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정부의 ‘정상 가족’ 개념 고수 ─ 그 이유와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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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는 10월 11일에 열린 노동자연대 온라인 토론회 ‘윤석열 정부의 ‘정상 가족’ 개념 고수 ─ 그 이유와 의미’의 발제문이다.
최근 윤석열 정부가 건강가정기본법의 협소한 가족 규정을 고수한다고 밝혔다.
건강가정기본법은 2004년 노무현 정부 때 제정된 법이다. “혼인·혈연·입양으로 이루어진,” 즉 결혼한 남녀와 자녀로 이뤄진 가족만을 법적으로 인정한다. 그리고 그런 가족을 육성하고 지원하려고 만든 법이다.
이 법률하에서 사실혼 관계, 비혼 동거, 위탁 가정, 동성 관계 등은 가족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그에 따라 여러 불이익을 겪고 있다.
이 글에서는 오늘날 가족의 모습이 어떤지, 이른바 ‘정상 가족’ 또는 ‘건강 가족’이라는 협소한 가족 규정이 노동자 등 서민층 사람들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등을 마르크스주의의 가족 분석을 토대로 살펴보려 한다.
오늘날 한국 가족의 모습
학교와 매스컴 등에서는 결혼한 남녀와 자녀로 이뤄진 핵가족이 전형적인 모습으로 그려지지만, 오늘날의 현실은 그렇지 않다. 많은 사람들이 ‘전통적’ 가족 관계 바깥에서 살아간다.
2021년 통계를 보면, ‘전통적 핵가족’은 전체 가족의 28퍼센트밖에 안 된다. 반면, 부부만으로 이뤄진 가구, 한부모 가구, 1인 가구 등 다양한 형태의 가구가 증가해 왔다. 특히, 1인 가구가 큰 폭으로 증가했고, 한부모 가족도 전체의 약 10퍼센트나 된다.
결혼을 미루거나, 하지 않는 비율도 크게 증가하고 있다. 결혼 건수는 10년 연속 감소하고 있다. 초혼 연령도 증가해, 1990년대에 여성들은 20대에 결혼했지만, 이제는 30대가 돼야 결혼한다. 이혼도 크게 늘었다.
결혼·혈연으로 엮이지 않은 비친족 가구원은 2021년 처음으로 100만 명을 넘어섰다. 결혼하지 않고 친구나 애인 등과 동거하는 사람이 늘고 있는 것이다.
또, 사람들은 자녀를 더 적게, 더 늦게 출산하며, 아이를 낳지 않기도 한다. 2021년 출생률은 역대 가장 낮았다. 합계 출산율, 즉 가임기 여성 1명이 평생 낳을 것으로 예상되는 평균 출생아 수는 0.81명으로 OECD 나라들 가운데 8년째 가장 낮은 수치를 기록하고 있다.
한국의 비혼 출산은 다른 OECD 나라들과 비교하면 매우 적지만(2018년 기준 OECD 평균 41.2퍼센트, 한국은 1.9퍼센트), 결혼하지 않더라도 출산하거나 입양하고 싶다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이런 현실을 반영해 가족과 결혼에 대한 사람들의 관념도 변했다. 지난해 여성가족부가 실시한 조사 결과를 보면, 10명 중 7명은 혼인이나 혈연관계가 아니더라도 함께 거주하고 생계를 공유하면 가족으로 여길 수 있다고 생각한다.
또, 지난해 통계청 조사를 보면, 결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절반가량에 불과하다. 미혼 여성 사이에서는 결혼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22.4퍼센트로 매우 낮다.
여성만큼은 아니지만 미혼 남성 사이에서도 결혼을 꺼리는 태도가 늘고 있다. 남성은 ‘가장’으로서 가족을 부양해야 한다는 압력을 여전히 크게 받는데, 만성적 경제 불황 속에서 결혼과 아이 갖기를 피하거나 미루는 것이다.
