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마르크스주의 입문 ─ 우리를 둘러싼 세계를 바꾸기 위해》(오월의 봄):
20대 마르크스주의자가 안내하는 마르크주의 입문
〈노동자 연대〉 구독
자본주의가 기후 위기, 불평등과 차별 심화, 전쟁 등으로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위협하고 있는 지금, 마르크스주의의 유의미함을 주장하며 마르크스주의를 소개하는 책이 나왔다. 《마르크스주의 입문 – 우리를 둘러싼 세계를 바꾸기 위해》가 그것이다.
이 책이 특히 관심을 끄는 이유는 20대 청년이 쓴 마르크스주의 입문서라는 점이다. 저자인 이찬용 씨는 2003년생 젊은 마르크스주의자다. 저자는 한국외대에 입학해 동아리 ‘마르크스 정치경제학회 왼쪽날개’의 활동을 하며 스스로 중도좌파적 사회민주주의자에서 “고칠 수 없는 마르크스주의자”가 됐다고 한다.
저자의 말마따나 “마르크스주의를 막연한 옛날의 것, 현대에는 의미가 없어진 실패한 사상 정도”로만 보는 시각이 흔한 요즘, 20대 청년이 자본주의에서 비롯하는 온갖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길은 마르크스주의밖에 없다고 주장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마르크스주의를 안내하기 위한 책을 내놓았다는 점은 그 자체만으로도 매우 높이 살 만한 일이다.
이 책은 특히 몇 가지 장점이 있다. 우선, 저자는 “마르크스를 비판하는 이들”뿐 아니라 “마르크스를 옹호하는 이들”조차 마르크스의 주장 일부를 맥락을 무시한 채 가져오거나 취사선택해 왜곡하는 것을 바로잡으려 한다. 예컨대 마르크스가 주장한 유물론이 “인간조차 오로지 물질로 환원될 뿐”이라는 조야한 비난부터, 마르크스주의가 서구 중심주의인가, 마르크스주의와 민족해방 투쟁의 관계, 마르크스가 말한 민주주의의 의미 등을 다루며, 이와 관련된 흔한 오해를 바로잡으려 한다.
이를 위해 저자는 저자의 “개인적인 의견과 배치되는 부분”이 있더라도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사상을 설명하는 데에 중점을 두고 있다. 중간중간 참고자료나 ‘더 읽어보기’ 등을 통해 토마 피케티, 레닌과 스탈린, 사이토 고헤이, 낸시 프레이저, 데이비드 하비, 루이 알튀세르, 표트르 크로포트킨, 칼 폴라니, 안토니오 그람시 등을 짧게 소개하며 더 다양한 마르크스주의와 그 외 사상들과도 대화하는 자세를 보인다.
그러다 보니 약간의 난이도 문제가 생긴다. 저자 스스로는 이 책의 장점을 “쉽다”는 데에 두고 있지만,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주장을 철학·역사학·경제학·사회학·정치학 등으로 분류해 마르크스주의의 전반적인 내용을 담으려고 하기 때문에 입문서치고 쉽지만은 않을 듯하다. 특히 경제학 부분은 분량이 적지 않은 데다 재생산 표식, 평균이윤율과 전형문제, 이윤율 저하 경향을 다루고 있어 초심자들에게 만만치 않다.
둘째 장점은 저자가 분명하게 혁명 지향성을 드러낸다는 점이다. 이는 저자가 마르크스주의에 관한 왜곡을 바로잡으려 하는 것과 연관돼 있다. 예컨대, 저자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관한 흔한 오해를 반대하고,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부르주아 독재에 대항하는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라는 점을 역설한다.
“주류 정치학자들이 이야기하는 바와는 다르게 자본주의 사회에서 확립된 여러 ‘민주적’ 제도들은 자본가를 위한 민주 제도이다. 따라서 자본주의 체제 자체를 뒤집고 노동자들의 진정한 민주주의를 쟁취하기 위해서는 프롤레타리아계급의 독재에 기반한 새로운 정치체제가 필요하다. … 기존의 국가기구를 해체하고, 프롤레타리아의 이해관계에 맞게 새롭게 바꿔야 하는 것이다.”(281쪽)
또, 저자는 한 절을 할애해 ‘개량인가 혁명인가’를 다루면서, 마르크스가 비판한 “의회주의 백치증”을 인용하며 의회를 통한 사회 변화 추구를 비판하고 있다.
