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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주의 극우 팔레스타인·중동 이재명 정부 이주민·난민 우크라이나 전쟁 긴 글

《빛의 혁명 183》 서평에 대한 조정환의 비판에 답하며:
개혁이냐 혁명이냐 하는 물음은 여전히 중요하다

진지한 토론과 논쟁은 사라지고 무시나 피상적인 물어뜯기가 판을 치는 요즘 같은 때에 조정환 씨(이한 존칭 생략)의 진지한 반론은 반갑다.

먼저 그는 자신의 관점이 2000년대 초와는 달라졌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2016년 이후의 나의 관점 변화는 … 섭정의 틈새나 경로를 발견한 것[이다.] … 나는 대의장이나 개혁장을 다중에게 강요되는 수동적 장이 아니라 다중이 개입할 수 있는 능동적 장으로 보기 시작했다.”

그가 말하는 ‘섭정’이 무엇인지는 모호한 데가 있다. 아마도 현행 헌법에 (개헌을 통해) 직접민주주의 요소를 가미하는 것을 뜻하는 듯하다. 자본주의적 민주주의의 틀에서 벗어나 있지는 않은 것이다.

그래서 조정환의 대안은 ‘대중 동원과 의회를 둘 다 활용한다’는 좌파적 개혁주의의 정식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좌파적이지만 여전히 개혁주의인 이유는 국가를 개혁해서 활용하려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 시리자와 스페인 포데모스의 경험은 좌파적 개혁주의 정당이 국가를 개혁하기는커녕 자본주의 국가에 포섭돼 운동의 요구가 아니라 자본주의 국가의 이익을 대변함으로써 ‘운동과 의회’라는 양면 작전의 모순과 한계를 보여 줬다.

나는 서평에서 이를 두고 (좌파적) 개혁주의의 실패(국가를 개혁하겠다는 프로젝트가 파산한 것)라고 말했다.

아래에서는 조정환이 제기한 쟁점 세가지에 대해 답해 보겠다.

① 노동계급은 사라지거나 덜 중요해졌나

조정환은 “20세기에서 21세기로의 이행은 실업자, 불안정노동자, 노동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노동이 증대하면서 임금 노동계급이 축소되는 시대”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조정환이 열거한 노동자들도 노동계급의 일원이다. 고전적 마르크스주의 전통에서 노동계급은 “생산수단을 소유하거나 지배하지 못해 생계를 위해 노동력을 판매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다.(김하영, 《오늘날 한국의 노동계급》, 2017)

이런 정의에 따르면 세계적 수준에서 노동자의 수가 늘어나고 있다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전통적 노동자’라고 생각되는 제조업 부문의 노동자도 늘어나고 있다. 일부 서방 자본주의 나라에서 제조업 부문의 노동자가 줄어들기는 했지만, 중국과 인도에서 늘어난 제조업 노동자들의 수만 해도 그 수를 상쇄하고도 남는다.

통계청,「경제활동인구조사」, 2024.08, 2025.09.23, 성/근로형태별 임금근로자 규모 및 비중(총괄)

한국에서도 노동자의 수는 축소되기는커녕 늘어나고 있다.

“전체 피고용자 중 신중간계급을 제외한 노동계급의 비중은 최소 80~85퍼센트에 이르며, 그 수는 1550만~1640만 명이다. 여기에 자영업자로 분류돼 있는 특수고용 노동자 등을 포함하면, 그 수는 1650만~1740만 명이다.”(김하영, 위의 책)

이 노동자들의 가족까지 고려하면 인구의 압도 다수가 노동계급이라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한국에서 제조업 고용 비중은 다소 줄었지만, 제조업 자체가 쇠퇴한 것은 아니다. 그만큼 제조업 부문의 노동자들이 과거보다 더 많은 잉여가치를 창출한다는 뜻이고, 따라서 그들이 가진 잠재력도 더 커졌다.

서비스업에 고용된 노동자들이 전통적 노동계급과 처지가 다를 뿐 아니라 다른 이해관계를 가진다는 생각이 유행하지만 커다란 오해다.

