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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틴아메리카 반신자유주의 대안 논쟁 ①:
룰라 정부는 반신자유주의의 대안을 제시하는가?

[편집자 주] 2000년대부터 라틴아메리카는 신자유주의와 자본주의에 반대하는 다양한 움직임들의 ‘실험실’로 여겨졌다.
2000년 에콰도르, 2001년 아르헨티나, 2002년 베네수엘라에서 기존 정부를 뒤흔들거나 우익 쿠데타 세력을 몰아낸 대규모 항쟁이 일어났고, 그 속에서 대중의 기대를 한껏 받는 좌파 정권들이 새롭게 집권하거나 기존 정권이 급진화했다.
한국에서도 라틴아메리카의 실험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많다. 〈레프트21〉은 세 차례에 걸쳐 브라질, 베네수엘라, 볼리비아의 경험과 교훈을 다룬다.

2002년 브라질 대선에서 노동자당(PT)의 후보 룰라가 당선했을 때, PT가 1970~80년대 브라질 군부 독재 정권을 약화시킨 강력한 노동자 파업 투쟁 속에서 탄생한 정당이며, 룰라는 바로 그 파업 투쟁을 이끈 지도자였기에 사람들의 기대가 컸다.

그러나 룰라 정부는 시작부터 IMF와 중앙은행이 정한 틀 - 외국 자본을 끌어들이기 위한 세계 최고 수준의 이자율, IMF에 외채 지불 약속을 지키기 위한 대규모 재정흑자 창출과 공공지출 억제 등 - 안에서 경제 정책을 운용했다.

2009년 8월 상파울로에서 시위를 벌이는 MST

혁명적 변화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동시대 서유럽 사민주의 정당들의 제3의 길(‘개혁없는 개혁주의’)과는 달리 사회를 좀더 평등하고 정의롭게 만드는 진정한 개혁을 추진할 거란 기대가 깨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2005년 포르투알레그레에서 세계사회포럼이 다시 열렸을 때 참가자들에게 가장 열렬한 환영을 받은 라틴아메리카 정부 지도자는 룰라가 아니라 ‘21세기 혁명’을 외친 차베스였다. 오히려, 룰라는 일부 참가자들의 야유를 듣기도 했다.

그러나 5년이 지난 지금 상황이 약간 변했다. 어쨌든 룰라 정부에게 배워야 할 긍정적 교훈이 있다는 주장이 국제적으로 세를 얻고 있는 듯하다.

최근 PT 전당대회를 앞두고 친PT 지식인들이 공저한 책을 보더라도, 2000년대 중반의 위축된 분위기와는 달리 이른바 ‘룰라 모델’을 적극적으로 옹호하고 있다. 얼마 전 출간된 조돈문 교수의 《브라질 룰라 정부에서 진보의 길을 묻는다》(후마니타스)도 비슷하다.

이런 주장의 공통적 근거는 다음과 같다.

먼저, 룰라가 집권하자마자 IMF 정책을 충실히 따른 것은 어쩔 수 없었기 때문이었고, 그는 의식적으로 반신자유주의 정책을 접목시켜 그런 한계를 뛰어넘으려 했다는 것이다.

2010년 상파울로의 교사 파업

예컨대, 보우사 파밀리아(빈민 가정 소득 보조 정책) 같은 정책으로 최근 몇 년간 절대빈곤자의 수가 줄고 불평등이 완화됐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정책을 통해 룰라 정부가 빈민들을 정치적으로 각성시켰다고 주장한다.

또, 룰라 정부는 IMF의 직접 감시가 끝난 2005년 이후, 또는 2006년 재선된 뒤부터 급진화하면서 성장촉진정책(PAC) 같은 본격적인 ‘반신자유주의’ 정책을 폈다는 것이다.

“운이 억세게 좋은 신자유주의 정부”

일단 룰라 정부 등장 이후 빈곤층의 삶이 개선된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1999년 브라질의 극빈자 비율은 35퍼센트였지만 2007년에는 25.1퍼센트로 줄었다. 지니계수도 같은 기간 0.57에서 0.53으로 줄었다. 이것이 룰라에 대한 빈민들의 지지율을 크게 높였다.