그래서 이 책의 감수자인 포스트마르크스주의자 배세진 씨의 영향은 제한적인 듯 보인다. 배세진 씨 스스로도 ‘감수의 말’에서 “분명 본서는 포스트-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는 ‘교조적’으로 보일 수 있을 것”이라고 지적하며, 저자의 “근본으로 돌아가 읽기”가 자신 또한 자극하고 있다고 칭찬하고 있다.
모호함
그럼에도 이 책은 몇몇 부분에서 모호함과 (의도적인 듯한) 공백 때문에 아쉬움을 준다. 그런 아쉬움의 일부는 분명 20대 초반의 저자가 정치적 경험이 부족해 생긴 듯하지만 말이다.
이 글에서는 그중에서도 핵심적인 몇 가지 쟁점만 다루겠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점은 저자가 “현실 사회주의”라고 부르는 소련과 동구권, 중국 등의 성격에 대한 분석과 평가를 다루는 데에 별도의 장을 할애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저자의 지적처럼 “역사 속 사회주의 국가들의 붕괴는, 현실 사회주의에 대한 평가와는 무관하게 마르크스주의 전체에 대한 사형 선고로 여겨졌”는데도 말이다.
더구나 저자는 소련 사회 성격을 둘러싼 마르크스주의자들 사이의 논쟁에 문외한도 아니다. 책 마지막 부분의 ‘용어사전’에서 “타락한 노동자국가,” “기형적 노동자국가,” “국가자본주의,” “클리프주의” 등을 짤막하게라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자본주의가 계속되고 있으니 마르크스주의는 유의미하다’는 주장으로 충분하다고 보는 듯하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를 이용해 자본주의를 비판하고 반대하는 것과 마르크스주의를 실천 지침으로 삼아 자본주의를 타도하려 하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이다. 저자가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를 다루면서 강조한 것처럼 “중요한 것은 세계를 바꾸는 것”이라면, 마르크스주의를 실천 지침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마르크스주의가 그런 (혁명적) 실천 지침이라면 “현실 사회주의”의 실패 문제는 결코 회피할 수 없는 문제인 것이다.
실제로 저자는 책 곳곳에서 “현실 사회주의”에 대한 나름의 평가를 하고 있다.
“현실 사회주의의 실패는 혁명 이후 권력을 잡은 세력들이 모든 비판의 목소리를 반혁명 세력으로 규정하고 탄압하며,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를 죽였던 비극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을 것”(282쪽)이라거나, 월러스틴을 인용해 “선거를 통해 집권하고자 한 독일의 사회민주당도, 폭력혁명을 통해 집권한 러시아의 볼셰비키도 권력을 지향하는 방법에서 차이를 보였을 뿐, 모두 우선 국가권력을 차지하고 이후 사회를 바꾼다는 단계론에 매몰되었다는 것”(280쪽) 등이다. 저자는 국가 권력 문제를 놓고 기존 좌파 전략을 비판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이런 비판은 레닌주의와 스탈린주의를 동일시하는 난점일 수 있고, 자율주의를 소환하는 난점일 수도 있다.
