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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 통제 강화에 맞서 난민의 친구가 되자

국경 통제가 강화되고 있다. 트럼프는 생계를 위해 국경선을 넘으려는 온두라스 이주민들에 군대로 맞섰다. 유럽이라고 다를까? 국경 통제 강화의 분기점이 된 지난해 6월 유럽연합 정상회담에서 유럽 지배자들은 이민자를 배척하는 일련의 결정을 내렸다. 난민들이 북아프리카에서 유럽으로 못 오게 막고, 유럽에서 난민을 내쫓아 억류시킬 강제수용소까지 만들기로 했다. 난민 유입을 막겠다며 해상 순찰을 강화한 탓에 지중해에서 익사한 난민만 올해 200명이 넘는다.

인천공항 터미널에 있는 소파에서 잠을 청하고 있는 루렌도·보베테 씨의 어린 자녀들 ⓒ조승진

높아지는 국경은 남의 나라 얘기만이 아니다. 콩고 출신 앙골라 난민 루렌도 가족과 이집트 난민 메리 다니엘 가족은 인천공항에서 한국으로 들어오지도, 다른 나라로 나가지도 못하고 있다. 난민 인정도 거부되고 임금 체불액만 쌓여 한국에서의 삶을 포기한 이집트 난민 가족은 독일 메르켈 정부한테도 입국을 거부당했다.

2017년만 해도 인천공항에서 난민 신청을 한 난민 10명 중 9명이 난민 신청 자체를 거절당했다. 무비자로 입국할 수 있는 무사증 제도에서 일부 나라들이 제외됐다.

심지어 4월 25일 콩고 출신 앙골라 난민 여섯 명에게 국경은 목숨줄을 끊을 칼날의 모습을 했다. 인천지방법원(인천지방법원 제1행정부, 정성완 부장판사)은 난민 심사를 받게 해 달라는 요구도, 앙골라로 돌아가면 살해될 거라는 절규도 외면했다.

한국에서 국경이라는 장벽으로 고통받고 있는 것은 피부색 다른 외국인들만이 아니다. 이산가족과 탈북민도 제국주의 열강의 점령, 전쟁, 그 뒤로 이어진 남북 간 체제 대결이 낳은 국경 통제(봉쇄)의 희생자들이다. 지금 이 순간 탈북민에 대한 차별과 억압도 강화되고 있다. 사실 2011년 제정된 한국의 난민법은 당시 한나라당(자유한국당의 전신) 의원 황우여가 입법 발의한 것으로, 북한 체제가 붕괴돼 북한 주민들이 탈북했을 경우를 대비해 만든 법이다.

한국에서 국경 통제와 난민 차별이 최근 일인 것만도 아니다. 베트남 ‘보트 피플’이 단적이 사례다. 1977년부터 1989년까지 국내에 입국해 부산 재송동 월남난민구호소에 수용됐던 1382명의 베트남 난민 중 단 한 명도 난민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이들은 1개월마다 갱신되는 긴급상륙허가증이 있어야만 구호소에서 나올 수 있었다!

국경 통제로 고통받는 것은 가난한 사람들이고 노동자들이고 부당한 체제에 저항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정작 제국주의 전쟁과 빈곤을 조장한, 전 세계 인구 100명당 한 명이 고향을 떠나도록 만든 자본주의 지배자들은 문지방 닳듯 국경을 넘나들면서 세계 곳곳을 누빈다. 그러면서 경제가 안 좋아지고 불만이 터져 나오려 하면 국경 통제를 강화하려 든다. 도대체 왜 이런 일들이 벌어질까?

난민이 너무 많아서 어쩔 수 없다는 거짓말

우익은 정치 박해를 받지도 않으면서 먹고 살려고(경제적 동기) 한국에 들어오려는 “가짜 난민”이 많다는 주장을 편다. 이들이 세금과 일자리를 뺏는다고 말한다. 수용 능력이 부족하다는 주장도 있다.

정부도 ‘가짜 난민’(경제 난민)을 제대로 솎아내기 위해 난민법 개악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런데 정부는 정치적 박해 때문에 한국에 온 ‘정치 난민’인 이집트 난민을 왜 유독 천대할까?