그러나 빈곤 퇴치와 불평등 완화가 룰라 정부의 우선순위였다고 말할 수는 없다.

먼저, 브라질의 가장 중요한 운동 세력 중 하나인 무토지농업노동자운동(MST)이 빈곤 문제 해결의 핵심 고리로 요구한 농지개혁의 진행 속도는 선거공약에 한참 못 미쳤다.

룰라는 경작 가능한 토지의 대부분을 극소수(인구의 0.6퍼센트)의 대지주가 소유하고 수백만 명이 자기 토지 없이 근근이 먹고사는 상황을 크게 변화시키지 못했다. 이것은 대지주인 농기업과 연관된 자를 농업부 장관으로 임명했을 때부터 예고된 것이었다.

또, 룰라의 가장 중요한 사회 정책인 보우사 파밀리아도 한계를 드러냈다. 이 정책은 한 달에 가구소득이 약 1백 20헤알(대략 8만 원)이 안 되는 모든 가구에게 일괄로 돈을 지불하고 자녀수에 따라 3명까지 추가로 보조금을 지불하는 정책이다.

PT의 대안 좌파 정당을 건설하려 노력하는 PSoL

지불되는 액수 자체는 적지만 지원받는 대상자의 삶이 워낙 빈곤해 이 정도도 그들에게는 상당한 도움이 된다. 또, 지원받는 가구가 많아(2006년 1천1백만 가구), 오랫동안 침체된 가난한 지역의 내수를 다소 활성화하는 구실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정책이 정부 재정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지극히 작다. 보우사 파밀리아 예산은 2006년에 GDP의 0.3퍼센트, 국가 재정의 2퍼센트밖에 안됐다.

반면에 룰라 정부는 평균 재정의 40퍼센트를 부채 상환에 썼고, IMF가 요구한 선(GDP의 3.75퍼센트)을 초과해 재정흑자(평균 GDP 4.5퍼센트 이상)를 달성했다. 초과분만 사용했어도 보우사 파밀리아의 지원 규모를 갑절 이상 늘릴 수 있었다.

룰라 정부는 PT의 전통적 원칙(외채 상환 거부)을 버렸을 뿐 아니라, ‘부당한’ 부채의 상환을 조정하거나 유예한 다른 라틴아메리카 정부들의 온건한 정책을 도입하는 것도 거부했다.

또, 거의 20퍼센트에 육박하는 고이자율 정책을 고수하면서 은행과 이 은행에 거액을 저축한 소수 부자들의 부는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은행 이윤은 역대 최고를 기록했고 최상위 1퍼센트의 부가 GDP에서 차지하는 몫도 늘었다.

룰라의 친자본가 정책은 금융 영역에 한정되지 않았다. 예컨대, 대표적 ‘반신자유주의’ 성장 정책으로 꼽는 PAC의 주된 내용은 감세 등으로 민간 투자를 유인하고 사회기반시설을 독점적으로 운영하는 민간 기업의 이윤을 국가가 조세로 일정 기간 보장해 주는 것이다.

2007년 3월 부시와 룰라 정상회담

이렇게 우선순위가 잘못된 상황에서 앞서 말한 수준으로 불평등이 완화된 것 자체가 거의 기적으로 보일 수도 있다. 세계경제, 특히 중국 경제가 막대한 양의 브라질 상품을 수입한 덕분에 빈곤인구 수와 불평등 지수가 그나마 하락할 수 있었던 것이다.

2008년 OECD 보고서를 보면, 2006년에 룰라 정부의 사회 정책이 지니계수 하락에 미친 영향은 0.01에 불과했다. 반면에 유럽 각국 정부의 사회 정책이 지니 계수 하락에 미친 영향은 0.15였다.

룰라 시대 빈민 처지 향상은 정책 때문이라기보다는 주로 세계시장 호황 덕분이었던 것이다.

즉, 룰라 정부는 “운이 억세게 좋은 신자유주의 정부”였다.

룰라의 정책은 시장의 뒤꽁무니를 쫓은 유럽 사민주의 정당들보다 그다지 낫지 않았다. 그러나 브라질 경제가 세계경제와 맺는 특수한 방식 때문에 문제가 크게 부각되는 것을 피할 수는 있었다.