이와 같은 한국 가족의 모습 변화는 50년 넘게 지속됐다. 여성들의 노동시장 참여가 늘고 교육 수준이 높아지면서 여성의 경제적 독립성과 자의식이 높아진 것이 그 요인이다. 독립적인 소득원을 갖게 되면 자기 삶을 대하는 여성의 태도가 달라진다. 그리고 교육은 여성이 아내와 어머니가 되는 것 이상의 더 많은 가능성에 눈뜨게 한다.
이것이 결혼과 출산에 대한 태도 변화도 낳았다. 가족에 대한 헌신과 희생보다 가정 바깥의 일을 통한 개인의 성취와 자아실현을 점점 더 중시하게 된 것이다. 또한 피임·낙태 기술의 발전 등으로 성이 오로지 가족과 재생산을 위한 것이라는 관념도 도전받아 왔다.
건강가정기본법의 제정 목적
건강가정기본법은 이런 변화가 빠르게 진행되는 상황에서 그에 대한 반작용(반동)으로 2004년 제정됐다.
건강가정기본법이 제정되던 무렵은 만혼과 이혼의 증가, 출생률 저하와 고령화 등이 본격화되고 있었고, 그에 따라 지배계급의 우려가 커졌다. 특히, 그 몇 해 전 IMF(국제통화기금)를 불러들인 한국 초유의 경제 위기가 가족의 변화를 재촉하는 상황이었다.
지배계급은 이런 변화를 “가족의 해체,” “가족의 위기”로 진단하고, 그것이 정부의 부담을 키우고 국제 경쟁력을 저하시킬까 봐 걱정했다. 2003년 당시 노무현 정부의 보건복지부 장관 김화중이 한 말은 지배계급의 시각을 잘 보여 준다.
“1년에 버려지는 아이들이 1만 명이 넘습니다. 그중의 반 정도는 이혼해서 버려진 아이들이고 반 정도는 미혼모입니다. … 보건복지부는 이렇게 버려진 아이들을 감당하기 너무 힘든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 [이런] 풍토가 계속 간다면 기본이 흔들리는 사회가 될 것 같습니다.”
이런 진단에 따라, 노무현 정부가 제출한 법안과 보수 정당 한나라당(현 국민의힘)의 의원이 제출한 법안을 기초로 2004년에 건강가정기본법이 제정됐다.
이 법은 국가가 출산과 양육, 직장과 가족생활의 양립, 교육 등을 지원하도록 했다. 전통적 핵가족 형태를 제외한 다른 형태의 가구원은 이런 지원에서 배제됐고, 이혼을 어렵게 만드는 조처 등도 취해졌다.
이처럼 건강가정기본법은 가족 해체가 지속되면 사회 안정을 해칠 수 있다는 우려 속에서 전통적 핵가족을 보호하려고 만든 법이다. 국가가 나서서 결혼과 자녀 갖기를 장려하고, 가족이 아이들을 제대로 양육하고 교육하도록 법과 제도를 정비한 것이다.
전통적 핵가족을 우대해 지원하지만 그 목적은 어디까지나 돌봄과 양육, 노동력 재생산을 개별 가족에게 여전히 떠맡기는 모순이 건강가정기본법에 담겨 있다.
그래서 윤석열 정부의 건강가정기본법 고수는 우선, 전통적 가족 내에서 돌봄과 양육을 주로 담당할 것이 기대되는 여성의 고통을 가중시킬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서 살펴보겠다.
또, 윤석열 정부의 건강가정기본법 고수는 법적 가족에서 배제된 사람들이 겪어 온 고통을 외면하겠다는 것이다.
법적 가족에서 배제된 사람들이 겪는 고통
가족은 흔히 사적인 관계로만 여겨지지만, 이혼이나 상속을 둘러싸고 분쟁이 생기면 가족에 국가 법률과 제도가 얼마나 많이 개입하고 있는지 새삼 알게 된다. 가족구성원연구소의 보고서를 보면, 2019년 기준 현행 법률 1400여 개 가운데 240여 개에서 ‘가족’이 언급돼 있다. 재난·안전, 죽음·질병, 토지·주택, 조세·세법, 수형, 교육 등을 다루는 각종 법률에 ‘가족’이 등장하고 그 의무가 강조되기도 한다.
