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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공 아파르트헤이트 철폐 30년 ─ 팔레스타인에 주는 교훈

넬슨 만델라가 남아프리카공화국 최초로 흑인 대통령이 된 지 30년 가까이 돼 간다. 아파르트헤이트가 어떻게 철폐됐고 오늘날 얻을 교훈은 무엇인지 찰리 킴버가 살펴본다.

1985년 6월 16일 아파르트헤이트 반대 시위

대규모 행동으로 남아프리카공화국(남아공)에서 아파르트헤이트 정부를 물리친 바 있다. 마찬가지 방법으로 이스라엘의 아파르트헤이트에 맞서 승리할 수 있을까?

남아공 사례에서 우리 모두는 가장 잔혹한 정권, 심지어 온갖 무기로 무장하고 서방 제국주의의 지원을 받는 정권도 물리칠 수 있음을 배워야 한다.

하지만 남아공에서 아파르트헤이트가 어떻게 철폐됐는지에 관해 잘못된 얘기가 많고, 그중 일부는 흑인들이 스스로 해방을 쟁취한 주체였음을 누락하기도 한다.

노동계급 사람들이 자신의 힘으로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이런 진실은 은폐되고 체계적으로 왜곡됐다.

그 진실이 당시 유행하던 “노동계급이 사라지고 있다”는 이론에 부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영국에서는 1984~85년 광원 파업 패배 이후에 그런 이론이 유행했다.

아파르트헤이트는 1948년에 명문화됐지만, 그 기초가 된 인종 억압은 이미 한참 전부터 존재했다. 아파르트헤이트는 테러와 잔혹 행위로 유지되는 체제였다. 지독하게 관료적인 규제도 많았다.

누가 어느 해변에 갈 수 있는지, 어떤 직종에서 일할 수 있는지 등 모든 것이 피부색에 따라 정해졌다.

“잘못된” 상대와 성관계를 하는 것도 불법이었다.

백인은 남아공 인구의 7분의 1이었는데, 그들만이 투표권과 각종 권리를 온전하게 누렸다. 아파르트헤이트 체제 하에서 흑인들은 극심한 빈곤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고통

45년 동안 남아공 어린이들은 머리카락의 곱슬 정도와 손톱 모양까지 검사받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국가가 제멋대로의 인종 분류 방식에 아이들을 끼워 맞추기 위한 것이었다.

경찰과 군인들은 사람들이 “잘못된” 인종 지역에 살고 있다며 최대 600만 명을 집에서 쫓아내 멀리 떨어진 타운십[흑인 거주구]이나 낙후한 시골 지역으로 보냈다.

사람들이 저항에 나서면 국가는 무자비한 탄압으로 대응했다.

1948~93년 동안 2000명이 교수형 당했다. 수십만 명이 투옥됐고 체포된 이는 수백만 명에 달한다.

이처럼 사악한 체제가 결국 무너진 것은 각종 저항 덕분이었다. 그중 하나는 국제 연대였다.

전 세계에서 수억 명이, 특히 청년들이 남아공 아파르트헤이트 철폐 운동을 해방의 상징으로 보며 영감을 받았고, 그 운동을 지지했다.

영국에서는 사람들이 행진과 시위를 벌이며 영국 정부에게 남아공과의 관계를 단절하라고 요구했고, 아파르트헤이트 철폐 투쟁을 지원하기 위해 모금을 했다.

보이콧과 제재는 효과를 발휘했다. 남아공 안팎의 몇몇 부문 기업가들은 은행 대출과 투자 유치가 어려워져 이윤에 타격을 입을 것을 두려워했다.

이에 더해, 1987~88년에 남아공 군대가 아프리카 대륙 남부 앙골라의 쿠이투쿠아나발르에서 패배하는 일이 벌어졌다. 아프리카국민회의(ANC) 지도자 넬슨 만델라는 이 패배가 “우리 대륙과 우리 민중의 해방을 향한 전환점”이라고 표현했다.

흑인 앙골라 전사들은 쿠바의 지원을 받아 백인 남아공의 군대를 격파했다.

이들의 승리로 아파르트헤이트 지배자들이 우월하고 무적이라는 생각이 산산조각 났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1991년 소련이 몰락한 것도 일정한 구실을 했다. 그전까지 미국은 남아공에서 아파르트헤이트가 철폐되면 남아공이 “공산주의” 진영에 편입될까 봐 두려워했다.

