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20일 노무현 정부가 한미동맹의 최대 이슈였던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을 인정하기로 합의하면서 논란에 휩싸이고 있다. 정치권 내 분열 때문에 〈프레시안〉에는 각종 정부 문서들이 폭로되고 있다. 현재 이 논란은 신임 통일부장관 내정자 이종석에 대한 자격 시비로 비화하고 있다.
노무현 정부는 “미국은 한국이 한국민의 의지와 관계없이 동북아 지역 분쟁에 개입되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한국의 입장을 존중한다”는 합의 문구를 내세워, 이번 합의에 성과가 있었던 것처럼 말한다. 그리고 ‘전략적 유연성' 문제가 해외미군 재배치 계획이나 용산 미군기지 이전 문제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발뺌한다.
그러나 이번 합의는 “한반도가 동북아 주한미군 개입의 발진기지가 돼 우리 안보가 어려움에 빠져서는 안 된다는 우리 입장과 미국의 세계 군사전략을 서로 이해해서 만든 것”이라는 이종석의 말이 잘 보여 주듯 한국과 미국의 이해관계를 절충한 것이다.
실제로는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을 인정하는 것과 한국이 동북아 지역 분쟁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은 모순이다.
‘전략적 유연성'이란 세계 도처에 산재해 있는 미군을 신속대응군 형태로 재편해 분쟁지역에 집중 개입하는 전략을 의미한다.
그러나 미국의 군사전략 변화가 세계 체제의 불안정성을 제어하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신속대응군 체제의 시험장이었던 이라크 점령은 미국을 수렁에 빠뜨리고 있는 지경이다.
따라서 미군의 신속대응군 체제에 협력한다는 것은 세계 체제의 불안정한 각축장에 더욱 깊숙이 휘말린다는 것을 뜻한다. 즉, 남한 군대가 분쟁에 직접 개입하지 않으려 하더라도, 주한미군이 남한 내 미군 기지를 거점으로 동북아 지역에 군사적으로 개입한다면 그 결과 한반도가 분쟁의 소용돌이에 빠질 수 있다.
이런 위험이 있는데도, 노무현 정부는 이번 합의의 본질을 속이려 했다. 〈프레시안〉에 폭로된 국정상황실과 NSC 사이의 공방이 담긴 정부 문서들을 보면, 노무현 정부는 ‘전략적 유연성' 합의와 한미상호방위조약 적용 문제, 용산기지 이전 문제 등이 서로 관련이 없는 것처럼 꾸미기 위해 의식적으로 노력했다는 점이 잘 드러나 있다.
이는 노무현 정부가 “전략적 유연성을 부정하는 것은 주한미군 철수나 한미 간 지속적 갈등을 의미”한다는 부담 때문에, 미국의 이해관계를 근본적으로 거스르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실용주의적' 합의는 노무현 정부와 남한 지배계급이 처한 모순된 처지에서 비롯한 것이다. 남한 지배계급은 성장한 경제력에 걸맞는 독자적인 정치·군사적 영향력을 확대하려 한다. 그러나 그들은 미국 제국주의의 하위 파트너가 됨으로써 그렇게 하려 한다.
이 때문에 노무현 정부 하에서 한미동맹은 “친미적 자주”라는 모순된 표현으로 드러났던 것이다. 이번 ‘전략적 유연성' 합의는 노무현 정부의 ‘실용주의' 관점이 동북아 지역의 불안정을 근본적으로 해소하지 못한다는 점을 보여 줬다. 진정한 평화를 얻으려면, 제국주의 세계 체제 자체에 근본적으로 도전하는 운동을 건설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