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라크 전쟁 개전 20년:
세계 최강대국 미국을 수렁에 빠뜨린 전쟁
〈노동자 연대〉 구독
2003년 3월 20일 바그다드 현지 시각으로 오전 5시 34분,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했다.
네오콘 등 미국의 지배자들은 이에 앞서 이라크 침공을 공언해 왔다. 미국 부시 정부는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정권이 2001년 9·11 공격의 배후이며, 대량 살상 무기를 보유하고 있다는 거짓말을 퍼뜨렸다.
사담 후세인 정권은 미군 침공 한 달 만에 무너졌다. 5월 1일, 부시는 미 항공모함 에이브러햄 링컨호에서 “승전” 선언을 했다. 하지만 신속한 승리를 호언장담했던 미국은 이라크 전쟁이라는 수렁에 빠지고 말았다. 미군은 그로부터 8년이 지난 2011년 12월에서야 이라크에서 완전히 철군한다.
이라크에서 미군은 5000명 가까이 죽고, 수만 명이 부상 당했다.
이라크 국가와 사회 기반 시설의 붕괴는 급진 이슬람주의 단체들 중 ‘이라크·시리아 이슬람국가(ISIS)’와 같이 반동적 세력이 성장할 수 있는 배경이 됐다.
결국 미국은 힘의 한계를 느끼고 철군해야 했다. 중동에서의 패권을 강화하려던 미국의 애초 의도와는 달리, 이라크와 인근 국가에서는 오히려 이란의 영향력이 커졌다.
세계 패권의 재확립
냉전 종식 이후 미국은 유일한 초강대국으로 등극했다. 그러나 미국의 경제 권력은 일본, 독일뿐 아니라 새롭게 떠오른 중국 등 경쟁 국가들로부터 도전받고 있었다.
미국 지배자들은 여전히 압도적 우위인 군사력을 이용해 세계 패권을 공고히 하려 했다.
1990년대 동안 아버지 부시 정부와 클린턴 정부는 군사력을 사용해 세계 곳곳에 개입했다. 1991년의 걸프전쟁, 유고슬라비아 내전, 소말리아 등에서 미국은 군사력을 과시했다.
2001년 아들 부시 정부는 이런 경향을 더 강화했다.
부시 행정부에는 부통령 딕 체니, 국방장관 도널드 럼즈펠드, 폴 울포위츠와 같은 네오콘 인사들로 가득했다. 네오콘이 지지한 ‘미국의 새로운 세기를 위한 프로젝트’는 미국의 군사력를 적극 사용해 세계 패권을 재확립하는 게 목표였다.
이라크 전쟁은 바로 이런 목적을 위해 시작된 전쟁이다. 네오콘에게 2001년 9·11 공격과 이른바 ‘테러와의 전쟁’은 절호의 기회였다. 이들은 이라크를 장악해 중동에서의 패권을 강화하려 했다. 중동에서의 패권 재확립을 통해 중국·독일·일본 같은 경쟁자들이 중동 에너지 자원을 이용하는 과정을 통제하려 했던 것이다.
전쟁에 맞선 저항이 전 세계를 뒤덮다
미국의 계획은 완전하게 실패로 돌아갔다. 사담 후세인 정권은 한 달 만에 무너졌지만, 이라크의 무장 저항 세력은 점령 기간 내내 미군과 영국군을 괴롭히며 수렁에 빠트렸다.
국방장관 럼즈펠드는 소규모 첨단 군대를 이용해 ‘전환적 전투’를 벌여 신속하게 이라크를 장악할 것이라고 자신했다. 하지만 미군은 점령 초기부터 현지의 저항 운동에 직면했고, 2004년에 저항 운동의 중심 도시였던 팔루자를 완전히 파괴하고 2000명을 학살하고서야 이 저항을 꺾을 수 있었다.
국제적으로는 거대한 반전운동이 벌어졌다. 이미 이라크 전쟁 발발 전부터 전 세계 반전 여론은 고조되고 있었다. 이 운동에서 혁명적 좌파가 중요한 구실을 했다. 예컨대, 영국에서는 2001년 9·11 공격 열흘 만에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SWP)이 급진 좌파, 무슬림 단체들과 함께 ‘전쟁저지연합’이라는 공동전선을 결성해 반전운동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2002년에 세계 주요 도시들에서 수십만 명 규모의 반전 시위가 열리며 미국의 이라크 전쟁 시도에 대해 반대했다. 반전운동은 1999년 시애틀 항쟁으로 폭발한 대안 세계화 운동(반신자유주의 운동)의 여파와 만나 미국의 제국주의적 공세에 맞선 세계적 저항으로 발전했다.
