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가 시장의 광기를 치료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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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위기 대안 논의 ① ― 장하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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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사마리아인들》, 《사다리 걷어차기》 등 장하준 교수의 책들은 신자유주의의 ‘유죄판결문’들로 가득하다.
그는 국가에 의존해 성장한 선진국들이 후진국 경제들에는 ‘자유무역’ 교리를 강요하는 위선을 폭로한다. IMF 등의 기구들은 후진국 경제에 필요한 조처들을 ‘걷어차면서’ 이들 국가들의 장기적 성장 기반을 나빠지게 했다.
그는 멕시코 등 자유무역협정을 체결한 나라들의 실상을 폭로하면서 한미FTA와 한EU FTA 모두 추진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부실 예측조차 어려운 파생상품을 금지하고, 외환시장을 급속한 자금이동에 취약하게 만드는 자본시장 자유화가 아니라 자본시장 통제 등의 ‘시장 규제’가 필요하다는 그의 정책 제안은 타당하다.
요컨대 신자유주의는 “경제 성장의 모든 전선 ― 성장, 평등, 안정 ― 에서 실패했다.”
‘시장’이 얼마든지 실패할 수 있는 불완전한 제도라고 올바르게 지적하는 그는 신자유주의의 ‘대안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국민 경제의 성공적 발전을 가능케 하는 “국가의 역할”을 제시하고자 한다. ‘역할 모델’인 한국과 스웨덴은 모두 자원이나 넓은 내수시장 등을 갖고 있지 않은 후발 경제에 시사점을 줄 수 있는 국가들일 것이다.
그는 박정희 시기의 한국 경제에서, 적절한 산업정책을 세워 전략산업을 지도·육성하고, 무역·금융·국내시장 등을 규제하는 “국가의 역할”을 이끌어 낸다. 특히, 박정희 모델은 ‘수출주도전략’을 잘 발전시켰기 때문에 ‘예외적인’ 수준의 성장을 이룰 수 있었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이러한 ‘경쟁력 있는 제조업 수출 강국’ 전략에는 근본적인 취약점이 있다. 더 많은 국가들이 이런 전략을 채택할수록 세계시장에 쏟아지는 막대한 상품들을 흡수하기가 더 어려워질 것이라는 점이다.
“무역흑자국과 무역적자국 사이의 엄청난 불균형”은 수렁에 빠진 세계경제가 해결해야 할 핵심 문제다. 〈파이낸셜타임스〉의 칼럼니스트 마틴 울프는 나머지 세계는 미국에 계속 수출만 하고 미국은 계속 수입만 한다면 서브프라임 모기지와 같은 빚잔치를 벌이지 않고서야 어떻게 세계 경제가 굴러갈 수 있겠느냐고 걱정한다.
물론, 작은 규모의 경제는 세계 시장에서 수출시장을 찾기가 더 용이하고, 일시적으로 급속히 성장할 수 있다. 그러나 세계 시장의 상황이 달라지면 고도성장의 배경이었던 급속한 축적은 바로 과잉설비와 부실이라는 부메랑이 될 수 있다. 이는 한국의 고도성장과 1997년에 겪은 외환위기에 적용된다.
장하준은 또 스웨덴에서 ‘사회적 대타협’을 통한 장기적 성장 기반을 이끌어내는 “국가의 역할”에 주목한다.
스웨덴은 노동운동과 좌파가 국유화 요구를 폐기하고 재벌체제(발렌베리그룹)를 인정하는 대신, 재벌은 고용안정을 보장하고 국가는 복지를 책임지는 ‘대타협’을 통해 높은 제조업 생산성을 기반으로 복지와 성장 둘 다 가능했다는 것이다.
복지가 열악한 한국에서 서구의 높은 수준의 복지제도를 도입하자는 것은 훌륭한 주장이다. 그러나 장하준은 재벌과 국가에 ‘대타협’을 어떻게 강제할 것인지에 대해 마땅한 답을 내놓지 않는다. 그는 스웨덴의 복지나 루스벨트의 ‘뉴딜’은 1920년대와 30년대에 노동계급이 혁명적 투쟁을 동원해 자본가계급과 국가의 양보를 강제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점을 언급하지 않는다.