난민들은 정부의 난민 심사 제도가 사실상 범죄자 취조와 다를 바 없다고 전한다. 난민 신청자들은 본국의 전쟁과 박해로 인한 트라우마 때문에 자신이 겪은 일을 분명하게 설명하지 못할 수 있다. 일부 정보를 빠트릴 수도 있다. 그러나 이를 나중에 바로잡으려 하면 거짓말을 했다고 의심받는다.

난민 지위를 인정받으려면 난민 스스로 “박해를 받을 우려가 있다는 충분한 이유가 있는 공포”를 입증해야만 한다. 그러나 콩고 출신의 욤비 토나 교수는 이를 증명하기 어려운 경우가 부지기수라고 말한다(《내 이름은 욤비》, 이후, 2013). 가짜 여권으로 들어올 수밖에 없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무차별 폭격이 진행되는 와중에 어떻게 여권을 제대로 발급받아 올 수 있었겠는가.

어떤 난민들은 자신이 박해받은 사실을 소상히 말하기 어려운 경우도 있다. 욤비 교수는 자신의 본국 탈출을 도와 준 사람들을 심사 과정에서 얘기하면 그 내용이 콩고 대사관으로 흘러들어가 그들이 살해될까 봐 말할 수 없었다고 한다.

난민 신청자의 출신국 정부와의 외교 관계 때문에 정부가 난민 인정을 하지 않는 경우도 빈번하다. 특히 이집트 난민의 경우 지난해 엘시시 대통령이 온 뒤에 강화된 한국·이집트 군사비밀정보보호협정 때문에 “충분한 근거가 있는 공포”를 증명하는 데서 더 큰 어려움에 직면하고 있다. 난민 인정은 해당 정부를 ‘난민을 발생시키는 정부’라고 인정하는 셈이기 때문이다. 이집트 난민들은 문재인 정부가 이집트에 무기를 수출해 이득을 보기 때문에 이집트 난민들을 유독 더 차별한다고 비판한다.

난민 브로커의 존재가 ‘가짜 난민’을 입증하는 것도 아니다. 난민들은 한국 정부가 무비자 입국 금지 등 난민 유입을 차단하려고 하기 때문에 울며 겨자 먹기로 비용을 지불하며 브로커의 도움을 구하는 것이다.

경제 난민도 적극 환영해야 한다. 우익은 ‘경제 난민’은 ‘가짜 난민’이라고들 주장하지만, 현실에서는 100퍼센트 순수한 ‘경제 난민’도 ‘정치 난민’도 존재하지 않는다.

가난과 곤궁에서 벗어나 더 나은 삶을 살고자 하는 것은 죄가 아니다. 경제 파탄에서 벗어나고자 미국으로 향한 온두라스인들이 비난받아야 할 이유가 없듯이 말이다. ‘경제 난민 불가론’은 중국 당국이 탈북민 탄압을 정당화하는 핵심 논리였다. 우리는 정치적·경제적 동기로 고향을 등져야 했던 탈북자들을 진심으로 환영해야 한다.

경제 난민이든 정치 난민이든 모두 한국의 한 구성원으로서 정당한 권리를 행사할 자격이 있다.

연대 2019 이주노동자 메이데이 집회를 마친 참가자들이 행진하고 있다 ⓒ조승진

난민 때문에 임금이나 일자리가 줄어든다는 것도 순전한 거짓말이다. 이주민 유입의 경제적 효과에 관한 많은 연구 결과들은 이주민 수와 임금 하락 사이에 뚜렷한 상관관계가 없다고 말한다. 되레 많은 경우 이주민 유입은 해당 국가 경제에 기여했다. 지배자들이 추진하는 구조조정, 외주화, 민영화야말로 임금 하락과 일자리 축소의 원흉이다.

일자리 수는 정해져 있는데 사람이 너무 많아서 문제라는 전제 자체를 의심하자. 인구가 감소하는데도 실업률은 갈수록 높아지지 않는가? 일자리는 경제 상황과 경제 운영 원리 및 정책에 달려 있다. 일자리는 자본주의 운영자들의 특정 정책에 따라 더 많이 생겨날 수도 있다.

