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우는 심리학》, 《가짜 자존감 권하는 사회》의 저자 김태형 심리학자 인터뷰:
“정신적 고통의 근본 원인은 사회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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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여 년 동안 심리학이 크게 인기를 끈 이유가 뭐라고 보시나요?
저는 한국 사회가 신자유주의 체제로 재편되면서 사람들의 정신적 고통이 극도로 심해진 것이 심리학의 인기와 연관이 있다고 생각해요. 한마디로 사는 게 너무 힘든 거죠. 그것을 이해하고 또 치료할 수 있는 학문으로 심리학이 각광받게 된 것 같아요. 사실 예전에 우리 민족은 이런 걸 무당이나 점집에 찾아가서 해결하곤 했는데, 그런 건 비과학적이니까 대중이 더는 좋아할 수 없고, 이제 과학 쪽에서 이를 대신할 수 있는 것은 심리학이 유일한 거죠. 한국인들의 지적·문화적 수준이 높아지고 기초학문에 눈을 뜨면서 심리학의 중요성에 주목하게 된 것도 하나의 원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앞서 말한 것이 더 중요한 요소라고 봐야겠죠.
주류 심리학의 문제를 지적해 오신 것으로 압니다. 핵심 문제가 뭔가요?
한두 마디로 정리할 수는 없을 텐데요. 제가 대학에 들어갔을 때 주류 심리학에 가장 실망했던 게 환원주의였어요. 사회 문제를 개인으로 환원하고, 사람의 문제를 생물학적인 것으로 환원하고. 이런 식의 사고방식이 팽배해 있고 가르치는 것도 모두 그래서 주류 심리학이 이 정도밖에 안 되는구나 하고 실망했어요.
한국의 대학이 심리학을 불균형하게 가르쳐요. 예를 들면 프로이트의 정신분석, 그리고 정신의학 쪽은 일반적으로 거의 배울 수 없다고 봐야 합니다. 본질적으로 미국의 행동주의 심리학에 기초하고 있는 주류 심리학만 가르치죠. 기존 심리학 이론도 편향적인데 그중에서도 일부만 가르치거든요. 정규 심리학 교육에 실망을 안 느끼면 심리학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저희 때도 정말 심리학을 배우고 싶어서 심리학과에 들어왔던 친구들은 다 실망해서 그만뒀습니다. 예를 들어 고등학교 때 융이나 프롬의 책을 읽었던 친구들은 다 그만둔 거죠.
행동주의 심리학은 뭐가 문제인가요?
행동주의라는 건 간단하게 말씀드리면 인간을 자극에 반응하는 깡통 같은 걸로 보는 거예요. 파블로프의 개는 많이 들어보셨을 텐데요. 인간은 자극을 받으면 그에 반응하는 존재라는 식으로 단순화하는 거예요. 인간을 동물화, 기계화하고 자극-반응의 매개체 정도로 이해하는 거예요. 왓슨이라는 행동주의 심리학자는 무슨 얘기까지 했나 하면 ‘애들한테 꼬리표를 붙여서 나한테 보내 주면 그걸로 키워 주겠다’ 하고 말했어요. ‘대통령이 되게 해 주세요’ 하면 대통령이 되는 데 필요한 자극만 주겠다. 이런 식이죠. 인간을 거의 개 취급하는 거죠.
미국에서도 행동주의가 하도 비판을 받으니까 ‘인지-행동주의’로 이름을 바꿨어요. 그런데 인지-행동주의도 인간을 조금 똑똑한 개로 보는 정도에요. 기본적으로 이런 이론에서는 인간을 사회적 존재로 보지 않습니다. 단순히 생물학적 존재라고만 봐요. 요즘 유행하는 진화심리학도 같은 건데요. 기본적으로 생물학적 인간관을 공유해요.
심리학에서 생물학적 인간관이 왜 문제가 되나요?
예를 들면 한국 사람들이 왜 우울하냐는 물음에 대해 이들은 세로토닌 부족이라고 해요. 그럼 세로토닌이 왜 부족하겠습니까? 사는 게 거지 같으니까 세로토닌이 부족한 건데 그건 이들의 관심 대상이 아니에요. 뇌에 세로토닌이 부족한 것만 봐요.
그러니까 자살을 줄이려면 세로토닌을 보충해 줘야 한다 이렇게 가는 거죠. 인간의 모든 행동, 예를 들면 폭력성, 성폭력 등도 다 본능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거예요, 동물적 본능. ‘성폭력은 프로이트주의에서 얘기하는 성적 본능에 의한 것이다. 인간은 원래 그렇다, 어쩔 거냐?’ 이런 식이죠. 이처럼 인간에 대한 이해가 대단히 왜곡돼 있고 비과학적이고 천박하죠.
제가 이런 문제들을 집대성해서 서양의 심리학을 비판한 책이 《심리학을 만든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생물학주의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근본적인 문제에요. 시야가 조금 넓어져 봤자 개인의 영역을 넘어서지 못해요. ‘부모가 너를 잘못 키워서 그래’ 하고 말하긴 해도 왜 오늘날의 부모들이 애를 잘못 키우게 되었을까 하는 문제에는 관심이 없어요. 그건 사회 문제잖아요. 그런데 절대 여기까지 눈을 돌리지 않습니다. 개인에게 집착할 뿐이죠.
