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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고 차베스 (1954-2013) 사망 10년:
베네수엘라 ‘핑크 물결’ 균형 있게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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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수엘라 전 대통령 우고 차베스는 10년 전인 2013년 3월 5일 세상을 떠났지만, 서방 권력자들은 여전히 그를 증오한다.
지난달 미국 하원은 ‘사회주의 공포 규탄’ 결의문에서 차베스를 역사에 길이 남을 범죄자의 한 명으로 지목했다. 풍요롭던 산유국을 가난으로 몰아넣은 독재자라면서 말이다.
반면 많은 좌파에게 차베스는 추억과 존경의 대상이다. 그들에게 차베스는 ‘선거 혁명’으로 집권해 반(反)신자유주의 개혁을 단행한, 라틴아메리카 좌파 정부 집권 물결(‘핑크 물결’)의 기수다. 지난해 브라질·칠레·페루 등지에서 좌파 정부가 잇따라 집권할 때 ‘핑크 물결’이 재현될지 주목했던 사람들은 바로 그런 차베스를 떠올린 것이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 중 일부는 차베스 집권기를 볼 때 국가 주도의 개혁이라는 면에 주로 착목한다. 차베스 시기 베네수엘라의 특별한 성취를 인정하더라도, 산유국이라는 특수한 조건 속에서 놀라운 개성을 지닌 차베스가 집권해 민중과 혼연일체가 된 덕에 그런 성취가 가능했다고 여기기도 한다.
하지만 이렇게 보면, 차베스의 ‘볼리바르식 혁명’이 보인 여느 (좌파적) 개혁 정부와는 다른 독특한 급진성과 모순을 보기 어렵다.
카라카소 항쟁의 목소리
차베스는 1999년 2월 대통령에 취임했다. 당시 베네수엘라에서 주류 양당 출신이 아닌 사람이 대선에 승리한 것은 40년 만의 일이었다.
그 전까지 베네수엘라에서는 1959년 군부 독재가 종식된 이후 수십 년 동안 두 부르주아 정당들이 공식 정치를 지배했다. 공산당은 군부 독재 종식의 일등 공신이었지만, 이후 쿠바식 게릴라 전술을 펼치다가 도시 노동자 기반을 잃고 탄압으로 분쇄됐다.
당시 권력층은 석유 수출 수익에서 막대한 부를 챙겼다. 부패가 횡행했다. 하지만 경제 상황이 비교적 좋던 1970년대까지는 그 수익의 극히 적은 일부만으로도 도시 서민들이 그럭저럭 살 만한 조건을 마련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80년대 세계경제가 불황기에 접어들자 베네수엘라도 위기에 빠졌다. 권력층은 국제통화기금(IMF)의 긴축 정책을 채택해 그 위기의 대가를 서민이 치르게 했다. 몇 년 만에 인구의 3분의 2가 빈곤층이 됐다.
그러다 1989년 정부의 보조금 철폐로 대중교통 요금이 하룻밤 새 곱절로 오른 것이 깊게 고인 분노에 불을 붙였다.
미조직 노동자와 빈민들이 베네수엘라 수도 카라카스 인근에서 대규모 소요 ‘카라카소’를 일으켰다. 어떤 좌파도 여기에 영향을 미치지 못했지만, 그 소요는 군부의 유혈 진압으로 사그라들 때까지 열흘 가까이 계속됐다. 카라카소는 베네수엘라 권력층의 통치 위기를 뚜렷이 보여 준 사건이었다.
더 중요하게는, 카라카소는 신자유주의에 맞선 세계적 운동의 신호탄 중 하나였다. 1994년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발효를 규탄하며 시작된 멕시코 사파티스타 운동, 1995년 프랑스 공공부문 대파업, 1999년 미국 시애틀에서 세계무역기구(WTO) 회담을 무산시킨 대중시위 등이 카라카소를 뒤이었다. 1996~1997년에 한국에서 벌어진 민주노총 파업도 그런 운동 물결의 일부였다.
군 장교였던 차베스가 정치 무대에 처음 등장한 것도 이때였다.
차베스는 1991년에 “국부(國富)를 도둑질하는 자들”에 맞서 소수의 군부 내 지지자들을 데리고 군사 쿠데타를 일으켰다. 쿠데타는 실패하고 차베스는 투옥됐다.
그러나 부르주아 정당들이 통치 위기에 빠져 있고 좌파가 존재감이 미미한 가운데 차베스는 대중의 지지를 한몸에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몇 년 후 “카라카소의 목소리”를 자임하며 대통령에 당선했다.
