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한국 경제의 위기와 구조조정, 대안(3):
산업정책 참여가 구조조정의 대안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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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조조정으로 위기를 벗어날 수 있을까?
- 일자리 보호를 위한 국유화
- 산업정책 참여가 구조조정의 대안인가?
- 경제 위기 시기 대안을 둘러싼 논쟁
일자리 보호를 위한 국유화 요구와 그것을 위한 투쟁의 실현 가능성이나 효과 등을 문제삼는 등 여러 방향에서 비판이 제기된다. 대신에 가장 ‘현실적인’ 대안으로 제시되는 방안은 산업 정책 개입이다. 경제 위기와 구조조정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노동조합이 국가의 산업 정책에 관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노정교섭과 사회적 대화 등의 제도적 틀에 참여해야 하고, 노동조합이 정책 역량을 높여야 한다고 한다.
이런 주장은 경제 위기 시기에는 일자리 지키려고 투쟁해 봤자 소용 없다는 생각을 그 밑바탕에 깔고 있다. 더 나아가, 개별 기업의 고용 안정 투쟁은 “내 일자리 지키기 식의 기득권 추구 운동”이어서 노동계급 전체에 오히려 해롭다고 한다. 노동조합이 구조조정에 반대만 해서는 안 되고 사회 전체를 위한 대안을 내놓아야 한다고도 한다.
조직 노동자들을 이기적인 기득권 수호 세력으로 치부하는 친문재인 개혁주의자들만이 이런 주장을 하는 건 아니다. 노동조합 지도자들과 그 싱크탱크들도 이 같은 대응 방안을 활발하게 제안하고 있다.
노광표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소장은 이렇게 주장한다. “민주노총[이] 제조업을 살리고 일자리의 양과 질을 높이고 전체 노동자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대안을 정책으로 구현해야 한다.” “반대와 저항에서 형성전략으로 나가야 한다.”
실제로 김명환 민주노총 집행부는 이런 방향을 추구한다. 김명환 민주노총 위원장은 2019년 신년사에서 “노동친화형 미래 산업을 창출하도록 산업정책[에] 개입”하고 “경제구조 개혁 청사진[을] 제시”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대정부·대자본 교섭과 협의틀”을 강조했다. 투쟁을 언급하긴 했지만 강조점은 “교섭과 협의”에 있었다. “문재인 정부를 비판만 하는 것은 평론가 몫”이고 민주노총은 “책임 있는 주체”로서 “능동적인 개입이 필요하다.”
김호규 금속노조 위원장도 제조업 위기와 구조조정에 대응하기 위해 “노동 주도 산업정책” 마련을 강조했다. 애초에 금속노조가 경사노위 산하 자동차·조선·철강 업종별위원회 설치를 원한 것도, 또한 그것이 좌절되자 ‘자동차산업 노사정 포럼’을 출범한 것도 이런 방향과 관련 있다. 자동차산업의 경쟁력 강화, 미래 환경 변화에 따른 고용 문제 등을 노·사·정이 함께 논의하자는 것이다.
올해 초 금속노조가 발간한 《미래형 자동차 발전동향과 노조의 대응》 보고서도 동일한 논점을 강조했다. “산별노조[는] 정부나 기업에 기득권 보호[를] 요구하는 것에 그칠 게 아니라 산업정책과 실행계획을 가져야 한다.” 실제로 이 보고서는 기업 간 협력을 통한 차세대 자동차 개발, 노사간 협력을 통한 생산방식 혁신 등 한국 자동차산업 발전 전략을 제시하고 있다.
반대 투쟁은 비생산적이라는 해묵은 오해
‘노동운동이 대안 없이 반대만 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지난 몇 년간 이런 주장을 물리도록 듣고 있다. 사실 이것은 국제 노동운동에서 19세기 말로 거슬러 올라가는 ‘유서’ 깊은 주장으로, 사용자와의 협력 강화나 국가기구 참여가 추진될 때 거듭 등장했다.
