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디아코니아 홍주민 목사 기고:
난민 인정은커녕 냉대하는 한국 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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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 난민들이 17일 동안 법무부가 있는 정부종합청사 앞에서 난민들의 권리 보장과 법무부 장관 면담을 요구하며 농성을 벌였다. 필자인 한국디아코니아 홍주민 목사는 이번 농성을 지원하고, 경기도 오산에서 난민 쉼터를 운영하는 등 난민 연대 활동에 적극 나서고 있다.
[4월 16일] 이집트 난민들의 과천정부종합청사 앞 17일간 노숙이 종료됐다. 어제 하루 긴장된 하루를 보내고 밤늦도록 토론하고 오늘 공무원들과 만나 의사를 전달하고 마감했다. 처음 시작부터 다섯 번 연대하며 차디찬 길거리에서의 지난한 노정에 함께했다.
이들에겐 대화의 상대자가 없었다. 그런 이유로 대화를 요청했지만 오늘에서야 형식적인 대화 시간을 통해 입장을 전하고 정리를 했다. 의미있는 정부의 입장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난민과함께공동행동과의 연대와 서로 간의 학습은 큰 의미가 있을 것 같아 보인다.
지난해 여름에 밀려 온 예멘 난민에 이어 겨울에 터진 앙골라인 가족 난민을 통해 서로 다른 환경 속에서 양산된 세계 난민의 지형을 경험했다면, 이집트 난민들과의 이번 만남은 또 다른 세계의 현실을 맞닥뜨리게 했다. 특히 심각한 정치적 혁명 과정을 통해 양산된 이집트 난민 현실은 개인 이력을 보더라도 가히 충격이었다.
2013년 8월 14일 이집트의 군부 독재자 시시는 2000여 명을 학살하고 권력을 잡는다. 이후 이제껏 정치범은 10만여 명이 투옥됐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정치 난민이 세계 각지로 흩어졌고, 2018년 9월 이전까지 무비자 입국이 가능했던 한국에 난민신청을 하러 온 것이다. 하지만 이들에겐 거의 난민 지위가 불허돼 3개월마다 체류 연장을 하며 숨통 조이는 삶이 주어졌다.
숨통 조이는 삶
한국에서의 삶은 만만치 않다. 이들이 공통적으로 주장하는 바, 체류 연장을 하는 출입국관리사무소는 악명높다. 법무부 산하의 이 기관은 이주민에게는 염라대왕 격이다. 방망이 두드리는 놈이 임자라는 말이 있듯이, 출입국관리사무소 공무원의 기세는 등등하다. 수틀리면 국물도 없다. 4월 25일에 결과가 나올 앙골라인 루렌도 씨 가족의 재판에서도 봤듯이, 자칭 국경수비대라는 출입국관리사무소 공무원의 근거 없는 억지는 무소불위다.
자료 공개하라면 그런 관행이 없다느니, 규정에 없다느니, 법조항을 들먹이며 더는 대꾸를 못하게 한다. 특히 한국어를 못하는 외국인에게 어려운 법률 용어를 섞어가며 방망이를 두들기는 모습은 마치 기계이지 사람이라 할 수 없는 경우도 있다. 독일에서 10년을 살았던 경험자로서 하는 말이다.
- 24세의 A는 1년 전 한국에 왔다. 이집트에서 그는 엔지니어 관련 전공을 했다. 그는 이집트에서 반(反)정부운동에 가담해 1년간 감옥에 살다가 다시 형을 받았는데, 150년형이었다. 인천공항에서 19일 정도 억류됐었고 지금 G-1-5비자[난민 신청자]다. 출입국관리사무소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기 일쑤다. 무슬림 국가로 가지 왜 한국으로 왔냐는 질문을 항상 받는다. 이건 너무 큰 상처다. 3개월마다 매번 체류 연장하러 가야 하는데 너무 힘들다.
- 27세의 O는 1년 4개월 전 한국에 왔다. 대학에서 고전 아랍어를 전공하고 혁명 과정에서 수많은 이들의 죽음을 목격하다가 이집트를 떠났다. 그는 여권 없이 한국에 들어왔다. 공항에서 난민 신청을 했다. 페이크[‘위조’] 여권으로 입국했다. 그는 이집트의 정치적 박해로 떠나야 했다. 국제적 보호를 받고 싶다. 여권도 필요하고 또 여행증명서를 발급받고 싶다. 여기에 있을 수 없다면 다른 나라라도 갈 수 있어야 한다. 더는 도주하는 인생으로 살고 싶지 않다. 지금 쉼터에서 있을 수 있는 기한이 끝났고 지낼 곳도 없다. 이태원 모스크 앞에서 노숙을 해야 하는 상황이다. 생활의 문제 없이 살아가고 싶다.
