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위기의 진정한 해결책을 갖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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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위기 대안 논의 ② 케인스vs마르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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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대공황을 겪었고, 2009년 현재 점점 심각해지는 경제 위기가 ‘대공황 2.0’으로 치닫고 있는 현실을 볼 때 납득할 수 없는 일이지만, 주류 경제학자들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일반적인 과잉생산’은 일어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주류 경제학에서는 자본주의 사회가 물물교환 사회와 본질적으로 다를 바 없다고 간주한다. 화폐가 중간에서 매개하기는 하지만, 상품을 판매하는 목적은 자신에게 유용한 다른 상품을 구입하기 위한 것이라고 가정하는 것이다. 따라서 상품을 판매해 얻은 소득은 다른 상품을 구입하는 데 자연스레 쓰일 것이라고 본다.
물론 소득 중에는 시장에서 상품을 직접 구입하지 않는 부분이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저축하는 부분이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은행예금, 주식 또는 채권의 형태로 저축하기 때문에, 그 저축은 타인이 다시 사용할 수 있게끔 돼 있다. 만일 어떤 기업이 새로 발행한 주식을 구입한다면 저축을 직접 사업에 투자하는 것이고, 은행에 예금한다면 자본을 구하는 기업주에게 대출돼 사용된다.
주류 경제학은 이자율이 변동하면서 저축량이 증가하거나 감소하는 식으로 조절되기 때문에 저축은 모두 투자로 전환되고 결국 생산된 상품은 모두 소비된다고 주장한다.
이 주장이 뜻하는 바는, 정부와 노동조합이 개입해 상품 가격의 ‘자연적인’ 변화를 방해하지만 않는다면 자본주의는 결코 불황에 빠지지 않을 것이고 언제나 완전고용을 이룩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만약 실업이 발생한다면 그것은 노동자들이 임금의 하락을 막아 더 많은 노동자가 고용되는 것을 막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런 주장이 현실을 설명할 수 없다는 점은 분명하다. 1970년대부터 시작된 경제 위기와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국가는 공기업을 팔아치우고 복지를 삭감했고, 노동조합의 힘은 상대적으로 약해지고 전 세계적으로 노동자들의 임금 수준은 계속 떨어져 왔다. 주류 경제학의 주장대로라면 경제는 좀더 잘 나가야 하지만 오늘날 현실은 대공황에 버금가는 위기를 겪고 있는 것이다.
케인스, 불황은 자본가들이 투자하지 않기 때문
케인스는 저축이 자연스레 투자로 이어진다는 주류 경제학의 주장에 반대했다. 자본주의 사회의 투자는 “부 자체에 대한 욕구”에서 비롯하기 때문에, 기업주들이 충분한 수익을 거둘 것이라고 예측하지 않는다면 투자에 나서지 않아 ‘과잉저축’이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케인스는 사회 전체의 소비는 상대적으로 안정적이라고 주장했다. 사람들이 먹고 입기 위해 기본적인 지출을 계속하기 때문이다. 평범한 노동자·서민은 소득의 대부분을 소비해 버린다. 케인스의 표현대로 한다면 이들은 “소비 성향이 높다.” 반면 연간 소득이 수억~수십억 원이 되는 부자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만큼 소비하고도 많은 돈을 저축할 수 있다. 즉 “소비 성향이 낮다.”
케인스는 이런 논리가 사회 전체에도 적용될 수 있다고 봤다. 경제가 발전할수록 저축이 늘어나는 것이다. 반면 경제가 발전할수록 투자는 잘 이뤄지지 않는데, 투자가들이 수익을 얻을 만한 투자처가 줄어들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자본주의 경제는 불안정한 데다 케인스가 “자본의 한계효율”이라고 표현한 예상 이윤율은 계속 떨어지기 때문에 민간 투자는 저축이 늘어나는 것만큼 늘지 않는다. 그런데 투자가 줄어들면 사람들의 소득이 줄어들고 과잉생산이 발생하고, 결국 저축이 줄어들게 된다. 이 과정에서 한편에는 실업자들이 늘고 다른 한편에는 유휴 설비가 늘어나는 일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벌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케인스의 이런 주장이 뜻하는 바는 불황과 실업이 노동자들의 고임금 때문이 아니라 자본가들이 투자에 나서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사회 전체의 투자량이 호황과 불황을 결정짓고, 그 투자량은 “자본의 한계효율”에 따라 결정된다는 케인스의 주장은 마르크스의 주장과 흡사하다.
마르크스, 공황의 원인은 이윤율 하락 경향
마르크스는 케인스보다 70여 년 앞서 자본주의가 공황에 빠질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물론 그 내용은 케인스의 것과 같지 않다. 케인스는 “자본의 한계효율”이 장기에 걸쳐 떨어진다는 개념을 제시했지만 이를 발전시키지는 않았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공황의 원인을 “이윤율 하락 경향” 때문이라고 주장했고 이를 자세히 분석했다.
마르크스는 상품의 가치가 사회적 필요노동시간에 따라 결정된다고 주장했다.
