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위기 대안 논의 ⑥ ─ 마지막 편:
사회주의는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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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가 고장 났다. 그럼 대안은 뭐지? 지난 몇 달 동안 신용 경색, 금융 붕괴, 경기 침체가 정신없이 이어지는 것을 지켜본 전 세계 수백만, 어쩌면 수억 명의 사람들은 마음속으로 이런 질문을 한번쯤 해 봤을 것이다. 그러나 이 사람들의 생각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들, 예컨대 정치인들, 언론, 교육, 또 이들이 현실에서 겪는 경험 등이 전할 대답이 ‘자본주의의 대안은 없다’라는 게 문제다.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자본주의의 대안이 없다는 점만은 똑같다. ‘신’케인스주의자, 고든 브라운, 어쩌면 버락 오바마가 대변하는 수정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대안은 없다는 것이다.
사실 자본주의의 명쾌하고 분명한 대안으로 사회주의가 제시된 것은 벌써 1백60년 전 일이다(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1848년에 《공산주의자 선언》을 썼다). 사회주의는 매우 직설적이고 자본주의에 비해 극히 단순하다. 사회주의는 사회적 또는 집단적 소유, 주요 생산수단(토지, 공장, 기업체, 은행 등등)에 대한 통제, 이윤이 아니라 인간의 필요에 따른 생산, 계급 분단의 철폐 등을 포함하는 개념이다.
많은 사람들이 사회주의를 대안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그것이 너무 복잡하거나 이해하기 어려워서가 아니라 단지 현실이 되기에 너무 이상적이라는 것이다. 우리 중 상당수는 자본주의 아래서 끔찍하게 억눌리고 그에 따라 자신감을 잃으면서 사회주의처럼 명백히 합리적이고 훌륭한 대안이 현실에서는 결코 가능하지 않을 것이라 확신하게 된다. 우리 삶이 그와 한참 동떨어진 것만 봐도, 틀림없이 어딘가 문제가 있을 것이란 식이다.
이 글에서 내가 주장하고자 하는 바는 이런 것이다. 첫째, 사회주의가 현실이 되기에 너무 이상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회를 운영하는 데 지극히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대안이라는 점. 둘째, 자본주의 사회에서 널리 받아들여지는 이데올로기 때문에 우리 머릿속에서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사회주의에 대한 다양한 반대 논거들이 사실은 현실과 거리가 멀고 심지어 얼토당토않은 것이라는 점. 내가 얼토당토않다고 말한 까닭은, 머릿속 깊숙이 자리잡은 편견 때문에 사람들은 논쟁이 너무 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또 그들이 의지하는 편견들이 사실 우스꽝스러울 뿐 아니라 현실의 시험대에 오르는 순간 한 줌의 연기로 사라질 것들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1963년 브리스톨에서는 흑인 노동자들의 버스 운전을 허용할지를 두고 한바탕 논쟁이 있었다. 일부 인종차별주의자들은 흑인들이 버스 운전에 필요한 순발력이 부족하다고 주장했다.(펠레와 무함마드 알리를 보고도 그런 말을 하다니!)
1974년 안젤라 리폰이 여성 최초로 〈BBC 9시 뉴스〉 정규 진행자가 되기 전에는, 일부 구닥다리 성차별주의자들의 주장처럼 ‘사람들은 여성이 보도하는 기사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란 생각이 팽배했다. 인종 또는 성에 따른 노골적 차별이 사라지면서 이런 주장들도 자취를 감췄다.
인간 삶에서 가장 기초적인 부분, 즉 먹고사는 문제에서 출발해 보자. 오늘날 세계는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높은 생산성을 자랑할 정도로 풍족하다. 그러나 UN이 발표한 통계를 보면, 오늘날 9억 6천3백만 명이 기아와 아사 공포에 시달리고 있고 매일 약 2만 5천 명(대부분 아이들)이 기아나 그와 관련한 질병으로 죽어 간다. 이게 음식이 부족해서 일어나는 일일까? 전혀 그렇지 않다.
