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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정부 퇴진 운동 극우 팔레스타인 트럼프 2기 이주민·난민 우크라이나 전쟁 긴 글

개헌 논란과 진보적 개헌 제안

윤석열이 파면되자마자 우원식 국회의장이 대선과 개헌 국민투표 동시 시행을 제안해 정치권에서 논란이 되고 있다.

우원식의 제안 직후, 국민의힘은 뻔뻔하게도 “제왕적 국회를 바꿔야 한다”며 개헌론을 이용해 민주당 등 야당을 다시 공격하는 데 나섰다.

반면, 민주당 이재명 대표는 옳게도 “개헌이 필요하지만 지금은 내란 종식이 먼저”라며 우원식의 대선·개헌 동시 투표 방안에 반대 입장을 밝혔다.

실제로 윤석열은 파면된 직후 국힘 지도부와 만나고, 자기 지지자들에게 “결코 좌절하지 마십시오”라며 극우 선동을 계속했다. 특히, 쿠데타 동조 세력이 정부 곳곳에 여전히 포진해 있기도 하다.

이런 상황에서 국힘과 개헌 논의를 하자는 것은 오히려 윤석열 일당과 국힘, 극우 세력이 다시 야당을 탓하며 자신들의 세력을 만회할 기회를 줄 뿐이다.

그런데 우원식 의장의 제안 직후 진보당과 정의당도 개헌 제안을 환영하는 성명을 발표했다.(노동당은 전부터 진보적 개헌을 주장해 왔지만 옳게도 이번 우원식 의장의 제안에는 아무런 입장도 내지 않았다.) 많은 비판이 나오자 김재연 진보당 대표는 “개헌 논의 자체가 내란 세력 청산과 단죄에 혼란을 조성할 수 있다”며 바로 환영 입장을 철회했지만 말이다.

사실 진보 계열(온건 좌파) 상당수는 윤석열이 파면되면 개헌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광장의 요구를 제도화”해야 한다며 말이다.

만만찮은 대중 투쟁이 벌어져야만 실질적인 개혁도 얻을 수 있다. 4월 5일 주권자 시민 승리의 날 집회 ⓒ조승진

물론 이런 진보적 개헌론에는 현행 헌법에 대한 진보적 비판이 담겨 있다. 여전히 권위주의 정치 체제의 잔재가 남아 있고 정치적·사회적 기본권도 매우 빈약하다는 것이다. 윤석열의 쿠데타 기도는 현행 헌법 아래에서 “비상대권”을 휘두르는 것이 최고 권력자의 선택지가 될 수 있음을 드러내기도 했다.

박근혜 퇴진 운동으로 문재인 정부가 집권했지만 개혁 요구가 제대로 실현되지 않았으므로 이번에는 그 전철을 밟지 말자는 평가가 담겨 있기도 하다.

본지는 진보적 개헌 운동을 지지한다. 그러나 진보적 개헌으로 사회 대개혁 요구들을 쟁취할 수 있을까 하는 물음을 던져 볼 수 있다.

진보적 개헌론에는 근본적으로 헌법에 대한 환상이 깔려 있다. 즉, 헌법을 시민들의 사회적 합의를 기록한 문서로 여기는 것이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헌법은 자본주의 국가가 하는 활동의 원리와 방법과 규칙, 국가기구들의 조직 구조를 핵심적으로 다룬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국가와 자본가 계급은 서로 의존하고, 국가는 자국과 연계된 자본가들의 편익을 우선하려고 한다. 즉, 헌법은 자본가 계급의 지배를 위해 존재하는 국가를 원활하게 작동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문서다.

자본주의 국가는 강제력만으로 지배할 수는 없다. 피억압 대중 또는 적어도 그 일부의 동의와 지지를 조직해야 안정적 통치가 가능하다. 그리고 어느 정도의 복지 제공 같은 체제 유지에 필요한 기능도 수행해야 한다. 헌법에 여러 기본권 조항들이 포함돼 있는 까닭이다.