영암 예멘 노동자들을 보자. 몇 달만에 골병드는 상황이다. 이런 노동 현실에 내몰린 예멘 난민들이 한국 노동자들의 일자리를 빼앗는다는 건 정말이지 궤변이다. 현대삼호중공업과 한진중공업의 하청업체 경영진들은 제주에 있던 예멘 노동자들이 인도적 체류 지위를 받자, 제주도로 황급히 달려가 필요한 인원을 공장으로 데려갔다. 그만큼 내국인들이 꺼리는 작업이었다는 뜻이다.

한국의 경우 ‘난민 복지’ 예산이라고 할 만한 것도 없다. 난민 신청을 한다고 생계비가 자동으로 나오는 게 아니다. 별도로 생계비 지원 신청을 해야 하고, 또 심사를 거쳐야 한다. 2017년 통계를 보면 생계비를 신청한 난민의 약 절반, 난민 신청자 전체로는 단지 3.2퍼센트만이 평균 3개월 정도 생계비를 지원받았다. 그조차 난민 지원 시설을 이용하면 절반으로 깎인다. 난민 절대 다수는 의료보험 혜택도 전혀 받지 못한다. 오죽하면 이집트 난민 메리 다니엘이 난민 지위를 인정받고서도 가족들과 함께 독일로 가려고 결심했을까.

벼룩의 간을 내 먹는다는 한국 속담이 딱 들어 맞는 경우도 있다. 3개월에 한 번씩 체류 연장을 해야 하는 G-1-5 비자의 갱신비가 10만 원이 훌쩍 넘는다.

더욱이 다들 입을 모아 인구 절벽을 걱정하는 지금 아닌가? 이것만으로도 난민을 우리의 지역 사회 곳곳에서 따듯하게 맞을 충분한 이유가 된다.

무엇보다 제국주의적 개입이 전쟁을 낳고, 제국주의 강대국은 그 지역을 지배하기 위해서 그 지역의 권력자들과 결탁한다. 그리고 그 부패하고 독재적인 권력자들이 민주주의와 평등을 위해 싸우는 사람들을 탄압한다. 이 때문에 고향을 등져야 하는 사람들이 생겨나는 것인데 왜 난민들이 비난을 받아야 하는가.

이들의 고통을 껴안고 이들이 왜 난민이 돼야만 했는지를 보면, 우리가 어디에 살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글로벌 자본주의와 제국주의의 속살을 이해할 수 있다. 난민을 통해 배우고 난민과 함께 손잡아야 한다.

국경 통제를 강화하는 진짜 이유

오늘날 지배자들은 “국경 단속”에 왜 그리도 목을 맬까? 국경을 경계로 일부 사람을 배제하겠다는 생각에는 어떤 정치적 의도가 깔려 있는 것일까?

근대 초기인 17~18세기까지만 하더라도 유럽의 지역 왕국과 공국 사이의 경계는 모호했다. 오늘날 상당수의 국경들은 비교적 최근에 확정된 것이다. 현대의 지도 자체가 150년도 안 되는 역사를 가진다(블랙 제러미 2009, 《지도, 권력의 얼굴》 심산출판사). 국경에 대한 강조는 19세기가 되면서 더욱 강해졌다. 가령 극동 지역에서 러시아-일본 간 국경(1885)이나 1861년 중국-러시아, 조선-러시아 국경이 확정된 것이 이런 사례에 해당한다. 국경이 중요해지면서 민족 개념이 강화됐다. 1914년 제1차세계대전 발발 전까지도 국경은 통제되지 않았다. 세계의 주요 자본주의 국가들이 충돌한 제1차세계대전 때 처음으로, 유럽과 북아메리카에서 여행을 할 때 여권, 비자를 요구하는 조처가 도입됐다.

생각해 보자. 봉건 왕조에서 왕족은 자신들이 기층의 피억압자들과는 다른 핏줄이라는 것을 강조했다. 이때는 ‘민족’을 강조할 이유가 없었다. ‘동족’을 노예로 삼고 팔았던 사회에서 어떻게 민족 개념(‘너와 나는 한민족’)이 생겨날 수 있었겠는가.

