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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석균 보건의료단체연합 공동대표 기고 팬데믹과 기후 위기:
노동자들이 불평등 확대와 상시적 재난에 맞서야

“누가 코로나19의 부담을 질 것인가? 문제는 바로 이것이다. 누가 삶이 더 편해졌고 누구의 삶이 더 힘들어졌는가?”

올해 9월 독일 연방선거에서 독일 좌파당이 내건 선거강령 맨 앞에 나오는 말이다. 이 질문은 한국 사회에도 잘 들어맞는 말인 듯하다.

OECD 국가 중 일상적으로 엄격한 사회적 거리두기를 하고 검사·추적·격리(‘제로 코로나’ 정책)를 시행한 다섯 나라(호주, 뉴질랜드, 한국, 일본, 아이슬란드)가 느슨한 방역 정책(‘위드 코로나‘ 정책)을 시행한 나라들보다 사망률은 25배나 낮고 경제성장률은 더 높았다고 한다. 한국도 상대적으로 방역에 성공을 거둔 것으로 평가된다.

그런데 이 다섯 나라 중에서 한국은 유독 재정 지출을 작게 한 나라다.

뉴질랜드는 GDP의 19.3퍼센트, 호주는 18.4퍼센트, 일본은 16.5퍼센트를 썼고, OECD 국가는 아니지만 제로 코로나 정책을 편 대표적 국가인 싱가포르가 18.4퍼센트를 썼는데, 한국은 GDP의 4.5퍼센트만을 썼다. 한국GDP가 2000조 원쯤이니 다른 나라들보다 연간 270조 원을 덜 쓴 것이다. 애초에 불평등한 한국이 더욱 불평등해질 수밖에 없었다.

국내 500대 기업의 올해 상반기 영업이익은 지난해보다 100조 원 이상 늘어났다. 반면 청년 확장실업률을 보면, 코로나 이전인 2019년에 22퍼센트였던 것이 올해 들어 29퍼센트로 급증했다.

필수 노동자들은 박수만 받았을 뿐 노동조건 개선이나 인력 충원은 거의 없었고 오히려 상황이 더 악화됐다. 자영업자들은 반란을 일으켜야 한다고 얘기할 정도다. 자영업자들이 거리로 나와야 할 정도라면 이들이 고용했던 노동자들은 어떻게 됐을까?

고용, 소득, 사회보장, 주거 등 모든 생활지표가 나빠졌다.

사망률과 경제성장률을 보면, 한국의 대응은 상대적으로 성공한 게 맞다. 그러나 그 과실은 대기업이 가져갔고, 노동자·서민의 삶은 더욱 팍팍해졌다.

누가 코로나19의 부담을 졌는가? K-방역의 성공은 노동자·서민을 갈아 넣어 만든 것이다.

직장과 집회에서 어느 쪽이 더 안전한가

그러나 노동자·서민이 팍팍해진 삶을 개선하라고 호소할 권리는 금지돼 왔다. 건강보험콜센터 집회를 보자. 이 노동자들의 원주 집회는 하루 전에 금지 통고를 받았다. 심지어 우파 언론들은 집회로 모이려는 노동자들을 좀비에 비유했다.

건강보험콜센터 노동자들은 코로나 시기에 사람 목숨을 지키는 필수 노동자이다. 이들은 말로는 박수를 받는 노동자였지만 그들이 자기 권리를 주장하는 순간 좀비가 됐다.

“우리는 파업하고 집회하는 게 직장에 있는 것보다 훨씬 안전해요”.

건강보험콜센터 노동자들이 집회 금지를 통보받은 후 한 말이다. 실제로 올해 5월까지 콜센터에서 발생한 코로나 집단감염만 23번이고, 감염자만 630여 명이다.

작업장은 코로나에 위험했다. 자본가들이 방역을 위한 조처를 제대로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물류센터에서는 계속해서 집단 감염이 일어났다. 쿠팡물류센터는 매달 감염이 일어나다시피 했고, 부천물류센터는 한 달에 2번 문을 닫은 적도 있지만 기업주가 처벌받지 않았다. 반면 민주노총 위원장은 발생하지도 않은 코로나 감염으로 구속됐다.