일찍이 1899년, 프랑스 사회당 지도자 알렉상드르 밀랑이 급진당 정부에 입각했을 때 개혁주의자들은 “반대” 정책이 “비생산적”이라며 정부 ‘참여’를 정당화했다. 영국 노동조합들이 제2차세계대전 동안 정부 위원회들에 대거 들어갔을 때도 월터 시트린 영국 노총 사무총장은 “선전하던 시대에서 책임지는 시대로 전진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정부와 사용자들의 정책을 반대하는 것이 비생산적이거나 무책임한 것은 결코 아니다. 2016년 공공부문 노동자들의 성과연봉제 반대 투쟁과 그 결과를 생각해 보라. 노동자들의 조건을 악화시키는 정책을 반대하는 것은 직접적인 효과(조건 지키기)가 있을 뿐 아니라, 노동자들에게 자신감을 준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크다. 그동안 진정한 문제는 (반대 투쟁이 비생산적인 게 아니라) 노동조합 지도자들이 정부와 사용자들의 정책을 저지할 만큼 투쟁을 단호하게 이끌지 않아, 대개 개악 저지라는 결실을 거두지 못했다는 것이다.
게다가 노동운동 안에서 대안이 제안되지 않았던 것도 아니다. 파산 위험 기업의 국유화는 한 가지 사례다. 임금 손실 없는 노동시간 단축도 일자리 감소의 대안으로 1990년대 말부터 제안됐다. 이것은 장시간 노동과 강요된 실업이 공존하는 파괴적인 현실에 대한 합리적인 대안이다. 프랑스에서는 1999년 임금 삭감 없는 주35시간 노동이 법제화돼, 일자리 28만여 개 창출 효과를 낸 것으로 알려졌다.
주 35시간 노동
그동안 진정한 문제는 (일자리 감소의 대안이 없는 게 아니라) 노동조합 지도자들이 노동시간 단축과 동시에 임금 삭감이나 노동강도 강화도 수용해, 일자리 창출 효과가 사라졌다는 것이다. 노동시간 단축의 이름으로 사실은 조업 단축을 수용한 것도 그런 효과를 냈다. 조업 단축은 법정 노동시간 이하로 일하고 임금도 줄어드는 것으로, 위기의 대가를 휴직이나 일시적 폐쇄(사업 종료) 등의 방식으로 노동자들이 치르게 하는 것이다.
요컨대 그동안 노동자 투쟁이 ‘대안 없는’ 비생산적 운동이었다는 주장은 참말이 아니다. 이것은 좋게 말해 지난 시기 문제점을 잘못 짚은 것이거나, 아니면 의도적 왜곡이다. 그 효과는 노동운동 내 전투적 경향을 싸잡아 무능력한 집단으로 보이게 만듦과 동시에, 반자본주의적 대안을 (‘비현실적’이라며) 열외로 만드는 것이다.
물론 노동운동이 전 국가적 차원의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는 주장에는 합리적 핵심이 포함돼 있다. 지금 같은 경제 불황기에는 사용자들이 양보할 의사와 능력이 별로 없어서, 더 광범하고 단호하게 투쟁해야 한다. 그러려면 개별 사업장의 협소한 경제적 쟁의를 확산시켜, 전 국가적인 차원의 대안을 내놓고 투쟁하도록 해야 한다.
만약 개별 기업을 상대로 한 전투적인 생존권 투쟁으로 충분하다고 본다면, 투쟁을 이끄는 데 정치적 무능을 드러내고 훨씬 폭넓은 노동자들을 설득해 광범한 연대를 구축하기 어려울 것이다. 왜냐하면 노동자들은 위기가 빈발하는 현 상황을 극복할 대안이 없다고 생각한다면 저항할 자신이 생기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다가는 ‘이러다 회사 망하면 일자리고 뭐고 다 날아간다’는 협박에 굴복해 원치 않는 타협을 수용하게 된다. 전에 전투적이었던 활동가들도 이런 분위기에 굴복하기 쉽다. 전투적 노동조합 운동으로 충분한 시대는 저문 것이다.