그만큼 법률이 가족을 어떻게 규정하느냐는 많은 사람들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건강가정기본법은 가족을 협소하게 규정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법적 가족으로 인정받지 못해 차별과 곤경에 처한다. 사실혼, 비혼 동거, 위탁 가정, 미혼 부모와 아동, 동성 커플 등이 이에 해당한다.
가령 결혼하지 않고 아이를 낳은 여성이나 커플, 그 자녀는 전통적 가족 관계 안에 있는 여성이나 커플, 그 자녀들보다 삶의 곳곳에서 난관과 불이익에 부딪힌다. ‘남녀고용평등과 일·가정 양립 지원에 관한 법률’이 규정하는 돌봄휴직, 출산 휴가와 육아휴직도 법적 가족이 아니면 아예 대상조차 되지 못한다.
우리나라 복지제도는 대개 가족을 기초 단위로 설계돼 있다. 가뜩이나 국가가 제공하는 복지 수준이 그리 좋지도 않은데, 법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가족은 사회복지나 (이를 준용하는) 기업복지 혜택을 받지 못할 때가 많다.
주거나 의료보험 등이 대표적이다. 공공임대주택 신청에 제약이 따르고 가산점이 낮아 당첨에도 불이익이 있다. 임차인이 사망했을 때 공공임대주택을 승계하기도 어렵다.
법적 가족이 아닌 사람은 국민건강보험 직장가입자의 피부양자로 인정받지 못할 수 있다. 얼마 전 한 동성 부부가 배우자의 건강보험 피부양자 자격을 인정해 달라고 행정소송을 제기했으나 패소했다.
노인을 집에서 돌보는 가족을 지원하는 가족요양보호 제도도 배우자나 8촌 이내의 친족에게만 보장된다. 그래서 법적 혼인 관계가 아닌 노인 커플은 이 제도를 이용하지 못한다.
장례는 2020년에야 법적 가족이 아니라도 치를 수 있게 됐지만, 그 우선권은 여전히 법적 가족에 있다. 유족연금, 산재유족급여, 유족 보상금 등도 법적 가족에 한정돼 있다.
동성 커플이 겪는 어려움은 특별히 강조할 필요가 있다. 그들의 고통은 단지 복지를 받지 못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아예 결혼 등 가족을 구성할 권리 자체가 없고, 체계적인 천대와 혐오, 차별을 받는다.
이런 법률과 제도의 메시지는 분명하다. 전통적 가족 관계 바깥에서 사는 사람들은 주변에서 ‘너 늙고 아프면 누가 보살펴 주니?’ 하는 말을 흔히 듣는다. 즉, 전통적 가족으로 들어오라는 것이다.
현실에 한참 뒤처진 민주당 개혁안
건강가정기본법은 제정 당시부터 많은 비판을 받았다. 현실의 변화를 반영하지 못하고 전통적 가족과 가족 가치관을 강화하려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난 20년간 현실의 변화는 더욱 도도히 진행됐다. 그런데도 건강가정기본법은 별로 바뀌지 않았다. 유의미한 변화라고는 2018년 1인 가구를 인정하며 그에 대한 지원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규정을 넣은 것 정도다.
문재인 정부의 여성가족부와 민주당 의원 일부가 건강가정기본법 개정 등을 통해 현실의 변화를 일부 반영하려고는 시도했다. 그러나 정부 임기 말에야 착수한 데다 내용 면에서도 한계가 매우 컸다.
예를 들어, 남인순 의원이 내놓은 2018년 건강가정기본법 개정안은 가족 규정에 사실혼과 위탁 가정만 포함하고 비혼 동거와 동성 관계는 제외했다. 2020년에는 가족 규정을 삭제하는 안을 냈지만 그 효과는 별 차이가 없는 듯하다. 남인순 의원은 자신의 개정안이 동성혼을 인정하려 한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라고 선을 그었다.
