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청년 자살·자해가 급증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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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자살과 자해 시도로 응급실에 방문하는 사람 중 절반은 10대와 20대다.
국립중앙의료원과 중앙응급의료센터가 최근 발간한 ‘2021-2022 응급실 자해·자살 시도자 내원 현황’을 보면, 2022년 자해·자살 시도로 응급실을 이용한 4만 3268건 중 20대가 1만 2000여 건, 10대가 7500여 건으로, 전체의 46퍼센트를 차지했다.
10대와 20대의 자해·자살 시도는 급증하는 추세다.
자해·자살을 시도한 10대는 2018년 인구 10만 명당 95.0건에서 2022년 160.5건으로 5년간 68.9퍼센트나 증가했고, 같은 기간 20대는 127.6건에서 190.8건으로 49.5퍼센트가 늘었다.
한국은 청년 자살률이 OECD 1위이다. 2022년 기준으로 OECD 평균(10.6명)의 2배가 넘는다(22.6명).
노인 연령층에서 주로 발생하던 고독사는 이제 청년들 사이에서도 적잖다.
40세 미만 청년 고독사는 매년 70~100명가량으로 추정된다(김원이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의 2021년 국정감사 보도 자료).
‘5~10평의 원룸, 배달 음식, 비어 있는 냉장고 ... 다른 한편에는 각종 수험서가 쌓여 있고, 컴퓨터에는 빼곡히 적은 이력서 파일들이 저장돼 있다.’
유품 정리업체 관계자들이 전하는 고독사한 청년들이 살던 방의 모습이다. 청년들은 죽기 직전까지 살기 위해 버둥거렸다.
물에 빠지지 않기 위해 버둥거리다 힘이 빠지고 지쳐서 가라앉아 버리는 모습. 오늘날 청년을 생각하면 그런 그림이 떠오른다.
“어려선 마음고생, 커가면서는 외로움에 시달리다가, 고독사로 죽는 첫 세대”(청년 자살 문제를 다룬 책 《가장 외로운 선택》 중)라는 말이 마음 아프게 와닿는다.
실업과 취업난
청년들의 자살과 고독사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실업이다.
윤석열 정부는 2023년 청년 실업률이 역대 최저라며 자화자찬했다. 그러나 이런 지표 이면에는 청년 고용률이 떨어지고, 취직 단념자가 크게 늘어난 현실이 있다. ‘쉬었음’ 청년은 20대와 30대를 합치면 무려 60만 6000명에 달한다(통계청, 2023년 6월 고용동향).
취업난으로 인한 경제적 어려움에 청년들은 몸살을 앓고 있다.
청년층의 정신 건강 위기는 세계적 문제다. 세계 경제 위기로 인해 실업이 늘어났는데, 가장 큰 피해자는 청년인 경우가 많다. 기업들은 비용을 아끼려고 신규 채용을 줄이고, 채용하더라도 경력직을 우선해 뽑는다. 노동시장 진입을 앞둔 청년들은 더욱 좁아진 취업문 앞에서 좌절하고 있다.
취업난은 청년들에게 경제적 어려움뿐 아니라 고독을 안긴다. 취업난은 인간관계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부모는 늙어 가는데 자신은 아직도 ‘어른’으로 자립하지 못하고 짐이 되고 있다는 죄책감 때문에 가족과 연락을 끊어 버리는 일이 많다. 친구들마저 하나둘 일자리를 잡으면 연락하기도 점점 부담스러워진다.
이 사회는 그런 청년들을 패배자라고 낙인찍고 모욕한다. 소셜미디어나 매스미디어에는 부와 성공 얘기가 넘쳐 나고 실패는 언제든 마음먹기에 따라 극복할 수 있는 것, 즉 개인의 의지 부족 탓으로 돌린다.
경쟁과 소외에 찌들고 주눅 들어 버린 청년은 혼자만의 방으로 점점 더 숨어들어 간다.
지난해 보건복지부의 온라인 설문 결과를 보면, ‘은둔형 외톨이’는 청년층에서 51만여 명으로 추정된다. 이처럼 사회적으로 단절된 은둔형 외톨이는 정신적 문제에 더욱 취약해진다.
이들 중 75.4퍼센트가 자살을 생각했다고 답했는데, 그 이유로는 취업 관련 어려움(24.1퍼센트)이 가장 많았다.