- 22세의 N은 고등학교를 마치고 수단에서 약학대학을 1년 다니다가 반정부운동에 가담해 두 번 끌려가 석 달간 감옥에 있다가 한국에 왔다. 출입국관리사무소에서 너무 인간 이하 대접을 받는다. 체류 기한 연장 받을 때 적어도 1년마다 한 번씩 해야 한다. 3개월에 한 번씩은 정말이지 너무 힘들다.
- 34세인 U는 이들 중 가장 연배가 높다. 법학전공자인 그는 변호사로 활동한 엘리트다. 하지만 군사독재의 칼끝은 가정을 풍비박산냈다. 2년간 투옥생활으로 부인과 이혼했다. 경찰의 집요한 협박으로 처자와 헤어지기로 했단다. 그는 17개 죄목으로 130년형을 받아 더는 이집트에서의 삶이 불가능해 망명길에 올랐다. 이집트에서 사업체를 운영했었는데 이집트 정부로부터 박해를 받아 터키로 갔다. 그런데 터키에서도 이집트 정부가 압력을 넣었는지 또다시 정치적 박해를 받아야 했다. 한국 생활도 너무 힘들다. 출입국관리사무소는 최근 체류기한 연장을 해 주지 않았다. 사유가 무엇인지 알 수 없다.
난민은 우리 이웃이다
17일간 노숙 투쟁을 통해 몸에 쌓인 피로와 배고픔도 털어낼 겸 젊은 이집트 친구들 다섯과 저녁식사를 함께하며 이야기를 나눴다. 충격이었다. 내전으로 인해 가족을 등지고 나온 예멘과 앙골라 친구들과는 또 다른 결의 이집트 정치 난민의 현실은 가히 놀라왔다. 광주 학살이나 세월호 참극에 비견되는 대형 참사를 겪고 혁명 운동의 대열에서 정치적으로 각성된 이집트의 아들들은 눈빛이 달라 보였다.
하지만 이런 비참함을 가슴에 묻고 온 이들에게 한국은 너무도 충격이었다. 난민 인정은커녕 냉대와 홀대 그리고 무시까지 서슴없이 자행한다. 혁명 운동에 가담한 이들의 자존심이 대단하다. 굴복하느니 서서 죽기 원한다는 운동가요를 부단히 불렀던 우리들의 1980년대처럼 이집트의 아들들에겐 불과 6년 전 혁명의 바람이 불어와 영혼에 깊이 박혀 있다. 그런 친구들에게 석 달마다 출입국 공무원들의 강압적이고 비하하는 태도는 눈꼴 사나웠을 것이다.
4월 15일 M의 출입국사무소에서의 해프닝도 바로 그러한 연장선상에서 폭발돼 나온 예견된 사건이었다. 난민 불인정 통보서를 불과 4일 전 손에 쥐고 찾아간 곳은 출입국관리사무소였다. 26세의 나이에 감옥에 3번씩이나 간 별 세 개 정치범이다. 그리고 12년형을 받고 탈출해 온 곳이 민주와 정의 그리고 평화를 존중한다는 한국이었다.
그런 이력이 있는 그가 출입국관리사무소에 요구한 것은 난민 심사 영상이었다. 도저히 이해가 안 갔기 때문이다. 유엔난민협약에 가입돼 있고 난민법이 장착돼 있는 나라에서 자신같은 정치범이 난민으로 인정받지 못한다는 것이 이해가 안 가 심사 증명을 법정에서 하고자 했다. 하지만 출입국 공무원이 영상을 줄 수 없다고 하자 실랑이를 벌이다가 경찰이 수갑을 채워서 출입국관리사무소로 이관한 것이다.
삶의 이야기를 통해 난민됨을 추적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한국에서의 난민 심사는 이미 결론을 내고(난민 안 주기로) 형식적인 심사를 하는 경우가 태반일 것이라는 생각이 짙어간다. 예멘 난민 신청자 500여 명 중 겨우 2명만 난민 인정을 받았다. 앙골라인 루렌도 씨 가족은 난민 심사 대상에도 불회부돼 109일 동안 출입국장에 구금돼 있다. 그런 나라다. 우수한 나라가 아니라 우스운 나라다. 턱없는 우월감이 대단한 나라다.
차디찬 풍찬노숙을 17일간 한 이 친구들에게 미안하다고 여러 번 말하면서 헤어졌다. 앞으로 이들의 친구가 돼 이들을 알아가고 싶다. 한국에서의 난민이라는 주제는 한국사회의 중요한 화두로 더욱 정교하게 해석되고 이해되고 학습돼야 한다. 난민은 혐오의 대상이 아니라 우리의 이웃이다.
※농성 난민들 이력에 ‘난민과 손잡고’ 김어진 대표가 전한 내용을 추가했다.
이집트 난민들의 농성 사진과 영상은 난민과함께공동행동 페이스북 페이지에서 볼 수 있다.(https://www.facebook.com/withrefugeesjointac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