노동운동이 대안을 내놓아야 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경제 위기에 직면해 벌어지는 투쟁들은 대안의 필요성을 가리키고 있다. 진정한 쟁점은 노동운동이 전 국가적인 차원의 대안을 제시해야 하느냐 아니냐가 아니라, 그 내용이 무엇이고 그것을 성취할 수단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노동자와 사용자의 이익을 조화시킬 수 있다는 공상
경제 위기와 구조조정의 대안으로 산업정책 개입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노동조합이 국민경제를 더 효율적이고 경쟁력 있게 만드는 데 협력해야 한다고 본다. 양대노총 제조공투본 연구용역 보고서인 《제조산업 발전 연구》는 노동조합이 “산업정책 거버넌스”(정부·사용자와의 협의구조)에 참여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그 정책 목표는 노·사·정이 함께 “전략적 우선순위를 설정”하고 “생산성 향상 방향을 모색하는 것”이다.
노동조합이 산업 발전을 남의 일처럼 방관하기보다 적극 뛰어들어 노동 친화적인 구조 개편과 발전 전략을 제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노동자들의 이익과 사용자들의 이익이 조화될 수 있다는 생각이 전제돼 있다. 경제 또는 산업의 위기가 특정 경제모델(수출 위주, 재벌 체제)에서 비롯했다고 보면서, 이를 경제주체들이 조화롭게 공존하도록 개혁하는 것에 산업의 미래가 달려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재벌 개혁을 통한 산업 생태계 개선과 소득주도성장이 노동조합 산업정책의 내용으로 빠지지 않고 제안되는 것은 이래서다.
그러나 소득주도성장으로 성장과 분배를 모두 잡겠다던 문재인 정부의 경험은 오히려 노동자와 사용자의 이익이 조화될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해 줬다. 알량한 최저임금 인상으로도 사용자들은 비명을 질렀고, 경제 상황이 악화하자 문재인 정부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한걸음도 내딛지 못했던 것이다. 이는 최저임금을 한때 대선 후보 모두의 공약이던 1만 원 수준으로만 올리려 해도 사용자들을 강제할 힘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 준다. 문재인 정부 하에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지만, 실제로 임금 몫을 늘려 기업주들의 이윤을 위협한다면 더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노동조합과 그 싱크탱크들은 또한 노조의 산업정책으로 지속 가능성 확보, 제조업의 귀환(해외투자 기업 유턴) 등을 제안하며, 영국·미국·독일 노조의 사례를 주목한다. 그러나 한국 산업의 국제 경쟁력을 높이려는 목적으로 추진되는 정책들이 과연 노동자들에게도 이로울 수 있을까?
가령 해외 진출 한국 기업이 국내로 돌아오도록 지원하는 제조업 귀환 정책은 일자리 위기의 원인으로 해외 생산을 꼽는다는 문제점이 있다. 진단부터 잘못된 것이다. 해외 진출 기업들이 해외 공장을 신설한다고 해서 국내 생산을 줄이는 경우는 거의 없다. 해외 진출 목적이 대개 생산비 절감이 아니라 현지화(현지 시장 겨냥)이기 때문이다. 지금처럼 세계화된 경제에서 선진 시장에 접근하지 못하면 도태되기 쉽다.
제조업 귀환 정책
흔한 오해와 달리, 싼 노동력을 찾아 해외로 나가는 것이 아닌 것이다. 전자산업도 예외가 아니다. 전자산업 대기업이 저임금 활용을 목적으로 해외 투자를 하는 경우는 5퍼센트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난다. 제조업 고용 인원 감소의 주된 원인은 경제 위기와 구조조정, 첨단기술 도입(에 따른 고용 없는 성장)이지, 기업들의 해외 진출이 아니다.