비교적 안정된 남녀 관계인 사실혼과 위탁 가정만 가족 규정에 포함한 것은 민주당 정치인들의 주된 관심사도 낮은 출생률과 양육·돌봄 공백을 메우는 데 있음을 보여 준다. 이는 현실의 변화에 뒤처진 매우 미흡한 안(案)일 뿐 아니라 본질적으로 보수적인 안인 것이다.
그런데도 당시 주류 엔지오와 정의당은 환영만 하는 입장을 내놓았다. 민주당은 그런 미흡한 개혁안조차 진지하게 추진하지 않았다. 보수파들뿐 아니라 문재인 정부 내에서도 반대 목소리가 나오면서 흐지부지됐다.
윤석열 정부가 ‘정상 가족’ 개념을 고수하는 이유
윤석열 정부는 문재인 정부의 여성가족부와 일부 민주당의 의원들이 추진하려던 매우 제한된 변화마저 거부했다.
이것은 윤석열 정부와 여당의 보수적 성격을 잘 보여 준다. 보수 정치인들은 전통적 가족 수호나 가족 가치관을 항상 강조한다.
문재인 정부가 가족 개념 일부 확대를 추진하려 했을 때 보수파, 특히 개신교 우파는 “가정 해체와 사회 혼란을 초래”하고 “동성혼 합법화 의도”라며 거세게 반대했다. 현재 여성가족부 장관인 김현숙은 19대 국회의원을 지낼 당시, 낙태와 동성애는 물론 심지어 피임·이혼·인공수정도 반대한 ‘국제가톨릭의원네트워크’의 임원이었다.
윤석열 정부가 ‘정상 가족’ 개념을 고수하는 것은 경제 위기 대응 기조인 긴축 재정과도 무관하지 않다. 정부는 내년 공공임대주택 예산을 올해보다 5조 7000억 원 삭감했고, 노인 복지 성격이 강한 노인 일자리 예산도 1000억 원이나 삭감했다. 공적연금과 건강보험도 개악하려고 한다.
그런데 법적 가족 개념을 확대하면 국가의 복지비 지출이 늘어나게 돼 긴축 기조와 충돌한다. 같은 이유로, 문재인 정부 때 보건복지부는 사실혼 외국인에게 건강보험 혜택을 주자는 제안을 “도덕적 해이”를 일으킨다며 거부한 바 있다.
일반적으로, 경제 위기 시기에 지배자들은 전통적 가족과 그 가치관을 강조한다. 복지 삭감을 정당화하고, 양육과 노인·환자·장애인 등의 돌봄 책임을 개별 가족에게 떠넘기려는 데 목적이 있다. IMF 외환 위기 때에도 주류 언론들은 “버팀목은 역시 가족뿐”이라고 강조했다.
이는 법적 테두리 안에 있든 밖에 있든 노동계급 가족 구성원 모두를 더욱 옥죌 것이다. 특히, 많은 여성들이 집 밖에서 일하고 있는 현실에서 여성들의 이중 굴레를 더욱 강화할 것이다.
자본주의와 가족제도
지배자들이 현실과 괴리된 가족 개념을 고수하려는 것은 근본적으로 가족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하는 중요한 역할 때문이다.
마르크스주의 관점에서 볼 때 가족은 양면적이다. 한편으로, 가족은 자본가 계급에 매우 중요한 기능을 수행한다. 현 세대 노동자들의 의식주를 해결하고 다양한 욕구를 충족시키고, 다음 세대의 노동자를 양육한다. 바로 노동력 재생산이다.
다른 한편, 가족은 경쟁과 착취와 소외로 찌든 사회에서 위안을 주는 안식처로 여겨진다. 사람들이 가족을 꾸리고 싶어 하는 이유이다.