‘식량·개발 정책 연구소 ― 푸드퍼스트’란 싱크탱크가 발표한 보고서를 보면, “오늘날 지구상 모든 사람들에게 매일 3천5백 칼로리를 제공할 수 있는 밀과 쌀 등 곡물들이 생산된다. 이 수치는 심지어 사람들이 흔히 먹는 식품들, 예컨대 채소, 콩류, 견과류[호두, 밤 등], 근채류[무, 감자 등], 과일, 쇠고기, 생선 등은 제외한 것이다. 전 세계적으로 하루에 1인당 최소 4.3파운드[약 2킬로그램]의 음식, 즉 곡물·콩류·견과류 2.5파운드[약 1킬로그램], 과일과 채소 1파운드[약 0.5킬로그램], 고기·우유·계란 1파운드를 제공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한 식량이 생산된다. 사람들 대부분을 비만으로 만들 수 있을 정도다! 심지어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들’ 대부분도 현재 그들 나라 국민을 모두 먹여 살릴 수 있을 정도의 식량을 갖고 있다. 이들 중 상당수가 농산품 수출국이다.”
교통수단이 문제일 수도 있다. 기아에 허덕이는 사람들은 아마 식량을 전달받지 못할 만큼 생산지에서 멀리 떨어져 있을 것이다. 그런데 굶주림에 고통받는 사람들 상당수는 캘커타나 리우데자네이루, 다카 같은 대도시에 산다. 이런 도시에는 비행기가, 때때로 여행객들을 싣고 매일 오간다. 심지어 이들이 농촌의 난민 캠프에 거주한다 할지라도 TV 카메라 기자들은 원할 때 언제든 그곳에 간다. 또 우리는 폭탄을 실은 폭격기들을 지구상 어느 곳이든 배치할 수단을 갖고 있다. 그런데 식량은 안 된다는 게 말이 되는가?
아이들 수천 명이 굶어 죽든 말든 사람들이 관심을 갖지 않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현실과 거리가 멀다. UN만 보더라도 이런 문제에 “관심 갖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또 옥스팜과 세이브더칠드런처럼 이런 문제에 관심 갖는 사람들의 기부로 운영되는 국제 구호 단체들도 많다. 가난한 나라에 가 보면 기아 문제를 해결하려고 애쓰는 NGO들이 셀 수 없이 많다. 그런데도 기아와 영양 부족은 계속된다. 도대체 왜? 여기 한 가지 해답이 있다. 기아 문제를 다루는 웹사이트를 방문할 때마다 이 해답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또 UN 산하 모든 기관과 구호 단체들도 여기에 동의할 것이다. 바로 빈곤이다. 사람들은 가난해서, 필요한 식량을 구입할 여력이 안 돼서 굶주리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전체 그림의 일부일 뿐이다. 아이 4명을 둔 부모가 창고에 식량을 가득 쌓아 놓고도 자식 한 명이 음식을 살 돈이 없어서 죽어 가는 것을 그냥 지켜본다면 어떤 생각이 들겠는가? 현실에서 빈곤이 기아를 낳는 이유를 구호 단체 웹사이트에서 찾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것은 식량이 자본주의 사회의 다른 모든 것들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상품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 시장에서 판매해 이윤을 얻으려고 생산되는 상품이라는 사실 때문이다.
사회주의는 이처럼 어려워 보이는 기아 문제를 가장 손쉽고 또 합리적인 방식으로 해결할 것이다. 즉, 식량을 상품으로 보지 않고 모든 사람들이 충분한 영양을 섭취할 수 있도록 그저 잘 분배하기만 해도 이 문제로 고통받는 가정은 없을 것이다.
