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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퇴진 운동 2023~24년 팔레스타인 투쟁과 중동 트럼프 2기 이주민·난민 우크라이나 전쟁

기후 위기를 막을 유일한 전략

이 글은 8월 31일 노동자 연대가 주최한 온라인 토론회(당시 영상 링크)에서 필자가 발표한 내용을 일부 수정한 것이다.

특별보고서는 2030년 전까지 결정적 전환을 시작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 문제에서도 자본가들의 방식은 철저하게 실패하고 있다.

자본가들이 추진하는 방식의 한계를 잘 보여 주는 것은 다름 아닌 파리협약이다. 온실가스 배출을 막기 위해 체결된 이전의 국제 협약은 교토협약이다. 교토협약에는 그나마 공통의 감축 목표(1990년 대비 5퍼센트 감축)라도 있었다.(강제력은 없었고 그래서 이행되지도 않았다) 그러나 파리 협약은 각국이 자발적으로 온실가스 감축 목표를 정하도록 하고 있다.

그런 만큼 특별보고서가 “각국 정부가 제출한 감축 목표로는 기후 위기를 막을 수 없다”고 단언한 것은 당연한 지적이었다. 자본가들의 자발성에 기대서는 상황을 바꿀 수 없고 그동안 시간만 까먹은 것이다.

한국의 문재인 정부도 별로 다르지 않다. 문재인 정부는 온실가스 감축에 가장 효과가 큰 조치인 석탄 화력 발전소 폐쇄조차 제대로 하고 있지 않고 있다. 오히려 외국에 석탄 발전소를 수출해서 국내외 환경단체들의 지탄을 받고 있다.

개혁주의자들은 이런 정부를 옳게 비판하며 정부가 더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주장한다. 정의당만 해도 문재인 정부의 그린뉴딜 정책을 날카롭게 비판했다. 많은 이들은 아래로부터 운동이 자본가들에게 압력을 가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옳게 본다.

그러나 개혁주의자들, 특히 개혁주의 지도자들은 자국의 국제적 위상을 중요하게 여긴다. 그래서 개혁주의자들은 온실가스 배출을 줄이는 방안과 국가경쟁력을 강화시킬 방안을 결합시키려 한다.

그런데 지금 온실가스 배출에 필요한 국제 협력이 안 되는 핵심적 이유 중 하나는 자본주의 경쟁 때문이다. 미국 트럼프와 중국 시진핑이 자국 국민들이 각각 대규모 화재와 수해로 피해를 입는데도 온실가스 감축에 소극적인 이유는 그들이 벌이는 무역 전쟁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온실가스 감축이 자국의 경쟁력을 갉아먹을 것을 우려하는 것이다.

실제로 특별보고서는 이렇게 강조한다. “대다수 모델 연구는 국제적 협력 부족, 불평등과 빈곤이 지속되는 채로 기후변화를 1.5도 이내로 억제하는 시나리오는 찾을 수 없었다.” 지금처럼 각국이 협력보다는 경쟁을 우선하고, 불평등과 빈곤을 양산해서는 기후 위기 극복에 필요한 고도의 협력을 이끌어낼 수 없다는 것이다.

“기후 변화가 아니라 체제 변화”라는 운동의 구호가 옳다. 즉, 우리는 자본가들과 그들 편인 정부를 꺾고 자본주의를 타도해서 에너지, 운수, 공장, 빌딩을 빠르게 바꿔야 한다. 앞서 봤듯이 자본가들을 중심에 놓은 방식으로는 가능하지 않다. 오직 각국 노동자들이 권력을 잡고 국제적 협력에 나설 때에만 변화를 이룰 수 있다.

기후 위기의 해결책을 찾으려면 전적으로 기후변화에 초점을 맞추는 운동이 아니더라도 체제의 각종 병폐에 맞서 이미 벌어지고 있는 여러 투쟁, 특히 계급투쟁과 접점을 찾으려고 해야 한다.