미국의 주류 심리학은 철저한 개인주의 심리학이고 생물학 중심적이고 정확히 계급적 입장에서 얘기하자면 부르주아 심리학이라고 할 수 있죠. 자본주의 체제를 합리화하고 미화하는 역할을 하죠.
그런데 마르크스가 인간은 사회적 존재라는 개념을 제시했고 그것을 에리히 프롬 같은 학자들이 수용해서 심리학에서 약간 좌파적인 이론을 전개했죠. 사회주의권에서 마르크스 이론에 입각한 심리학이 발전했을 수도 있지만 맥이 끊겨 서구 사회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고 에리히 프롬 정도만 알려졌죠.
에리히 프롬에 대해서 조금만 더 소개해 주시죠.
그의 기여라고 한다면 올바른 인간관에 기초한 심리학을 전개하려고 애썼다는 점이에요. 에리히 프롬은 인간을 사회적 존재로 보는 마르크스주의에 입각해서 프로이트주의와 결합시키려고 했거든요. 그런 점에서 심리학계 내에서는 상당히 진보성이 있는 학자였죠. 에리히 프롬은 사회 문제가 인간 심리에서 매우 중요하다는 점을 계속 강조했고요. 개인주의, 환원주의에 대해서 일관되게 반대했어요. 에리히 프롬은 사회가 인간 심리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가, 또 인간의 심리가 사회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가에 관심이 많았어요. 미국 심리학자들로서는 도저히 관심을 가질 수 없었던 거시적이고 본질적인 주제죠. 미국 심리학자들의 관심은 기껏해야 나와 주변 환경의 관계이지, 자본주의 체제와 나의 관계가 아니에요. 반면 에리히 프롬은 그런 거시적인 주제를 연구한 학자입니다. 저는 뭐니 뭐니 해도 인간을 사회적 존재로 보고 그에 기초해서 이론을 전개한 것이 에리히 프롬의 가장 큰 공헌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프로이트주의는 근본에서 마르크스주의와 결합이 불가능합니다. 마르크스주의의 인간관은 사회적 존재인데, 프로이트주의에서 인간은 생물학적 존재입니다. 이를 결합하려면 프로이트주의에서 잔가지만 가져오고 큰 기둥은 버렸어야 해요. 에리히 프롬은 그러지 않고 둘 다 가져가려고 하다 보니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과 생물학적 존재로서의 인간 사이의 갈등이 인간의 최대 모순이다’ 하고 나아가게 됐어요. 아주 간단히 얘기하자면 인간에게 내재된 속성에는 동물로 돌아가려는 속성이 있는 동시에 완전한 사회적 존재가 되려고 하는 속성이 있다. 이게 갈등을 일으켜서 인간의 모든 비극이 시작된다는 이론을 전개합니다.
이건 잘못된 거죠. 인간의 동물적 속성과 사회적 속성은 동등한 수준에서 고려할 수 있는 게 아니거든요. 인간은 사회적 존재이고 그 안에 생물학적 존재로서의 인간이 포함되어 있는 겁니다. 하위 변수거든요. 그런데 프롬은 이를 동격 변수로 놓고 두 가지가 갈등 관계에 있다고 봤어요.
그러나 인간에게는 동물로 돌아가려는 지향 따위는 없어요. 사람답게 살고자 하는 지향과 그게 안 됐을 때 고통스러워하는 건 있어도 프롬이 얘기한 것처럼 동물로 돌아가려고 하는 지향은 없어요.
굳이 프로이트가 아니더라도 사람들의 경험으로는 본능을 추구하는 게 너무 당연히 느껴지기도 하는데요.
생물학적 욕구가 인간 심리에 독자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게 뭐가 있을까요? 이와 관련해 성욕을 자주 거론하는데요. 이건 동물의 종족 번식욕하고는 완전히 다른 겁니다. 동물의 종족 번식욕은 본능에 따른 욕망이거든요. 그런데 사람의 성욕은 이미 본능의 영역을 벗어났어요. 심지어 본능과 무관하다고도 할 수 있어요. 사회적 욕구와 결합된 하부 욕구라고 볼 수 있어요.
예를 들자면 오늘날 사회적으로 여성을 대하는 남성의 태도가 남성의 성욕에 엄청난 영향을 끼칩니다. 이는 본능에서 크게 벗어난 거예요. 왜냐하면 요즘 젊은 남성들은 애를 잘 낳을 수 있는 체격 좋은 여성을 좋아하지 않잖아요. 진화심리학적으로 보자면 매력은 그쪽에서 느껴야 하거든요. 이는 생물학적 관점에서 보면 일탈이라고 할 수 있어요.
어린 아이에게 성욕을 느끼는 범죄자들도 본능의 영역에서 보면 말이 안 되는 거죠. 이들의 경우에는 오히려 번식 능력이 있는 성인 여성에게서는 거의 성욕을 느끼지 않아요. 이런 걸 보면 성욕 자체도 그 사람의 사상과 신념, 가치관 이런 것에 큰 영향을 받는다는 걸 알 수 있어요. 즉, 사회적인 욕망과 관련해서 움직인다는 겁니다.
