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전기 미국의 대일본 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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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중국의 동중국해 방공식별구역 설정은 동아시아의 제국주의 간 긴장과 갈등 수준을 대폭 끌어올리고 있다.
지난달 미일안전보장협의회에서 미국이 일본의 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공개적으로 지지하고 동맹을 강화한 것이 중국을 자극했을 것이다.
미국은 동아시아에서 중국을 견제하는 데 일본이 더 큰 구실을 해 주기를 바란다. 특히 냉전 해체 이후, 두 나라는 전후 일본의 군사대국화를 가로막아 온 제약들을 허물면서 군사적 일체화를 향해 나아갔다(본지 115호 ‘냉전 해체 이후 미국의 대일 전략’ 참조). 이것은 일본의 군사대국화에 날개를 달아 주고 있다.
그런데 이 재앙의 씨앗은 이미 냉전기에 뿌려졌다. 1945년 이래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의 핵심은 일본을 미국의 동맹으로 묶어 두고 일본이 미국의 동아시아 ‘대리인’ 구실을 하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오늘날 일본 국가의 뿌리는 제2차세계대전 종전 직후로 거슬러 올라간다. 흔히 일본의 초기 점령 정책은 ‘민주화·비군사화’로 불린다. 하지만 일본에서 우익 정권이 수립되기를 바란 미국은 전후에 천황의 지위를 유지시켜 줬고, 전범들을 정부 안으로 받아들였다. 종전 직후에 폭발한 노동자들의 저항과 급진화에 맞서 일본 자본주의 체제를 방어하기 위해서였다. 1946년 5월 1일 전국 곳곳에서 열린 메이데이 집회에 경찰 추산으로만 1백25만 명이 참가했을 만큼, 당시 일본 노동자들의 투쟁은 체제를 뒤흔들고 있었다.
소련이 핵실험에 성공하고 중국에서 공산당이 권력을 잡자 미국에게 일본의 전략적 가치는 매우 중요해졌다. 미국은 일본의 경제 재건과 재무장을 서둘렀다(‘역코스’). 일본이 동아시아에서 ‘반공의 방파제’ 구실을 할 수 있게 해야 했다.
한국전쟁 중에 미국은 일본 공산당과 노동운동을 대대적으로 탄압했고(‘레드 퍼지’), 일본에 (장차 자위대로 발전할) 경찰예비대 창설을 요구했다.
1951년 미국은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대일 강화조약) 체결을 주도해, 일본이 전쟁 책임을 거의 지지 않고 독립할 수 있게 해 줬다. 동시에, 미일안보조약을 체결해 미군이 일본에 계속 주둔할 ‘권리’를 보장받았다. 이것은 일본이 미국의 세계 전략에 편입되는 것을 의미했다.
또, 미국은 자유당의 개헌 시도를 지지하고, 개헌을 실현할 강력한 세력을 형성케 하려고 두 보수 정당(자유당과 민주당)의 통합을 지원했다.(이 개헌 시도는 성공하지 못했다.)
1960년 미국과 일본은 한 걸음 더 나아가려 했다. 1957년 말 소련이 미국보다 먼저 대륙간탄도미사일 실험에 성공하고, 이듬해 중국과 대만이 대만해협에서 군사 충돌을 벌이자, 동아시아 지역에서 군사적 긴장이 높아졌다. 이런 상황을 배경으로 미국과 일본은 미일안보조약을 개정했다. 새 미일안보조약은 미군이 일본에 계속 주둔하는 것뿐 아니라(제6조), 미일 공동작전(제5조)과 일본의 군비증강(제3조)을 새로운 의무로 규정하는 내용도 담고 있었다.
최근 미국은 거듭 댜오위다오(일본명 센카쿠)가 “미일 안보조약의 적용 대상”이라고 확인했는데, 바로 이때 개정된 안보조약 제5조(‘어느 한쪽이 무력 공격을 받으면 이를 자국에 대한 위협으로 받아들여 미-일이 공동 대처한다’)에 근거한 것이다.
애초에 미국은 이 조약에 ‘집단적 자위 능력을 발전시킨다’는 문구를 포함시키고 집단적 자위권의 적용 범위를 ‘태평양’ 지역으로 규정하고 싶어 했다. 그러나 국내의 반발을 의식한 일본 정부의 반대 때문에 이런 내용은 포함될 수 없었다.(이것은 일본의 집단적 자위권 도입이 미국의 숙원 사업이었음을 보여 준다.)
그럼에도 새 안보조약이 미-일 공동작전과 일본의 군비 증강을 위한 근거를 마련한 것은 분명했다. ‘헌법 규정을 따른다’는 조건을 달았지만, 헌법을 확대 해석하면 얼마든지 자위대의 활동 수준과 범위를 넓혀 나갈 수 있는 것이었다.
