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 연대

전체 기사
노동자연대 단체
노동자연대TV
IST
제국주의 극우 팔레스타인·중동 이재명 정부 이주민·난민 우크라이나 전쟁 긴 글

서평 《빛의 혁명 183》(조정환 지음, 갈무리):
자율주의에서 (좌파) 개혁주의로

《빛의 혁명 183》은 윤석열의 친위 쿠데타가 일어나기 두 달 전부터 대선이 끝날 때까지 저자가 하루가 멀다고 쓴 수기들을 모아 펴낸 책이다. 590쪽을 꼬박 채운 촘촘한 기록은 저자의 성실함을 보여 준다.

저자인 조정환은 1990년대 후반부터 국내에 자율주의 사상을 전해 온 학자이자 저술가다. 1980년대에 독재 정권에 맞서다가 옥고를 치르고 1990년대에는 사회주의노동자동맹 사건으로 10년 가까이 수배 생활을 하기도 했다.

《빛의 혁명 183》 조정환 지음, 갈무리, 592쪽, 29,000원

하지만 이 책은 윤석열의 쿠데타와 파면에 이르는 한국의 정치 지형이 완전히 새롭게 바뀌기 시작하는 시기에 대한 명료한 분석을 담고 있지 않다. 오히려 자율주의 사상가가 어떻게 (좌파) 개혁주의로 이동하지는지를 보여 주는 실례라 할 수 있다.

조정환의 자율주의는 자본주의를 증오하고 스탈린주의와 개혁주의를 거부할 뿐 아니라 더 나아가 대의민주주의(선거) 자체도 거부하는 것이었다.

그랬던 그가 이 책에서는 헌재의 윤석열 파면 결정 직후 녹색당에 가입했음을 알렸다. 녹색당이 “추첨을 통한 대의원 선출과 같은 운영 방식”을 채택하고 있고, “반정당의 정당을 명시하고 있다는 점” 등을 입당 사유로 들었다. 하지만 녹색당도 선거를 중시하는 정당이다.

조정환은 권영국 선본의 초기 논의(와 경선) 기구인 ‘사회대전환대선연대회의’ 회원으로도 참가했고 선거인단으로도 참가했다.

더 나아가 그는 진보당의 “민주대연합 혹은 인민전선”도 지지했다. 윤석열의 쿠데타에 반대하는 연합이(“반예외주의 연합정치”) 사활적이라는 것이다. 인민전선을 비판하는 좌파를 향해 조정환은 오히려 “민주당과의 연합 가능성을 미리부터 차단하는 좌파 일각의 행보는 위험해 보인다” 하고 비판했다.(이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루겠다)

어떻게 이런 입장 변화가 일어났을까?

자본주의 국가

자율주의는 1990년대 말 신자유주의에 맞선 글로벌 운동에서 큰 인기를 얻은 사상이고 지금도 여러 운동에 이러저러한 영향을 끼친다. 자율주의는 매우 다양한 사상과 실천을 포괄하지만, 자율주의 정치가 다른 좌파 정치와 구별되는 핵심 쟁점은 자본주의 국가에 관한 문제다.

개혁주의자들은 자본주의 국가를 중립적으로 본다. 그래서 집권을 통해 국가를 사회 개혁에 활용할 수 있다고 여긴다.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자본주의 국가를 계급 지배를 위한 수단으로 본다. 따라서 “노동자 계급이 기존의 국가 기구를 단순히 장악하여 그것을 자기 자신의 목적을 위해 운영할 수는 없다.”(칼 마르크스, 《공산주의자 선언》 서문, 1871년) 자본주의 국가는 혁명적 전복을 통해 노동자 국가로 대체돼야 한다.

자율주의자들은 자본주의 국가를 우회해 운동만으로 사회 변화를 이룰 수 있다고 보고, 그래야 한다고 여긴다.

이로부터 다양한 자율주의를 관통하는 두 가지 공통점이 생겨난다.

