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만 폭격 80년:
태평양전쟁은 미국의 아시아 해방 전쟁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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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12월 7일 일본군이 하와이 진주만의 미 해군 기지를 폭격했다. 태평양 전쟁의 개전을 알린 사건이었다.
태평양 전쟁 발발로 제2차세계대전은 진정으로 세계 전쟁이 됐다. 세계 주요 강대국 모두가 싸우게 됐다.
전투 지역도 확대됐다. 그 전까지 전투는 유럽과 그 식민지 일부(중동·북아프리카)에서 주로 벌어졌다. 하지만 태평양 전쟁 발발로 인해 동으로는 하와이, 서로는 버마, 북으로는 중국, 남으로는 호주에 이르기까지 유사 이래 가장 넓은 지역이 전쟁의 참화에 휩싸였다.
태평양 전쟁은 3년 반 동안 이어졌다. 제2차세계대전 전체 사망자 수의 약 절반에 해당하는 최대 3600만 명이 이 전쟁에서 사망했다. 그중 약 3000만 명이 민간인 사망자로 추산된다.
흔히 이 전쟁의 원인을 일본의 호전성 탓으로 설명한다. 미국은 이에 맞서 한반도 등 수많은 지역을 해방시키려 ‘선한 전쟁’을 불사한 것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물론 일본이 엄청난 야만을 자행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진실은 그 이상이다.
미·일 경쟁의 귀결
일본의 진주만 폭격은 놀라운 일이었지만 동시에 예견된 사건이었다. 놀라움은 진주만이 일본 본토에서 한참 먼 곳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미 중국에서 전쟁을 벌이고 있던 일본이 나아가 동남아시아를 노린다는 사실은 전혀 비밀이 아니었다. 그 지역을 지배하던 모든 열강이 이미 일본의 침공에 대비하고 있었다.
공황에서 전쟁으로
일본 국가는 1868년 메이지 유신 이래 자본주의 발전을 추진했고, 국가 관료와 소수 대자본의 긴밀한 협력하에 대만·조선 등을 식민 점령하며 성장했다.
특히 일본은 1929년 대공황에 대응해 군사적 팽창 노선으로 전환했다. 일본은 1931~32년 만주를 점령해 수탈하고 국가 주도의 강력한 산업 통제로 경제를 가동해, 다른 주요국들보다 몇 년 빨리 불황에서 빠져 나왔다. 1934년 일본의 산업 생산은 1929년보다 28.7퍼센트 높았다.
하지만 이런 성장은 한계가 있었다. 일본이 거두는 이윤은 점령지에 축적된 잉여가치를 대거 몰수하고 그 지역의 값싼 노동력을 사용함으로써만 유지될 수 있었다. 하지만 일본의 식민지는 다른 강대국들에 견줘 턱없이 작았다.
당시 세계 주요 경제권은 모두 불황에 대응해 블록화(보호 무역주의) 경향을 강화했고, 교역이 수십 년 후퇴했다.
일본이 호황을 유지하려면 식민지를 확장해야 했다. 이는 곧 기존 제국주의 열강의 세력권을 침범하고 그들의 식민지를 일부 빼앗아야 함을 의미했다. 이것이 이른바 ‘대동아공영권’ 구상의 핵심이었다.
중국 대륙이 일본의 첫 번째 타깃이었다. 그러나 중일전쟁은 곧 교착 상태에 빠졌다. 일본의 경제 규모로는 그런 대규모 전쟁을 감당할 수 없었다. 중국 내 무장 저항도 끈질기게 일어났다.
일본은 새로운 전쟁을 벌여서 교착 국면을 돌파하려 했다. 석유·고무 등 중요한 전략 자원이 풍부한 동남아시아가 다음 목표가 됐다.
‘아메리카 태평양 제국’
하지만 당시 동남아시아는 무주공산이 아니었다. 영국·프랑스·네덜란드·미국이 수많은 섬과 반도를 분할 점령하고 있었다. 특히 일본의 침략 시도는 미국의 이해관계를 거스르는 일이었다.
일본에 맞선 미국의 대응은 인도주의와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미국은 일본이 19세기 후반부터 수십 년간 벌인 식민 점령도, 난징 대학살 등 중일전쟁에서 민간인을 대량 살상한 것도 보아 넘겼다.