지금까지 집회에서 코로나 집단감염이 일어난 단 한 건, 지난해 8.15 태극기 집회 560명이 유일하다. 이 집회는 사랑제일교회 확진자들이 참여했고, 마스크를 안 쓰는 등 방역수칙을 깡그리 무시했다는 점에서 예외적이었다. 그리고 이 500여 명이 집회에서 감염된 사람들의 전부다.

민주노총의 어떤 집회에서도 감염자가 없었고 다른 어떤 집회에서도 감염자가 없었다. 태극기 집회가 유일한 사례인데 이렇게 쳐도 집회 감염자는 전체 감염자 34만여 명의 0.16퍼센트다. 그러나 정부는 모든 집회에 금지 조처를 내렸다.

설사 집회에서 코로나에 감염될 위험이 있다고 치자. 1908년 뉴욕의 여성 노동자들이 왜 굶고 있는데 파업을 하는가라는 질문에 답한 말이 있다. “우리는 일해도 굶고, 파업을 해도 굶는다”.

노동자들은 직장에서 코로나에 더 위험하다. 올해 7월 코로나가 가장 극심했을 때 서울 코로나 감염자의 35퍼센트가 직장 감염자였다.

위드 코로나와 ‘터널의 끝’

문재인 정부는 지난 5월 취임 4년 연설문에서 이제 터널의 끝이 보인다고 말한 바 있다. 백신 접종이 끝나면 일상으로 되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며 말이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다. 예견된 바이러스 변이 때문에 백신의 효율은 시간이 지나면서 60~80퍼센트까지 떨어지는 것이 밝혀졌다. 전 국민의 80퍼센트가 백신 접종을 완료해도 효율이 80퍼센트이니 64퍼센트밖에 면역이 없다. 집단면역은 불가능한 것이다. 위드 코로나의 대표격인 영국에서는 매일 100~200명의 사망자가 발생한다.

지금 시기는 ‘터널의 끝’이 아니다. 처칠을 인용하자면, “끝이 아니며 ‘끝의 시작’도 아니다, 굳이 말하자면 ‘시작의 끝’일 뿐이다”.

인구의 70~80퍼센트가 접종을 완료하더라도 진짜 일상으로의 복귀하기까지는 앞으로도 몇 년이 걸릴지 모른다. 주기적 급증과 사망자 행렬도 계속될 것이다.

세계로 눈을 돌리면 상황은 더 절망적이다. 지금까지 백신을 한 번이라도 맞은 사람은 세계 인구의 47.5퍼센트로 절반이 채 안 된다. 최빈국에서는 1번이라도 접종을 한 사람은 2.7퍼센트에 불과하다. 이 속도로는 2025년에야 전 세계 백신 접종이 끝날 수 있을 것이라는 계산이다.

옥스팜이 올해 4월에 발표한 보고서를 보면, 백신 수익으로 새로 억만장자가 된 9명이 번 돈만 있으면 전 세계 최빈국 사람들에게 백신을 두 번 접종을 할 수 있다고 한다. 또 이미 억만장자였던 8명과 그 가족들이 백신으로 번 돈만으로도 인도 인구에 맞먹는 12억 명에게 2번 접종을 할 수 있다고 한다. 전 세계의 한편에서는 인류 절반이 백신을 구경도 못 하고 있는데 다른 한편에서는 백신으로 천문학적 이윤을 쌓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백신에 대한 지적재산권 면제 요청은 WTO에서 통과되지 않는다. 백신 기업들과 이들을 지지하는 정부, 그리고 특허와 지재권이 이윤의 원천인 몬산토 등 농축산 기업(종자의 특허)과 구글, 삼성전자, 마이크로소프트 등 빅테크 기업들 때문이다.

반복될 팬데믹과 기후위기

그런데 더욱 전망을 어둡게 하는 것은 코로나 팬데믹이 마지막 팬데믹이 아닐 것이라는 점이다. 세계보건기구가 예상한 팬데믹 후보 목록 중 코로나19는 맨 마지막에 이름도 없는 8번째 질병(“질병 X”)이었다.

많은 질병학자들이 앞으로는 팬데믹 발생 주기가 더욱 짧아질 것으로 예상한다. 3년에 한 번씩 팬데믹이 올 것이라고 예상한 학자도 있다.

