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지식인의 자격》(노암 촘스키, 황소걸음):
지식인의 책임을 물으며 미 제국주의의 민낯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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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세의 언어학자 촘스키를 미국을 대표하는 행동하는 지식인으로 세상에 널리 이름을 알리게 한 《지식인의 책임》이 57년 만에 국내에 처음 소개됐다.
《지식인의 책임》은 베트남 전쟁을 배경으로 지식인의 위선을 고발하고 전 세계 지식인의 양심에 경종을 울린 촘스키의 가장 위대한 에세이로 알려져 있다. 여기에 ‘9·11 공격’ 10주년을 맞아 지식인의 위선을 다시 한번 고발하고 지식인에게 책임을 다할 것을 호소한 글(“지식인의 책임 후편 : 국가를 견제하기 위한 특권의 사용”)을 함께 묶어 《지식인의 자격》(노암 촘스키 저, 강성원·윤종은 역, 황소걸음, 2024)으로 펴냈다. 한국어판에 촘스키가 직접 서문을 썼다.
우크라이나 전쟁과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이 계속되고 있는 지금, 지식인의 책임을 묻는 촘스키의 이 책은 각별한 의미를 갖는다.
좋은 대학에서 학위를 받고 사회의 주목을 받으며 영향력을 행사하는 지식인들이 그 위치에 오른 건 자력에 의해서만은 아니다. 서구 사회에서 성공한 지식인들은 진실을 찾을 수 있는 시간적 여유와 시설, 공공교육 시스템의 훈련을 제공받았다. “특권은 기회를 제공하며 기회는 책임을 부여한다. 그렇기에 지식인은 저마다 선택을 해야 한다.” 그 결과 지식인들은 두 부류로 나뉜다. ‘가치 지향적인 지식인’과 ‘체제 순응적인 지식인’.
전자는 책임감 있는 지식인이다. 그러나 자주 ‘무대 뒤의 야인’으로 취급되거나 처벌받기 십상이다. 반면 ‘체제 순응적인 지식인’은 미래를 보장받을 수 있다. 미국의 범죄를 미화하거나 침묵한 대가로.
이 책은 미국의 제국주의 행태에 미국 지식인들이 어떻게 대응했는지를 분석한다. 1부에서 촘스키는 미국이 인도차이나반도에서 저지른 제2차세계대전 이후 최악의 범죄에 미국 지식인들이 어떻게 대응했는지를 상세하게 묘사한다.
촘스키에 따르면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국의 ‘체제 순응적 지식인’의 첫째 특징은 부정직과 거짓말, 과장이다. 아서 슐레진저, 월트 로스토가 대표적 인물이다. 이들은 소련과 중국이 인도차이나반도에 영향력을 행사하려 한다는 공포를 조장했다. 이를 위해 이른바 ‘가짜뉴스’를 퍼뜨렸다. 대표적인 가짜뉴스는 1946년 인도차이나반도에서 스탈린이 게릴라전을 벌였다는 것이었다. 1958년 북베트남이 전쟁을 시작했다는 것도 거짓말이다. 실제로 베트남 전쟁은 1964년 6월 미국의 공격으로 시작됐다. 이때에도 북베트남 어뢰정이 통킹만에서 미 해군 전함 매덕스 호를 두 차례 공격했다는 거짓 주장이 동원됐다.
또 다른 특징은 권력자들의 의도를 미화하기, 비판을 하더라도 실용적인 수준에서 머무르기. 미국의 베트남 전쟁은 선한 의도에서 시작됐지만 너무 길게 끈 게 실책이었다는 주장이다.
민중을 멸시하는 태도도 체제 순응형 지식인들의 특징이다. 이 책을 읽으면 학살이라는 “최종해결책”이 불가피하다는 결론을 내려고 친정부 지식인들이 베트남인들을 얼마나 깎아내렸는지 알 수 있다.
‘내로남불’ 논리도 체제 순응형 지식인들의 특징이다. 이들은 러시아가 아제르바이잔에 무력으로 친소련 정부를 세워 이란 석유에 접근하려는 것을 비난했다. 하지만 정작 1950년대 초 당시 이란 총리 모사데크가 석유 국유화를 추진했을 때 미국이 영국과 쿠데타를 추진해서 그 정부를 전복시킨 것에 대해선 ‘자유 진영’의 정당한 대응이라고 미 제국주의자들을 추켜세웠다.
또한 정직한 지식인들에게 비아냥거리거나 판에 박힌 딱지 붙이기. “감상적, 감정적, 신경질적 비판”, “도덕적 우월감에 빠진 조악한 반제국주의”. 이런 비판 문구가 낯설지 않다.
범죄 미화
2부에는 9월 11일에 발생한 두 사건(1973년에 민주적으로 선출된 칠레 아옌데 정부를 미국이 지원한 쿠데타로 전복한 사건과 2001년에 알카에다 전사들이 미국 세계무역센터와 국방부 청사를 공격한 사건)이 등장한다. 촘스키는 칠레, 브라질, 아르헨티나, 아이티, 콜롬비아, 엘살바도르에서의 미국 범죄 행위에 체제 순응적 지식인들이 어떻게 대응했는지를 폭로한다. 미국은 쿠바 혁명과 니카라과 혁명에 화들짝 놀라 라틴아메리카에서 군부 쿠데타와 독재 정부를 후원했다.
역시나 체제 순응형 지식인들은 이 범죄들을 미화했다. “미국인은 19세기 내내 선한 양심에 따라 아메리카 대륙에서 자신들의 원칙과 힘을 확대하는 데 헌신했”고 “무력으로 권력을 유지하는 반봉건 체제에 맞서 개인의 존엄성을 지켰[다].”
촘스키에 따르면 칠레 쿠데타 이후 ‘시카고 보이즈’(밀턴 프리드먼과 조지 스티글러 같은 시카고대학 출신의 신고전파 경제학자들)가 밀어붙였던 사영화 정책과 내핍 정책도 라틴아메리카 민중의 삶을 송두리째 앗아간 범죄적 테러였다.
촘스키는 다니엘 벨의 책 《이데올로기의 종언》이 지식인 사회에 가치 중립을 부추긴다고 비판한다. 벨은 누구나 정보에 접근할 수 있어 복지국가가 확대되면 지식인들이 이데올로기 운운하는 건 구시대적이라 말한다. 그러나 불평등과 전쟁이 난무하는 시대에 살고 있는 지식인들은 “이데올로기를 고안하고 분석하는 역할에 무엇보다 관심을 가져야 한다.”
촘스키는 정의로운 지식인들의 분투를 촉구한다. “정직한 학생과 젊은 교수 들은 ‘전문가’와 정부에 책임을 떠넘기지 않고 자신이 직접 진실을 찾아내려 할 수 있다.” 이는 평범한 사람들에게 용기를 줄 것이다. 실제로 베트남 전쟁에 반대한 지식인들과 학생 시위대는 대학 캠퍼스들에서 반전 토론회, 대안 신문, 집회, 피켓 시위, 데모, 청원, 신문 광고, 벽낙서 등을 통해 전쟁에 반대하는 여론을 만들었다.
미국을 숭상하는 권력자들에 순응하는 지식인들 말고 정의로운 지식인들이 더 많아지길 바란다. 제국주의 전쟁이라는 시험대를 통과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