분배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굶주리는 아이는 더는 없을 것이다. 영양실조로 불룩 튀어나온 배도, 생기 없이 먼 곳을 바라보는 눈빛도 사라질 것이다. 아이들이 초착취 공장에서 12시간씩 일하거나 노인들이 길가에서 죽어 가거나 거지들이 먼지 가득한 바닥에서 기어 다닐 필요도 없을 것이다. 오늘날 인간이 겪고 있는 엄청나게 많은 고통이 사라질 것이다. 설사 사회주의가 성취한 게 이것뿐이라 할지라도, 이것 하나로도 얼마든지 사회주의의 정당성을 입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사회주의는 현실이 되기엔 너무 이상적이다. 틀림없이 어딘가 문제가 있을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 머릿속에 미리 입력된 ‘표준적인 반대 논거들’이 제기된다. 만약 식량이 무료로 분배된다면, 사람들은 더 열심히 일할 동기를 잃게 될 것이다. 사람들이 모두 일을 멈추진 않을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사람들 중 문자 그대로 굶주려 본 적이 있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영국 전체에서도 그런 사람은 많지 않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일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진실은 오히려 그 반대다. 만일 당신이 굶주리고 있다면, 당신은 곧 일할 기력을 잃게 될 것이다. 훌륭한 식단에 충분한 영양을 섭취한 사람들이 그렇지 못한 사람들보다 더 생산적으로 일한다.
실제 굶주린 사람들에게 음식을 나눠 주면 두 가지 주요한 “문제”가 생긴다. 첫째는 거대 기업들이 더는 식량을 통해 이윤 수십조 원을 얻지 못할 것이라는 점이고, 둘째는 식량 분배가 가능하다면 다른 것들, 예컨대 주택 같은 것도 분배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이다.
주거는 인간이 사는 데 필수 요소 중 하나다. 심지어 미국처럼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의 가장 부유한 도시들에서도 노숙자는 흔히 볼 수 있다. 영국 런던도 마찬가지다.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의 거대 도시에 있는 빈민가·판자촌에 가 보면, 문제는 정말 심각하다.
사회주의적 계획이 이 문제를 아주 간단히 해결할 것이다. 예를 들어 영국을 살펴보자. 엄밀히 말해 영국에 주택이 부족한 것은 아니다. 사람들이 구입할 수 있는 값싼 주택이 부족할 뿐이다. 무주택자들의 문제를 즉각 해결하려면 빈 집과 저택, 부자들의 잉여 주택들을 몰수해 분배하는 조처 등이 필요할 것이다. 영구적인 대안을 떠올리기도 어렵지 않다. 인구 조사를 활용해 인구 대비 주택 수요를 예측하고(이미 이와 같은 일이 실시된 바 있다) 공공주택 건립 계획을 세운다. 벽돌공, 목수 등 건설 노동자들을 고용해 실제 필요한 것보다 약간 많은 주택을 건립한다. 모든 아이들이 학교에 다닐 권리를 갖고 국민보건서비스(NHS)가 모든 시민에게 무상으로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모든 가정 또는 개인이 작지만 질 좋은 주택을 공급받는 것을 기본 권리로 규정한다. 다시 말해 주택을 상품으로 보지 않고 사람들의 필요에 따라 분배한다.
똑같은 원칙을 교통수단에도 적용할 수 있다. 오늘날 교통체계는 한마디로 쓰레기다. 물론 기술적으로는, 전 세계 사람들이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효율적으로 이동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러나 자본주의 아래 교통체계는 비효율적일 뿐 아니라 파괴적이기까지 하다. 오늘날 주된 교통수단은 자가용인데, 자동차 보유가 너무 보편화한 나머지 도로는 꽉 막혀 버렸고(심지어 런던을 한 바퀴 도는 데 걸리는 시간이 19세기에 마차를 이용했을 때와 별반 다르지 않다) 자동차 배기가스는 지구 온난화의 주범이 됐다.