이는 더 많은 서비스 부문 노동자들이 자신의 조건과 권리를 지키려고 노동조합을 만들고 집단적 투쟁에 나서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반박된다. 금융, 철도, 화물, 마트, 보건의료, 교사, 학교비정규직, 삼성전자서비스 등. IT 노동자들인 네이버 자회사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만들고 싸우기 시작한 것이나 전공의들이 노조를 만든 것은 그 최신 사례다.

노동자들은 인구의 다수를 차지할 뿐 아니라 다른 사회 집단이 갖지 못한 사회를 혁명적으로 바꿀 잠재력을 갖고 있다.

노동계급의 힘을 강조하는 것이 노동계급이 늘 도덕적으로 우월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자본주의하에서 차별당하는 수많은 사회집단들과 그들의 저항을 폄하하려는 것도 아니다. 내가 다중을 “혐오”한다는 조정환의 주장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그러나 모든 차별받는 집단이 똑같은 힘을, 특히 차별을 끝장 낼 힘을 가진 것은 아니다.

노동계급의 힘(잠재력)은 역설적이게도 그들이 착취당한다는 사실에서 비롯한다.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을 집합적으로 착취함으로써만 이윤을 얻을 수 있고(이윤의 원천), 축적된 자본의 힘으로 노동계급을 지배한다. 노동자들의 파업은 이 이윤의 원천을 타격할 수 있다.

이 힘은 단지 고용주를 압박해 임금 등 노동조건을 개선하는 데에만 쓰이는 것은 아니다. 서평에서 지적했듯이 노동자들이 대규모 파업을 실제로 벌이면 자본가들과 국가는 단순히 시간끌기로 대처할 수 없다. 파업 자체의 경제적 효과는 물론이고 그것이 사회 전체에 끼치는 정치적·이데올로기적 효과 때문이다. 이를테면, 누가 부를 생산하는가, 국가는 중립적인가 하는 핵심적인 문제가 제기될 것이다.

② 박근혜/윤석열 퇴진 운동은 애초에 헌법적 틀 안에 귀결될 수밖에 없었나?

조정환은 박근혜 퇴진 운동에서 노동자들이 한 구실이나 ‘즉각 퇴진’ 대 ‘탄핵’ 논쟁, 운동의 주도권이 거리에서 의회로 옮겨지는 과정 등에 관한 내 서술을 “주도권·음모론에 함몰된” 것이라고 비판한다.

그러나 박근혜 퇴진 운동 초기에 벌어진 퇴진-탄핵 논쟁은 그저 음모론 같은 게 아니었다.

“2016년 11월 내내 퇴진행동 내 최대 쟁점은 운동의 슬로건을 ‘즉각 퇴진’으로 할지 ‘탄핵’으로 할지였다.”(최영준 전 박근혜정권퇴진비상국민행동 공동상황실장, ‘백서 《박근혜 정권 퇴진 촛불의 기록》 발간에 맞춰 — 좌파적 시각에서 본 박근혜 퇴진 운동의 주요 쟁점과 교훈’, 《마르크스21》 26호)

물론 즉각 퇴진이 반드시 헌법 밖 경로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두 슬로건은 운동의 전망과 목표를 둘러싼 이견을 날카롭게 표현하는 것이었다.

기층의 운동 잠재력을 최대한 끌어내는 것을 목표로 할지(퇴진 후 선거 일정이나 새 정부에 커다란 불안정 요인이 될지라도), 아니면 안정적인 정권 이양을 위해 국회와 헌법재판소가 정하는 경로에 의존할 것인지를 둘러싼 논쟁이었다.

좌파와 민주노총 등이 운동을 주도하던 초기에는 탄핵론이 퇴진행동 내에서 지지받지 못했고 다음 같은 입장이 채택됐다.