그래서 제조업 귀환 정책은 일자리 창출의 현실적 방안이 못 된다. 현지화가 목적인 기업들은 (세금 등의 혜택 좀 보겠다고) ‘큰 물’에서 노는 이점을 포기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저임금 활용을 목적으로 해외 진출한 기업들은 좀 다를 수 있지만, 그런 기업들의 유턴이 좋은 일자리 창출로 이어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주류 언론들은 유럽 기업들이 동남아시아나 동유럽으로 진출했다가 유턴 하는 사례를 조명하곤 하는데, 첨단기술 도입을 동반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기업들의 유턴으로 일자리가 많이 생기지 않는다는 뜻이다.
게다가 유턴 또는 해외진출 포기의 조건으로 정부와 사용자들이 노동조건 하락을 압박하기 쉽다. 독일 자동차 회사인 폭스바겐은 투란 공장을 동유럽에 신설하는 대신 국내 생산을 하는 조건으로 기존 폭스바겐 노동자보다 임금이 20퍼센트 이상 낮은 자회사(아우토5000) 설립을 관철했다. 문재인 정부의 ‘광주형 일자리’ 정책은 이것을 벤치마킹한 것이다.
이처럼 제조업 귀환 정책은 일자리 대안이 못 될 뿐 아니라, 노동계급의 분열에 문을 열어 준다는 더 심각한 문제도 있다. 해외 공장 노동자들을 희생시키는 방식(해외 공장 폐쇄 같은)을 고용 보장 방안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나라 노동자들의 희생을 대가로 일자리를 보호하는 것은 현재 위기에 대한 답이 될 수 없다. 한쪽 노동자들의 고통을 다른 쪽 노동자들에게 전가하는 것일 뿐이다. 게다가 한국 노동자들이 이런 경우를 당할 때 항변할 논리도 없거나 군색하다.
현재 여러 나라 노동조합들이 산업정책으로 채택하고 있는 보호주의에도 마찬가지 문제가 있다. 예를 들어 2016년 영국 노동조합들(유나이트와 GMB)은 철강산업 위기에 대해 중국의 “덤핑”을 비난하면서 외국 철강에 대한 수입규제(관세)를 요구했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 엄청나게 많은 중국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잃게 될 것이다. 이것은 자국 정부의 ‘이웃나라 거지 만들기’(근린궁핍화) 정책에 편승해 중국 노동자들에게 고통을 떠넘기는 것일 뿐이다.
우려스럽게도 양대노총 제조공투본 연구용역 보고서 《제조산업 발전 연구》는 다음과 같은 정책에 주목한다. “저가 철강재 대량 수입”을 한국 철강산업의 문제점으로 지적하며 다른 나라 노동조합들의 ‘반덤핑’ 정책을 우호적으로 소개한 것이다. 그러나 이런 정책이 저임금을 문제 삼는 것처럼 포장할지라도 실제로는 자국 산업(자본가)을 편들고 국제 노동계급을 나라별로 반목시킨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아래 최근의 일화는 이를 잘 보여 준다.
중국 철강에 수입규제(관세 부과)를 요구하던 영국 노동조합들은 트럼프가 영국 철강에 관세를 부과하려 하자 이번에는 정반대 입장을 취했다. 유나이트 노조는 영국 철강에 대한 트럼프의 관세 정책이 현명하지 않다며 미국 노동조합들에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미국노총 AFL-CIO 지도부는 “[미국 철강산업을 보호하는] 정부의 노력에 박수를 보낸다”며 트럼프를 지지하고 나섰다.
‘참여’의 효과
우리 나라 노동조합들과 싱크탱크들이 주목하는 또 다른 산업정책은 오바마 식 제조업 살리기와 일자리 정책, 독일의 노동4.0, 영국 노동조합들의 산업 부문위원회 참여 등이 있다.
