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세계는 심각한 지정학적 위기에 빠져 있다. 미중 갈등이 격화하고 우크라이나에서 서방 강대국들과 러시아 간 전쟁이 확전하면서, 강대국 간 충돌 가능성이 급격하게 높아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세계적 좌파 지식인 놈 촘스키가 공저한 새 책 《물러나다》(시대의창)가 2월 말에 출판됐다. 이 책은 촘스키가 좌파적 역사학자·언론인 비자이 프라사드와 나눈 대담을 기록한 것이다.
촘스키는 미국의 제국주의적 만행과 그에 대한 책임 회피·거짓말·위선을 폭로하는 데에서 손꼽히게 뛰어난 급진주의자다.
촘스키의 이런 장점은 이 책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된다. 촘스키는 미국이 “세계 어디서든 가장 커다란 피해와 폭력을 가하는 테러 국가”임을 풍부한 역사적 사례로 논증한다.
20세기 후반 이래 미국이 자신의 영향력 제고를 위해 베트남·라오스·아프가니스탄·이라크 등지에서 잔학한 짓을 저지르고, 라틴아메리카와 중앙아시아에서 우익 군벌들을 ‘대리 군대’로 육성하고(촘스키는 이것이 독재자들에 맞선 현지인의 저항을 방해했음도 지적한다), 경제 제재로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파괴한 것 등을 두루 밝힌다.
촘스키는 미국 지배자들이 ‘민주주의’나 ‘인도주의적 개입’을 운운하는 것도 가차 없이 비판한다. 이것은 공화당과 민주당을 불문하고 미국 지배자들이 “미국이 마음 내키는 대로 누구든 공격할 수 있게 하는 정치적·도덕적 정당화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런 지배자들을 비호하며 진실을 왜곡하는 지식인들에 대해서도 촘스키는 따끔한 일침을 가한다.
오늘날 지정학적 위기 상황에서 한국을 포함한 친서방 나라의 좌파들은 미국 주도의 서방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다. 그래서 촘스키의 이 같은 폭로와 주장은 특히 뜻깊다.
다만 촘스키가 종종 잘못된 대안으로 이끌리는 것은 아쉽다. 예컨대 이 책에서 촘스키는 중국을 비롯한 미국의 (잠재적) 경쟁국들의 부상에 진보성이 있다고 시사하거나, 유럽이 미국의 대외 정책에서 독립해서 국제 관계에 “급진적 전환”을 이룰 수 있으리라고 기대한다.
이는 촘스키가 미국의 제국주의를 진심으로 증오하지만 이에 맞선 투쟁의 전략은 분명치 않은 것과 연관 있다. 그럴듯해 보이는 여러 방안들을 나열하다 보니 문제적 주장들에 뒷문을 열어 주게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촘스키가 이 책에서 쉬운 말로 풍부하게 풀어낸 많은 폭로는 매우 유용하다.
이를 이용해 촘스키와 우리 모두가 증오하는 제국주의에 맞서 아래로부터 운동을 건설하는 것이야말로, 이 책의 서문에서 앤절라 데이비스가 기대한 “세계가 필요로 하는 미래를 만들 수 있는 유일한 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