미국은 나치가 유럽을 참화로 밀어 넣고 유태인 수백만 명을 학살할 때도 그것을 막으려 참전하지 않았다. 미국은 영국 등에 막대한 군수물자를 제공하긴 했지만, 그 대가로 영국의 금 준비금과 해외 투자금을 몽땅 쓸어가고 그 전까지 영국 몫이던 시장들에 대한 접근권을 확보했다.
미국의 속내는 제2차세계대전 발발로 유럽 강대국들이 혼란을 겪는 틈에 자국의 영향력을 넓히는 것이었다. 당시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는 식민지에 대한 유럽의 통제가 약화되면 그 식민지들이 미국에 정치·경제적으로 의존하게 되리라 봤다.
그래서 미국은, 일본이 아시아·태평양 지역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을 위협했을 때에야 비로소 참전한 것이다.
일본이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차지하며 남진 야욕을 본격적으로 드러내자, 미국은 대(對)일본 석유·철강 금수 조처를 내렸다. 그러면서 중국 대륙에서 완전 철수하고 국민당이 이끄는 중화민국을 인정하라고 일본에 요구했다.
일본은 이를 자국의 팽창 전체를 되돌리라는 요구로 이해했다. 그래서 남방 진출에 최대 걸림돌이 됐던 진주만의 미국 함대를 공격하는 것으로 응수했다.
요컨대 쟁점은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통제권이었지, 자유나 해방이 아니었다.
총력전
일본의 계산은 진주만 기습으로 미군이 타격을 입어 주춤한 사이에 태평양·동남아시아 주요 지역을 빠르게 점령한 후 미국과 협상한다는 것이었다. 일본은 미국이 유럽 전선도 신경써야 한다는 점도 계산했다.
실제로 진주만 폭격 후 6개월 만에 일본은 남으로는 남태평양, 서로는 버마에 이르는 광범한 지역으로 진출했다.
하지만 총력전이 본격화되면서 강박적 경쟁의 논리가 지배하게 됐다.
일본은 나름 제한적·‘합리적’으로 설정하고 달성한 목표치를 방어하기 위해서라도 판돈을 키워야 했다. 물러섰다가는 이제까지 건 판돈을 모두 잃게 될 터였다.
미국도 일본이 파멸할 때까지 판돈을 키울 태세가 돼 있었다. 미국은 다른 참전국 모두를 합친 것보다 많은 군비를 쏟아부었다.
미국은 자국 자본주의에 대한 국가 통제를 비약적으로 강화해, 1930년대 대불황으로 유휴 상태에 빠졌던 생산력을 전면 가동했다. 국가가 군수 부문뿐 아니라 민간 부문의 생산과 분배를 직접 관장했다(전시 경제). 그 결과 3년 만에 국내총생산이 2배로 뛰었다(1940년 970억 달러 → 1943년 1900억 달러).
‘뉴딜’이 아니라 전쟁이 미국을 불황에서 벗어나게 한 것이다.
파괴
이로써 미국은 막강한 파괴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일례로 미국은 제2차세계대전 기간을 통틀어 항공모함을 총 141척 건조했는데, 이는 나머지 국가들의 항공모함 수를 모두 합한 것보다도 많은 것이었다.
이 전력의 일부를 투입해 미국은 태평양의 제해권을 확보하기 시작했다. 필수 자원 일체를 수입에 의존하던 일본으로서는 당장에 생산력(따라서 군비 경쟁 능력)이 둔화됐다.
일본은 조선을 비롯한 식민 점령 지역 전체를 극도로 쥐어짜 총력전을 이어갔다. 폭력·기아·질병이 일본의 식민지를 휩쓸어, 한 추산에 따르면 민간인 최대 1000만 명이 사망했다. 점령지를 방어하기 위한 일본의 비이성적 전쟁 수행(자살 공격 등) 역시 대개 이 시기에 벌어졌다.
전쟁 발발 1년을 약간 넘긴 시점인 1943년 상반기를 지나면서, 이미 일본의 열세는 뚜렷해졌다.