강간범의 경우도 단순한 번식욕이라기보다 여성에 대한 정복 욕구나 공격성, 잔인성 등이 있는 경우라고 할 수 있어요. 그런 욕구가 없는 남성이라면 그런 상황에서 아예 발기가 안 돼요. 성폭력으로 언론에 오르내리는 인물들이 뭐 생물학적 욕구가 남달라서 그랬겠어요? 이걸 보면 인간의 성욕에 생물학적 요인이 독자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한다는 걸 알 수 있어요. 대부분 사회의 영향을 받는 거죠. 부부관계에서도 비슷한 현상을 발견할 수 있어요. 둘의 사회적 관계가 성욕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칩니다.
흔히 생각하는 것과 달리 성욕이라는 건 보노보 원숭이 단계에서부터는 번식욕이 아닙니다. 얘네들은 친교를 위해 성관계를 하거든요. ‘너랑 나랑 친구야. 같이 놀자.’ 이런 거예요. 이런 행위가 된 거죠. 인간은 어떻겠어요. 훨씬 더하죠. 인간 심리에 독자적으로 작용하는 생물학적 욕구는 없다고 보시면 돼요.
식욕은 어떠냐? 그럼 단식투쟁은 뭐에요. 그게 독자적으로 작용할 수 있는 힘이라면 단식투쟁을 하면 안 되는 거죠. 심지어 아무리 먹을 만한 음식이라도 누가 바닥에 던져 주면 그거 주워 먹지 않잖아요. 식욕이 중심이 아니라는 거예요. 인간은 그렇게 모욕당하는 상황, 사회적 욕구가 좌절되는 상황에서는 식욕도 포기하죠.
우리가 생물학적 욕구를 제거할 수 없고 유기체로서 그런 욕구를 갖고 있는 건 당연한데 그게 독자적으로 우릴 지배할 수 있는 건 아니라는 겁니다.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사회적 동기, 사회적 욕구이고 그 하위 욕구로서 생물학적 욕구가 따라다니는 거예요.
이 점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서구 심리학의 문제에요. 프로이트는 성적 욕구가 어떻게 실현되고 혹은 좌절되는가에 따라 그 사람의 인격이 좌우된다고 봤는데요. 예를 들어 성행위를 할 때 공격적인 태도를 보인다면 일상에서도 그런 가학적 성격이 형성된다는 식이에요. 그러나 프롬은 반대로 봤죠. 가학적인 성격의 인간이라서 성행위도 가학적이라는 거죠. 프로이트는 어떤 사람의 생물학적 욕구, 성욕이 그의 사회적 특성을 결정한다고 본 반면 프롬은 이를 뒤집으려고 한 건데 완벽히 성공하지는 못했어요. 그럼에도 프로이트의 입장에는 반대했어요. 인간이 어떤 이유로 가학적 성격을 갖게 돼서 성적으로도 가학적이라고 본 겁니다.
프로이트에게서 물려받을 만한 건 뭘까요?
정신의학이나 정신병리, 임상심리와 관련된 이론들이에요. 이 중에는 프로이트가 공헌한 게 분명히 있습니다. 예를 들면 억압 이론이 있죠. 억압 이론의 기초를 이루고 있는 생물학주의는 틀렸지만 인간이 견디기 힘든 고통을 억압한다는 이론은 당시로서는 대단히 뛰어난 관찰이었던 거죠.
정신병이 어디에서 비롯하는가에 대한 프로이트의 견해들 중에는 쓸 만한 내용이 상당히 있어요. 사실 프로이트 없이는 오늘날의 정신의학이 성립되기 힘들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중요한 개념들을 제시했고, 그런 부분적인 성과들에 대해서는 받아들일 필요가 있어요. 하지만 프로이트가 일관되게 뼈대로 갖고 있던 생물학주의는 버려야 합니다.
과거에 미국에서 유행했던 행동주의 심리학은 프로이트를 아주 싫어합니다. 프로이트주의에 대한 반대로 시작한 학문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놀랍게도 인간관은 똑같아요. 프로이트는 임상적 자료를 갖고 이론을 전개한 편인데 행동주의는 미국적 실용주의, 실증주의의 영향을 받아서 실험을 하고 통계를 내고 이런 게 아니면 잘 인정을 안 해요. 그래서 쥐를 갖고 실험하고 이런 걸 굉장히 좋아한 거죠. 프로이트주의는 그런 식의 증명이 불가능하니 비과학적이라고 비판한 거예요. 자기들은 그렇게 애매모호한 건 인정할 수 없고 실험실에서 검증 가능한 것만 인정하겠다 이런 식이죠. 그러면서도 결과적으로는 프로이트랑 똑같은 결론을 냈으니 거기서 거기라고 할 수 있죠.
마르크스가 심리학에 끼친 영향도 크다고 하셨는데 어떤 건가요?
인간관의 혁신이죠. 사실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니 뭐니 하는 얘기는 아리스토텔레스도 했죠. 그런데 자신의 철학적 체계 속에서 인간을 사회적 존재로 위치 지어서 이론을 전개한 학자는 마르크스가 처음이죠. 유일하다고도 할 수 있고요. 이런 점에서 인간관에 대단한 혁신을 가져왔고 결과적으로 심리학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습니다.