오바마 정부는 2008년 경제 위기 이후 미국 자동차산업을 ‘성공적’으로 구제하고 구조조정했다. 그러나 이것이 노동자들에게도 ‘성공’이었던 것은 아니다. 미국 자동차노조(UAW)는 자동차산업을 살리려고 오바마의 월스트리트식 GM 해법을 수용하고 노동조건을 대폭 양보했다. 일부 공장폐쇄, 신규 노동자에게 낮은 임금 적용(이중임금제), 연금 후퇴 등이 그것이다.
이런 구조조정의 결과 GM은 빠르게 수익성을 회복했고 노동자들의 처지는 반대로 악화됐다. 2013년 7월 미국 자동차산업의 상징적인 도시 디트로이트 시가 파산했는데, 이것은 자동차산업 구조조정의 결과였다. 디트로이트 자동차 관련 일자리는 1990년 30만 개에서 2013년 15만 개로 줄어들었다. 미국 자동차노조는 일자리 감소에 맞서 싸울 의지도 능력도 보여 주지 못했다.
독일의 노동4.0은 독일 산업4.0과 발맞추는 정책이다. 산업4.0은 제조업에 디지털 첨단기술을 결합해 제조업 경쟁력을 높이고자 추진된 것으로, 미국 ‘스마트제조’ 프로젝트, 중국 제조2025 전략, 한국 4차산업혁명 등에 비견되는 것이다. 독일 노총은 산업4.0으로의 성공적 재편을 위해 노동조합의 협조가 필수라며, 정부의 산업4.0 연구그룹에 참여했다. 산업4.0은 노동의 미래에도 중요하므로 ‘참여’해서 영향을 미쳐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노동조합의 의견도 반영해 나온 〈노동4.0〉 백서(2016년)는 다양한 고용 형태(불안정 노동)의 인정, 능력과 성과에 따른 임금체계, 노동시간 유연화 확대 등을 담았다. 독일 제조업의 국제 경쟁력을 높이려면 노동자들도 첨단기술 도입에 따른 환경 변화에 맞춰야 한다는 전제에서 비롯한 결과다.
우리나라 노동조합들은 독일 노총과 금속노조의 이 같은 ‘참여’ 정책을 벤치마킹하려 애쓴다. 한국 정부와 기업들의 ‘노동 배제’는 탐욕의 표현이라는 점에서 비판받아야 한다. 그러나 노동조합 대표가 기업 이사회나 정부 위원회에 참여해서 자본주의적 경영이나 정책에 관여한 결과, 경제 위기와 구조조정으로부터 노동자들을 보호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독일의 노동비용은 다른 유로존 나라보다 10퍼센트나 낮다. 지난 20년 동안 파트타임과 비정규직이 늘고 임금이 줄어든 결과다. 현재 독일 노동인구의 4분의 1이 저임금층이다. 노동조합 조직 규모도 투쟁이 활발했던 때의 절반으로 줄었다.
독일의 ‘공동결정제도’는 노동조합 경영 참여의 모범으로 알려져 있다. 피고용인이 2000명 이상인 민간기업은 사용자 측과 노동자 측이 각각 절반씩 참여해 감독이사회를 구성하게 돼 있다. 그러나 노사 의견이 동수로 대립할 경우 사측이 임명하는 의장이 2표를 행사하기 때문에 노동자 측은 결코 이길 수 없는 구조다.
