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 국가는 민주적으로 개혁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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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1월 4일 같은 주제로 진행한 노동자연대 온라인 토론회(영상 보기)의 발표문이다
4년 전, 박근혜가 헌법재판소에서 탄핵 파면되고 구속됐다. 이를 위해 매주 적어도 수십만 명이 참가하는 촛불 집회가 반 년 가까이 열렸다. 이 결과가 진보 개혁 염원 대중에게는 적폐 청산 등 현 대한민국 국가가 민주적으로 개혁될 수 있다는 징표로 보였을 것이다.
이후 군부와 박근혜 정부의 촛불 무력 진압 논의나 사법 농단을 통한 불의한 재판 거래의 추한 진실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선출되지 않은 국가 관리자들의 반동적 성격이 새삼 부각된 것이다. 친민주당 지식인들은 이것을 자신들의 “검찰 개혁” 어젠다로 연결시켰다.
한편, 민주노총, 정의당, 진보당 등 노동계 대표 조직들의 지도부들은 문재인 정부를 진정성 있는 개혁 정부로 보고 정부와 협력해 진보적 개혁을 얻겠다는 비판적 지지 노선을 취했다. 지지에 압도적인 강조가 있고 비판은 조금만 하는 것이었다. 가령 청와대-검찰 갈등 초기에는 정부 편을 드는 태도를 취했다. 기존 국가를 지렛대로 개혁을 얻으려는 개혁주의 전략은 이런 실천을 더욱 부추겼을 것이다.
선출되지 않은 국가 관리자들이 자본주의 국가의 억압적 성격의 일면을 보여 주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두 가지 질문을 더 던져야 한다. 첫째, 선출된 정부가 신자유주의 정책을 펴고 부패의 한 사슬이 되는 일을 어떻게 봐야 하는가? 선출된 정부의 배신을 대중이 통제하지 못하고 바로잡을 수 없다면, 그들이 임명해서 채우는 선출되지 않는 관료들의 문제는 보나마나일 것이다.
둘째, 문재인 정부가 과연 노동계급의 삶을 개선하고 보호하려는 의지가 있는(능력은 제쳐놓고라도) 개혁 정부인가 하는 문제이다. 지금 문재인 정부의 정치적 위기는 우파나 관료들의 보이콧 때문이 아니라 문재인 자신의 선택(개혁 약속 배신)에 대한 대중의 환멸이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문재인 정부가 촛불 정신을 잘 계승하고 있는가 하는 물음과 관련해 2017년도 조사는 70퍼센트가 그렇다고 답했다. 그러나 지난해 연말의 조사에서는 58퍼센트가 그렇지 않다고 답했다.
최근 여론조사에서 서울시장 보궐선거 지지도에서 안철수가 지지율 1위를 기록하고, 윤석열이 차기 대선 후보로 30퍼센트나 되는 지지를 받는다. 둘의 유일한 공통점은 주류 양당 소속이 아니면서 문재인과 갈등하는 정치인들이라는 점이다.
문재인 정부가 선출된 정부이므로 선출되지 않은 권력들로부터 보호돼야 한다고 주장하는 민주당 정치인들과 그 주변의 지식인들이 의도적으로 빼놓는 것들이 바로 문재인 자신의 선택이라는 요점이다.
브라질의 교훈
최근 정경심 1심 유죄 판결과 윤석열 징계를 중단시킨 판결이 난 후, 〈한겨레〉 칼럼 등에서 친여권 평론가들은 브라질 노동자당의 사례를 이용해 재차 정권 수호를 주장한다. 2016년 브라질 노동자당 정부가 부패 혐의로 탄핵됐는데, 이것은 선출된 정부가 우파의 반민주적인 사법 쿠데타로 전복된 사건이라는 것이다.
이는 청와대-검찰 갈등 등에서 문재인 정부 편을 들지 않으면 대중의 정부 선출권이 선출되지 않은 우파 권력에 의해 부정될 수 있다며 진보 염원 대중을 협박하는 것이다.
브라질 우파가 합심해 노동자당 정부를 끌어낸 것은 사실이다. 그 뒤 보우소나루 같은 강성 우익이 대통령이 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브라질 노동자당은 14년이나 연속 집권(대선에서 4번 연달아 승리)했는데, 왜 하필 그 시점에서 우파의 탄핵이 성공했을까?