하나는 공식 정치의 타협과 책략, 그리고 거기에 기대를 거는 개혁주의 정당과 노동조합을 거부하는 것이다. 그래서 자율주의는 대중 운동이 등장하는 초기에 영향력을 가지곤 했다. 기층의 행동을 강조하며, 체제와 영합하는 것을 도덕적으로 거부하기 때문이다.(선거 때만큼은 의회를 ‘활용’해야 한다는 이들도 일부 있다: 연성 자율주의).

다른 하나는 체제 전체에 맞서는 전략을 거부하는 것이다. 그런 전략적 목표를 지향하는 조직도 거부한다. 자율주의자들은 혁명적 좌파도 개혁주의자들만큼이나 운동에 해로운 존재로 여긴다. 마르크스의 용어들을 사용하지만 전략을 거부함으로써 그 핵심 요소인 노동계급과 그들의 구실을 기각한다.

자율주의의 입장을 이론화하려는 드문 시도 하나는 존 홀러웨이의 《권력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는가》이다. 조정환이 2002년 국내에 번역해 소개했다.

홀러웨이가 말하고자 한 바는 권력을 잡으려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가 보기에 권력을 잡으면 타락하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이런 주장은 스탈린주의와 개혁주의에 대해 반감을 가진 이들에게 그럴듯해 보이기도 했지만, 실제 역사를 구체적이고 맥락적으로 돌아보지 않는 게으름을 정당화하는 핑계가 되기도 했다.

홀러웨이는 체제의 끔찍한 면모에 맞서는 여러 운동이 어떻게든 하나로 모여(‘운동들의 운동’) 체제를 무너뜨릴 것이라고 주장했다. 자발성이 유력하면 국가는 저절로 붕괴하므로 권력을 잡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전혀 그렇지 않다. 우리가 국가를 무시해도 국가는 운동을 (체제를 위협하는 경우는 물론이고 그 작동을 일정 수준 이상으로 방해하면) 무시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거듭 보여 줬다.

체제를 지키려는 국가의 폭력에 직면하면 국가를 무시하라는 말은 기껏해야 공상이거나 운동을 무장 해제시키게 된다. 결국 국가를 개혁할 방법을 찾거나 아니면 국가를 전복할 방법을 찾아야 하는 것이다. 즉, 자율주의자들은 그런 상황에서 개혁주의자가 되거나 혁명가가 돼야 한다는 선택에 직면한다. 고립된 소규모 공동체로 탈주(도피)하는 게 아니라면 말이다. 유감스럽게도 대부분의 경우에 자율주의자들의 선택은 전자였다.

조정환은 윤석열의 국가 폭력(군사 쿠데타)에 직면해 같은 결론에 이른 듯하다. 그는 특히 “헌법을 폭력으로 파괴하려 한” 윤석열이 석방되고 헌재의 파면 결정이 미뤄지며 각하될 가능성까지 제기되자 엄청난 위기감을 느꼈다고 한다.

운동에는 '활력'뿐 아니라 전략과 이론도 필요하다 ⓒ조승진

자율주의에서 좌파적 개혁주의로

그러나 국가 폭력이라는 극적인 사태가 아니어도 자율주의자들이 개혁주의로 이동하는 경우는 드물지 않다. 특히 일종의 교착 국면, 즉 국가가 운동을 폭력적으로 짓밟지는 않아도 좀처럼 물러서지 않으며 힘이 빠지기를 기다리는 국면이 지속되는 경우에도 그런 일이 벌어진다.

이런 교착 국면을 돌파하기 위해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운동이 체제의 작동을 마비시킬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힘, 즉 노동계급의 힘을 동원해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그러면 지배자들은 단순히 ‘버티기’를 할 수 없다.

반면, 개혁주의자들은 ‘제도화,’ 즉 의회를 통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윤석열 국회 탄핵과 뒤이은 헌법재판소 파면 촉구로 나타났다.

이런 상황에서는 자율주의자들도 계속 집회, 계속 시위를 외치는 것으로는 상황이 해결되지 않으니 운동을 지속하며 의회도 활용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나아가곤 했다. 다만 기존 정당들은 믿을 수가 없으니 새로운 정당을 만들거나 이제 막 생겨난 개혁주의 정당에 힘을 싣는 것이 유력한 대안으로 여겨진다. 이는 좌파적 개혁주의자들이 주장해 오던 ‘의회 안팎에서 싸워야 한다’는 정식과 딱 들어맞는다.