단지 수적 열세만이 문제는 아니다. 경영에 협조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노동 측 대표들은 번번이 사측 이익을 방어하곤 했다. 폭스바겐을 비롯한 독일 자동차 기업들의 디젤차 배출가스 수치 조작 공모 사건이 이를 잘 드러냈다. 그런 기업들의 감독이사회 절반을 차지했던 노동 측 대표자들은 이를 바로잡는 구실을 전혀 하지 않았다. 이런 참여가 “지속가능한 제조업”을 위한 정책이라고 정당화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독일 ‘공동결정제도’가 만들어진 과정을 보면, 그 목적이 대공장의 노사갈등을 규제하고 노사관계를 안정화하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독일 사회주의자인 폴카트 모슬러는 공동결정제도의 기원을 이렇게 설명한다. “제1차세계대전 동안과 제2차세계대전 이후 노동계급의 힘이 자본보다 상대적으로 강력했던 덕분에 특정한 형태의 사회적 동반자 관계가 생겨났다. 그것은 각각 혁명과 패전에서 자본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자세한 내용은 〈노동자 연대〉 218호에 실린 ‘독일식 노사관계 모델: 누구를 위한 성공의 역사인가?’를 보시오.)
그래서 “사회적 동반자 관계가 제도화된 것은 노동계급의 이익을 지키는 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오히려 위기의 순간, 노동계급이 투쟁에 나설 때 발목을 잡는 족쇄가 됐다.”
족쇄
이것이 바로 문재인 정부가 사회적 대화를 추진하는 이유다. 정부는 경제 위기의 대가를 노동자들에게 치르게 하는 구조조정을 원활히 하려면, 노동현장의 갈등을 규제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안다. 우리 나라 노동자 투쟁은 세계적 수준으로 보면 비교적 활발한 편이다. 현장 노동자들을 길들이고 생산성 향상에 협조하게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사회적 대화나 초기업단위 교섭을 중시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통해 노동현장의 갈등과 투쟁을 억제할 수 있다는 데 주목한다. “사업장 바깥에 존재하는 교섭기구”가 “노사 갈등[을] 외부화”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노동현장에서는 경영참가를 통해 노사협력 관련 쟁점에 집중하고 생산성 향상을 도모할 수 있다고 한다. 경영참가는 원활한 구조조정을 위한 수단이기도 한 것이다. 국제노동 기구(ILO)의 ‘노동자 경영 참여 개념의 비교 조망’ 보고서는 이렇게 설명한다.
“구조조정 과정에서 노동자들에게 함께 부담을 나눠 지도록 설득하려면 무엇보다 사회적 공론화를 거쳐 정당성을 확보할 필요가 있다. 노동자가 경영에 참여할 수 있게 제도적으로 보장하면 이 절차를 쉽게 통과할 수 있다.(‘노동자 경영참여가 구조조정 해법이다’, 〈주간경향〉 1180호)
노동조합 지도자들은 정부의 산업정책에 개입하는 것이 소모적인 투쟁보다 합리적인 방식이라고 여길 수 있다. 그러면서 점점 더 노동조합의 투쟁력보다 ‘전문성’이나 ‘정책’ 역량 수립을 중시하며 여기에 조직력(인원과 재정 등)을 쏟으려 할 수 있다. 그러나 위에서 살펴봤듯이, 노·사·정이 ‘서로 받아들일 만한’ 조화로운 해법을 제시한다는 관점에서 노동조합이 내놓는 정책들로는 개혁은커녕 노동자들의 현재 조건조차 지키기 어렵다.
게다가 대중 투쟁을 통해 정부에 일격을 가하기보다 협상장의 대화나 교섭 기술을 더 중시한다면, 스스로 불리한 위치를 자처하는 셈이다. 투쟁의 열기가 아직 남아 있을 때는 최저임금 1만 원을 주장하던 사람들이 중심이 대화기구로 이동하자 딴소리 하는 것을 보라. 노동조합이 노동자들의 조건을 지키려면 정부와 사용자들을 강제하지 않으면 안 되고, 그러려면 투쟁해야 한다.
급진적 요구 제출은 소용 없다는 말인가?
