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서사를 바꿔라 ─ 하워드 진의 마지막 인터뷰》:
아래로부터의 미국사
〈노동자 연대〉 구독
하워드 진의 마지막 인터뷰가 담긴 책이 번역돼 나왔다. 《서사를 바꿔라》(산처럼)는 미국 언론인 레이 수아레스가 2007년에 하워드 진을 인터뷰한 내용을 엮은 대담집이다.
2010년 세상을 떠난 하워드 진은 미국 제국주의의 역사와 실체를 폭로하고 피억압 대중의 투쟁과 저항을 조명한 걸출한 역사가이자 저술가였다. 뿐만 아니라 흑인 민권 운동과 베트남 전쟁 반대 운동 등 현실에서 벌어지는 운동에도 적극 참여한 투사이기도 했다.
1980년에 처음 출간된 하워드 진의 《미국 민중사》는 미국 사회에 큰 충격을 줬다.
하워드 진은 미국 권력자들의 관점을 거부하고, 피억압 대중의 편에 서서 미국 역사를 다시 썼다. 무엇보다 평범한 사람들의 투쟁이 사회를 바꿔 왔다는 것을 감동적으로 보여 줬다.
레이 수아레스는 콜럼버스 이야기부터 베트남 전쟁과 그 이후까지 다룬 《미국 민중사》의 내용을 중심으로 하워드 진을 인터뷰했다. 둘의 대화를 따라가다 보면 미국 국가의 실체를 마주하게 된다.
미국 민중사
미국 권력자들은 자신의 지배를 정당화하고자 역사적 진실을 숱하게 감추고 왜곡해 왔다.
예컨대 ‘신대륙’을 ‘발견’한 콜럼버스를 위대한 인물로 포장하고 미국 건국 과정을 ‘개척’으로 포장한다. 또, 20달러 지폐에 새겨진 제7대 대통령 앤드루 잭슨을 ‘위대한 민주주의자’로 칭송한다.
그러나 콜럼버스의 상륙 전에 아메리카 대륙엔 이미 수백만 명이 터를 잡고 살고 있었다. ‘신대륙 개척/발견’은 백인 식민주의의 개념일 뿐인 것이다.
‘신대륙 개척’은 학살로 점철된 유혈낭자한 범죄였다. 이후 수백 년 동안 아메리카 원주민은 인구의 90퍼센트가 절멸되는 인종청소를 당했다. 미국 대통령 앤드루 잭슨은 노예제를 지지하고 아메리카 원주민을 살해했던 자다.
하워드 진은 평생 그랬던 것처럼 마지막 인터뷰에서도 역사적 진실을 술술 풀어내며 미국의 위대한 ‘영웅’들이 얼마나 많은 사람을 짓밟고 학살해 왔는지 폭로한다.
그러면서 차별 받고 착취당하는 사람들의 저항이 사회를 더 나은 방향으로 바꿔 왔음을 설파한다.
침략에 맞서 싸운 원주민들, 반란을 일으키고 북부군에 가담한 노예들, 사용자에 맞서 투쟁한 노동자들, 차별에 저항한 흑인·여성·성소수자들이 하워드 진이 말하는 영웅이다.
“[주류 역사책에는] 다른 사람들을 착취하거나 침략하거나 약탈하는 자들이 영웅으로 되어 있지 않습니까? 이제 우리는 진짜 영웅이란 정의와 평등을 위해 권력과 정부에 맞서서 의연하게 투쟁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하워드 진은 이렇게 말한다. “민주주의는 위로부터 오지 않습니다.”
하워드 진은 미국의 민주주의가 시작부터 부자들을 위한 민주주의였다는 것을 지적하며 ‘미국 민주주의 시스템의 자정 작용’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의 투쟁이 사회를 바꿔 왔다고 강조한다.
또한, 하워드 진이 자본주의적 민주주의에서의 선거와 의회 정치에 대해 한 말은 더 나은 사회를 염원하는 사람들에게 중요한 영감을 준다.
“운동이 가난한 사람들, 노동자와 농민들에게 도움이 되는 새로운 입법을 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정치인을 가지는 것은 매우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게 다른 투쟁 방식을 훼손시켜가면서 하는 것은 생각해볼 일입니다.”
이처럼 피억압 대중의 투쟁을 강조한 하워드 진이지만, 그는 대중을 무결한 정의의 사도인 것처럼 생각하지 않았다. 피억압 대중은 서로 경쟁하거나 다투기도 한다.
하워드 진은 권력자들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인종 차별 등을 부추기며 대중을 분열시키는 한편, “있지도 않은 이해관계의 통합을 내세우기 위해” ‘국익’ 같은 거짓말을 한다고 지적한다.
하지만 하워드 진은 피억압 대중이 차별과 이간질을 극복하고 함께 단결해 투쟁할 수 있다는 것을 여러 역사적 사례를 들며 강조한다.
‘선한 전쟁’?
미국은 전쟁을 벌일 때마다 인종차별 이데올로기를 활용하고 ‘민주주의’와 ‘해방’을 가져다 주겠다는 거짓말을 했다.
제2차세계대전이 대표적이다. 미국은 제2차세계대전이 파시즘 같은 ‘악’에 맞서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선한 전쟁’이었다고 주장한다.
하워드 진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만 보더라도 미국의 제2차세계대전 참전이 결코 ‘선한 전쟁’이 아니었음을 지적하고, 이후로도 ‘선한 전쟁’ 논리를 활용해 베트남과 중동을 침공했다고 비판한다. 그리고 민주주의와 해방은 제국주의 전쟁이 아니라 아래로부터의 투쟁으로 이뤄 낼 수 있다고 말한다.
이 외에도 하워드 진은 미국 제국주의의 수많은 만행을 비판한다. 미국이 영국·프랑스 같은 다른 제국주의 열강처럼 식민 지배를 했던 것은 아니지 않느냐는 물음에 그는 이렇게 답한다.
미국 권력자들은 “굳이 식민지 정책을 펼 이유가 없다고 본 것입니다. 이런 지역의 경제를 미국이 장악할 수 있고 결정적인 시기에 언제든 미국의 군사력을 파견해서 친미적인 입장을 가진 세력을 정부로 세울 수만 있다면 괜찮다고 여긴 것입니다.
“오늘날 미국의 제국주의는 지구 도처에 군사기지를 세우는 방식으로 유지되고 있으며 이에 더해 미국의 기업들이 다른 나라의 내정에 관여하여 지배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하워드 진의 말처럼 미국은 세계 곳곳을 폭격하고 침략해 왔다. 자국 내에서는 대중을 착취하고 억압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그에 맞선 대중 운동도 계속 벌어졌다.
하워드 진은 87년 평생 동안 여러 전쟁과 비극을 목격하고 경험했으면서도 “내겐 절망할 권리가 없다”며 언제나 낙관적인 태도를 잃지 않았다. 그럴 수 있었던 것은 아래로부터의 저항이라는 관점에서 역사와 세계를 바라봤기 때문일 것이다.
하워드 진이 남긴 책, 강연, 연설은 언제나 다른 세계를 염원하는 이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준다. 그의 마지막 인터뷰가 담긴 이 책도 마찬가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