생산에 필요한 기계나 재료는 그 가치를 새로운 생산물에 그대로 이전할 뿐이고 노동자들의 노동만이 새로운 가치를 추가한다는 ‘노동가치론’은 상품의 가치가 그 상품을 생산하는 사회의 생산효율성에 달려 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그런데 자본주의 사회는 자본가들에게 끊임없이 생산을 혁신할 것을 강요한다. 더 효율적인 생산방식으로 값싸게 상품을 공급해야만 더 많은 이윤을 얻을 수 있다.
이때 생산의 혁신은 더 값비싸지만 성능이 좋은 기계를 이용해 더 많은 원자재를 노동자가 취급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결국 자본가들의 전체 투자액에서 노동자를 고용하는 비중보다 기계나 원자재를 구입하는 비중이 더욱 커지게 된다.
그러나 새로운 가치를 생산하는 것은 노동자들의 노동뿐이므로 자본가들의 전체 투자액에 비하면 새로 창출되는 가치는 점점 줄어드는 것이고, 이는 곧 이윤율의 하락으로 나타난다.
이윤율이 하락하는 것을 감지하는 자본가들은 투자를 줄이는데 이렇게 줄어든 투자는 과잉생산을 낳고 결국 공황으로 발전하는 것이다.
마르크스와 케인스의 설명은 현실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해 준다. 몇몇 경제학자들이나 경제 신문들은 이번 위기가 과도한 투기 때문이라며 투기꾼들을 비난한다. 그러나 투기꾼들은 언제나 투기에 골몰한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더 근본적으로 물어야 하는 점은 이것이다. 투기꾼들은 이번 위기를 낳은 막대한 투기 자금을 어떻게 공급받았는가?
그 해답은 바로 전 세계에서 생긴 ‘과잉저축’이다. 특히 2000년대 들어 중국·일본·한국 등의 동아시아 국가들과 독일 등에서 생긴 막대한 저축이 새로이 투자되지 않고 미국으로 흘러들었다. 그리고 그 돈은 미국의 평범한 사람들에게 저리로 대출됐고, 미국인들은 그 돈으로 ‘과잉소비’를 하며 투자의 부족분을 일시적으로 메웠던 것이다.
그러나 빚에 의존한 ‘과잉소비’는 지속될 수 없었다. 빚을 갚기 어렵다는 점이 분명해지기 시작하면서 거품은 꺼지게 됐던 것이다.
케인스는 주류 경제학 비판했지만 자본주의 체제 유지 원해
케인스는 주류 경제학의 날카로운 비판자였지만 자본주의 체제를 근본에서 바꾸길 바라지 않았다. 케인스는 정부가 적절한 공공 투자에 나서 민간 투자의 부족분을 메운다면 공황과 실업을 극복할 수 있고 자본주의를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물론 케인스는 “투자의 다소 포괄적인 사회화가 완전고용에 근접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라며 급진적 사상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러나 케인스는 정책을 마련하고 집행하는 데 언제나 기업주들의 눈치를 살폈기 때문에 늘 부족한 대안만을 제시할 수 있었다.
케인스는 임금 삭감이 불황의 해결책이라는 주장에 반대했다. 임금 삭감은 소비 성향이 높은 노동자들의 소득을 떼어내 부자들에게 이전하는 것으로 사회 전체의 소비를 오히려 줄여 불황을 더욱 깊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케인스가 불황기에 임금 인상을 주장한 것도 아니다. 임금 인상은 노동자들의 소득을 늘려 사회 전체의 소비를 늘릴 수는 있겠지만, “자본의 한계효율”에 악영향을 줘 민간 투자를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부자들에 대한 세금을 늘리는 것도 민간 투자에 악영향을 줄 수 있다.
정부의 공공 투자도 매우 조심스럽게 진행해야 하는데, 예를 들어 정부가 대규모 공공임대주택을 짓는다면 민간 건설 자본의 투자를 심각하게 훼손하기 때문이다.
이런 식의 모순된 태도는 현실에서 당장 문제에 부딪혔다. 1930년대 대공황 때 영국에서 완전고용을 위해 필요했던 일자리 3백만 개를 창출하려면 정부 지출을 약 56퍼센트 늘릴 필요가 있었다.
결국 제2차세계대전의 전시경제에서야 이런 대규모 정부 투자가 달성될 수 있었다. 그러나 평화시에 정부 지출을 실제로 이렇게 급격하게 늘린다면 기업주들은 자신의 이윤과 재산이 잠식되고 그들의 경제 지배를 위협한다고 느낄 것이다.
기업주들은 돈을 해외로 빼돌리는 식으로 정부 정책을 훼방놓고 심지어는 개혁 조처들을 실행하려는 정부를 전복하려 할 것이다. 케인스의 기대와 달리 경제 불황기에 완전고용의 달성은 기업주들의 동의를 얻어 점진적으로 부드럽게 진행될 수 없는 것이다.
바로 이 때문에 대중 투쟁이 필요하다. 노동자들은 정부가 더 많은 사람들의 삶을 책임지라고 요구하고, 해고 위협에 직면한 공장을 점거하고 싸움으로써 지배자들을 강제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조처는 노동자들의 처지를 즉시 개선해 줄 것이다. 또한 이 힘은 개혁의 성과를 빼앗으려는 기업주들과의 ‘불안한 동거’를 끝내고, 근본적인 사회 변혁을 위해서도 쓰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마르크스적 위기 해결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