공통의 시장과 언어, 지리적 경계, 민족적 정체성이라는 생각이 발전하면서 이를 강조하는 신화가 만연했다. 한국에서도 ‘반만년의 단군 신화’가 등장했지만, 유전적으로 분석해 보더라도 오늘날 한반도에 사는 사람들은 중국과 몽골 같은 북방계와 동남아시아 쪽의 남방계가 섞여 있다고 알려져 있다. 민족이라는 개념이 한반도에서 처음 사용된 것은 러일 전쟁 즈음한 1904년이다.

요컨대 민족과 국경, 자본주의는 결코 떼놓고 생각할 수 없는 삼각편대인 셈이다.

그런데 자본주의는 경제 위기를 풍토병처럼 달고 산다. 경제 위기는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주기도 하지만 변화 열망을 키우기도 한다. 그러면 정부는 불안해진다. 부자와 특권층의 책임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커지면 책임을 전가할 희생양이 필요하다. 복지 축소는 국경을 넘어 오는 이민자들의 무리한 바람 때문이라는 식으로 말이다. 국경 단속이 그런 수단 중 하나로 채택된다.

국경 통제는 비뚤어진 착시감, 우월감과 결합될 수 있다. ‘어느 나라 출신이냐에 따라 서로 다른 권리를 가지고 있다’, ‘우리 중 누군가는 이 곳에 속할 수 없다’는 관념을 제도화함으로써 말이다.

그런 관념 중 하나가 바로 인종차별주의다. 지배자들은 자본주의 지배에 위협이 되는 사람들을 분열시키는 수단 중 하나로 인종차별주의를 조장한다.

아프리카인들에 대한 체계적인 인종차별주의(니그로=열등 인종)는 1676년 계약 노동자들이 원주민 노예들과 단결해서 싸운 사례와 관련이 깊다. 1676년에 버지니아에서 가난한 백인들과 아프리카인들은 지주에 맞서 단결했다. 이후로 아메리카에서 ‘정의로운 전쟁’을 위해 노예가 필요하다는 말은 더 이상 먹혀 들지 않았다. 이후 지배자들은 노예가 특별히 열등한 존재라는 생각을 어떻게든 받아들이게 하려 했다.

그런데 오늘날 인종차별은 “신체적 열등함”보다는 문화적 편견이나 종교적 편견과 결합되는 경우가 많다. 무슬림 혐오가 대표적이다.

마르크스도 1870년에 민족주의적 감정이나 배타성의 정치가 자본가 계급에게 유리한 결과를 가져다 준다고 준엄하게 지적한 바 있다. 아일랜드인들을 향한 적개심이 잉글랜드 노동자들 사이에 만연한 것을 두고서 마르크스는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

“이러한 적대 관계야말로 영국 노동계급이 자신의 조직을 가지고 있음에도 무기력한 비밀이고 자본가 계급이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는 비결이다. 자본가 계급은 이 사실을 아주 의식적으로 인식하고 있다.”

요컨대 국경 통제 및 인종차별주의 강화는 제국주의·자본주의에 맞서 함께 단결하지 못하도록 하는 분열 지배 전략이다.

엄격한 국경이라는 개념 자체가 자본주의와 함께 등장한 것이고 국경 단속으로 피해를 보는 것은 결국 전 세계 노동자와 가난한 사람들이다.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문재인 정부는 역대 정부들과 마찬가지로 중동 전쟁에 참여하는 등 난민 양산에 책임이 있다. 그래 놓고 난민 수용을 안 하려고 나쁜 난민법조차 더 개악하려 한다.

국경을 넘은 연대로 국경 통제 강화라는 칼날을 녹이자. 국경 통제는 길어 봤자 100년 정도 된, 최근의 일이고 연대와 투쟁의 덕목과 역사는 인류의 역사만큼이나 길다.

난민을 포함한 가난한 이주민에 연민의 정을 느끼는 것도 그 자체로 의미 있다. 동시에 난민에 대한 연대는 우리 자신의 조직을 강화하고 지역 공동체를 강화하는 한 방편이기도 하다. 난민과 친구가 되고 그들에게 다가가자.

이 글은 노동자연대 경기지회가 주최한 공개 토론회 ‘강화되는 국경 통제와 난민 차별: 왜 난민에게 공항 문은 열리지 않을까?’에서 필자가 한 발표를 요약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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