지난해 180개국에서 기후위기 비상행동이 벌어졌듯이 올해 ‘흑인 목숨도 소중하다’ 운동이 미국뿐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크게 벌어졌다. 이 운동이 크게 벌어진 미국, 독일, 오스트레일리아 등지의 활동가들은 지난해 기후위기 비상행동에 나왔던 사람들 중 많은 수가 이번에 인종차별 반대 시위에도 나왔다고 전했다. 이것은 우연이 아니다. 인종차별을 조장하는 정부와 우파들은 기후변화에도 무책임하다. 미국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를 보라.

더 근본적인 공통점이 있다. 지금 지배자들이 온실가스를 줄이는 대책에 소극적인 이유는 자본주의 체제를 유지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바로 그 자본주의 체제가 차별과 착취, 독재와 빈곤 등을 양산하고 있다.

우리가 공통의 적과 싸우고 있다는 사실은 중요하다. 독재자에 맞서는 벨라루스 노동자들, 질산암모늄 폭발에 항의하는 레바논인들, 경제 위기 해고에 맞서는 세계 곳곳의 노동자들에게 연대하며 기후 위기도 함께 해결하자고 제안할 때, 그들은 귀를 기울일 객관적인 이해관계가 있다. 앞서 언급한 유류세 인상에 반대하는 한국 화물연대 투쟁이나 프랑스 노란조끼운동, 이란 반정부 시위도 마찬가지다.

물론 지배자들은 여러 운동들이 서로 연대하는 것을 좌절시키고 이간질도 서슴지 않을 것이다. 역사를 돌아 보면 혁명적 정치 조직이 강력할 때에만 지배자들의 분열 책동을 넘어 더 큰 단결로 나아갈 수 있었다. 기후 위기를 막기 위한 국제 협력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도 한 나라 안에서 노동계급의 투쟁과 연대를 전진시켜야 한다.

이렇듯 노동계급이 이미 벌이고 있는 투쟁에서 작은 승리를 누적할 때 기후 위기 대응에 필요한 거대한 전투에서도 승리할 수 있다. 자본가들이 기후 위기에 필요한 조처에 맞서 거세게 저항할 것이 예상되는 만큼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확신에 찬 노동계급만이 그런 저항을 뚫어낼 수 있다.

역사에서 혁명기마다 노동자들은 생산 수단을 장악하고 자신들의 필요에 맞게 통제했다. 1917년 러시아, 1956년 헝가리 혁명, 1970년대 칠레와 이란에서 그랬다. 기후 위기에 대처하려면 생산을 수십 년, 어쩌면 수백 년 동안 아주 세심하게 통제해야 한다. 또한 이미 시작된 기후 위기에 적응력을 키우기 위해서도 생산을 통제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지금 경제 위기 상황에서 벌어지는 노동자 투쟁과, 차별에 맞서는 운동 등에 연대하면서 기후 위기의 해결책에는 자본가들의 방식이 아닌 노동계급의 방식이 있고, 그것만이 기후 위기를 막을 유일한 방법이라고 설명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기후 위기를 막으려면 채식을 해야 할까?

기후 위기를 막으려면 육식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얘기를 심심찮게 듣는다. 일부는 육식으로 인한 온실가스 배출이 많다는 IPCC 등의 보고서를 인용한다.

소가 내뿜는 메탄가스가 주요 온실가스라는 사실이 흔히 제시된다. 그러나 자세히 따져 보면 그에 못지 않게 소가 먹을 곡물을 재배하는 데서 막대한 온실가스가 배출된다. 왜냐하면 자본주의에서는 농업도 여타의 산업 못지 않게 화석연료에 중독돼 있고 환경을 파괴하기 때문이다. 결국 육식과 채식은 자본주의 농업이라는 같은 문제를 공유하고 있다. 채식주의는 이런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한다.

더욱이 채식주의는 노동계급의 집단적 해결책이 되기 어렵다. 많은 노동자들은 다음날의 고된 노동에 필요한 체력을 유지하기 위해 육식을 선택한다. 채식은 더 비싸기도 하다. 이런 물질적 조건에는 눈감은 채 노동자와 평범한 사람들에게 불필요한 죄책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채식주의는 기후 위기를 막을 효과적인 대안이 아니다.

(더 자세한 내용은 ‘운동 속 논쟁: 기후 위기를 막으려면 채식을 해야 할까?’를 보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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