그래서 가족이 유지되지만, 자본주의가 가하는 압력들은 이런 기대를 거듭 좌절시키고 사람들을 고통으로 내몬다. 가족은 가정 폭력과 아동 학대 등으로 지옥이 되기도 한다. 특히, 가족에 떠맡겨진 노동력 재생산, 즉 양육과 돌봄 때문에 여성은 끔찍한 희생을 치른다.
이는 특히 노동계급 가족에 무거운 부담과 고충을 안기지만, 기업과 자본주의 체제 전체에는 커다란 이익을 가져다준다. 노동력 재생산에 드는 막대한 비용을 아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통적 핵가족을 복원하고 그 가치관을 강화하는 시도가 체계적으로 이뤄지는 것이다.
이런 이해관계 때문에 국민의힘이든 민주당이든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가족 가치관을 고수하고 기껏해야 모순과 한계가 가득한 정책만 내놓으면서 현실의 다양한 관계를 핵가족 모델에 욱여넣으려 하는 것이다.
맺으며
오늘날 가족 형태의 변화는 사람들이 전통적 핵가족의 틀에 얽매여 살아가지만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준다. 다양한 형태의 가족을 마땅히 인정하고 그들에게 주거, 연금, 의료 등의 복지를 차별 없이 제공해야 한다. 또한 성소수자들이 결혼 등 가족을 구성할 권리가 법 제도로 인정돼야 한다.
또, 가족에게 양육과 돌봄 부담을 전가하는 것에 반대해야 한다. 양육에 대한 국가의 대규모 투자, 장애인·노인 등에 대한 공적 돌봄, 질 좋은 공공주택 제공 등 노동계급 가족의 부담을 줄이고 서민 생활을 개선하는 데 필요한 조처들을 요구하고 투쟁해야 한다.
사회가 양육과 돌봄, 가사의 부담을 책임지지 않는다면, 개인들이 서로 어떤 관계를 맺으며 살지를 선택할 자유에는 커다란 제약과 고통이 따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발제자의 정리 발언
한 분이 서구에서 시민 결합이나 동성혼이 인정된 것은 왜 그렇고 어떻게 봐야 하는지 질문을 주셨습니다.
서구 일부 나라에서 시민 결합이나 동성혼이 법으로 인정됐고, 그것은 분명히 한국보다 더 진보한 측면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도 두 가지 모순적 압력의 결과였습니다.
먼저 현실의 변화에 대응하는 지배계급의 필요가 있었습니다. 예컨대 프랑스는 2000년대 초반에 시민동반자법이 만들어졌는데, 1990년대에 이미 프랑스 혼외 출산 비율이 40퍼센트가 넘었습니다. 지배자들 입장에서도 이렇게 태어나는 아이들을 어떻게 할 것이냐 하는 문제에 직면했죠. 단지 동거 커플을 법적으로 인정하는 것뿐만 아니라, 혼인 관계 바깥에서 태어나는 아동과 그 보호자를 법적 테두리 안으로 데려와 지원을 하면서 부양 의무도 지울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이런 관계들도 법적 혼인에 비해 제약이 있습니다. 나라마다 다르지만, 시민 결합의 관계에서는 입양에 제한이 있다든지, 상속에 제한을 둔다든지 하는 일이 있습니다.
한국에서도 시민동반자법을 제정하라는 요구가 있는데요, 일부 사람들은 이 법을 제정하면 사람들이 서로를 돌보기 때문에 오히려 국가 부담을 덜 수 있다고 얘기하기도 합니다. 물론, 우리는 시민동반자법 제정을 그런 근거가 아니라 차별에 반대하는 의미에서 지지하죠. 그리고 국가가 복지에 더 많이 투자하라고 해야겠죠.