사회주의적 해결책은 명백하다. 각종 교통수단이 연결된 무료 대중교통 체계를 구축한다. 이를 위해서는 운송용 철도, 또 도시 간 이동용 철도 등을 대거 확충해야 할 것이다. 철도가 자동차나 화물차보다 더 빠를 뿐 아니라 비용 절감 효과도 크고 더 친환경적이기 때문이다. 도심에서 이것은 전차와 버스, 지하철, 모노레일, 미니버스, 자전거 등을 결합한 형태가 될 것이다. 세부적인 묘사가 더 필요할 것 같지는 않다. 다만 중요한 것은, 사람들에게 제공되는 대중교통이 충분히 넓은 지역을 포괄하고 효과적이라면, 도시에서 자가용과 그것이 불러온 각종 문제들, 예컨대 주차, 교통체증, 교통사고, 석유 연료와 공해 등을 없앨 것이란 점이다.(대중교통이 충분히 확장될 수만 있다면 농촌에서도 마찬가지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다.)
계획
이런 식으로 음식·주택·교통수단을 무료로 제공받을 수 있다면, 마찬가지로 의료와 교육도 무료로 제공받을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여기서 불가피하게 제기되는 문제가 있다. “이 모든 비용을 어떻게 대지?” 최근 몇 달 사이 파산 직전의 은행을 구하는 데만 천문학적인 돈이 쓰인 상황에서, 이 질문은 별로 심각하게 여겨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현재 상황과 상관없이 우리가 이 문제를 얼마나 깊이 사고하느냐에 따라 두 가지 대답이 있을 수 있다. 첫째는 간단히 세금에서 충당하는 것이다. 오늘날 NHS와 공교육, 군사비와 전쟁 비용이 모두 세금에서 나가는 것처럼 말이다. 만약 음식·주택·교통수단이 모두 확실히 무료로 제공된다면, 사람들이 세금으로 낼 돈도 더 많아질 것이다.
그러나 좀더 깊이 생각해 보면, 우리는 돈 그 자체가 부·상품·서비스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떠올리게 된다. 오직 자연에 인간의 노동이 더해질 때만 가치가 만들어진다. 돈은 단지 상품화한 제품과 서비스를 교환하는 수단에 불과하다. 상품으로 여겨지는 제품과 서비스가 줄어들수록, 돈의 구실도 점점 줄어들 것이다. 사회주의는 상품 생산이 궁극적으로 사라질 때까지 그것을 체계적으로 줄여 나갈 것이다. 따라서 진정한 문제는 이것이다. 사회가 모든 구성원들을 먹여 살리기 적당할 만큼 식량을 생산하고 분배하는 데, 모든 구성원에게 부족함 없이 주택을 제공하는 데, 모든 구성원들의 이동에 필요한 기차·전차·버스 등을 만들고 운영하는 데 필요한 노동을 투입하는 것이 가능한가? 우리는 이미 이와 유사한 일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이처럼 집단적으로 소유한 산업들을 어떻게 운영할 것인가? 이를 위해선 기껏해야 생각 없이 위에서 시키는 일만 하는 공무원이나 최악의 경우 괴물 같은 독재자가 되기 마련인 국가 관료들이 엄청나게 필요한 것 아닌가?
한편에 스탈린의 러시아와 김일성의 북한이 있고, 다른 한편에 영국 철도와 NHS가 있는 20세기의 국가 소유·계획의 역사를 돌아보면, 이것은 자연스럽고 또 중요한 질문이다. 그리고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우리가 사회주의적 대안이라고 부르는 것의 핵심과 연결돼 있다.
사회주의적 계획은 사회주의자들만의 것은 아닐 것이다. 그것이 민주적이지 않거나 대중의 능동적인 참여가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현실에서 제 구실을 하지 못할 것이다. 사회주의로 옮아가는 조정기에는 분명 보수적 이데올로기가 우리의 머릿속에서 작동하며 이렇게 말할 것이다. “사회주의는 가능하지 않아. 평범한 사람들, 노동계급은 사회를 운영할 수 없어. 그들은 그럴 만큼 영리하지 못해. 그들은 제대로 교육받지도 못했고 경영하는 법을 배운 적도 없어. 게다가 늘 그렇듯 누군가 지도적 위치에 오르면 그 사람도 이득을 취하기 바쁠 거야.”