외로움도 위험하다. 하루 종일 느끼는 외로움은 조기 사망 가능성을 26~29퍼센트 높인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이는 매일 담배 15개비를 피우는 해악에 맞먹는다(비벡 머시 미국 공중보건서비스단(PHSCC) 단장 겸 의무총감, ‘외로움과 고립감이라는 유행병’).
공황장애
간신히 일자리를 잡아 바늘구멍 같은 취업문에 들어간 청년들도 고통스럽긴 마찬가지다.
보통 저질 일자리와 장시간 노동에 시달린다.
청년층 64.4퍼센트가 첫 직장에서 받는 월급이 200만 원 미만이었다(2023년 5월 경제활동인구조사 청년층 부가조사). 요즘 같은 고물가 시대에 자산도 없는 청년들이 홀로 생계를 제대로 꾸려 갈 수 없는 금액이다.
직장은 긴장과 스트레스로 가득 찬 곳이기도 하다. 직장에서 노동자들은 기업의 수익에 기여한 바에 따라서 냉혹하게 평가받고 기준에 미치지 못하면 온갖 수모를 당한다. 취업의 기쁨도 잠시 청년 노동자들은 직장 내에서 최약자의 처지로 내몰린다.
긴장과 불안이 핵심 원인인 공황장애가 청년층에서 크게 증가한 것도 직장 내 스트레스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따르면 20~30대 공황장애 환자 수는 2019년 6만 1401명에서 2021년 7만 5776명으로 23퍼센트 늘었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는 청년 노동자의 업무 압박감과 공황장애를 사실적으로 그려 큰 공감을 얻었다. 끝나지 않고 쌓여만 가는 업무, 잘 해내지 못하면 패배자라는 압박감 등이 청년 노동자의 발 밑에서 물처럼 차올라 결국 숨을 쉬지 못하게 만들고 발작 증세로 터져 나와 버린다.
사람들로 빈틈없이 들어차 숨도 쉬기 힘든 지하철 출퇴근 길 속에서 ‘평생 이렇게 살아야 하나’ 하는 자괴감과 두려움이 올라온다. ‘갓생’ 살기, 미라클 모닝 등 자기계발이 청년층 사이에서 관심을 끄는 것은 어떻게든 팍팍한 삶 속에서 작은 보람과 희망을 느껴 보려는 발버둥이기도 하다.
그러나 많은 청년 노동자는 보통 일을 마치고 나면 기진맥진해, 여가나 자기계발은커녕 누워서 핸드폰 보다가 잠들기 바쁘다.
청년 여성의 자살률 증가 : 기대와 현실의 간극
특히 청년 여성의 자살률이 급증하고 있다. 이는 코로나와 경제 불황 등을 겪으며 노동시장에서 여성들이 더욱 취약한 처지에 몰리게 된 것과 관련이 있다.
2021년 통계청 조사를 보면, 20대 여성의 인구 10만 명당 자살률은 2017년에 비교해 71.9퍼센트 늘어났다(11.4명 → 19.6명). 같은 기간 20대 남성의 자살률은 30.3퍼센트(20.8명 → 27.1명) 증가했다.
최근 비정규직, 시간제 노동, 청년 니트(NEET: 학업, 일, 구직 활동을 하지 않는 사람) 비율 증가와 청년 여성의 자살률 간에 정(+)의 관계가 존재한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이민아 중앙대 교수, ‘노동시장에서의 위기심화와 청년여성 자살률’).
2017년에서 2021년 사이에 20~24세 비정규직과 시간제 비율이 각각 44.79퍼센트와 28.9퍼센트에서 58.77퍼센트와 40.67퍼센트로 올랐는데, 같은 나이대 청년 여성 자살률도 인구 10만 명당 9.5명에서 18.9명으로 두 배 늘어났다. 20~24세 여성 비경제활동인구(취업 준비, 심신 장애, 쉬었음 등을 포괄)를 기준으로 니트 비율을 분석한 결과 같은 나이대 여성의 자살률과 비슷한 상승·하락 그래프를 보였다.
이현주 〈노동자 연대〉 기자는 “최근 젊은 여성들의 자살률 증가 폭이 커지고 있는 것은 여성들의 기대감과 현실 사이의 간극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하고 지적한 바 있다(‘코로나 블루와 자살 — 인간의 필요가 아니라 이윤을 우선하는 자본주의 탓’).