다른 한편으로는 많은 분들이 이야기해 주셨듯이, 아래로부터 운동의 압력이 있었습니다. 서구에서 1960년대 말과 1970년대 초에 일어났던 대중적 저항이 국가가 동성 관계 등을 인정하는 데에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합니다. 당시 여성과 성소수자들이 굉장히 급진적으로 투쟁했는데요. 이런 투쟁의 퇴적물이 현재까지 남아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국 성소수자 운동은 서구에 비해 역사가 짧고 또 [1960년대 말 미국 등지의 운동과 비교해] 급진성에서도 차이가 있습니다. 그래서 동성애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한국과 서구에서 차이가 있는 것이죠. 물론, 한국에서도 나아져 왔습니다.
또, 경제 위기 시기에는 이런 개혁도 언제나 뒤집힐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어요. 예컨대 헝가리는 동성 간 시민 결합이 인정되는 나라인데, 우파가 집권하고 나서는 동성 커플의 입양을 어렵게 한다거나, 시민 결합에 제약을 둬 그것도 점점 어렵게 만드는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자본주의가 기본적으로 개별 가족에게 양육·돌봄의 책임을 떠넘기는 체제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리고 많은 분들이 가족이 짊어진 부담을 생생히 이야기해 주셨습니다. 특수교사 분이 이야기해 주신 장애인 가족 살해 소식을 들었을 때 저도 가슴이 많이 아팠는데요. 가족이 짊어진 무거운 부담이 어떤 극단과 비극으로까지 나아갈 수 있는지 보여 주는 사례인 것 같습니다.
자본주의의 지배자들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해서가 아니라, 돌봄·양육을 사회화하면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이런 비용이 자본가 계급의 부담으로 이어지고 경쟁력을 약화시킬까 봐 한사코 개인(가족)에게 그 책임을 떠넘기고, 그것을 짊어지지 못하면 속죄양을 삼는 것이죠.
사실 부유한 가족은 거의 매일 레스토랑에서 밥을 먹고, 아침에 신선한 샐러드를 배달시켜 먹고, 가사노동자에게 집안일을 다 시키고, 온종일 자녀를 돌봐주는 서비스를 이용합니다. 모든 가족이 이런 서비스를 이용할 수 없는 것은 이런 서비스가 이윤 동기에 따라 운영이 되면서 비싸기 때문입니다.
만약 생산이 이윤이 아니라 대다수 사람들의 필요에 따라 조직되는 사회라면 다를 수 있겠죠. 또 그런 사회에서는 굳이 개인들 간의 관계를 협소한 이 핵가족 틀에 욱여 넣을 필요도 없습니다.
아까 한 분이 러시아 혁명의 실험에 대해서 이야기해 주셨는데요. 개인들이 진정으로 자유로운 관계를 맺고 살아가기 위해서라도 이 자본주의 체제 자체에 맞서야 합니다.
시청자 전화 발언
“국가가 가족에 떠맡겨진 장애인 돌봄을 지원해야 합니다”
장애인에 대한 돌봄도 철저하게 개별 가정에 맡겨져 있습니다.
저는 초등특수교사인데요. 21년 동안 초등학교에서 장애 아동들을 만나고 있어요. 학생들 대부분이 보호자와 함께 등하교를 합니다. 하교 후에는 주로 보호자가 가정에서 아이들을 돌봅니다.
코로나19는 개별 가정에 떠맡겨진 장애인에 대한 돌봄의 무게를 극명하게 보여 줬는데요. 각종 복지시설이 문을 닫았습니다.
국가인권위 조사 결과를 보면, 20.5퍼센트가 가족의 돌봄을 위해서 직장을 그만둬야 했다고 합니다. 매년 [돌봄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장애인 가족을 살해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비극적인 일들이 벌어집니다.
지난 4월 20일에 청와대 앞에서는 556명의 발달장애 당사자와 가족들의 삭발식이 있었습니다. ‘발달장애인 24시간 지원 체계’ 구축을 요구하는 삭발식이었는데요.
그러나 윤석열 정부는 그런 목소리에 귀를 닫고 있습니다. 정부는 장애인 관련 예산을 7천억 원 정도 증액하면서 장애인 연금 일부를 인상했지만 그 인상 폭은 매우 미미하고 다른 장애 관련 예산은 삭감해서 실제로는 증액했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한국의 장애인 복지 예산은 GDP 대비 0.61 퍼센트인데, OECD 평균(2.02 퍼센트)의 3분의 1도 안 되는 열악한 수준입니다.