왜냐하면 심리학은 인간관에서 출발한단 말이에요. 인간을 생물학적 존재로 보느냐, 사회적 존재로 보느냐에 따라 이론이 달라져요. 마치 철학이 관념론이냐 유물론이냐에 따라서 모든 분과 학문 혹은 하부 학문에 영향을 주듯이 심리학도 똑같거든요. 인간관이 뭐냐에 따라 분과 심리학 이론 전반이 다 영향을 받는다는 거예요.
그런 점에서 인간관은 심리학의 근본문제라고 할 수 있는데 여기서 마르크스가 큰 공헌을 한 거죠. 심리학자는 아니었지만 철학자로서 인간관 분야에서 혁신을 가져왔기 때문에요.
인간 심리에 가장 큰 영향을 주는 건 다른 사람과의 ‘관계’라고 하셨는데요.
인간은 관계를 떠나서는 살 수가 없어요. 그리고 관계를 조금 크게 보면 사회죠. 인간은 사회를 떠나서는 생존과 발전이 불가능한 존재에요. 인류는 그 등장에서부터 단독자로 등장한 게 아니에요. 인류의 등장은 사회의 등장과 일치하는 거예요. 인류는 처음에 생산력 수준이 낮았기 때문에 절대로 혼자 생존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회를 이뤄서 등장하죠.
그러니까 사회와 인간과 언어의 탄생은 같은 거예요. 인간은 태생부터 사회적 존재거든요. 물론 그 당시 한 개인의 독자적 생존 능력은 지금보다 높았을 수 있어요. 자급자족 경제였으니까요. 산속에 들어가서 농사도 짓고 살 수 있었겠죠. 그러나 점차 인간은 더 결합되고 분업이 발전하면서 현대인들은 관계를 떠나서는 생존 자체가 불가능해요.
이런 조건이 인간 심리에 어떤 영향을 주느냐는 점을 봐야 하는데요. 예를 들면 옛날에 인도에서 발견된 늑대아이 얘기 아시죠. 얘네들을 데려다 사회화를 시키려고 해 봤어요. 언어도 가르쳐 보고 인간의 예절도 가르쳐 보고 했는데 안 되는 거예요. 뭐가 증명된 거냐 하면 예전에 사람들은 인간이라는 몸을 갖고 태어나면, 인간 유전자를 갖고 태어나면 인간이 될 거라고 기대했는데 확실해진 건 사회 속에서 성장하지 않으면 인간이 될 수 없다는 겁니다. 특히 인간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욕망들, 사회적 욕구들은 가질 수 없어요. 늑대소년들에게는 그런 욕망이 없어요. 인간이 되고 싶어 하지 않았지요.
그래서 사회를 떠나서는 아예 인간이라는 존재가 될 수 없다는 게 심리학적으로 확인됐어요. 우리 인간 심리가 뇌에서 만들어진다고 하는 뇌과학자들이 있는데요. 사회를 떠나서는 인간 심리가 전혀 형성이 안 됩니다. 인간 심리는 사회와의 상호작용 속에서 형성되는 것이고 최소한 아동기 이전에 사회와 정상적인 접촉이 없으면 인간 심리가 형성되지 않습니다. 몸만 인간이죠. 아동기 이후에도 인간은 사회 속에서 생활하면서 독특한 심리를 가지게 되는 거예요. 예를 들면 한국인들이 갖고 있는 서로에 대한 공격 성향이나 돈에 대한 집착 같은 것은 부탄 같은 나라에서는 찾아보기 어렵죠. 북유럽 같은 곳에서도 별로 발견되지 않아요. 즉, 사회 제도가 인간 심리를 크게 좌우한다는 거예요.
어린 시절의 경험이 심리 형성과 성격 형성에 큰 영향을 줘서 이후의 삶에도 큰 영향을 준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성격을 고정불변의 것으로 봐서도 안 된다고 하셨는데요.
어릴 때가 중요하다는 것은 부정하기가 어렵습니다. 이는 아주 중요한 거고요. 부모가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면 부모가 결정적이라는 얘기냐? 저는 그게 아니라 사회가 그만큼 결정적이라는 얘기라고 봐요. 왜냐하면 부모는 사회의 대리인입니다. 이건 일찍이 에리히 프롬이 지적했던 건데요. 부모가 스스로 창조한 새로운 사상을 가르치는 게 아니잖아요. 한국 사회에서 통용되는 주류 사상을 가지고 아이들을 대하고 가르치잖아요. 예를 들어 한국 사회가 돈을 숭배하는 사회란 말이에요. 그러면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부모들이 돈돈 하면서 키워요. 한국 사회에서 아이들이 부모를 통해 사회화되는 거죠.
주류 심리학에서는 부모만 강조하지만 매개 변수가 부모일 뿐이지 궁극적으로는 사회가 아이들을 사회화시키는 거예요. 예를 들면 ‘너희 이웃을 아끼거나 사랑하지 말아라’ 하는 건 사회의 주류적 가치관인데 부모들이 이를 아이들에게 전하는 거죠. 한국 사회가 그런 사회가 아니라면 부모가 그런 메시지를 전하지는 않겠죠.