위에서 산업정책 참여론을 비판했다고 해서 국가에 어떤 정책을 요구해서는 안 된다는 뜻은 아니다. 국가로부터 독립성을 유지해야 하지만, 국가에 요구하는 것을 피해선 안 된다.(다음 호에서 살펴보겠지만 그것은 후퇴를 정당화하는 또 다른 방법이 될 수 있다.) 노동운동은 경제 위기 시의 대책으로 ‘노·사·정이 서로 받아들일 만한 해법’이 아닌 더 급진적인 요구를 제출할 수 있다.
노동자를 대량 해고하거나 공장을 폐쇄하려는 기업을 국유화하라는 요구가 그런 사례다. 자본가들이 사회를 위해 생산하지 않으려 한다면 그들의 생산 통제권을 박탈해야 한다. 최근 대우조선과 중소 조선소들과 지난해 GM 군산공장이 이런 경우에 해당한다. 1998년 경제 공황으로 정리해고가 급증했을 때도 당시의 좌파들은 대부분 이런 정책을 주장했다. 2008년 경제 위기 이후 미국의 노동운동도 월스트리트식 GM 해법을 거부하고, 경제 위기를 이용해 자동차 산업의 전면 재편을 요구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일부 환경주의자들은 자동차 공장 폐쇄를 반대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기업주들이 자동차 공장 문을 닫고 노동자들을 내쫓는 게 기후변화를 걱정해서는 아니다. 노동자들이 자기 책임도 아닌 위기의 대가를 치르게 해서는 안 된다. 숙련과 첨단기술을 사장시키지 말고 대안 교통수단이나 제3세계를 위한 물자 등 사회적으로 유용한 생산으로 전환하라고 요구할 수 있다.
2008년 경제 위기로 그리스가 IMF 구제금융을 받으며 혹독한 긴축을 추진했을 때 일부 그리스 좌파들이 일련의 요구를 내놓은 것은 또 다른 사례다. 당시 경제 파탄으로 노동자들은 임금과 연금 수십 퍼센트 삭감, 대량 해고와 민영화, 공공서비스 중단 등으로 고통받았는데, 빚을 갚으면서 이런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스 정부는 2010년 구제금융을 받은 뒤 5년 동안 1년치 총생산에 해당하는 돈을 오직 빚을 갚는 데 사용했다. 그래서 일부 좌파들은 ‘민중의 디폴트(채무 불이행)’를 요구했다. 그와 동시에, 외채 상환을 거부하면 유럽연합이 매우 엄격한 제재를 강요할 것이므로, 디폴트와 함께 유로존 탈퇴, 은행 국유화, 가격과 자본 통제 등의 대책도 내놓았다.
그런데 이 같은 대안은 자본의 논리와 충돌할 수밖에 없다. 기업주들의 이윤과 재산을 잠식하고 그들의 경제 지배를 위협하기 때문이다. 지배계급은 가만히 있지 않고 반발할 것이다. 따라서 이런 요구를 관철하려면 자본의 논리를 무시하고 광범한 대중 투쟁을 해야 한다. 그것만이 계속되는 지배계급의 반대에 부딪혀 후퇴하거나 압살되지 않고 궁극적 승리를 향해 나아갈 수 있는 동력을 창출하는 길이기도 하다.
바로 이 점에서, 과연 이런 요구들이 어떤 성격의 것이고 누가 어떻게 이런 조처들을 실행할 것이냐를 명확히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이것은 자본주의를 더 조절된 유형으로 재건하기 위한 정책인가, 아니면 자본주의를 넘어서려는 움직임인가? 거듭되는 경제 위기는 이런 조처들로 해결될 수 있는가, 아니면 더 근본적인 대안을 추구해야 하는가? 그 주체는 급진좌파 정당이 공직을 차지한 자본주의 국가기구인가, 아니면 아래로부터의 노동자 투쟁인가?
더 급진적인 대안을 고민하는 한국 좌파들의 일부는 이런 문제에서 일부 혼란을 보이는 듯하다. 다음 호에서는 이런 문제를 다루면서, 급진적 요구를 어떻게 자리매김해야 하는지 살펴보도록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