“탄핵 절차”는 “박근혜 정권이 자신의 권력을 유지 연장하기 위한 버티기 시간끌기와 다르지 않으며 ... 헌법재판소가 탄핵소추를 인용하지 않을 위험성이 상당히 높은 바 ... 민주주의의 근본 원칙이 국회와 사법부에 의해 왜곡될 수 있다.”(박근혜정권퇴진비상국민행동 기록기념위원회, 《박근혜정권퇴진 촛불의 기록1》, 126쪽)

요컨대, 운동 초기에 ‘즉각 퇴진’ 요구가 채택된 것은 처음부터 논쟁의 산물이었고, 좌파가 운동을 주도한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지 않았다면 10월 말에 박근혜 퇴진 집회가 시작되지도 못했을 것이다. 운동에서 대중의 자생성은 상대적 소수의 의식적 노력과 상호작용하는 것이지 분리돼 있는 것이 아니다.

반면, 민주당은 12월 3일 최대 규모의 퇴진 집회를 거치면서야 비로소 탄핵안을 추진했다. 노조 지도자들과 정의당은 탄핵안 추진의 사전 정지 작업으로 철도 파업을 중단시켰다. 박근혜 퇴진 운동이 노동계급 투쟁으로 나아가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조정환이 12월 27일에 쓴 ‘퇴진 대 탄핵인가 퇴진과 탄핵인가?’(《빛의 혁명 183》, 134~140쪽)는 이 시기의 논쟁을 피상적으로 다루고 있는데 결론에 이르러서는 “제헌활력의 섭정을 제도화”해야 한다고 모호하게 주장한다. 머잖아 정부를 구성하게 될 민주당을 통제할 직접민주주의 제도를 법제화(혹은 개헌)해야 한다는 얘기인 듯하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민주당 정부로부터 독립적인 대중 운동을 건설하는 것이다.

당시 투쟁의 세력관계 변화 과정을 음모론으로 보는 조정환의 관점은 박근혜 퇴진 운동에서 노동자들이 한 구실을 과소평가하는 것과 연관돼 있다.

박근혜 퇴진 촛불은 주말에만 집회를 했다. 주중에도 매일 시청 광장 앞을 지키며 퇴진 촛불을 이어간 것은 파업중인 철도 노동자들이었다.

“당시 파업에 참가했던 철도 노동자들은 ‘촛불이 옮겨 붙기 전부터 광장을 지켰다는 자부심, 새로운 역사를 내 엉덩이로 써 냈다는 우쭐함’을 느꼈다고 한다.”(최영준, 위의 글)

주말 촛불 집회 참가자들의 구성도 노동계급 비율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참가자들의 사회적 구성을 보면, 노동자 58.5퍼센트, 대학생·청년 24.5퍼센트, 자영업 16.2퍼센트였다.”(최영준, 위의 글) 그중 청년도 대체로 미조직 노동자일 가능성이 컸다.

“사회적 구성 면에서만 노동계급이 큰 비중을 차지한 것이 아니다. 능동성과 투쟁성 면에서도 노동계급은 (특히 초기에) 결정적인 구실을 했다. 11월 12일 전국노동자대회와 11월 30일 민주노총 하루 총파업은 12월 3일 전국적으로 230만 명이 참가한 시위가 일어나는 데에 선도자 구실을 했다. 11월 30일 민주노총 하루 총파업은 사실상 ‘총’파업이 아니라 제한된 부분의 파업이었던데다 단시간에 그쳤지만, 정치적 상징으로서의 효과는 결코 작지 않았다.”(최일붕, ‘계급 관점에서 본 박근혜 퇴진 운동’, 2017)

조정환은 철도 파업 종료에 관해서도 “당시 운동 내부의 전술적 고려 및 선택(파업 장기화의 한계, 운동의 전선 확대 필요성)과 관련된 논쟁적 문제”였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파업 장기화의 한계”는 전혀 사실이 아니다. 당시 민주당과 정의당, 철도노조·공공운수노조 지도부는 철도 파업을 끝내려고 부단히 애를 썼다. 11월 16일, 11월 21일에 이어 12월 7일 세번째 시도 끝에야 이들은 노동자들의 파업을 종료시킬 수 있었다. 노동자들의 저항이 그만큼 강했던 것이다. 국회에서 탄핵소추안이 가결된 것은 그 이틀 뒤인 9일이었다.