그런 위험이 사라지자, 서방이 남아공 개혁을 좀더 편하게 거론할 수 있게 됐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모두 보조적 요인이었고 결정적 요인은 따로 있었다. 남아공 흑인들 자신이 행동에 나선 것, 특히 흑인 노동자들이 전투적이고 조직적으로 행동한 것이 중요했다.

아파르트헤이트는 그저 인종차별주의자들의 심보가 잔혹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아파르트헤이트는 남아공에서 자본주의가 발전한 방식의 산물이었다. 아파르트헤이트는 19세기에 광업 기업들에게 노동력을 싸게 공급하는 수단이었다. 오랫동안 아파르트헤이트 체제는 막대한 이윤을 벌어들이는 수단이었다. 이 공공연한 인종차별 체제가 뽑아내는 돈을 좇아 국제 자본들이 남아공으로 몰려들었다.

임페리얼 케미컬 인더스트리스(ICI), [영국의] 제너럴 일렉트릭 컴퍼니(GEC), 쉘, 필킹턴, 케이프 아베스토스, 제너럴모터스, 메르세데스-벤츠, [미국의] 제너럴 일렉트릭, 브리티시 페트롤리엄, 블루서클인더스트리, 캐드버리 슈웹스 등등 수많은 기업의 주주와 최고경영자들이 돈 냄새를 맡았다.

그러나 아파르트헤이트 자본주의의 문제는, 그 밑에서 고역과 지성을 들여 생산을 떠맡을 노동자들이 없으면 어떠한 부도 얻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누군가는 더할 나위 없이 혹독한 노동조건하에서 금·다이아몬드·백금을 땅에서 캐내야 했다.

아파르트헤이트를 살찌운 모든 공업·농업에는 노동자들이 필요했다.

결국 탄압도, 협조적인 극소수 흑인 지도자들을 포섭하려던 시도도 모두 실패했다.

아래로부터의 반란

노동계급과 빈민은 여러 방식으로 맞서 싸웠다. 그중 하나는 주요 도시 외곽에 자리잡은 대규모 타운십에 몰려 사는 수많은 흑인들을 조직하는 것이었다.

노동계급과 빈민은 경찰에 맞서 치열하게 싸웠고, 아파르트헤이트 지배자들이 1인 1표를 보장하지 않는 대신 제공하는 가짜 “민주주의”를 거부했다.

이들은 주택·교육·교통 같은 구체적 쟁점을 두고, 또 자신들을 열등한 지위로 묶어 두는 정치 체제 자체에 도전하며 들고 일어났다.

이들은 경찰을 공격했고, 아파르트헤이트에 부역하는 흑인 관리·경찰을 살해하고 자신들만의 대안적 행정·사법 체계를 만들었다.

혁명가들은 폭력 투쟁을 포함한 모든 종류의 저항을 좌고우면하지 않고 지지했다. 영국 노동당이나 노동조합 지도자들이 투쟁을 지지하지 않을 때조차 그랬다.

남아공 저항 세력들은 정치적으로는 ANC에게 지도를 바랐다.

1950년대에 ANC는 대중적인 비폭력 시위를 잇따라 벌였다. 이런 시위들은 모든 계급의 흑인을 민주주의 쟁취 투쟁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것이었다.

1960~70년대에 ANC는 극심한 국가 탄압에 직면해 사실상 궤멸됐다.

ANC가 부활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1970년대 전반에 노동자 조직들이 성장하고 1976년에 [요하네스버그 인근 흑인 거주구] 소웨토에서 학생 반란이 분출한 덕분이었다. ANC는 파업에서도, 학생 반란에서도 지도적 구실을 맡지 않았지만 부활할 수 있었다.

1980년대가 되면 ANC는 아파르트헤이트 철폐 운동을 남아공 내에서든 국제적으로든 지도하는 세력으로 단단히 자리잡았다.

그러나 ANC는 민족주의 운동이었지 사회주의 운동인 적은 없었다.

ANC는, 아파르트헤이트는 철폐해도 남아공 자본주의는 유지하길 바라는 일부 중간계급·대기업가들과 동맹 관계를 지키려면 조직 노동계급이 자신의 요구를 삭감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이는 1970년대에 부활하던 독립적 노동자 운동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었다.