한국의 현행 헌법에도 기본권에 관한 조항들이 꽤 있다. 그렇지만 그런 조항들은 대개 매우 추상적이다. 심지어 헌법 내에는 그 권리들을 제약·봉쇄할 수 있는 조항마저 있다. 가령 헌법 37조 2항에는 “국가안전보장·질서유지 또는 공공복리를 위하여 필요한 경우에”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제약할 수 있다고 돼 있다.

헌법의 좋은 문구들은 그 나름의 이데올로기적 효과가 있지만, 노동계급 사람들에겐 공문구에 그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현실에서 국가는 학교 교과서가 이상화해 놓은 것과는 다르게 행동하기 때문이다.

많은 진보 인사들이 1948년에 제정됐던 제헌헌법에 주목한다. 현행 헌법보다 국가의 적극적인 역할을 더 강조하고 노동자의 권리를 보장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분명 제헌헌법에는 ‘주요 자연자원과 생산수단 국공유 원칙’이 명시됐고, 노동자들의 이익균점권 등이 들어가 있었다. 하지만 사실상 별 효력이 없었다. 그래서 당시에 이승만은 제헌헌법의 해당 조항들이 법률로 구현될 일은 없다고 말했다.

앞으로 어찌어찌해서 진보적 개헌이 이뤄져도 그 효과는 위기에 처한 자본주의하에서 제한적일 공산이 크다. 가령 헌법에서 성소수자 권리 보장과 차별 금지 조항이 강화된다면 그 정치적 상징성은 분명히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자체로 실질적인 변화를 담보하지는 않는다. 만만찮은 대중 투쟁이 벌어져야만 차별이 완화되고 실질적인 개혁도 얻을 수 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은 1997년 헌법에서 성소수자 권리를 인정한 최초의 국가다. 하지만 남아공에서는 여전히 “많은 [흑인] 성소수자들, 특히 여성들이 LGBT라는 이유로 죽거나 성폭행을 당한다”(남아공 인권 활동가의 말, 〈한겨레〉 2018년 5월 2일 자).

1919년에 제정된 독일의 바이마르 헌법은 당시 인류가 만들어낸 ‘가장 자유롭고 민주적인 헌법’이라는 평가를 받았고, 지금도 현대 헌법의 전형으로 여겨진다. 한국의 1948년 제헌헌법도 바이마르 헌법의 영향을 받았다.

하지만 1930년대 대불황을 배경으로 한 정치적 양극화 속에 나치가 부상했다. 사회민주당은 헌법과 법이 나치로부터 바이마르 공화국을 지켜 주리라 믿었지만, 결국 1933년 히틀러가 정권을 잡았다. 서구에서 가장 진보적인 헌법도 나치를 막아 주지는 못했던 것이다.

많은 진보 정당들이 윤석열 퇴진 이후 개혁을 점진적으로 확대해 사회의 개혁을 이룰 “일관된 틀”로서 개헌을 생각하는 듯하다.

하지만 이런 개혁주의적 구상은 금세 현실의 벽에 부딪힐 공산이 크다. 지금 경제 전망은 어둡고 사회 양극화와 정치 양극화가 커지고 있다. 제국주의간 갈등에 따른 지정학적 불안정이 한반도에 가하는 압력도 갈수록 커지고 있다. 위기의 이런 양상들을 개혁 입법으로 통제하거나 완화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이집트 혁명으로 들어선 무르시 정부는 2012년 연말 개헌 국민투표에 성공했지만 정부의 기반은 여전히 불안정하게 흔들렸다.(결국 반 년 남짓 뒤 엘시시의 반혁명 군사 쿠데타로 무르시 정부는 전복됐다.)

윤석열은 파면됐지만, 극우들은 반격을 계속 노리고 있다. 지배계급의 인내심도 줄어들고 있다. 이럴 때일수록 기성 질서를 흔들 수 있을 만큼 대중 투쟁을 키우는 데 집중해야 한다. 그래야 대중의 개혁 염원이 실현될 가능성도 커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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