“운동의 전선 확대 필요성” 때문에 철도 파업을 종료했다는 주장은 파업이 퇴진 운동 확대에 걸림돌이 된다는 포퓰리즘적 발상이다. 그러나 광장의 정서는 개혁주의 지도자들과는 달랐다. 당시 철도 노동자들과 민주노총은 집회 참가자들로부터 큰 환영과 호의를 받았다.

따라서 합헌적 탄핵 절차로 수렴된 것은 예정된 결론이 아니었다. 오히려 노동자 투쟁을 위시해 이런 투쟁이 더 지속되거나 확대될 가능성이 있었다. 당시 헌재가 박근혜 파면 결정을 내리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조정환은 헌재가 그럴 리 없다고 단정한다. 그러나 훗날 폭로된 군부의 쿠데타 모의는 그 가능성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었다.

사실 조정환은 올해 3월 말 헌재의 파면 결정이 지연되자 기각이나 각하 가능성을 염두에 뒀다.

“국민다중은 헌법을 폭력으로 파괴하려 한 윤석열과 양립할 수 없다. ... 만약 윤석열의 복귀가 사실로서 나타난다면 국민다중은 12월 3일 밤 10시 30분 비상계엄 선포의 상황에 다시 놓이게 된다. ... 이 양립불가능성은 진정시킬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다. ... 집회는 지금까지와는 달라져야 한다. 더 이상 진정제로 기능해서는 안 된다. 헛된 희망을 불어넣어 적시 행동을 놓치게 하는 희망 고문의 장치로 기능해서는 안 된다.”(《빛의 혁명 183》, 362쪽)

헌법에 신뢰를 보내는 것에 비하면 이런 걱정이 훨씬 더 현실적이다.

③ 개혁이냐 혁명이냐 하는 물음은 의미 없는가?

개혁이냐 혁명이냐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부정직하게 말하는 것이다.

개혁을 위해 투쟁해야 하느냐는 쟁점이 아니기 때문이다. 혁명가들은 개혁을 위해 투쟁한다. 문제는 과연 개혁 운동만으로 충분한가, 그리고 어떻게, 어떤 전망 속에서 개혁 운동을 해야 하는가 하는 점이다.

개혁주의자들은 개혁 운동만으로 충분할 뿐 아니라 개혁 운동이 기존 질서를 뒤흔드는 혁명으로 발전해선 안 된다고 여긴다.

그래서 운동의 잠재력을 최대한 끌어내는 데에도 반대한다. 이는 특히 앞서 언급한 노동자들의 잠재력을 사용하는 것을 극구 반대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운동을 자기제한적으로 만드는 것이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박근혜 퇴진 운동의 결과가 처음부터 문재인 정부 출범으로 예정돼 있었던 것은 아니다.

〈노동자 연대〉가 주장했던 것처럼 노동자들이 파업으로 자신들의 힘을 사용했다면 사회 관계를 근본에서 바꾸는 혁명은 아니어도 박근혜를 탄핵하는 것 이상의 결과를 낳을 수도 있었다. 설사 결과적으로 민주당 정부가 등장하더라도 노동자들은 더 유리한 세력관계에서 새 정부를 맞을 수 있었을 것이고 그랬다면 문재인의 노골적인 개혁 배신에 맞서 효과적으로 저항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런 점들은 혁명적 상황이 아닌 때에도 개혁이냐 혁명이냐 하는 문제가 의미 있음을 보여 준다.

그러나 어쨌든 조정환의 주장은 혁명에 반대하는 것이지, 개혁이냐 혁명이냐가 중요치 않다는 것은 아니다. 물음은 어떻게 하면 혁명이 성공할 수 있을지, 역사에서 무엇을 배워야 할지 하는 것으로 제기될 수 있다.

이 대목에서 조정환은 설사 혁명이 성공하더라도 결국은 타락하기 마련이라고 주장한다. 자유주의자들과 개혁주의자들의 견해를 공유하는 것이다.