이러한 약점은 소액주주운동과 같이 재벌의 소유구조를 주로 문제 삼는 운동을 비판하며 ‘대타협’의 파트너인 재벌체제의 긍정적 측면에 주목하는 태도와도 관련이 있다. 그는 재벌체제를 자원을 효율적으로 활용하고 위험을 분산할 수 있는 효과적인 기업조직 형식이자 한국 경제의 ‘자산’이라고 여긴다.
‘신자유주의’가 낳은 문제가 경제의 ‘금융화’에서 비롯한다고 보는 분석도 재벌에 대한 그의 태도와 관련이 있다.
무분별한 세계화를 받아들이면서 ‘초국적 해외자본=금융자본’이 ‘국내재벌=산업자본’을 억압하게 된 것이 문제의 원인이라는 것이다. 주주의 단기적 이해관계 때문에 은행은 기업에 장기투자할 돈을 빌려 주지 않고, 기업들도 투자를 꺼리는 현상이 나타나 고용이 정체하는 등의 문제가 발생했다는 것이다.
투기자본의 폐해는 당연히 인정해야 할 점이지만, ‘악한’ 금융자본이 ‘선한’ 산업자본을 억압해 산업이 정체한다는 구도는 현실과 다르다.
대기업 투자의 정체는 산업자본의 수익성에 문제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즉, 자본주의의 고질병인 이윤율 하락 경향 때문에, 수익을 올릴 마땅한 투자처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한국의 투자율이 다소 하락한 것은 사실이나, 경쟁력을 유지하기 위한 장기적 투자가 방해받았다고 말할 수준은 아니다. 한국의 투자율은 최근 몇 년 동안에도 GDP 대비 30퍼센트에 근접해 OECD 국가들 중 1위를 기록했다.
대기업들은 막대한 공적자금과 구조조정을 통해 부채를 갚아 금융비용을 낮추고 투자 수준을 조정하고 착취율을 높이는 등 수익성을 개선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고용의 질은 급속히 나빠져 노동소득분배율이 1996년 63.4퍼센트에서 2002년 58.2퍼센트로 감소했다. 이것은 ‘금융자본’과 똑같이 이윤을 최우선시하는 ‘산업자본’의 입장에서 합리적인 대응이었다.
따라서 재벌에 우호적 환경을 조성하는 데 협력하는 것이 아니라 막대한 잉여금을 쌓아 두고도 오히려 비정규직 확대 등 고용을 악화시키려는 재벌에 맞서 이들의 이윤을 일자리와 복지에 쓰라고 투쟁하는 것이 맞다.
장하준은 의식적인 국가 개입을 통해, ‘시장’은 완벽한 제도로 거듭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지배 엘리트들의 ‘선의’에 기대는 식으로는 불가능하겠지만, 장기적 성장기반을 갖춘 나름대로 규제되는 국민 경제가 가능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이 결국 세계시장에서 개별 국민 경제의 경쟁력을 끌어올리자는 것인 한, 시장 제도의 모순에서 벗어날 순 없다. 경쟁에서 살아남으려면 모든 국가들은 다른 국가들의 ‘사다리를 걷어차’야 한다. 장하준은 “역사적으로 그걸 넘어섰던 시기도 있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장하준이 사다리를 걷어차지 않은 예로 높이 사는 ‘마셜플랜’은 2차 대전이 낳은 잿더미 속에서, 미국 제국의 패권을 위해 세계를 분할한 냉전의 일환이었다.
국가가 나서 ‘시장 실패’를 바로잡으려던 대규모의 시도는 이미 1930년대와 1970년대에 거듭 실패했다. 루스벨트의 뉴딜이든, 히틀러의 나치즘이든 간에 국가개입은 대공황을 낳은 근본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고, 축적 경쟁은 더 위험천만한 방식으로 내달았다. 2차 대전이 낳은 야만적 파괴와 냉전의 산물인 막대한 군비지출을 통해서야 25년짜리 호황의 기초가 놓였다. 호황의 끝에서 케인스주의 정책이 대대적으로 시행됐지만 불황을 막지 못했고, ‘신자유주의’ 교리가 케인스주의를 밀어냈다.
자본주의 시장 체제의 본성인 이윤추구를 위한 경쟁과 축적 논리에 근본적으로 도전하는 대안만이 진정으로 ‘시장’의 병폐를 해결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