팬데믹의 근원 농축산 기업들의 열대 우림 파괴로 인간과 박쥐가 맞닥뜨리게 될 기회가 많아진 것이 팬데믹 창궐의 배경이었다. 인도네시아 파푸아 섬에서 포스코가 팜유 농장을 조성하려 27,000헥타르에 이르는 열대 우림을 파괴한 모습 ⓒ출처 Mighty Earth

문제는 팬데믹의 원인이다. 박쥐는 포유동물인데도 바이러스를 자신의 몸에 많이 지니고 있다. 포유동물로서 날아야 하니 신진대사율을 높여야 하고, 그래서 체온이 40도 정도로 높다. 많은 바이러스와 함께 공생할 수 있게 된 이유다.

원래 박쥐는 인간과 만날 일이 많지 않다. 그런데 거대 농축산기업들이 플랜테이션 농업으로 전 세계에서 열대우림을 파괴하는 것, 도시와 도시 사이에서 공장식 농장을 확대시키는 것과 비례해, 박쥐와 인간이 맞닥뜨리게 될 기회가 많아졌다. 인간이 키우는 가축은 밀집·밀접·밀폐된 ‘3밀 상태’에 있고, 이 속에서 바이러스는 최적의 변이와 번식의 기회를 갖게 된다.

그러자 박쥐에게 있던 바이러스가 인간과 인간이 키우는 가축으로 더욱 자주 넘어온다. 사스와 메르스에 이어, 코로나19가 코로나 바이러스로는 셋째로 종간 장벽을 넘어섰다. 코로나 바이러스만이 아니다. 에볼라나 니파 바이러스가 바로 이러한 경로를 통해 인간에게 역병을 일으켰고, 다음 번 팬데믹 후보 목록 맨 위에 있다.

자본주의적 공장식 축산업은 이미 신종플루와 조류독감으로 팬데믹의 근원이 될 능력을 보여 준 바 있다.

그런데 화석연료 기업과 더불어 거대 농축산기업들이 바로 기후 위기를 불러온 또 하나의 원인이기도 하다.

상시적 재난의 시대

기후 재난이 궁극적으로 인류의 멸종을 불러온다고 해서 그것이 마치 혜성 충돌처럼 어느 날 갑자기 찾아와 인류가 모두 한꺼번에 사망하는 이벤트가 벌어진다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호주와 유럽에서 발생한 대규모 산불, 규모가 커진 태풍과 허리케인, 심각해진 황사와 대기오염, 기후 위기로 인한 감염병 증가, 식량 위기 등 여러 기상 이변과 재난들이 늘어나고 희생자가 점점 늘어나는 것이다.

당장 대기오염으로 인한 사망자수는 2020년 한 해에만 450만 명이었다. 팬데믹으로 인한 사망자 수보다 훨씬 많다. 기후 위기의 규모는 팬데믹보다 훨씬 크며 그 피해도 더 크다.

그리고 코로나 팬데믹에서 잘 드러난 것처럼 재난은 결코 평등하지 않다. 팬데믹보다 훨씬 큰 재난이 계속해서 발생한다고 생각해 보라. 지구상의 약자들이, 또 한 국가에서 약자들이 가장 큰 피해를 본다. 자본가들과 부자들은 기후 위기를 맨 마지막까지 피할 수 있다. 반면 노동자·서민은 기후 위기의 재난들을 맨 몸으로 맞닥뜨리게 될 것이다. 마치 코로나19처럼 말이다.

기후 위기는 자연 재난으로만 오는 것도 아니다. 팬데믹처럼 경제 위기로, 그리고 나아가 군사적 갈등 심화로 발전해 사회적 재난, 군사적 분쟁으로 찾아올 것이다.

정치인들과 기업가들의 팬데믹 대응이 철저히 무능했던 것처럼 앞으로의 기후 재난에 대해서도 이들은 모든 것을 해결할 것처럼 얘기하지만 실제로는 전혀 행동을 취하지 않는다.

코로나19, 기후 재난으로 가장 고통을 당할 사람들이 바로 노동자이고 그것을 진정으로 해결할 힘을 갖고 있는 것도 노동자들이다. 민중의 호민관으로서, 전 인류를 재난에서 보호하기 위해 노동자들이 나서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