‘볼리바르식 혁명’
차베스는 자신의 청사진을 “볼리바르식 혁명”이라고 불렀다. 19세기 반(反)식민 투사 시몬 볼리바르의 이름을 딴 것이다.
사실 그의 정책은 처음에는 온건했다. 차베스는 대통령 취임 후 첫 연설에서 새 정부는 “국가 통제 정부도 신자유주의 정부도 아닐 것”이고 “국가가 절실히 필요하듯이 시장도 최대한 보장될 것”이라고 약속했다.
차베스 정부가 구상한 경제 정책의 골자는 국가가 석유 수출 수익을 더 잘 관리하고 부패를 일소해 국부의 누출을 줄이고 베네수엘라를 세계 시장의 무자비함에서 보호하겠다는 것이었다. 집권 초 차베스 대외 정책의 핵심은 산유국 카르텔인 오펙(OPEC)에서 베네수엘라의 영향력을 키우는 것이었다. 그로써 서구 대자본과 강대국들로부터 상대적 자율성을 얻겠다는 것이었다.
요컨대 당시 ‘볼리바르식 혁명’은 세계 자본주의에 도전하는 진정한 혁명이 아니라 그 구조 안에서 더 나은 조건을 확보하려는 노력이었다.
그러나 베네수엘라의 소수 특권층은 차베스 정부의 온건한 개혁조차 마뜩잖게 여겼다. 특히 두 가지가 그들을 분노케 했다. 첫째는 아주 제한적인 토지 개혁 법령이었다. 극소수 지주들이 소유한 광대한 유휴지 일부를 실제 경작자들에게 분배하겠다는 것이었다.
둘째는 석유 공사 PDVSA를 규제하는 법령이었다. PDVSA는 공기업이면서도 사기업 시절의 경영진이 그대로 남아 있으면서 계속 소수 특권층의 치부 수단으로 기능했다. 막대한 석유 수출 수익은 정부 통제 바깥에 있었다. 차베스의 새 법령은 석유공사의 거래를 공개 조사 대상으로 삼고 그 수익에 대한 정부의 몫을 기존 15퍼센트에서 30퍼센트로 늘리는 것이었다.
지배자들은 쿠데타를 일으켰다. 2002년 4월 12일 새벽 우익 군 장교들이 차베스를 감금하고, 상공회의소 회장이 대통령을 자임했다.
“21세기 사회주의”
바로 그때 대중이 아래로부터 정치적 힘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빈민 대중 50만 명이 자발적으로 시위를 벌여 쿠데타 주도자들을 압박했다. 쿠데타가 성공하면 가혹한 긴축과 만연한 부패로 회귀하리라고 여겨서였다. 차베스를 제거하려다 봉기에 직면할 가능성을 우려한 권력층은 차베스를 처형하기 직전 쿠데타를 접어야 했다.
그러나 이것이 끝은 아니었다. 같은 해 말 ‘사장 파업’이 벌어졌다. 사장들이 PDVSA의 석유 시추 시설을 폐쇄하고 고장 냈고 생필품 유통을 중단시켰다. 경제를 마비시켜 통치를 불가능케 하고 빈민들과 차베스를 갈라놓으려 했던 것이다.
사장들을 물리친 것은 노동자들의 행동이었다. 노동자들은 투쟁 기구를 꾸려 석유 산업을 재가동하고 전국적으로 식량·필수품을 분배했다. 3개월 만에 베네수엘라 자본가들은 결정적으로 패배했고, 차베스는 기사회생했다. 세력 균형이 대중에게 유리해졌다.
대중운동이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사람들은 사회 변화를 더 전진시킬 방법을 두고 열띠게 토론하고 행동하기 시작했다. 노동 단체, 지역 단체, 협동조합, 토지 분배 단체가 우후죽순처럼 늘었다.
이 과정을 겪으며 차베스 자신이 좌경화했다.
차베스는 대중의 “참여 민주주의”를 적극 고무했고, PDVSA 전면 국유화를 추진하는 한편 야심 찬 복지 정책 ‘미시온’을 발족했다. 미시온은 국가기구가 아닌 대중 단체들이 석유 수출 수익으로 조달되는 재정으로 교육, 주거, 의료, 생필품 소매, 주택 여건 등을 개선하는 정책이었다.