2008년에 시작된 세계 경제 위기가 해결되지 않고 세계 곳곳에서 커다란 대중 운동이 분출했다. 2011년에는 유럽의 여러 나라들과 미국에서 광장 점거 운동이 벌어졌다. 중동에서는 혁명이 분출했다.

그러나 이 운동들은 2008년의 경제 위기에 직면해 기존 정치 세력들이 대중에게 가한 끔찍한 고통을 해결하지 못했고, 일종의 교착 국면이 형성됐다. 이집트에서는 반혁명이 일어났다.

그러자 자율주의의 영향이 강했던 여러 운동들에서 좌파적 개혁주의 정당들이 대안으로 부상했다.

그리스의 시리자, 스페인의 포데모스 등이 대표적이었다. 또, 영국에서는 제러미 코빈이, 미국에서는 버니 샌더스 등이 좌파적 리더로 부상했다.

좌파적 개혁주의의 실패, 최근의 사례

조정환도 이 무렵 이미 개혁주의로 이동하기 시작한 듯하다. 그는 2017년 이후 “다중이 권력을 장악하지 않으면서 대의제 권력기관들을 움직이는 섭정의 정치에 관심을 기울였다”고 한다.

‘다중’(多衆, multitude)은 자율주의 사상가들의 고유한 표현으로 다양한 운동에서 자발성과 열정으로 고취된 사람들을 뜻한다. 윤석열 퇴진 운동에서 ‘말벌들’로 불린 청년들이 있었는데, 자율주의자들은 예전부터 다중을 벌떼에 비유했다.

“섭정”은 그가 사실상 의회와 선거를 통해 개혁을 하는 수밖에 없다고 여기면서도 대의민주주의를 거부해 온 과거의 주장과 절충하기 위해 선택한 용어로 보인다.

조정환은 2016~2017년에 벌어진 박근혜 퇴진 운동이 국회의 탄핵 절차로 수렴되지 않았다면,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단언한다.

“만약 다중의 직접행동이 국회의 탄핵소추 거부나 헌법재판소의 탄핵소추안 기각에 부딪혔다면 파면은 불가능했을 것 … 대의 구조를 갖추는 것도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준 사건이었다. 이때부터 나는 ... 선거의 긍정적이고 구성적인 측면에 조금씩 눈을 돌렸다.”(438쪽)

그러나 당시 운동은 처음부터 ‘탄핵’이라는 합헌적 수단으로 자신의 목표를 제한했던 것이 아니었다.

박근혜 퇴진 운동은 그 주된 동력이 노동운동에서(특히 철도 노동자들) 왔고 초기에 운동을 주도한 것도 좌파였다. 덕분에 처음부터 상당한 위력을 발휘했다. 거리 시위의 규모는 윤석열 퇴진 운동 때의 갑절 이상이었고, 극우는 소규모로 힘을 발휘하지는 못했다. 이런 점들 때문에 민주당은 처음에는 운동과 거리를 뒀다.

정의당의 심상정 의원과 민주노총 지도자들은 이 운동이 헌법 질서 내에서 해결돼야 한다고 봤다. 그들은 철도 조합원들의 거듭된 반대를 무릅쓰고 파업을 중단시켰다.

박근혜 퇴진 운동에서 노동계급 투쟁의 요소가 제거되자 비로소 민주당은 국회 탄핵 트랙에 올라탔다. 민주당은 운동의 주도권을 거리에서 국회로 가져가는 데 성공했다. “질서 있는 퇴진” 운운하던 민주당이 최대 수혜자가 된 이유다.

문재인 정부는 박근혜와 이명박을 사면했고, 노동자들과 청년들에게 약속한 개혁을 배신했다. 배신이 낳은 환멸과 사기 저하를 이용해 윤석열이 집권했다.