예컨대 조정환은 “러시아에서 혁명주의적 볼셰비키의 무장봉기가 성공했[지만] ... 당관료 지배의 국가자본주의로 귀착되었다”며, “레닌이 더 오래 살았다면, 스탈린이 아니라 트로츠키가 후계자였다면, 독일 혁명이 성공했다면 … 등등의 가정법은 이 엄연한 역사적 사실 앞에서 무력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1917년 혁명 자체가 스탈린이라는 괴물을 낳았고, 결국 1991년 최종 소련 해체로 귀결됐다는 주장은 역사적으로 선행한 사건이 그 다음에 일어난 사건의 원인이라고 보는 매우 초보적인 논리적 오류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식이라면 역사의 경로를 바꾸고자 하는 인간의 노력은 다 무의미한 것이 되고 만다.

1917년의 러시아와 1991년의 소련 사회를 운영했던 사회 계급 사이에는 인적·물적 연속성이 전혀 없다. 1917년 이후 몇 해 동안 혁명 러시아를 실제로 운영했던 것은 노동자·농민·병사 소비에트였다. 소비에트는 역사상 어느 선진국에서도 시행된 적 없는 수준 높은 (직접민주주의를 포함해) 민주주의를 구현했다. 혁명 이후 몇해 동안 러시아 노동계급은 내외부의 공격에서 이 성과를 지키기 위해 기꺼이 목숨을 걸었다.

그러나 서방 제국주의 국가들이 동맹을 맺고 백군 장군들과 함께 일으킨 내전 때문에 러시아 노동계급은 거의 몰살당했고, 산업의 붕괴로 노동계급의 물질적 토대도 파괴됐다.

러시아 노동계급은 노동자국가를 통제할 힘을 잃었고 , 1928년에 이르러서는 노동계급과 유리된 관료 집단이(스탈린으로 대표되는) 완전히 권력을 장악해 러시아를 서방 자본주의 열강과 경쟁하는 자본주의 국가로 변모시켰다.

이 과정은 전혀 필연적이지 않았다. 역사상 최초로 노동자들이 권력을 잡고 자신들의 국가를 세우는 데 성공한 러시아 혁명은 외부의 압력으로 질식당됐다. 혁명이 국제적으로(특히 독일) 확산되지 못한 것은 산소호흡기마저 뗀 꼴이었고, 스탈린주의 관료의 반혁명은 마지막 심장 박동마저 멈추게 했다.

누군가가 이런 과정을 거쳤다면 그는 결국 죽을 것이다. 이윽고 그의 피부색은 끔찍하게 변할 것이고, 심지어는 썩어서 구더기가 기어 나올지도 모른다.

그러나 누구도 죽은 사람 자신이 그 피부색과 구더기 발생에 책임이 있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를 교살한 자가 누구인지를 말할 것이다.

그가 죽은 뒤의 모습을 보고 생전에 활기가 넘쳤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는 것처럼, 러시아 혁명이 교살당했다는 사실이 러시아 혁명이 활력이 넘쳤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노동자들이 옛 국가를 파괴하고 과거와 완전히 다른 사회를 건설했으며 그 과정에서 노동자들 자신이 변하기 시작했다는 사실도 부정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당시에 러시아와 독일, 그 밖의 여러 나라에서 혁명가들이 저지른 실수를 다시 반복하지 않는 것이다. 혁명이 시작된 뒤에야 혁명적 정당을 건설하는 것은 너무 늦고 일상적 시기에 혁명적 정당 건설에 착수해야 한다는 사실을 독일의 혁명가들이 깨닫지 못한 것이 가장 큰 실수였다.

구체적 상황이 다르므로 혁명에 이르는 과정도 새로울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좌파의 실천과 비교해 보자면 당대의 혁명가들에게서 배우고 계승해야 할 소중한 유산이 훨씬 많다. 제국주의에 맞서는 법에 관해 레닌과 트로츠키는 많은 것을 알려 준다. 무엇보다 독립적이고 충분히 단련된 혁명적 조직의 유무는 사활적이다.

위기가 심화하는 오늘날에 개혁이냐 혁명이냐 하는 문제는 여전히 우리 앞에 놓인 가장 중요한 물음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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