미시온은 첫 몇 해 동안 놀라운 성과를 거뒀다. 수십 년 동안 기본적인 복지조차 제공받지 못했던 빈민들의 삶이 유의미하게 개선됐다. 66퍼센트에 이르던 빈곤층 비율이 10퍼센트대로 떨어졌다.
국제적 상황이 미시온 추진에 유리하게 작용하기도 했다. 라틴아메리카를 뒷마당처럼 여기던 미국은 당시 이라크 전쟁에 발목이 잡혀 있었다. 전쟁의 여파로 각국이 비축 석유량을 늘렸고, 중국의 고도 성장이 본격화됐다. 그 때문에 국제 유가가 급등했다.
차베스는 이 과정 전체를 (트로츠키와 그람시를 인용하며) “21세기 사회주의”라고 명명했다. 그 “사회주의”의 상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여전히 모호했지만, 일국 지도자에게 보기 어려운 급진적 언사에 국제 좌파들은 열광했다.
많은 좌파들이 베네수엘라를 신자유주의에 맞선 대안으로 주목했다. 세계사회포럼이 2006년에 베네수엘라에서 열렸을 때, 참가자는 역대 최대 규모인 20만 명에 이르렀다.
하지만 바로 이때, 변화를 전진시킬 전략의 모순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아래로부터 민주주의 대 위로부터의 변화
고무적 사례들과 그것이 자아낸 기대·희망과는 별개로, 베네수엘라에서 실제 변화는 자본주의의 틀 안에서 추진되고 있었다.
사회적 지출이 곱절 이상 늘었지만, 그것은 분배 조건을 개선한 덕이었지 생산을 조직하는 방식(자본-노동 관계) 자체가 바뀌어서는 아니었다. 생산수단에 대한 통제권은 여전히 사용자들에게 있었고, 여기에 도전하는 것은 차베스의 구상에 없었다. 2004년에 차베스는 국제적으로 저명한 좌파 저술가·활동가인 타리크 알리와의 인터뷰에서 “사적 소유 폐지나 계급 철폐는 나의 목표가 아니”라고 말했다.
차베스는 PDVSA 전면 국유화를 시작으로 몇몇 주요 산업의 국유화를 추진했다. 그러나 그 방식은 자본가들에게 대개 시가보다 더 많은 보상을 제공하는 유상 국유화였다. 베네수엘라 자본가들의 자산은 차베스 집권기에 외려 늘었다.
자본주의적 사회 조직 방식 자체에 도전하려면 노동자 대중의 민주주의가 더 발전해 경제적·정치적 통제권을 장악해야 한다. 그런데 그런 도전은 필연적으로 자본주의 국가에 도전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차베스는 대중운동을 “이중[이원] 권력”이라고까지 부르며 찬양했지만, 그 말의 속뜻은 레닌주의적 의미와는 달랐다. 차베스에게 “이중 권력”은 대중운동은 국가와 공존하며 국가(차베스 자신)의 전략을 집행하는 보조자 구실을 하는 것을 뜻했지만, 레닌주의적 의미에서 “이중 권력”은 노동계급이 자본주의 국가와 전투를 벌여 국가를 파괴하고 다른 것으로 대체하는 혁명적 과정의 일환이다.
차베스는 기존 국가기구를 재편하고 오히려 강화했다. 그는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려고 자신을 지지하는 관료를 대거 충원했고, 2500명을 장성으로 추가 임명했다. 차베스는 군부에 주요 개발 사업권을 제공해 군부의 이권도 확대했다.
PDVSA 전면 국유화를 완료한 차베스는 이 기업을 대통령 직할하에 뒀고, 회계 내역을 공개할 의무조차 없앴다. 그러면서 2002년 ‘사장 파업’에 맞서며 탄생한 노동자 위원회들이 PDVSA 장악에 걸림돌이 될까 우려해 이를 해체시켰다.
이를 배경으로 ‘볼리부르게스’(볼리바르식 부르주아지)가 출현했다. 이들은 차베스 집권 후 시류에 편승해 석유 수출 수익에서 콩고물을 얻으려고 국가기구와 유착한 신진 계층이었다. 그 전 수십 년 동안 판쳤던 부정 축재가 사람만 바꿔 되살아났다.
차베스의 의도는 “변화의 적들”에 맞서 개혁의 동력을 지키는 것이었겠지만, 그의 전략은 변화의 진정한 동력인 대중의 자기 행동을 제약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차베스가 대중과 관계 맺는 방식도 마찬가지 문제를 드러냈다.