1973년 더반시(市) 파업을 시작으로, 노동자들은 착취에 맞서고 그 착취를 가능케 하는 더 커다란 정치 구조에도 도전하며 조직화하기 시작했다.

1980년대 광산과 제조업에서 벌어진 위대한 파업들을 보며 사장들은 패닉에 빠졌고, 혁명을 피하기 위해 협상을 애걸하게 됐다.

광업 대기업 앵글로아메리칸의 이사였던 자크 드비어는 1986년에 이렇게 말했다. “오랜 아파르트헤이트 탓에 많은 흑인들이 정치 체제뿐 아니라 경제 체제도 거부하고 있다.

“우리는 자유 기업이라는 아기를 아파르트헤이트라는 목욕물과 함께 버리는 우를 범해선 안 된다.”

당시의 파업들은 아파르트헤이트의 심장을 정조준하는 비수와 같았고, 수십만 명을 대규모 행동으로 거듭 동원할 수 있었다.

이런 집단적 위력은 혼란과 더 끔찍한 유혈 사태를 불러올 수 있다는 점에서 위협적이었을 뿐 아니라, 사회를 혁명적으로 재구성하고자 한다는 점에서도 위협적이었다.

파업 위원회, 활동가 네트워크, 노동자들의 자기 방어 조직의 등장은 국가를 파괴할 잠재력을 가진 새 권력이 태동하고 있음을 힐끗 보여 줬다.

이는 인종차별적 지배자들에 대한 도전이었다. 그러나 ANC에 대한 도전이기도 했다.

교훈

파업 지도자들 중 최상의 인물들은 [ANC의 바람대로] 노동자들의 이해관계를 뒷전으로 미루는 것이 아니라 계급 투쟁을 아파르트헤이트 철폐 운동의 중심에 두길 바랐다.

그런 사람들은 노동자 권력 수립과 인종차별 구조 철폐를 동시에 이루고자 했다.

그러나 이들이 ANC의 영향력에 도전할 정치 조직을 건설하지 않았던 탓에 주도권을 ANC에게 내어주게 된다.

ANC는 노동조합의 막대한 사회적 위력을 자신의 것으로 흡수해 사회를 “민족 민주주의적으로” 전환한다는 전략을 추진했다.

아파르트헤이트 국가가 마침내 양보할 수밖에 없게 됐을 때 ANC가 그 협상을 주도해 아파르트헤이트를 종식시켰다. 그러나 그 방식은 인종차별적이지 않은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를 수립하는 것이었다.

그 결과 오늘날 흑인들은 정치적 권리도 갖고 형식적 평등도 누린다. 그러나 경제적으로는 아파르트헤이트 때만큼이나 열악하다.

남아공 노동자들은 자본주의 생산에서 중심적 위치에 있었던 덕에 승리할 수 있었지만, 팔레스타인인 노동자들은 그런 위치에 있지 않다.

이스라엘에서 아랍인들은 노동자 중 작은 부분만을 차지하고, 그런 노동자들조차 중요도가 낮은 산업에서만 일할 수 있다.

그리고 이스라엘 자본이든 국제 자본이든 어느 부문도 시온주의 폐기를 고려할 만큼 절박한 처지에 있지 않다.

그러나 남아공인들이 발휘할 수 있었던 힘보다 더 큰 힘이 잠재돼 있는 곳이 있다.

팔레스타인은 이집트·요르단·이란 등 인근 나라 수많은 노동자·빈민에게 중요한 쟁점이다.

아랍 정권들에 맞선 반란은 중동 전체를 뒤흔들고, 더 광범한 혁명의 일환으로 팔레스타인을 해방시킬 수 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미국·영국·유럽연합의 지원에 전적으로 기대고 있다는 점 때문에, 서방 나라들에서의 저항은 남아공 아파르트헤이트를 무너뜨렸을 때보다 더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다.

만약 영국·미국에서 반란이 벌어져 서방의 이스라엘 지원을 끊을 수 있다면, 시온주의의 핵심 대들보들이 무너져 내릴 것이다.

팔레스타인인들이 남아공 사례에서 배울 교훈이 하나 더 있다. 바로 혁명적 변화 없이는 아파르트헤이트를 끝내더라도 온전히 해방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