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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혁명 90주년 특집 ①:
1917년 러시아 혁명 ―다른 세계의 가능성을 보여 주다

[편집자 주] 올해는 러시아 혁명이 일어난 지 90년이 되는 해이다. 이를 기념해 2회에 걸쳐 러시아 혁명 90주년 특집 기획을 연재한다.
1회 ① 1917년, 혁명 속의 러시아
② 혁명을 지키기 위한 투쟁
③ 혁명의 국제적 파장
2회 ④ 대중의 힘
⑤ 노동계급을 이끈 정당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급진적인 새 사회가 시작됐다. 노동자들이 생산을 통제하고, 토지가 경작자들에게 분배되고, 영토 합병 없는 [전쟁 종결과 함께] 즉시 평화가 실현되고, 식민지 주민들에게 자결권이 보장됐다.

이런 조처들은 1917년 11월 7일(당시 러시아에서 사용되던 달력으로는 10월이었고, 이 때문에 10월 혁명으로 알려지게 된다) 러시아의 수도 페트로그라드(오늘날의 상트페체르부르크)를 장악한 노동자들·병사들·수병들이 단 몇 시간 만에 취한 조처들이었다.

그런 조처들은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권리들을 보더라도 거대한 전진이었다. 새로운 소비에트 헌법은 여성에게 완전하고 동등한 투표권을 보장했다. 영국은 1928년에야 그렇게 했고, 스위스 여성들은 1971년까지 기다려야 했는데 말이다.

동성애와 낙태가 합법화됐고, 배우자 일방의 요청만으로 이혼이 가능해졌다. 영국인 대다수가 그런 이혼의 권리를 누릴 수 있게 된 것은 1969년이었고 낙태와 동성애는 1967년에야 합법화됐다.

교회와 국가는 분리됐지만 ― 새 국가는 특정 종교를 우대하지 않았다 ― 종교의 자유가 보장됐다. 소비에트 러시아 남동부 대부분 지역에서, 자기 결정의 원칙에 따라, 무슬림 학교들이 자유롭게 설립·운영됐다.

민주주의

오늘날 우리는 매우 제한적인 형태의 정치적 민주주의를 누리고 있다. 우리는 대체로 [4∼]5년에 한 번씩 국회의원들을 선출할 수 있지만 정부가 하는 일 ― 예컨대, 우리를 전쟁으로 끌어들이는 일 따위 ― 을 통제할 수 없다.

기업은 노동자를 수천 명씩 해고하고, 금리는 요동치고, 집값은 대다수 사람들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치솟는다. 이 모든 일은 기업의 이사회나 본사에서 소수가 멋대로 결정한다.

노동자들이 자신이 만든 제품이나 자신이 제공하는 서비스를 스스로 통제할 수 있다는 생각은 진지한 토론거리조차 못된다.

이와 대조적으로, 소비에트 민주주의는 공장·농촌·지역사회의 대중 집회에서 선출된 대표자들로 이루어진 평의회를 바탕으로 하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을 선출해 준 사람들을 제대로 대변하지 못하면 언제라도 소환될 수 있었다.

페트로그라드에서는 1917년 6월과 10월에 1만 5천 명 이상이 공장위원회 선거와 소비에트 선거에 참여했다.

러시아 노동자들은 1905년에 혁명으로 분출한 대중 파업을 조직하기 위해 처음으로 소비에트를 건설했다. 1917년 2월 러시아에서 다시 혁명이 터졌을 때, 노동자들은 자연스럽게 소비에트를 재건했다.

식품 가격에 항의하는 여성들의 투쟁이 촉발한 2월 혁명으로 당시 러시아의 지배자였던 짜르[황제]가 쫓겨났다. 그 뒤 8개월 동안 자유주의 정당과 중도좌파 정당 들의 연립정부가 러시아를 통치하면서 서구의 의회민주주의를 모방하려 했다.

처음에 소비에트에서 득세한 사람들은 의회민주주의 지지자들이었다. 어쨌거나 의회민주주의조차도 당시 러시아에서는 거대한 진보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정당들은 가장 중대한 정치 문제, 즉 러시아의 제1차세계대전 참전 문제를 전혀 해결하지 못했다.

페트로그라드의 평범한 노동자들은 급진적 해결책을 요구했다. 1917년 여름 내내 페트로그라드의 각 공장위원회 선거에서 볼셰비키가 잇달아 승리했고, 처음에는 장교들이 득세했던 병사 소비에트를 포함해 여러 소비에트에서도 볼셰비키가 다수파가 됐다.

1917년 2월에 1만 명이었던 볼셰비키 당원 수가 10월에는 25만 명으로 급증했다.

10월 혁명에 대한 가장 큰 거짓말은 레닌과 볼셰비키가 어느 날 밤 슬그머니 기어 나와 러시아 대중 몰래 권력을 찬탈했다는 것이다.

두 차례 혁명의 핵심이었고 유럽에서 가장 급진적이고 혁신적이었던 러시아 노동계급이 누군가가 자신들 몰래 권력을 찬탈하도록 내버려 뒀을까 하는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급진화

사실, 1917년 2월부터 10월까지 정치적 급진화 과정이 있었다. 처음에 노동자들은 입헌 민주주의를 약속한 정당들이 평화를 가져다주고, 토지를 농민들에게 분배하고, 경제적 혼란을 해결해 주기를 기대했다. 그 정당들은 모두 그 시험을 통과하지 못했다.

이미 1917년 7월에 페트로그라드의 노동계급은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볼셰비키는 그 반란에 반대했다. 왜냐하면 다른 곳의 노동자와 농민 들이 아직 그런 결론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8월에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 혁명을 파괴하려 했다. 공식 정부는 벌벌 떨었다. 볼셰비키가 이끄는 노동자들이 앞장서서 군사 쿠데타를 물리쳤다.

10월쯤 정부는 자신이 러시아를 통치한다고 큰소리쳤지만 사실은 대중의 지지를 거의 또는 전혀 받지 못했다. 옛 소수 특권층은 정부를 경멸했고 복수를 원했다. 러시아 대중은 빵·토지·평화를 원했다. 볼셰비키는 빵·토지·평화를 약속하면서, 이를 성취하기 위해서는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 집중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볼셰비키 당은 대중의 압력을 받으며 행동했을 뿐 아니라 자신의 전략에 대한 대중의 지지를 얻으려고 노력했다. 그것은 끊임없는 쌍방향 과정이었다.

그 말은 볼셰비키 당이 자신의 오랜 정책들 가운데 일부를 버렸다는 뜻이다. 예컨대, 볼셰비키는 토지 국유화 요구를 폐기하고 토지를 농민들에게 분배했다. 볼셰비키 당은 또, [당장] 혁명을 일으킬 필요성이나 독일과 평화조약을 체결하는 문제 등을 둘러싸고 엄청난, 흔히 공개적인 논쟁을 벌였다.

10월 혁명은 결코 독재정권을 만들어내지 않았다. 오히려 대중이 새 사회의 의사결정 과정에 참여하는 것이야말로 10월 혁명의 토대였다. 오늘날 우리는 그런 대중적 참여를 단지 상상만 할 수 있을 뿐이다.

출처 이 글은 〈Socialist Worker〉 2075호에 실린 글 'Russia in revolution'을 번역한 것이다.(http://www.socialistworker.co.uk/art.php?id=13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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