미국 심리학은 다 부모 탓을 하지만 부모 잘못이라고 하기 어렵습니다. 일차적으로 사회 문제에요. 그걸 거부하지 못한 부모들의 잘못도 있다고는 할 수 있지만 그래도 결정적인 변수는 사회라고 봐야 해요. 사회가 바뀌면 부모들도 더 이상 그렇지 않을 테니까요. 돈이 없이도 생존과 존엄이 보장되는 사회라면 부모들이 왜 그러겠어요. 이러면 어린 시절이 달라지겠죠. 그런데 한국과 미국의 심리학자들은 사회 얘기는 거의 안 하고 부모만 잡는 거죠. 요새 부모들이 이상하다 하고요.
어쨌든 아이들이 사회에 나오면요. 설사 부모에 의해서 나쁜 영향을 받았더라도 사회에서 좋은 영향만 계속 받으면 좋아질 거예요. 예를 들어 부모는 맨날 돈돈 했는데 사회에 나와 보니 사람들은 돈에 별로 관심이 없더라. 그러면 시간이 흐를수록 오히려 부모가 이상하다고 느껴지겠죠. 또한 모두에게 사랑받고 존중받는 환경에서 자라면 심리적 상처도 다 낫겠죠.
그런데 한국 사회에서는 어릴 때 받은 상처가 사회에 나오면 계속 악화된다는 거예요. 어릴 때 부모가 공부 못하면 거지된다고 괴롭혔는데 사회에 나오니까 주변에서 똑같은 얘기를 하거든요. 사람 대접 안 해주고 차별하고 무시하고 그러니까 상처가 곪아서 심해지는 게 한국 사회에요.
성격은 변합니다. 특히 환경적 영향이 일관성 있게 좋은 자극을 주면 안 변할 수가 없어요. 아무리 불안했던 사람도 아주 안전하고 편안한 상황에서 5~10년 살고 나면 대개 다 낫지 않겠어요? 내가 이렇게까지 불안할 이유가 없네 하고 말이에요. 그런데 한국 사회처럼 불안한 사회에서는 사회에 나오면 더 불안해져요. 한국 사회가 성격의 변화를 가로막는 획일성이 있어요. 사람을 아주 한쪽 방향으로 밀어붙이는 거죠.
트라우마가 뭔가요?
정신적 외상이라고 하죠. 정확히 얘기하면 중요 욕구의 좌절이 트라우마라고 할 수 있어요. 예를 들면 어릴 때 아버지한테 두들겨 맞았다. 그러면 안전의 욕구가 좌절되고요. 그 다음에 사랑받고자 하는 욕구가 좌절되죠. 존중받고자 하는 욕구도 좌절되죠. 이렇게 중요한 사회적 욕구들이 좌절되요. 그러면 부정적인 감정을 경험하게 되거든요. 불안, 공포, 슬픔, 분노 이런 것들이 가슴 속에 쌓이게 돼요. 그리고 이게 반복적으로 계속 진행되다 보면 이 양이 비대해져서, 문학적으로 표현하자면, 가슴 속에 가득 차는 거예요.
일단 이렇게 되면 아버지하고 헤어져서 살게 되더라도, 가슴 속에 쌓인 분노와 슬픔이 가득하니까, 일상적으로 우울하고 화나고 이런 거예요. 그럼 고통스럽잖아요. 간단히 말하면 이게 트라우마에요. 그러니 대인관계에도 문제가 생기고 비정상적인 행동도 하고 그러는 것이죠. 결론적으로 트라우마를 중요한 사회적 욕구의 좌절과 이로 인한 감정의 비정상화라고 간단히 요약할 수 있겠네요.
중요한 것은 생물학적 욕구의 좌절로는 트라우마가 안 생긴다는 사실이에요. 내가 밥을 두 끼 굶었다고 트라우마가 생기지는 않아요. 생물학적 욕구가 좌절되면 그냥 몸에 병이 생겨요. 그런데 사회적 욕구가 좌절되면 마음의 병이 생기는 거예요. 인간의 정신적 고통과 심리적 병은 사회적 존재인 인간에게만 있는 독특한 현상이에요.
사회적 욕구는 언제부터 어떻게 생기는 것인가요? 생물학적 욕구, 그러니까 본능과 어떻게 다른가요?
최소한의 사회적 욕구는 어느 정도는 태어날 때 가지고 태어나는 것 같아요. 유아들이 처음부터 사람 얼굴과 목소리에 굉장히 민감하게 반응하거든요. 이 중 일부는 어머니 뱃속에 있으면서 발달한 것일 수도 있겠죠. 그런데 사람의 얼굴을 쫓는 것이나 그림도 사람과 비슷한 그림, 예컨대 얼굴을 단순화한 그림 같은 것을 더 오래 본다는 거예요. 요즘 학자들은 안면 인식 뉴런이 있다는 얘기도 해요. 어쨌거나 사회성과 관련된 자질은 타고나는 것 같아요.
그런데 이게 태어난 뒤에 늑대가 키우면 아무 소용 없다는 겁니다. 주로 엄마일 텐데 사람에게서 ‘사랑을 받으니 너무 좋아’ 하면서 사랑의 욕구가 생기는 거고, 나도 뭔가 해주고 싶다고 느끼면서 손을 뻗어 얼굴도 만져 주고 그러는 거예요.