오늘날 많은 여성이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기대를 하고 있지만, 노동시장에서는 여전한 여성 차별의 벽에 부딪힌다. 채용부터 승진까지 체계적 차별에 시달린다. 외모와 신체를 가꿔야 한다는 압력이 여성들을 심각하게 짓누른다. 또한 많은 여성이 열악한 노동환경에 내몰려 있다는 것은 성희롱, 성추행 등의 위험에도 노출되기 쉽다는 것을 의미한다.
기대와 현실의 큰 간극은 여성들을 더욱 좌절감에 빠지게 할 수 있다.
자기 혐오와 학대
고통의 화살을 사회가 아니라 개인에게 돌리는 시스템은 개인들이 자기 자신을 학대하게 만든다.
불황이 장기화되면서 사회 전반에서 경쟁이 더 강화됐다. 기대는 더 높아졌지만 기회는 적은 현실 앞에서 청년들은 심각한 괴리감을 느낀다. 이 괴리감은 체제가 만들어 낸 것이지만, 많은 청년이 자신에게 화살을 돌리며 스스로를 아프게 한다.
자본주의 체제는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이 쓸모없고 하찮은 존재라고 생각하게 하고 끝없이 열등감과 패배감이 들게 만든다. ‘나는 경쟁에 뒤처져 있다’, ‘나는 하찮고 실패했다’ 등 상대적 박탈감과 열패감이 매일매일 청년들의 마음속 깊이 새겨진다.
최근 자기애적 성격장애(나르시시스트)에 대한 관심(‘그들에게 피해 입지 않는 법’ 등)이 늘어났는데, 자기애적 성격장애는 끊임없이 수치심을 부추기는 사회에 대한 한 반응일 수 있다. 자신은 완벽하다는 가면으로 방어막을 치면, 자신이 보잘것없고 하찮다는 느낌을 잠시 잊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냉혹한 경쟁이 지배하는 숨막히는 사회에서 자신에게 상처를 주는 자해가 늘어나는 건 어찌 보면 놀라운 일이 아니다.
자해가 곧장 자살로 이어지는 건 아니다. 그러나 자살을 시도하는 사람 중 적잖은 수가 자해 경험이 있다. 자살과 자해는 사회가 주는 고통에 짓눌려 자신을 해치게 된다는 점에서 맥을 같이한다.
자해 시도자들은 분노 같은 부정적인 감정을 멈추기 위해서, 편안한 마음을 느끼기 위해서, 스스로에게 벌을 줌으로써 죄책감을 덜고 싶어서, 무기력한 마음에 자극을 주고 싶어서 등 여러 이유로 자해를 한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보호하는 방어기제로 해리(dissociation)를 경험하기도 한다. 해리는 감당할 수 없는 고통스러운 상황에 직면해 잠시 동안 자기 스스로를 정신적·심리적 과정으로부터 분리시키는 것이다.
때로 자해는 이런 분리를 잠시 통합시켜 준다. 뺨을 때려서 얼얼함을 느끼면 잠시 멍했던 기분이 현실로 돌아오게 되는 것처럼, 자해 시도자 중 일부는 자해를 통해서 자기 통제감을 느낀다. 즉각적인 신체의 고통, 뜨거운 선혈, 아드레날린 등을 통해 자신을 옥죄는 긴장을 잠시 잊고, 자신이 현실적으로 살아 있다고 느끼기도 한다.
죽음에 가까워지는 행위를 통해서 살아 있음을 느낀다는 건 슬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마음의 정치학: 마르크스주의와 정신적 고통》(Politics of the Mind: Marxism and Mental Distress, 국내 미번역) 저자인 이언 퍼거슨은 지난 수십 년간 정신적 고통이 크게 증대된 배경에는 저조한 수준의 계급투쟁이 있다고 지적한다.
“사람들이 집단적 투쟁을 벌이지 않으면 차별을 내면화하고 우울하고 불안해지기 더 쉽다. 반면 집단적 투쟁에 나서면 외로움이나 무력감을 덜 느끼게 된다.”(2023년 5월 12일 노동자연대 온라인 토론회 “마르크스주의와 우울한 마음”)
투쟁의 규모가 크고 전투적이 되면 사람들 사이에서 연대감도 상승하고, 고립감도 적어지게 된다. 그랬을 때 사람들이 세계가 변할 수 있다는 희망을 발견하고 삶의 의지를 가질 가능성도 커진다.
《자살론》을 쓴 프랑스 사회학자 에밀 뒤르켐은 1848년 프랑스 혁명이 전 유럽을 뒤흔들었을 때 유럽 전체의 자살률이 격감한 것을 발견했다.