미국의 이라크 침공 직전인 2003년 2월 15일, 전 세계적으로 1000만 명이 참여한 시위가 벌어졌다. 이탈리아 로마에서 300만 명, 스페인 마드리드와 영국 런던에서 100만 명이 넘는 시위대가 쏟아져 나왔다. 서울 마로니에 공원에서 수천 명이 참여한 반전 시위가 처음으로 열려, 한국에서도 반전운동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안타깝게도, 국제적 반전운동은 이라크 전쟁을 막거나 중단시키지 못했다. 미군의 이라크 점령 후에는 반전운동이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그러나 점령 후에도 계속된 국제 반전운동은 미국의 위선과 잔혹 행위들을 폭로했고, 세계적으로 높은 반전 여론을 형성하는 데 기여하며 미국에게 심각한 정치적·도덕적 타격을 줬다.
이라크 전쟁의 유산
부시는 테러의 온상을 제거하고, 이라크에서 민주주의를 확립하겠다고 공언했다. 그러나 이라크 점령의 실상은 학살, 파괴, 만행으로 점철돼 있었다. 미국의 이라크 침공으로 중동은 그 어느 때보다도 불안정하고 위험한 지역으로 전락해 버렸다.
특히, 미국의 침공은 이미 십수년 넘은 서방의 제재로 고통받아 온 이라크인들을 절망으로 몰아넣었다. 폭격으로 수많은 사회 기반 시설이 파괴돼, 다수의 이라크인들은 교육과 의료 서비스는 물론 기본적인 전기와 식수조차 제대로 공급받지 못했다. 민간인에 대한 오인 사살과 폭격, 인권 침해도 다반사였다. 미군의 점령으로 사망한 이라크인의 수는 100만 명에 달한다.
위키리크스 웹사이트는 미군의 학살과 만행, 점령군이 부추긴 격렬한 종파 간 갈등을 기록한 육군 보고서 무려 40만 건을 공개했다. 이 보고서에는 껍질을 벗긴 전선과 배터리, 호스가 자주 언급된다. 죄수들은 구타, 성적 학대를 당하고, 모욕을 당하고, 불과 화약 물질에 피부가 타고, 고통스러운 자세를 취하도록 강요받았다.
이 보고서들은 미국의 이라크 침공 목적이 “압제자로부터의 해방”이나 “민주주의”가 아니라 자국의 패권 강화였음을 잘 보여 준다.
미국은 사담 후세인 정권하에서 차별받았던 시아파를 후원하며 수니파와의 종파 갈등을 부추켜, 이를 점령에 이용했다. 그렇게 부추겨진 종파 갈등은 빈곤과 사회 인프라 파괴와 더불어 급진 이슬람주의 조직 ISIS가 부상하는 배경이 됐다.
인기 없는 점령을 유지해야 했던 미국은 결국 2011년 이라크에서 완전히 철군하게 된다. 이로부터 10년 후인 2021년 아프가니스탄에서도 완전히 철군했다. 미국은 세계 패권 재확립이라는 원대한 목표를 달성하기는커녕 상처투성이 모습으로 물러서야 했다.
20년 전의 반전운동이 폭로했듯, 결국 미국과 서방이 이라크를 침공하며 내세웠던 대의명분이란 것은 위선과 거짓일 뿐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제국주의 강대국들의 안중에는 전쟁으로 파괴되는 평범한 사람들의 삶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라크 전쟁 연표
2003년 2월 15일, 국제적 반전 시위에 1000만 명이 참여
2003년 3월 20일, 미국은 이라크에 대량살상무기가 있다며 침공 개시
2003년 4월, 한국군 이라크 파병 동의안 국회 통과(실제 파병은 2004년 2월)
2003년 5월 1일, 부시 승전 선포, 이라크 점령 시작
2004년 미군과 영국군, 점령 반대 운동의 거점인 팔루자를 공격해 2000명을 학살
2006년 시아파 출신 누리 알말리키가 초대 총리로 이라크 정부 수립
2007년 미군 대규모 추가 파병
2011년 12월, 미군 철수 완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