과 국제사회주의경향에 많은 지면을 할애한다. “유럽 제국주의 옹호자”라는 중상 외에도 이런 주장을 한다. “본질적으로 이들은 정치 강령도 없는 조직이다 ⋯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을 [맹목적인 — 레안드로스 볼라리스] 활동으로 축소한다. 이들에게는 전략적 전망이 없다. 전술과, 혁명이나 사회주의를 운운하는 추상적인 선전만이 있을 뿐이다 ⋯ 어떤 투쟁이든 그것의 정치적 내용을 과소평가한다 ⋯ 오로지 투쟁의 방법에만 신경을 쏟을 뿐이다.”

어떤 조직이 전략, 즉 운동을 전진시킬 “나침반”을 갖고 있는지, 그 “나침반”이 맞는지 틀린지를 알 수 있는 간단한 기준이 있다. 바로 실천이다.

현재[2007년 1월] 그리스에서는 고등교육을 공교육으로 보장하는 헌법 16조를 개악하려는 움직임에 맞선 투쟁이 절정에 이르고 있다. 이 운동은 지난해 정부의 대학 교육 “기본법” 도입 시도를 대학 점거 투쟁으로 좌절시키면서 시작됐다. 이미 지난해 초부터 사회주의노동자당은 점거 투쟁의 승리는 가능하며 같은 해 프랑스[에서 노동법(CPE)에 맞서서 벌어진 거대한 투쟁]가 갈 길을 보여 준다고 주장해 왔다. 반면 그리스 공산당 청년 조직(KNE)은 대학 점거에 반대했다. “아무런 위협도 되지 않는 한가로운 짓”이라면서 말이다.

몇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당시 이탈리아 제노바에서는 [G8 회담에 맞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다. 사회주의노동자당은 “제노바 2001 행동단”을 통해 수많은 사람들을 이 시위에 동원했다. 그리고 이 시위는 반신자유주의·반자본주의 운동을 발전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됐다. 그리스 공산당은 우리에게 “혁명을 소재로 관광사업”을 한다고 비아냥거렸지만, 결국에는 이 시위에 참가하지 않을 수 없었고 제노바에 자신들의 참가단을 따로 보냈다.

[이라크] 전쟁 반대 운동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 운동을 발전시키려면 치열한 논쟁이 필요했다. 부시와 이슬람주의자들에 “양비론”을 펴는 주장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전쟁에 맞선 정치 투쟁이 없었다면 2003년 2월 15일의 대규모 국제 반전 시위와 그 이후의 전쟁 반대 운동은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 공산당은 처음에 이 과제를 방기했다. 예컨대 2001년 9월 27일 그리스 공산당 지도부는 미국 대사관 앞 시위가 “시기상조”라고 했다. 그후에는 자신들만의 “순수한” 집회를 열었다.

전략

아직도 사회주의노동자당의 이 모든 실천이 “전략 없는 전술”이나 “맹목적인 활동”에 불과해 보인다면, 몇 년 더 거슬러 올라가 보자. 1989년 그리스 공산당은 시나스피스모스(“좌파연합”)의 일부로서 우파인 신민주당 정부에 참여했다. 그리스 공산당 지도부는 그리스 사회당을 뒤흔든 부패 스캔들에 대응하려면 우파 정부에 참여하는 것 말고는 대안이 없다고 주장했다. 당시 사회주의노동자당의 전신인 사회주의혁명조직(OSE)은 그 정부를 계급 협력 정부로 규정했다. 그리고 그리스 사회당이 부패 스캔들에 휘말린 것은 신자유주의를 수용한 결과이며, 대안은 노동자 투쟁을 강화하고 부패를 배양하는 자본주의를 타도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결국 그리스 공산당의 “부패 일소” 시도는 결국 아무런 소득도 거두지 못했다. 그러나 그리스 공산당은 신민주당과 그리스 사회당 모두가 참여한 그다음 “거국 내각”에도 참여했다. 그리스 지배계급이 커다란 위기에 빠진 순간, 도움의 손길을 내민 것이다. 이것은 그저 또 다른 “실수”가 아니었다.

실로, 우리의 차이는 전략에 있다. 다시 말해, 사회주의 사회를 향한 혁명적 전략과, 공식 행사에서 내거는 온갖 미사여구에도 불구하고 결국에는 자본주의를 개혁하는 전략의 차이다. 오늘날 그리스 공산당은 가장 급진적인 좌파적 미사여구를 늘어놓는다. 이것은 그들의 역사에서 처음 있는 일이 아니다. 그리고 그런 후에는 언제나 급격한 우경화가 뒤따랐다. 《코메프》 논문의 서두에는 이런 말이 있다. “프티부르주아적인 초(超)혁명적 언사를 동원하지만 실천에서는 전적으로 타협적.” 이것은 트로츠키와 사회주의노동자당에 해당하는 얘기가 아니다. 스탈린주의에 더 어울리는 묘사다.

주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