둘째, 그렇다 보니 저자가 말하는 혁명은 마르크스의 그것과는 다소 의미가 달라진다. 마르크스에게 노동자 혁명은 자본주의 체제를 타도하기 위해서뿐 아니라 노동계급이 옛 사회의 오물을 씻어내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다. 그런데 저자는 그와 반대로 혁명 전에 혁명정당이 “노동계급 전체를 포괄하는 것,”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에 맞선 이데올로기적 투쟁을 펼치며 대자적 계급을 형성하는 것” 등을 거듭 강조한다. 다시 말해, 노동계급이 옛 사회의 오물을 씻어낸 후에야 혁명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런 엘리트주의는 저자가 민주공화정을 다루는 부분에서 매우 극명해진다. 저자는 ‘공화정의 유형’이라는 부분에서 의회독재, 입헌공화정, 사회공화정(사회주의)과 구분되는 민주공화정의 특징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여전히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이 존재하지만, 피지배계급의 요구 역시 국가 정책에 반영된다. 민주공화정을 극단적인 형태까지 몰고 가면, 이는 현대사회와 같은 정치인·관료와 민중의 분리가 사라지고, 시민이 언제나 대표자를 소환할 수 있는 고대 그리스의 직접민주주의와 비슷한 형태가 될 것이다.” “따라서 민주공화정은 헤겔이 이야기한 시민사회 외부에 따로 존재하는 일반의지가 없는 상태이기도 하다. 덕분에 프롤레타리아는 해방을 위한 도구를 손에 얻게 되었다.”(251쪽)
앞서 봤듯이, 저자는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자본가를 위한 민주 제도”라고 비판하면서 혁명, 봉기 등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이런 비판은 이 책 곳곳에서 거듭 반복된다. 예컨대 “노동자가 자본가에게 직접 주는 것은 10시간분의 노동뿐일지 몰라도, 그는 나머지 시간마저도 자본의 통제 아래 두게 된다. 하루 10시간의 강제노동이 노동자의 나머지 14시간마저 제한하는 상황에서, 어떻게 착취당할지 구체적인 방법을 직접 선택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252쪽) 하고 급진적인 비판을 하기도 했다.
그런데 막상 민주공화정을 설명할 때는 여전히 부르주아 계급 사회인데도 피지배계급의 요구 역시 국가 정책에 반영된다는 둥 국가와 시민사회의 분리가 없는 상태라는 둥 하는 얘기를 하는 것이다. 이는 결국 마르크스가 말한 민주주의의 계급성(부르주아 민주주의냐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냐 하는)을 부정하는 것으로, 민주공화정을 “프롤레타리아는 해방을 위한 도구”로 사용할 수 있다는 풀란차스 비슷한 중간주의 쪽으로 길을 열어 두는 셈이다.(그러다 보니 저자는 “혁명의 방법”을 설명할 때 “혁명정당”에 관해서만 설명하고, 노동계급의 대안적 권력에 관해 마르크스에게 결정적 단서를 준 파리 코뮌이나 그것의 발전된 형태인 소비에트에 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않는다.)
셋째, 이처럼 저자는 민주공화정 내에서 광범한 조직화를 강조하면서 노동계급의 결정적 중요성도 흐릿하게 만들어 버린다.
물론 저자는 마르크스가 “프롤레타리아를 자본주의의 보편계급, 사회주의혁명의 주체로 봤다”는 점은 인정한다. 노동계급이 단지 불쌍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힘으로 자본주의가 굴러가기에 프롤레타리아는 다가올 혁명의 주체가 된 것”이라는 점을 지적하기도 한다. 그런데 저자는 갑자기 후대 마르크스주의들을 향해 “다가올 혁명은 오로지 프롤레타리아트만을 위한 혁명으로 한정해서는 안 될 것”이라며 생뚱스러운 비판을 한다.
이 지점에서 저자는 낸시 프레이저를 인용한다(저자가 가장 우호적으로 인용하는 사람이 낸시 프레이저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제적 모순은 단일하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성적 모순, 인간과 자연 사이의 모순, 기타 다양한 모순들과 결합돼 존재한다”면서 프롤레타리와 차별받는 사람들의 연대를 강조한다.
이처럼, 저자는 마르크스가 노동계급의 중심성을 주장했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다시 프레이저를 인용하며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제(생산 영역)가 차지하는 궁극적 중요성을 간과하고, 자본주의를 폐지할 결정적인 힘이 노동계급에게만 있다는 점을 부정한다. 이를 위해, 마르크스주의에서 말하는 노동계급 중심성이 “프롤레타리아트만을 위한 혁명”을 뜻한다는 듯이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저자는 프롤레타리아 독재, 혁명, 봉기 등을 인정하고 지지하는 듯하다가도 결정적인 지점에서 이를 모호하게 만든다. 이런 약점은 저자가 마르크스주의를 옹호하면서도 정작 마르크스주의 정치의 핵심인 자본주의 국가 분쇄와 소비에트나 코뮌 형태의 민주적인 노동계급 기관들로 대체돼야 한다는 점에 대해 모호한 입장이기 때문인 듯하다.
레닌과 러시아 혁명, 스탈린 체제의 전면적 반혁명성에 대한 ‘역사적으로 구체적인’ 분석으로 이 모호성을 검토해 보면 좋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