그러면서 사회적 욕구가 본격적으로 개발되는 거죠. 사회적 관계가 없이 성장하면 이런 욕구가 개발이 안 돼요. 늑대소년만이 아니라 감금당해서 자란 아이들에 대한 연구에서도 똑같이 나타나요. 미국 같은 데서 부모들이 아이를 감금해서 키운 경우들이 보고되곤 하는데 이 아이들도 구출 시기가 늦으면 사회적 욕구가 개발이 안 돼요.
사실 처음부터 단독자로 산다면 누구한테 인정받고 사랑받는 게 왜 문제가 되겠어요. 엄마하고 살고 사람하고 사니까 배우고 개발되는 거예요.
항우울제 처방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시는지요. 혹은 더 나은 치료법은 어떤 게 있는지 소개해 주시죠.
제가 서양의 학자들을 많이 비판하지만 그래도 그들은 너무 심하거나 뻔한 거짓말은 잘 안 해요. 정신과 약으로 정신병을 치료할 수 있다고 얘기하는 학자는 본 적이 없어요. 그렇게 얘기하면 당장 거짓말한다고 욕먹으니까요. 뭐라고 얘기하냐면 증상을 억제할 수 있다고는 얘기해요. 그런데 병을 치료할 수 있다고는 절대 얘기 안 합니다.
그런데 한국은 중개상 같단 말이에요. 미국 이론을 수입해다 파는데 약간 짝퉁 같다고 할까요? 사이비가 넘쳐요. 그러니까 우울증은 약 먹으면 다 나아요. 이러는 사람이 많고요. 연예인들도 나와서 ‘공황장애? 약 먹으면 다 나아요.’ 이런단 말이에요. 약 먹어서는 치료 안 돼요. 증상이 억제되는 거죠. 증상 자체가 병은 아니거든요. 그래서 약으로는 궁극적으로 치료 안 돼요. 약을 아무리 많이 먹어도 원인은 알 수가 없잖아요.
약은 아니지만 인지-행동 치료도 대증요법 같은 거예요. 근본적인 치유가 안 됩니다. 그게 그렇게 잘 된다고 하면 왜 인지-행동 치료의 메카라고 하는 미국에서 1.5일마다 한 번씩 총기 난사 같은 사건이 벌어지겠어요. 효과가 아예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이런 현실을 보려 하지 않은 채 미국 이론을 맹신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저는 약을 쓰는 것을 반대하지는 않아요. 즉각적인 고통이 너무 심하니까 필요하면 약을 써서 경감시키는 게 맞죠. 필요하면 증상을 억제해야 하죠.
그런데 계속 약으로만 치료를 시도하는 것은 그 사람을 약물 중독자 만드는 것 밖에 안 됩니다. 내성 생기고 부작용이 굉장히 심각해요. 정신과 약을 오래 먹은 친구들 보면 자살 충동도 심하고 없던 증상도 생기고 그래요. 그러니까 적절하게 쓰여야 하는데 한국은 이쪽 분야가 엉망진창이라 약 처방을 남발하는 경우가 많아요.
치료하려면 약에만 의존하기보다는 상담을 받던가 자기 치유를 해야 하거든요. 그런데 한국에는 이 자기 치유 분야에서 개발된 게 없어서 제가 책을 쓰게 된 거예요. 《누구에게나 어린 시절의 상처가 있다》는 그런 목적으로 쓴 책이에요. 그런 걸 활용해서 자기 분석을 하고 자기 치유를 하려고 시도해야 합니다.
또, 그걸 효과적으로 도와줄 수 있는 책이나 기관 같은 곳을 찾아봐야 합니다. 사회운동하는 사람들은 더 힘들어요. 사회운동하다가 생긴 고통 같은 것을 보통의 정신과 의사들이나 상담사들은 잘 이해 못 한단 말이에요. 그래서 상담하러 가면 사회운동 하지 말라고 하죠. 사회운동을 해야 낫는다고 하는 사람은 없단 말이에요. 저나 사회운동 안 하면 병 걸린다고 하죠. 다른 사람들은 다 반대거든요. 그냥 적응하고 살라고 한단 말이에요. 이게 치료가 되겠어요?
사회 변혁에 대해 말씀하셨는데요, 무엇이 근본에서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하시나요?
일단 격차 해소와 관계 회복이 핵심이라고 할 수 있어요. 한국 사회만 봐도 그 안에서 작동하는 수많은 심리학적 메커니즘이 있겠지만 아주 단순화시켜 말하자면 격차가 급격하게 커지면서 사람들의 관계가 급속히 악화됐거든요.
한국에서 시급한 문제는 각자가 일자리를 구하고 돈을 더 받고 하는 문제가 아니에요. 그렇게 해서 해결될 수 있는 게 없어요. 예를 들어서 모든 청년이 취직이 됐어요. 그래서 안정적으로 밥 먹을 수 있는 돈을 받아요. 그러면 정신적 문제가 해결될까요? 안 됩니다. 그게 해결될 수 있으면 직장 우울증이라는 말이 왜 나왔겠어요. 요즘 직장 우울증이라는 말이 유행하잖아요. 좋은 대기업 취직하고 우울증 걸리는 문제요. 결론적으로 정신적 고통이 해결되려면 관계의 문제가 해결돼야 하는데 관계 문제가 해결되려면 각 개인이 안정성을 획득하는 것 이상이 필요합니다.