서로 연관된 세 가지를 빼놓고 이를 설명할 수 없다. 첫째, 국영석유 기업 페트로브라스와 연계된 노동자당 정부 관리들의 부패가 드러난 것이다. 둘째, 노동자당 정부는 2008년 세계적 경제 위기의 대가를 자신의 지지층인 브라질 노동계급에 전가해 오고 있었다. 신자유주의 정책들, 특히 긴축 정책을 편 것이다. 심지어 노동자당 자신이 원자재 호황 덕분에 시행한 소심한 개혁 조처들(포미 제로, 보우사 파밀리아 등)을 약화시켰다. 셋째, 그러나 브라질 노동운동 지도자들은 우파에게 이로울까 봐 노동자당 정부의 부패를 비판하고 항의할 책임을 회피했다. 이 때문에 대중의 환멸은 더 커졌고 대중은 룰라 정부에 등을 돌렸다. 그래서 우파가 기세등등해져서 수십만 명이 정권 퇴진 시위를 벌이며 노동자당을 정부에서 축출할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브라질 노동자당 사례에서 얻어야 할 교훈은, 진보 개혁 정부일지라도 노동자 운동이 그 정부의 부패 의혹을 감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물며 문재인 정부는 노동운동으로부터 출현한 진보 개혁 정부조차 아니다.
자본주의 국가 기원과 과제
자본주의 국가는 하늘에서 떨어진 정치 조직이 아니다. 자본주의 국가는 자본주의 경제 질서와 그 이해관계를 수호하려고 고안된 특별한 종류의 무장 조직이다. 이를 위해 자본가 계급이 이전 사회의 지배계급과 벌인 투쟁과 협력 속에서 사회 전체에 확립한 정치적 구조물이다.
자본주의 국가는 자본주의 경제의 번영에 의존하고, 그 번영을 위한 제반 과제에 적합하도록 설계되고 운영된다. 그래서 이 국가를 운영하는 고위 관료들은 대체로 자본가 계급에서 충원되거나 그들이 추천한 인물들로 채워진다. 그 과정에서 서로 다른 네트워크끼리 경쟁이 벌어지기도 하고, 그래서 국가의 정책이 특정 자본 분파(들)에게 유리하다가 불리하게 바뀌기도 한다. 하지만 착취 질서를 보호하고 세계 시장에서 국제 경쟁력을 추구한다는 점은 변하지 않는다.
한국 국가의 탄생 경로와 역사도 예외가 아니다. 이전의 국가들과 민족과 거주민이 비슷해 오해를 낳기도 하지만, 한국 국가는 이전의 조선이나 일제 식민통치 구조와도 완전히 단절돼 형성됐다. 한국 자본주의 국가는 1945년 이후 미국 제국주의의 강력한 후원 속에서 치열한 내부 투쟁, 그리고 분단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탄생했다. 그 과정에서 자본주의 이전의 사회적 관계(가령 지주제도)를 일소하고, 노동계급의 운동과 조직을 궤멸시켰다.
일제가 남기고 간 생산시설, 미국의 원조 물품과 자금, 또는 민간은행 등을 신흥 자본가들에게 넘겨 주면서 한국 자본주의가 성장하기 시작했다. 이 바탕 위에서 현대적 교육을 받은 젊은 엘리트들이 국가 관료와 군부를 채우고 새로운 지배계급으로 편입됐다. 자본가들과 신흥 국가 관료들의 동맹은 낙후된 농업 국가를 수출형 국가자본주의 방식으로 변모시켰다.
이후 오랜 우여곡절 속에서 시장 자본주의로 점차 전환하면서 한국 경제는 세계시장에 더욱 깊숙이 통합됐다. 이 과정에서 노동자 운동의 등장과 성장으로 국가 형태는 자본주의적 민주주의 체제로 변모해 왔다. 한국의 국가도 자본주의 수호를 위해 탄생했고, 자본주의 성장 단계마다 자본의 필요와 대중 지배에 적합한 국가 형태를 채택해 온 것이다.
따라서 누가 선출돼도(심지어 좌파가 선거로 집권해도) 자본주의 국가의 성격은 바뀌지 않는다. 이런 국가를 민주적으로 개혁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은 공상이다.
시장경제와 민주주의는 어울리지 않는다
민주주의는 단지 이념이 아니라 민주정(체)을 뜻한다. 단어 그대로 하면 ‘대중의 지배’로, 민주주의는 다수가 사회를 통치하는 국가 형태를 가리키는 것이다. 그래서 레닌은 계급이 사라지면(다수와 소수의 구분선도 사라지므로) 민주주의도 점차 소멸된다고 했던 것이다.