차베스는 임기 내내 대중과 끈끈한 친밀감을 보였고 직접 대중과 관계 맺으려 애썼다. 2006년에 차베스는 쿠바 공산당을 모델로 하는 신당 베네수엘라통합사회주의당(PSUV)을 창당하고, 자신의 계획을 지지하는 이들은 모두 이 당에 가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시 베네수엘라 인구의 4분에 1에 이르는 600만 명이 이 당에 가입했다. 그중에는 사회 변화에 진정으로 헌신하던 수많은 지역 활동가들도 있었지만, 시류에 편승하려는 국가 관료들과 볼리부르게스도 있었다.
차베스를 비판적으로 지지하던 일부 급진 좌파는 PSUV가 베네수엘라의 역동적 운동의 표현체이자 대중운동 내 급진적 부문의 정치적 창구가 될 수 있다고 기대하고 PSUV에 합류했다.
하지만 차베스가 이 당을 통해 대중운동과 맺은 관계는 쌍방향적이기보다는 일방적이었다. 당내 민주주의는 제약됐고, 차베스의 정책에 조금치라도 비판적이면 혁명에 반대하는 것으로 매도됐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 당이 급진 좌파를 위한 창구가 아니라 차베스의 정책을 하달하는 도구라는 점이 명확해졌다.
전략의 귀결
활력적이던 대중운동은 하달된 정책을 집행하는 구실을 하게 됐다. 미시온은 (대중 자신의 우선순위가 아니라) 국가의 우선순위에 따라 재정이 들쑥날쑥해졌고, 기층 활동가들의 헌신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상당수 프로젝트가 중도에 멈추거나 개점 휴업 상태가 됐다.
국제 유가가 요동침에 따라 이런 어려움은 더 두드러졌다. 석유 수출 수익에만 의존하면 복지 프로젝트뿐 아니라 베네수엘라의 장기적 전망 역시 어두워질 터였다.
차베스도 이 점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차베스의 구상은 민간 자본가들의 늘어난 부와 생산수단을 몰수해 대중이 직접 통제하게 하는 것이 아니었다.
차베스는 사회적 소유 기업(EPS)을 지원해 산업 다각화를 시도했다. 석유 수출 수익으로 생필품 생산과 기초 산업 부문에서 협동조합식 소기업들을 육성해 경제의 석유 산업 의존을 극복하려는 시도였다.
그러나 이 소기업들은 들쑥날쑥한 재정 지원에 의존하다가 다국적기업과의 경쟁에서 밀려 도산하기 일쑤였다. 정부는 도산 기업들을 헐값에 매입했고, 종사자들은 차베스 정부 기구에 편입됐다.
차베스는 ‘국제적’ 방안도 추진했다.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이 “대안적 교역 관계”를 구축해 서로를 돕는다는 ‘아메리카를 위한 볼리바르식 대안’(ALBA) 구상이 그중 하나였다. 쿠바·볼리비아·니카라과·에콰도르·아이티 등이 이 구상에 동참하거나 관심을 보였다.
차베스의 목표는 베네수엘라의 석유를 현물로 제공하고 그 대가로 산업 발전에 필요한 자원과 기술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구상에 참가하는 국가들은 세계 자본주의 시장에서 전혀 자유롭지 않았고, 그 시장과 맺는 관계도 저마다 달랐다.
베네수엘라 역시 석유 수출국으로서 세계 자본주의에 단단히 묶여 있었다. 차베스 집권기에 석유 수출 수익이 베네수엘라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더 늘었고, 그 석유의 최대 수입국은 변함없이 미국이었다.(오늘날까지도 미국의 베네수엘라 제재가 그토록 강력한 효과를 내는 이유다.)
그래서 차베스는 ALBA 구상을 통해 신자유주의 “워싱턴 컨센서스”에 대항하는 “남미 컨센서스”를 구축하겠다고 했지만, 이 구상은 베네수엘라와 쿠바가 석유와 의사를 맞바꾼 교역을 제외하면 별다른 성과 없이 끝났다.
차베스는 고성장을 구가하던 중국에서 투자를 유치해 베네수엘라를 발전시키려고도 했다. 그러나 중국의 투자는 미국이 이라크 수렁에 갇힌 틈을 타 자국의 시장과 영향력을 확장하기 위한 것으로, 대가가 따랐다. 베네수엘라와 중국 간 거래에서 이득을 본 쪽은 국제 시세보다 싼값에 원유를 공급받은 중국이었다.