그 이상이 뭐냐 하면 서로 존중하고 사랑하는 관계거든요. 그런 관계가 되려면 자본주의 체제를 그대로 놔둬서는 어렵다고 봐요. 《싸우는 심리학》을 읽어 보신 분은 알겠지만 저는 사회주의자입니다. 궁극적으로는 사회주의로 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에요. 사회주의가 되든가 그 과도기로서 북유럽 정도까지는 돼야죠. 단기간 내에 사회주의로 가기 힘들면 수정자본주의나 복지자본주의 정도라도 가서 그 다음에 사회주의 시스템으로 넘어가자는 거예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무슨 대책을 세워도 해결이 안 될 겁니다.
그렇다면 예전 소련과 동유럽의 경험에 대해서는 어떻게 평가하시나요?
제가 《싸우는 심리학》에서 다뤘습니다만 저는 에리히 프롬이 한 얘기를 많이 인정하는 편이에요. 에리히 프롬이 이미 소련 사회주의에 대해서 비판했었습니다. 가짜라고요. 가짜라는 얘기의 핵심은 뭐냐 하면 첫째, 물질주의라는 거예요. 사실 레닌이 혁명에 성공한 뒤에 소비에트라는 인민 권력이 생겼으니까 이제 생산력만 발전시키면 공산주의가 된다는 ‘소비에트 더하기 전기화가 공산주의다’라는 명제를 제시했잖아요. 제가 볼 때는 레닌이 조금만 더 살았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교정했을 것 같은데 너무 일찍 죽었고, 그 뒤에 이를 대체할 수 있는 사회주의 건설 이론이 안 나왔어요. 그 뒤 소련의 지도자들이 물질주의적 경향을 보입니다.
대표적인 게 흐루쇼프 같은 놈인데 뭐라고 했냐면 “자본주의의 목표는 한 사람이 잘 사는 거지만 사회주의의 목표는 만인이 다 잘 사는 것이다” 하고 말했거든요. 그걸 두고 프롬이 뭐라고 했냐면 ‘자본주의 목표는 한 놈이 돼지가 되는 거지만 사회주의 목표는 모두 돼지가 되는 것이라는 얘기냐’ 하고 비판했어요.
생산력의 발전은 사회주의로 가는 데 필요한 조건이긴 하지만 목표가 될 수는 없어요. 그런데 소련 지도부가 이를 착각하면서 문제가 생긴 거예요. 소련은 사실 물질적 자극을 위해 자본주의적 방식을 썼어요. ‘우리도 미국처럼 수퍼마켓에 물건이 빵빵 넘치는 나라가 돼야 한다’ 하고요. 이러니까 사람들의 의식도 점점 자본주의화하는 거죠. 덩샤오핑의 흑묘백묘론이랑 비슷한 거죠. 그렇게 되면 사회주의가 아니라 자본주의가 되는 거고, 그렇게 가는 한 미국을 못 당하죠.
그래서 에리히 프롬은 소련도 틀렸고 서방 자본주의권의 사회주의자들도 틀렸다고 비판했어요. 마르크스도 사회주의의 목표는 완전한 인간성의 실현이라고 했지 물질이라고 한 적이 없어요.
둘째, 인간 개조 문제를 너무 쉽게 생각했어요. 사람을 사회주의 시스템에 넣으면 사회주의자가 된다고 생각한 거예요. 그게 안 되거든요. 그게 되면 환경을 바꾸는 심리 치료만 하면 사람들을 다 바꿀 수 있게요? 실제로는 잘 안 바뀌어요. 그리고 계급 사회가 인류 역사상 수천 년이나 지속됐고 러시아 사회주의는 고작 수십 년밖에 안 됐는데 그 사이에 사람들이 다 사회주의적으로 바뀐다? 어림없는 얘기죠.
따라서 끊임없이 의식 혁명, 문화 혁명 같은 것을 해야 합니다. 사회주의화하려면요. 프롬의 말을 빌리자면 완전한 인간을 만들기 위한 끊임없는 의식 혁명을 해야 하는 거죠. 그런데 소련은 그걸 안 했죠. 그리고 그냥 놔뒀죠. 중국은 그걸 너무 과도하게 문화혁명이니 뭐니 하며 잘못된 방향으로 추진하다가 실패했고요.
그래서 에리히 프롬은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데에서 모든 영역에서 동시 혁명을 추진해야 한다. 즉 사상, 문화, 경제 혁명 등을 해야 하는데 그중의 기본은 사상 혁명이라고 봤어요. 즉, 인간 개조가 우선이라는 거죠. 저도 그게 맞다고 봐요. 사상의 우월성이 없이는 제국주의를 이길 수 없거든요.
프롬처럼 그것을 인본주의적 사회주의라고 하던 민주적 사회주의라고 하던 기존에 소비에트나 동구권 모델과는 다른 사회주의를 해야 한다는 겁니다.
청년들이 겪는 심리적 어려움 중에 가장 중요한 게 뭘까요?