안보 투쟁
일본 민중은 격렬하게 반발했다. 일본 민중은 일본이 미국과의 군사동맹을 강화해 미국의 전략에 더 깊숙이 편입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수만에서 수백만 명 규모의 대중 시위가 벌어졌고, 이 투쟁은 1960년 6월 15일 5백80만 명이 참가한 2차 총파업으로 절정에 올랐다. 저항이 얼마나 거셌던지, 당시 총리 기시 노부스케는 저항을 잠재우려고 자위대 동원까지 고려했을 정도였다.
이 때문에 아이젠하워의 일본 방문이 좌절됐고, 기시 내각은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이 투쟁은 안보조약 시행을 저지하지는 못했지만, 일본과 미국 지배자들에게 일본 대중의 강력한 반전·평화 정서를 확인시켰다.
크게 놀란 일본 지배자들은 이후 헌법 개정과 재무장 추진을 단념했고, 한동안 미국도 일본에 군사적 요구를 하는 것을 자제해야 했다. 이 때문에 냉전기 미국의 아시아 패권 전략에서 일본의 주된 구실은 (미군) 기지 제공과 (아시아의 반공 정권에 대한) 경제 지원에 머물렀다.
물론 일본의 이러한 기여(기지 제공과 경제 지원)는 미국이 동아시아를 지배하는 데 매우 값진 것이었다. 특히 오키나와 미군기지를 유지하는 것은 (지금까지도) 미국이 결코 양보할 수 없는 ‘핵심적 이익’이다.
오키나와는 미·일, 한·미, 미·대만, 미·필리핀, ANZUS(미국·뉴질랜드·오스트레일리아) 동맹 등 냉전기에 미국이 아시아에서 구축한 반공 포위망의 중심이었다. 이런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오키나와는 “미국의 힘을 아시아 전역에 투사하는” 미국의 전초기지가 됐다.
미국은 1950년부터 본격적으로 오키나와에 미군기지를 건설했고, 이곳을 동아시아 최대 미군기지로 만들었다. 미국은 1952년에 일본 본토를 독립시킨 후에도 1972년까지 오키나와를 직접 통치했다.
베트남 전쟁 내내 오키나와 미군기지는 B-52 폭격기 등이 출격하는 기지이자 병참·보급·수리를 담당하는 기지로 이용됐다. 1965년에 미국 태평양사령부 총사령관인 그랜드 샤프는 “오키나와 기지가 없었다면 미국은 베트남 전쟁을 치를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베트남 전쟁 기간 동안 미국은 오키나와를 식민지처럼 통치했다. 이 때문에 오키나와 주민들의 불만이 폭발했다. 이 때문에 1972년 미국은 일본 정부에 오키나와를 반납해야 했다. 그러나 이것은 형식 상의 변화였을 뿐, 미군 기지의 존재는 변한 것이 없었다.
1995년 한 소녀가 미군들에게 강간당한 사건을 계기로 또 한 번 저항이 분출했다. 미군은 문제가 가장 심했던 후텐마 기지를 이전하겠다고 약속했다. 오키나와인들은 후텐마 기지를 오키나와현 밖으로 이전하라고 요구해 왔다. 그러나 지금 미국은 오키나와현 나고시로의 이전을 추진하고 있다.
오키나와의 한 여성 활동가는 오키나와를 “미일 안보조약의 ‘쓰레기 하치장’”이라고 말한 바 있다. 오키나와인들은 미군에게 삶의 터전을 폭력적으로 빼앗겼고, 온갖 범죄의 희생자가 돼 왔다.
불행히도 최근 고조되는 동아시아의 긴장은 오키나와를 또다시 최전선으로 만들고 있다.
반공 정권 지원
미국은 동아시아에서 소련·중국의 영향력을 차단하고 반공 정권을 지원하는 데 일본의 경제력을 활용했다. 당시 미국의 입장에서 볼 때 이런 구실을 할 수 있는 경제력을 가진 나라는 일본이 유일했다. 미국은 일본이 동아시아 나라들과 교역을 확대하도록 지원하는 한편, 일본이 이 나라들에 경제 원조를 하도록 촉구했다.
특히 1964년 중국이 핵실험에 성공하고,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서 수렁에 빠지자 미국은 일본이 지역 안보에 돈(원조)을 더 많이 쓰라고 요구했다. 일본 정부와 기업들은 이런 원조를 일본 자본이 해외로 진출하는 기회로 삼았다.
1965년 13년 동안 질질 끌어 온 한일협정이 체결된 것도 이런 배경에서였다. 미국은 한국에 대한 지원을 일본에 맡기려 했다. 그래서 한국과 일본이 하루빨리 관계를 정상화하도록 압력을 가했다.