고등학교 졸업 후에 성인이 된 저의 제자들의 삶은 어떨까요? 이 사회에서 그 삶이 어떨지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섣불리 ‘안녕하시냐’라는 인사말을 건네기도 쉽지 않습니다.
제 제자들과 그 가족들이 온전한 삶을 살기 위해서 국가가 책임지고 촘촘한 지원 체계를 구축하라고 요구해야 합니다.
“일부일처 핵가족은 결코 인류의 보편적 제도가 아닙니다”
정상가족 개념은 이성애 부부와 자녀로 이뤄진 핵가족만을 자연스럽다고 봅니다. 그러나 인류 역사 전체를 보면 가족 형태는 다양했고 핵가족 규범은 자본주의 들어서 성립된 것입니다.
인류 역사 대부분을 차지하는 시기를 보면 양육과 돌봄이 가족 단위로 이뤄지지 않았어요. 이 시기는 수렵이나 채집으로 식량을 구했는데요. 이런 사회에는 계급이 없었고 여성과 남성이 평등한 사회였습니다. 양육과 돌봄은 공동체 모두가 책임을 지는 방식이었습니다.
부부 단위도 느슨하게 조직됐고요. 남녀 모두 성적으로 폭넓은 자유를 누렸습니다. 성관계의 목적이 가족 내 생식에 국한되지 않았고, 따라서 남녀 간의 성적 관계만을 정상으로 여기지도 않았죠.
남성이 우위인 일부일처제는 계급 사회가 등장하면서 확립되기 시작했는데요. 소수의 지배계급이 부와 특권을 상속할 필요성 때문에 여성의 성적 자유를 통제하는 가족 제도를 발전시켰습니다.
그러나 상속의 필요 때문에 계급 사회에서 일부일처제가 확립되기 시작했어도 가족의 형태는 획일적이지 않았고요. 사회마다 다양했습니다. 그리고 가족의 형태뿐만 아니라 가족의 구실이라든가 성별 규범도 사회마다 차이가 있었고 또 변화해 왔습니다.
동성애가 비정상이라는 관념도 유럽에서 19세기 들어서 자본주의 핵가족 제도가 확립되면서부터 생겨났습니다. 고대 그리스라든가 로마 사회를 보면 동성애가 이성애보다 더 아름다운 사랑으로 여겨지기도 했어요.
19세기 중반 이후에 지배계급이 노동계급에게 핵가족 모델을 규범으로 제시했지만 제2차세계대전 이후에 자본주의 사회의 물질적 조건이 변화하면서 서구에서는 핵가족 형태가 약화돼 왔습니다. 한국도 같은 흐름에 있는 거라고 볼 수 있는 거죠.
“법적 가족이 아니면 죽음을 애도할 권리마저 박탈당합니다”
저는 사회에서 규정한 소위 ‘정상가족’이 아니란 이유로, 법적으로 관계를 인정받지 못할 때 사람들이 겪는 배제나 차별이 얼마나 끔찍한지 말하고 싶습니다.
최근에 제가 뉴스로 접한 마음 아픈 사연이 하나 있습니다. 무연고사가 아닌데도 무연고사를 치르게 되는 사람들이 있다는 건데요. 고인의 가까운 지인, 심지어 연인이라도 법적 가족이 아니어서 장례를 치를 수 없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애도할 권리조차 박탈당한 것입니다. 심지어 고인의 유서에 파트너에게 장례를 부탁하고 유산을 상속한다고 남겨도 혈연관계가 우선시됩니다.
40년을 함께 산 동성 커플이 있었는데요. 파트너가 죽은 후에 함께 살던 아파트에서 자신의 물건을 챙겨 나왔는데 고인의 법적 가족이 그를 절도죄로 고소하고 아파트 키 번호도 바꿔 버렸다고 합니다. 결국 함께 살던 아파트 복도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으셨어요.