그렇다고 전쟁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미국은 일본의 점령 지역을 야금야금 먹어 들어가며 태평양 지역에 대한 통제권을 굳히는 방식으로 전쟁을 수행했다. 섬 하나하나를 뺏고 빼앗기는 유혈 낭자한 전투가 지리하게 이어졌다.
전투는 막대한 민간인 희생을 동반했다. 미국은 50만 톤이 넘는 폭탄을 쏟아부었다. 전투병 대비 민간인 사망자 비율이 이전 어느 전쟁보다 높았다.
미국은 일본의 열세가 뚜렷해진 1944년 10월부터 약 9개월 동안 일본 열도에 폭탄 16만 톤(핵폭탄 제외)을 쏟아부었다. 이 폭격으로 도시 수십 곳이 파괴됐고, 민간인 100만 명이 사망하고 1300만 명이 집을 잃었다. 기아가 만연했다.
미국은 일본이 반항을 도모할 힘 자체를 파괴할 작정이었다. (히로시마를 제외한) 일본의 대도시 모두와 산업 생산력 60퍼센트가 파괴됐다.
히로시마
이미 일본의 패망은 기정사실이었다. 1945년 7월 초부터 일본은 항복 협상을 타진했다. 미국 전쟁부 보고서는 이렇게 썼다. “소련이 [태평양] 전쟁에 개입하지 않고 [미국이] 일본 본토에 대한 추가 공격을 계획·기도하지 않아도 일본은 전면 항복할 것이다.”
그런데도 미국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핵폭탄을 투하했다(각각 8월 6일·9일). 지금까지도 유일한 핵폭격이다.
사망자의 압도 다수는 민간인이었다. 이 도시들은 그 전까지 미군의 폭격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전쟁 난민이 대규모로 몰려 있었고, 그래서 피해가 극대화됐다. 희생자 중에는 조선인들도 많았다.
미국이 핵폭탄을 사용한 것은 소련 때문이었다. 만주를 가로질러 빠르게 진격 중이던 소련군보다 먼저 일본의 항복을 받아내야 전후 처리에서 미국이 우위에 설 터였다. 그 전에 미국의 위력을 소련과 전 세계에 과시해야 했다.
이 때문에 《미국 민중사》를 쓴 하워드 진은 핵폭탄 투하가 “대(對)소련 냉전 외교에서 미국이 첫 번째로 벌인 주요한 행동이었다”고 지적했다.
전쟁이 낳은 세계
제2차세계대전에서 승리한 미국은 명실상부한 세계 최강국이 됐다. 일본을 꺾으면서 태평양 전역과 동남아시아 대부분에 대한 통제권을 확보했고, 일본 침공 이전에 이 지역을 식민 점령하던 서방 국가들도 미국의 우위를 인정해야 했다.
그렇다고 일본과 다른 열강의 식민지들이 미국에 의해 해방된 것이 아니었다. 많은 경우 식민지 민중의 해방 염원은 제국주의 간 거래에 밀려 배신당하고 무시됐다.(관련 기사: 격주간 다함께 47호, ‘“해방은 도둑같이 뜻밖에 왔다”’) 한반도는 미군과 소련군에 분할 점령됐다. 베트남이나 인도네시아 등지에서는 옛 식민지 주인들이 돌아오는 바람에 현지 민중은 유혈 낭자한 민족해방 전쟁을 벌여야 했다.
사상 최대의 제국주의 전쟁이 끝나기가 무섭게, 미·소 냉전이라는 또 다른 제국주의 경쟁이 시작됐다.
널리 알려져 있듯이 미국은 소련·중국에 맞서 일본의 경제를 재건하고 재무장하게 했다.(관련 기사: 본지 117호, ‘냉전기 미국의 대일본 전략’)
미국이 그때부터 지금까지 유지해 온 아시아·태평양 지역에 대한 통제력이 오늘날 중국의 도전에 직면해 있다. 이 지역에 대한 통제력을 바탕으로 세계 질서를 지금의 형태로 구축하는 데에 공을 들인 미국으로서는 결코 물러서지 않을 것이다.(관련 기사: 본지 390호, ‘알렉스 캘리니코스 초청 강연: 미국 vs 중국, 세계는 신냉전인가?’)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제2차세계대전과 태평양 전쟁의 역사를 돌아보며 경각심을 되살려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