사후
차베스는 생전에 마지막으로 발표한 글에서 “베네수엘라에서 여전히 21세기 사회주의는 실현되지 않고 있다”고 시인했다. 그가 가난한 사람들을 진심으로 위하려 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하지만 차베스의 전략이 낳은 문제는 그가 사망한 2013년 이후 더 두드러졌다. 국제 원자재 가격이 급락하면서 ‘볼리바르식 혁명’의 재원이 말랐다. 대중의 삶의 질이 크게 하락해, 그전에 빈곤층에서 벗어났던 사람 중 73퍼센트가 다시 빈곤층이 됐다.
차베스의 후임자 니콜라스 마두로는 재정을 확보려고 석유 산업에 대한 해외 투자를 유치하려 애썼고, 그에 조건으로 따라붙은 ‘재정 건전화’(긴축) 조처를 일부 받아들였다. 미시온 등의 형태로 제공되던 생필품 보조가 삭감됐다. 대중이 가난의 고통을 겪도록 방치하는 조처였다.
마두로는 차베스가 군부에 제공한 개발 사업권을 이용해 우림을 대규모로 파괴하는 채굴 사업 ‘아르코 미네라’를 발족했고, 150개 다국적기업으로 구성된 컨소시엄으로 외화를 벌어들이려 했다. 이는 토착 원주민의 권리를 심각하게 침해했다.
이런 조처들이 마두로만의 것은 아니었다. PDVSA에 대한 다국적기업들의 직·간접적 투자 유치, 우림 개발 시도 등은 차베스 시절부터 있던 일이었다. 마두로는 이를 더 밀어붙인 것이다.
하지만 차베스를 쿠데타에서 구출하고 역동적 사회 변화의 잠재력을 보여 줬던 대중운동은 국가기구의 하위 파트너가 되면서 그 역동성을 잃었고, 마두로 정부에 맞설 수 없었다.
우파들은 이런 상황을 반격의 기회로 삼았다. 이번에는 사장들뿐 아니라 미국의 재정적·정치적 후원을 받는 복음주의 기독교 우익도 가세했다.
이들은 생필품 품귀를 조장하고, 무장 집단을 이용해 정부 시설을 습격하고 거리에서 바리케이드 시위를 벌이며 사회 불안정을 심화시켰고, 2019년에 쿠데타를 다시 시도했다.(본지 261호 ‘위기의 베네수엘라 — 좌파는 무엇을 배울 것인가?’를 보시오.) 마두로는 군부에 의존하는 권위주의적 조처들을 더한층 강화하는 것으로 이에 대응했다. 한때 역동적이던 대중운동은 철저한 통제하에 조직되는 관제 시위로 변질됐다.
2000년대에 국제 좌파를 열광케 한 차베스의 “21세기 사회주의”는 변화의 진정한 잠재력을 흘낏 보여 줬다. 하지만 자본주의에 철저하게 도전하지 않고 그 속에서 조건을 재협상한다는 전략 때문에 그 잠재력을 실현하지 못했다.
오늘날 브라질·칠레·페루 등에서 집권한 이른바 ‘제2의 핑크 물결’ 정부들이 당시의 베네수엘라에서 보였던 잠재력을 재현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브라질의 룰라, 칠레의 가브리엘 보리치 모두 운동을 단속하고 의회 내 책략과 협상에 더 의존하며 변화의 진정한 동력에 착목하지는 못하고 있다. 페루의 페드로 카스티요는 그 과정에서 우파의 반격을 받아 탄핵당하기도 했다.
이들 나라를 둘러싼 국제적 상황도 훨씬 만만치 않다. 세계적 경제 위기와 얽힌 다중 위기 속에서 이들은 자국 자본주의의 수익성 회복을 위해 대중의 변화 염원을 더 단속해야 하는 처지다.
게다가 지난 10년 동안 국제적으로 부상한 극우 운동이 라틴아메리카에서도 만만찮게 성장했다. 브라질에서는 극우 보우소나루가 집권했고, 룰라 재취임에 맞춰 쿠데타 시도까지 벌어졌다. 이에 룰라는 국가 기구를 통한 숙정으로 대응했고, 미국의 바이든과 ‘중도 동맹’을 과시했다.
하지만 베네수엘라의 사례에서 드러났듯 변화의 진정한 동력은 노동자 대중의 운동이다. 그 운동이 성장해 자본주의 국가와 사회 관계에 도전하는 혁명적 방향으로 나아가야 사회를 진정으로 바꿀 수 있다는 것이 우리가 차베스의 사례에서 얻어야 할 교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