이런 말도 안 되는 일들이 현실에서 계속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이 정말 끔찍하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 사이의 관계는 국가에서 인정하고 말고 이렇게 결정될 것이 아니라 개인이 자유롭게 맺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의 자유로운 관계마저 통제하면서 낡은 체제를 옹호하고 유지하는 이 체제 지배자들에 맞서 싸워나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러시아 혁명은 새로운 가족과 인간관계의 가능성을 보여 줬습니다”
1917년 러시아에서 혁명으로 평범한 사람들이 권력을 잡았을 때 사회주의자들은 가족제도와 여성 차별에 대한 이해를 기반으로 새로운 가족생활을 위한 여러 조처를 도입했습니다.
러시아는 혁명 전까지만 해도 여성에 대한 천대가 깊이 남아 있던 사회였는데요. 하지만 혁명 직후에 여성에게 보통선거권이 부여됐고 동일노동 동일임금이나 유급 출산휴가 같은 제도가 도입됐습니다. 또 한쪽이 원하면 즉각 이혼을 허용했고 무려 1920년에 낙태권이 도입돼서 공공병원에서 무료 낙태 시술을 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동성애나 간통에 대한 억압적인 법률도 폐지됐습니다.
여기서 더 나아가서 볼셰비키는 여성 해방이 실질화되려면 가사의 사회화가 관건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개별 가족이 책임지던 가사 노동과 육아의 부담을 공공의 영역으로 가져왔습니다. 공공 탁아소나 어린이집, 공동 세탁소, 공공 식당, 공공 병원, 요양원 등을 설립해서 여성과 가족을 가사와 육아의 굴레에서 해방시키려고 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사람들이 낡은 도덕이나 금전적인 이해타산으로 인해 원치 않는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상호 애정과 유대에 기반해서 자유롭게 결합할 수 있도록 보장하려고 한 것입니다.
러시아 혁명은 짧은 실험이었지만 이 사회가 평범한 사람들의 행복과 필요를 위해 생산을 조직한다면 완전히 새로운 형태의 가족과 인간관계가 가능하다는 점을 보여 줬다고 생각합니다.
“치료비, 병원비, 간병비… 사랑하는 할머니를 돌보는 데 비용이 만만치 않습니다”
저는 94세 할머니를 모시고 함께 살고 있는데요. 할머니는 저를 길러 주신 엄마이고 너무나 소중한 존재입니다. 그런 할머니가 지난해 11월 코로나19 위중증으로 죽음의 문턱에서 겨우 살아나셨지만, 이제 24시간 돌봄이 필요해졌습니다.
할머니를 집에서 돌보기 시작하면서 저는 이 사회의 돌봄 문제가 정말 심각하다는 것을 몸소 깨닫게 됐는데요.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정말 턱없이 부족한 정부 지원입니다. 돌봄에 들어가는 시간과 비용은 온전히 개별 가정 몫입니다.
제가 출근한 사이에 할머니를 돌봐 줄 사람이 없어서 요양보호사를 고용해야 합니다. 그 비용만 한 달에 최소 120만 원이고 제 급여의 절반에 이릅니다.
어떤 사람들은 요양병원으로 보내면 된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 또한 한 달에 200만 원가량의 비용을 들어가요. 이런 걸 쉽게 감당할 수 있는 가정이 몇이나 될지 의문입니다.
사실 할머니를 모시는 곳이 엘리베이터가 없는 5층이라서 이사를 가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코로나19 위중증 치료비, 병원비, 간병비… 국가가 지원을 제대로 하는 것이 없어서 지난 1년 동안 3000만 원 수준의 목돈이 들었어요. 이사도 포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물론 할머니가 저한테 소중한 분이시기에 돈이 아깝지 않습니다. 하지만 만약 국가가 제대로 지원한다면 저와 할머니는 경제적으로 덜 쪼들리면서 더 행복하게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