결국 일본은 한국에 무상 자금 3억 달러와 차관 2억 달러를 제공하기로 했다. 이 돈은 박정희 정권이 국가 주도 수출 중심 공업화를 추진하며 장기 집권 기반을 닦는 데 긴요하게 쓰였다. 같은 해에 일본은 대만에도 1억 5천만 달러 상당의 엔화 차관을 제공했다.
1967년부터 수하르토의 권력을 뒷받침하기 위해 일본 돈이 인도네시아로 대량 흘러 들어갔다. 일본은 이때부터 1970년대 내내 동남아시아 나라들 중 인도네시아에 가장 많은 엔화 차관을 제공했다. 이밖에도 일본은 말레이시아, 타이, 필리핀 등에도 경제 원조를 했다.
가라앉지 않는 항공모함
1980년대 신냉전을 배경으로 미국은 일본에 더 대담하게 요구했다. 1970년대부터 미국 자본주의는 이윤율 저하에 시달렸다. 1950년대와 60년대의 ‘황금기’에 미국의 군비 지출은 세계경제 전체를 떠받쳤는데, 이제 그 대가를 치르게 됐다. 막대한 군비 지출이 미국 경제에 부담으로 작용하기 시작했다.
반대로 냉전기에 일본은 방위비를 GNP의 1퍼센트 이하로 낮게 유지하며 생산적 부문에 더 많이 투자할 수 있었고, 생산성과 경쟁력에서 미국을 바싹 추격하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미국 내에서는 일본이 ‘안보 무임 승차’를 그만둬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졌다. 미국은 일본이 더 많은 돈과 힘을 쓰게 함으로써 미국의 부담을 줄이고자 했다.
이즈음부터 일본은 주일 미군 주둔 비용을 분담하기 시작했다(‘배려예산’). 레이건 정권하에서 일본에 대한 군비 증강 압력은 더한층 강화됐다. 경제 전선에서 미국이 플라자 합의를 관철시킨 것도 이때다. 1978년 미·일은 미일방위협력지침(구 가이드라인)을 제정했는데, 이것은 처음으로 외부 위협에 의한 일본의 ‘유사사태’를 염두에 두고 미군과 자위대의 공동 작전 계획을 구체화한 것이다.
1982년에 당선한 일본 총리 나카소네는 미국의 책임 분담 요구를 적극 수행할 태세가 돼 있었다. 나카소네는 ‘뼛속까지 헌법 개정론자’였고, 평화헌법으로 상징되는 ‘전후 정치를 총결산’해야 한다는 소신을 공개적으로 밝힌 최초의 정치인이었다.
1983년 나카소네는 미국에 가서 소련의 백파이어 폭격기에 대비해 일본을 ‘가라앉지 않는 항공모함’으로 만들겠다고 말했다. 나카소네는 서방 세계 제2위라는 경제적 지위에 걸맞은 군사력을 갖추고자 한 일본 지배자들의 열망을 대변했다.
실제로, 나카소네 내각은 1986년에 방위비를 늘려 GNP 대비 1퍼센트를 돌파했고, ‘무기 수출 3원칙’을 완화해 미국에 무기 기술을 제공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1983년 방위청은 ‘공해상에서 핵무기를 적재한 미국 함정을 자위대 함정이 호위할 수 있다’는 해석을 내렸다. 일본은 미국의 전략방위구상(일명 ‘스타워즈’) 연구에도 참가하기로 했다.
전쟁범죄국
이처럼 냉전기에 일본은 미국의 동아시아 지배에서 핵심 파트너 구실을 해 왔다. 일본은 미국이 일본 영토에 동아시아에서 가장 큰 미군 기지를 지을 수 있게 보장했고, 동아시아의 친미 반공 정권을 지원하고 주일 미군 주둔 비용을 제공하는 등 이 지역의 안보 비용을 미국과 분담했다.
일본 지배자들은 미국의 전략에 편입돼 성장하는 전략을 취했다. 일본은 미국 시장에 진출할 기회를 보장받았고, 미국의 든든한 후원 아래 동아시아 경제에도 진출했다.
그러나 이 동맹에는 항상 제약이 뒤따랐다. ‘전쟁범죄국’라는 멍에 때문에 일본은 동아시아에서 미국의 가장 중요한 동맹이었음에도 미·일 군대가 일본 바깥에서 군사작전을 함께 펼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냉전 해체 이후 두 나라 지배자들은 이 제약을 무력화시켜서 동맹의 무대를 동아시아로, 나아가 전 세계로 넓히려고 안간힘을 써 왔다. 즉, 언제 어디서든 필요할 때면 두 나라 군대가 어깨 걸고 전투에 나설 수 있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두 나라 지배자들의 시도가 그저 순탄하게 관철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일본과 미국의 군사적 모험에 맞서 일본 민중이 얼마나 격렬하게 저항했는지는 다음 기회에 살펴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