“자살은 사회가 잘못 조직된 것의 증상” - 마르크스
카를 마르크스는 일찍이 자살이 사회적 현상임을 지적하고, 자살을 택한 사람들에게 큰 동정심을 가졌다. 마르크스는 프랑스 경찰관이자 시인이었던 푀셰가 쓴 자살에 관한 글을 독일어로 번역해 발간하기도 했는데, 푀셰는 사회의 문제 때문에 사람들이 자살에 내몰리는 현실에 분개했다.
특히 푀셰는 자살한 사람을 비난하거나 명예를 훼손해 자살을 막으려 하는 시도에 대해서도 분노했다. 그런 낙인찍기는 오히려 사회의 “비열함”만 보여 줄 뿐이라고 지적했다.
한국 사회에서 자살자에 대한 이런 비난이 최근에는 많이 줄어들었지만, 여전히 자살이나 우울증 등을 개인의 유약한 의지 문제로 보는 시선이 적잖다.
“모멸적인 처벌과 자살자에 대한 명예를 훼손하는 것으로 자살을 예방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라고들 한다. 더는 자기에 대해 변호할 생각이 없어서 그 자리에 없는 사람들을 낙인찍어 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불행한 자들은 그런 낙인을 걱정하지 않는다.”
“세상을 떠나고자 하는 사람이, 세상이 그의 시체에다가 할 모욕에 대해 신경이나 쓸까?”
마르크스는 자살이 “우리 사회가 잘못 조직된 것의 증상”이라고 지적했다.
“우리들 사이에서 평범하고 반복적으로 발생하는 연간 자살자 수는, 우리 사회가 잘못 조직된 것의 증상으로 간주돼야 한다. 왜냐하면 산업이 정체되고 위기에 처했을 때, 식량이 부족하고 겨울이 매서운 시기에 이 증상[자살]은 항상 더 두드러지고 전염병적인 성격을 띠기 때문이다.”
“자살의 다양한 원인들에 대한 분류는 바로 우리 사회의 결함들에 대한 분류일 것이다. 한 사람은 발명품을 빼앗겼기 때문에 자살을 했는데, 그가 헌신한 오랜 과학적 조사의 결과로 가장 극심한 가난에 던져진 발명가는 심지어 특허를 살 처지에 있지도 않았다. 다른 한 사람은 막대한 비용과 금전적인 어려움에 따른 법적 기소를 피하기 위해 자살했다. ... 또 다른 한 사람은 ... 일자리를 구할 수 없어서 오랫동안 신음하다가 자살했다.”
마르크스의 동료 프리드리히 엥겔스도 자살을 자본주의 사회의 빈곤·불평등과 연결했다.
“노동계급 가운데에는 너무나 도덕적이어서 아주 극단적인 상태에서도 도둑질을 하지 않고 굶어 죽거나 자살하는 사람이 많다.”(《영국 노동계급의 상황》)
푀셰는 프랑스 혁명 이후 평등한 세계가 도래했다는 부르주아지의 말과 달리 실제로 노동자들의 현실은 비참하고 자살에 내몰린다고 봤다. 마르크스는 이런 사회는 “사회”가 아니라 “짐승들이 사는 사막”이라고 통렬하게 비판했다.
“사람들이 수백만 명의 군중 속에서도 가장 깊은 고독을 발견하고, 아무도 그것을 알지 못하게 하면서 스스로를 죽이고 싶은 억누를 수 없는 욕망에 압도될 수 있는 사회는 대체 뭐란 말인가? 그런 사회는 사회가 아니라 루소가 말한 것처럼 야생 짐승들이 사는 사막일 따름이다.”
실업, 불평등, 경쟁은 모두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비롯된 병폐다. 자본주의에서 조금이라도 자살률을 떨어뜨리려면 청년들 삶을 개선하기 위한 투쟁이 일어나는 것이 중요하다. 정부가 책임지고 양질의 일자리를 늘리고, 저렴하고 질 좋은 정신건강 서비스를 확대하라고 요구해야 한다. 그런 투쟁이 전진하는 속에서 청년들은 삶의 자신감도 얻고, 자기 비난 대신 집단적 투쟁이라는 대안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소외와 빈곤을 계속 재생산하는 자본주의를 근본에서 뿌리 뽑아야 한다. 그럴 때만이 청년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비극을 없앨 조건을 만들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