즉, 박근혜 퇴진 운동은 개혁주의 전략의 불가피성이나 그 효율성을 보여 준 사건이 아니라, 어떻게 개혁주의가 운동의 힘을 약화시켜 자본주의적 지배를 회복하도록 돕는지 보여 준 사건이었다.

해외에서도 새롭게 부상한 (좌파적) 개혁주의 정당들은 자본주의 국가를 개혁하기는커녕 주류 사회민주주의 정당의 뒤를 좇았다.

그리스의 시리자는 유럽연합의 긴축 압력에 굴복하고 지지자들을 배신한 결과 몇 해 뒤 정권을 잃고 소수정당으로 전락했다. 스페인의 포데모스도 배신을 거듭해 몰락했다. 버니 샌더스와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코르테스는 바이든 지지라는 (지금 와서 보면 더욱 치욕적인) 이력을 남기고 찌그러졌다. 제러미 코빈은 노동당 우파에 의해 유대인 혐오라는 얼토당토않은 비방을 당한 뒤에 제명됐다.

극우와 파시스트들은 이런 배신이 낳은 환멸을 악용해 오늘날 여러 나라에서 주요 정치 세력으로 급부상할 수 있었다. 윤석열과 한국 극우의 급성장도 그 일환이다.

개혁주의의 배신과 극우의 부상

윤석열의 군사 쿠데타를 겪은 뒤 조정환은 더한층 개혁주의 쪽으로 나아간 것으로 보인다. 민주당과의 전략적 동맹인 민중전선도 옹호하는 것으로 나아갔으니 말이다.

물론 윤석열을 패퇴시키기 위한 행동 통일(공동전선)은 필요했다. 그러나 강령 통일(민중전선)은 윤석열을 끌어내릴 힘을 키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갉아먹는 결과를 낳는다.

민중전선에는 상이한 계급 간 협력을 유지하기 위해 자본가들과 중간계급을 놀라게 할 수 있는 노동자 대중 행동을 자제시켜야 한다는 논리가 작동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노동계급의 자주적 행동이야말로 쿠데타와 극우의 부상에 맞설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다.

조정환은 민중전선을 합리화하려고 민주당과 이재명을 추켜세우기도 한다. 탄핵 판결을 앞둔 3월 말 이재명 당시 민주당 대표가 기업주들의 환심을 사려고 삼성전자 회장 이재용을 만난 것을 두고 조정환은 “초국적 자본의 힘이 탄핵 선고에 미칠 영향을 제어하기 위한 것”이라고 해설했다. 이재명이 윤석열 반대 최대 동맹을 만들려는 구상으로 이재용을 만난 건 사실이다. 이를 위해 민주당은 윤석열과 쿠데타 (지지) 세력에 효과적으로 맞설 수 있는 노동자 파업에 대해서는 극구 말하기를 싫어했다.

조정환이 생각하는 “내란 종식”도 정권을 교체하고, 신자유주의의 폐해를 완화하고, 개헌을 하는 등 그가 비판해 온 대의민주주의의 틀을 전혀 벗어나지 않는다. 정작 윤석열과 극우는 대의민주주의를 존중할 의사가 없고 사라지지도 않고 있는데 말이다. 그러기는커녕 국힘이 급속히 재극우화하며 극우를 재결집시키고 있다.

그가 의회를 보완하자며 제시하는 ‘직접민주주의’는 자율주의와 개혁주의를 절충하기 위한 시도에 지나지 않는다.

그가 제안하는 개헌(국민발안권, 국민소환권, 국민거부권, 국민투표권)이 이뤄진다고 한들 자본주의 권력을 다중이 통제할 수 있을까? 국가 권력의 핵심부(검찰, 군대, 경찰, 국정원, 사법부 등)는 선출되지도 않고 자본가들의 경제 권력은 통제의 대상으로 고려되지도 않는데 말이다.

이메일 구독, 앱과 알림 설치
‘아침에 읽는 〈노동자 연대〉’
매일 아침 7시 30분에 보내 드립니다.
앱과 알림을 설치하면 기사를
빠짐없이 받아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