노동자들의 능력을 확인하려면 당신이 알고 있는 주변 직장을 한번 살펴보라. 경영자가 아프거나 휴가를 가서 자리를 비우면, 그 회사의 일이 그대로 멈추던가? 당연히 그렇지 않다. 노동자들이 일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몇 년 전, 내가 학생들을 가르치는 대학교에서 부총장이 부패 혐의로 직위 해제됐다가 결국 해고된 일이 있었다. 그래서 그의 후임자가 오기 전까지 그 자리에 공백이 생겼다. 그럼에도 우리 대학은 아무 문제 없이 잘 운영됐다. 반면, 만약 대학에서 가장 낮은 봉급을 받는 건물 관리인이 일을 하루라도 하지 않는다면, 사무실 전체가 문을 닫아야 할 것이다.
일부 사람들이 지도적 지위에 올라 권력을 남용한다면, 그것은 분명 문제다. 그러나 이런 문제가 발생하는 것은 인간 본성 때문이 아니라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주체가 자본주의 아래서 자란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성직자도 천사도 아니다. 따라서 이 문제에 대한 해법은 그런 개인들을 통제하고 필요할 경우 그 자리에서 끌어낼 수 있는 시스템을 발전시키는 것이다. 최초로 노동자 권력을 진지하게 실험한 1871년 파리코뮌 이래로 우리는 이 시스템이 무엇을 말하는지 잘 알고 있다. 즉, 모든 공직자들은 대중에 의해 선출돼야 하고 소환될 수 있으며 노동자 평균 임금을 받는다는 것이다. 또 우리는 러시아 혁명의 경험을 통해 이런 시스템이 가장 잘 작동하려면 집단적 토론을 할 수 있는 작업장과 이런저런 기관들에서 실시하는 선거에 바탕을 둬야 한다는 사실을 배웠다.
이 점이 바로 1905년 러시아 혁명 당시 최초로 상트페테르부르크 지역 노동자들이 구성한 소비에트, 즉 노동자평의회가 가장 크게 기여한 부분이다. 1917년 10월 혁명과 뒤이은 투쟁을 통해 소비에트는 노동자들이 사회 전체를 통치하는 정치 권력을 구축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기구라는 점을 거듭거듭 보여 줬다.
굶주림에 지친 사람들을 먹여 살리고, 무주택자들에게 집을 제공하고, 불평등과 계급 분단을 없애고, 경제를 민주적으로 계획하고, 지구온난화를 막고, 세계 평화와 통합을 구축하는 등 사회주의가 가져올 모든 변화들이 가능하려면 먼저 노동계급이 혁명을 통해 자본주의를 전복해야 한다. 이 혁명은 처음엔 한 나라에서 시작하겠지만 곧 전 세계로 퍼져 나갈 것이다. 노동자평의회는 혁명을 실현하는 핵심 요소다. 이것은 자본주의 체제에서 자본가에 맞선 노동자들의 투쟁을 조직하는 기구로 출발해 대중 파업과 공장 점거를 거치며 성장한다. 그리고 옛 자본주의 국가에 맞선 대안 권력의 중심으로 발전해 결국 혁명의 결정적 국면에서는 자본가 권력을 대체해 노동자 권력을 수립한다. 현대 세계경제에서 노동계급이 차지하는 객관적 지위에 바탕을 두고 만들어지는 이 권력은 수천만 명의 창의적 에너지와 재능을 해방시켜 끌어낸다. 일단 노동자 권력이 수립되면, 더 나은 세계는 가능성에 머물지 않고 현실로 바뀔 것이다.
번역: 조명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