그래서 룰라는 세계은행, 〈파이낸셜 타임스〉, 브라질 주류 세력과 브라질 빈민들과 일부 좌파들한테 동시에 우호적 평가를 받는 희귀한 정치인이 될 수 있었다.

계급 분열

룰라 정책의 또 다른 문제는 기업과 부자들에게 재원을 퍼주고 난 뒤 사회 정책의 재원을 확보하는 정치적 방식이었다.

룰라 정부는 2003년부터 공무원 연금을 공격했다. 룰라는 공무원이 터무니없이 높은 연금을 받기 때문에 빈민을 위한 사회 정책을 펼 돈이 없다고 거짓말을 했고, 반발하는 공무원 노동자들을 ‘특권층’이라며 공격했다.

노무현 정부의 ‘노동 귀족론’을 연상시키는 이런 공격으로 룰라는 계급을 분열시킨 후 승리를 거뒀다. 이것에 반대한 일부 PT 의원들은 당에서 축출됐고 이들은 나중에 급진좌파 정당인 사회주의자유당(PSoL)을 결성했다.

룰라는 공공부문 연금을 강제로 민간 수준으로 낮춰 거기서 생긴 차액을 보우사 파밀리아 프로그램에 투입했다.

조돈문 교수의 책을 보면 룰라 정부의 연금 개악 논리를 대부분 수용한다.

그러나 연금이 적자 상태라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었다. 또, 룰라가 노동자·민중을 정치적으로 이간질하고 분열시켰다는 점을 무시한 것이다. 이 사건은 룰라 정부가 계급적 각성을 촉진했다는 룰라 옹호자들의 주장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다.

룰라는 빈민들을 정치적으로 각성시켰다기보다는 이들을 미조직 상태로 남겨두고 표밭으로 활용했을 뿐이다.

룰라 정부는 빈민들을 조직할 ‘최적’의 조직인 MST와 끊임없이 긴장 관계에 있었다(비록 MST가 차악론에서 벗어나진 못했지만). MST는 2009년 8월에 농지개혁이 답보 상태에 머무른 것에 항의해 재무부 청사를 점거하기도 했다.

또, 룰라가 빈민들을 운동으로 동원한 경우는 드물었고 동원했을 때조차 동기는 별로 아름답지 않았다. 2005년 PT 중진들이 연루된 대규모 부패 스캔들이 발생했을 때 이들을 친정부 시위에 동원한 것이 대표적 사례다.

그리고 룰라 정부와 PT 정부의 거듭된 부패 스캔들은 정치의식의 각성은커녕 많은 좌파 활동가를 환멸에 빠뜨렸다.

예컨대 룰라의 오랜 친구이자, 저명한 진보적 가톨릭 인사인 프레이 베토는 2005년 스캔들이 발생했을 때 이렇게 말했다. “군부독재 당시 우파가 했던 어떤 일도 오늘날 PT 지도자들이 집권 3년 만에 저지른 일만큼 좌파의 사기를 떨어뜨리지는 못했다.

“독재 하에서 우리는 고문당하고 살해당했지만 머리를 높이 들 수 있었다. 우리가 이 나라의 민주화에 기여한다는 자부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는 아니다. 그들은 당 전체의 사기를 떨어뜨렸을 뿐 아니라 브라질 좌파 전체에 먹칠을 했다.”

룰라 정부의 친신자유주의 정책에 반발해 2005년 PSoL이 창당됐다. PSoL의 대선 후보 엘로이사 엘레나는 2006년 대선 1차 투표에서 6백만 표를 얻었고, 2008년 여론조사에서 15퍼센트 가까운 지지를 받았다. 지지율 80퍼센트의 ‘룰라 헤게모니’에도 균열이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사례다.

‘룰라 모델’이 과연 신자유주의와 자본주의 경제 위기의 대안이 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에 대한 답은 부정적이다.

경제 위기 시대 여전히 신자유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지배자들에 맞선 투쟁이 필요한데, 그 투쟁의 좌표를 ‘룰라 모델’로 정하기는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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