고독이죠. 한국 사람들 다 그렇겠지만 청년들도 그렇죠. 사실 한국 청년들처럼 고독한 사람들이 없어요. 고독과 불안은 통하거든요. 고독한 만큼 불안해져요. 즉, 불안하다는 사실은 고독하다는 얘기랑 거의 같다고 보시면 돼요. 내가 고독하지 않고 항상 누군가와 함께라면 불안하지 않아요. 설사 지구가 멸망해도 정말 사랑하는 동지와 함께 있다면 웃으면서 죽을 수도 있거든요. 전쟁 영화에도 나오잖아요. 당신과 함께 싸우다 죽어서 영광이라고. 그러니까 불안에도 고독이 핵심이에요.
요즘 청년들은 나이든 세대에 비해 더 어렸을 때부터 고독했어요. 공동체가 해체되고 가정이 황폐해진 조건에서 자랐기 때문에 그래요. 여기서 가정의 황폐화라는 것은 폭력이 난무하고 밥을 안 주고 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사랑이 없는 환경을 뜻해요.
오늘날 한국 가정은 옛날과 달라요. 옛날에는 공부 못하고 취직 못 했다고 집에서 냉대를 받지는 않았거든요. 오히려 위로를 받았죠. 지금은 집에서 더 욕먹어요. 어릴 때부터 그런 취급을 당한 거예요. 쉽게 말하면 부모한테 학대를 받고 자란 세대에요. 주먹으로 학대를 당하지는 않았지만 정신적 학대를 받은 거죠. 그래서 어릴 때부터 고독해요. 형제가 많지도 않고 있어도 사이가 좋지도 않고, 비교나 당하고요. 학교에 가면 친구들 사이도 안 좋고요. 그래서 그런 고독이 임계점까지 와 있는 게 요즘 청년들이 아닌가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이걸 극복하려면 그야말로 연대와 관계가 필요한데 그 상처들이 너무 커서 대인관계도 너무너무 어려워합니다. 힘들어 해요. 막상 시도하면 연애 같은 것도 잘 안 돼요. 그러니까 청년들은 악순환에 갇힌 거예요. 시도하자니 마음만 더 아파. ‘에이 혼자 살래. 혼자 사니까 불안하고 아파.’ 그래서 또 관계를 지향하는데 또 상처 입어.
그래서 이걸 끊어 내려면 근본적으로 사회가 바뀌어야 하겠지만 시간이 걸리고, 그 사이에 변혁 운동을 하는 청년들도 나와야 하는데 문제는 변혁 운동 하자고 몇 명 설득해서 데려다 놓는다고 예전처럼 그렇게 되질 않아요. 다 상처들이 있으니까요. 그 상처를 극복하는 사람들이 활동을 해야 활동도 잘 되고 그 사람도 상처가 잘 치유됩니다. 그 상처를 놔둔 채로 활동을 하니까 결국 떨어져 나가거나 활동하는 과정에서 오히려 상처가 악화되어서 어느 순간 배신하기도 하고, 김문수처럼, 이렇게 돼요. 그래서 오늘날 청년 세대는 거의 필수적으로 심리 치유를 필요로 하고 있어요. 사회가 급격하게 바뀌기 전까지는요.
활동이나 운동 속에서 그런 상처가 치유되려면 뭐가 필요한가요?
두 가지가 필요하겠죠. 심리 치유를 하고 운동을 시작하던가, 아니면 운동 조직이 그 치유를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든가. 지도급 리더들이 그런 것들을 치유해 줄 수 있을 만한 역량이 있어야 합니다. 저는 그런 얘기도 종종 하는데, 이제 진보운동 하는 사람들에게 진보적 심리학은 필수입니다. 미국 부르주아 심리학 달달 외우는 건 하나도 도움 안 되겠지만 제가 주장하는 진보적 심리학을 정확히 이해하고 치유하는 능력을 갖추는 건 필수적이다. 그렇지 않으면 운동이 안 되니까요. 그렇게 해 본 사람들은 실제 효과가 있다고 해요. 대화가 되고 치유가 좀 되면서 운동도 하고요.
그런 능력이 있는 사람들이 조직을 이끌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옛날에는 말 잘하고 용기만 있으면 이끌 수 있었는데 이제는 상처 입은 마음을 어루만져 줄 수 있는 능력이 담보되지 않으면 조직이 이끌어지지 않아요. 모아 놓으면 맨날 싸워요. 사이 나빠지고. 다들 상처가 있으니까. 엉망진창이 돼요. 그럼 이끄는 사람들이 지치죠. ‘이런 사람들을 데리고 해야 해?’ 그러면 인간에 대한 믿음까지 잃어 버릴 수 있어요. ‘이 인간들로는 안 돼.’ 이런 식으로요.
저는 거의 자폐에 가까운 청년들까지 상담한 적이 있는데요. 상담을 통해서 좋아지면 마지막에는 사회에 관심을 보여요. 그래서 진보적인 내용도 받아들이고 단체도 찾아보고 이럽니다. 오늘날에는 이런 단계를 밟지 않으면 운동하기가 어려운 것이 현실이에요.
제가 책에서도 얘기한 것처럼 진보적인 변혁 조직, 운동 그룹에서 지지를 받으며 치유를 병행하는 게 가장 효과가 높아요. 그게 결정적으로 중요해요. 그게 안 되면 어느 정도 치료가 돼도 다시 고독해지거든요. 어디 가서 친구를 만나고 좋은 얘기를 또 들을 수 있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