민주주의를 이렇게 이해하면, 주민의 다수인 노동자들이 자본가들에게 종속돼 착취를 받는 사회를 민주주의라고 부르는 것 자체가 모순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왜 사회의 소수인 자본가 계급이 민주주의에 관심이 없거나 적대적인지도 이해할 수 있다.
오늘날 역사학자들이 3대 부르주아 혁명이라고 부르는 혁명들 — 17세기 중반 영국 혁명, 18세기 후반과 19세기 중반의 미국 혁명(독립전쟁과 남북전쟁), 18세기 말 프랑스 혁명 —에서 민중이 선호한 대안과 최종적으로 승리한 부르주아의 대표자들이 선호한 해법은 서로 달랐다.
부르주아지가 혁명에 소상공업자와 농민 등 민중을 동원할 필요성 때문에 자유, 평등, 우애가 보편적 가치로 선언되고, 후자의 대중도 신분제의 속박에서 해방됐지만, 진정한 평등과 자유에는 이르지 못했다. 추상적인 가치들은 형식 절차를 넘어서면 재산을 가진 사람들만의 권리로 표현됐다. 법적·형식적 평등은 경제적 불평등에 기초하고 있었다.
자본주의 국가는 선거권자를 주권자라고 부르지만, 소수의 경제 권력자들만이 국가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지, 다수 대중에게는 실질적 권력이 없다. 소위 견제와 균형이 민주주의적이려면 실질적인 견제가 이뤄져야 하는데, 오늘날 자본주의적 민주주의 국가의 보편적 운영 원리라는 삼권 분립은 국가기구 간 견제일 뿐이고, 대중에게는 실질적 권력이 부여되지 않는다.
이는 삼권 분립의 기원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독립 혁명 후 수립된 미국 국가는 최초의 삼권분립 국가이다. 독립 혁명 과정에서 기여한 대중에게 어쩔 수 없이 선거권을 보장하는 양보를 했다. 미국 건국자들은 대중에게 선출권을 준 의회가 혹시라도 대중의 지배를 추구하는(민주주의) 입법을 하게 될까 봐 이를 견제하려고 사법부에 법률 위헌심판 등의 권한을 부여한 것이다.
선거 중심주의의 약점
각 기관들의 구조와 기능이 이미 정해져 있으므로 기관 운영자들을 직선제로 선출한다 해도 해법이 되지는 않는다. 지배자들이 이를 허용하지 않을뿐더러, 설사 허용된다 해도 고위직 개인들이 국가와 기관의 성격을 벗어나는 것은 구조적으로, 제도적으로 불가능하다.
만약 선출된 정부가 개혁을 하려고 할 때 선출되지 않은 관료들이 방해를 한다고 가정하면, 모든 국가 공무원을 선출할 때까지 이런 일이 반복되거나 아니면, 선출된 주요 관료들에게 나머지 국가기구가 그저 상명하복하길 바라야 할 것이다.
자본주의 국가가 이처럼 소수에 의한 다수 지배인 자본주의적 계급 지배를 목적으로 설립되고 사회 전체를 통치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민주주의 발전은 자본주의의 발전과 동시에 창출된 노동계급의 이해관계가 됐다. 이미 19세기 중반부터 민주주의는 노동계급의 요구였다. 자본주의적 불평등이 너무 끔찍했고, 그것이 자본주의가 약속한 법적 평등 같은 가치들과 어긋났으며, 부르주아지는 갈수록 민주주의를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노동운동의 민주주의적 요구는 처음에 정부 선출에 참가할 권리(참정권) 요구였다. 성공한 부르주아 혁명이 선거를 통한 대의제를 표방했기에 참정권 요구는 1인 1표의 보통선거권 요구이기도 했다.
19세기 중반 영국에서 일어난 위대한 차티스트 운동이 최초의 참정권 운동이었다. 차티스트 운동은 영국 의회에 노동계급의 대표들을 보내기를 원했다. 이 운동의 참가자들은 대체로 자본주의 하의 불평등이 정치 권력에 참여하지 못한 결과라고 생각했다. 이것은 정당한 요구였다. 그러나 온전한 진실은 아니었다.
노동계급은 보통선거권을 순차적으로 쟁취했다. 노동계급 남성을 시작으로, 마침내 러시아 혁명 이후에는 선거권 연령 하향, 여성 선거권 보장 등이 이뤄졌다. 그러나 자본주의 국가 하에서 쟁취한 보통선거권은 기대한 변화를 이뤄내지 못했다.
이런 결과는 자본주의적 민주주의의 본질적 성격과도 연관돼 있다. 자본주의적 민주주의는 지배자들이 더는 아래로부터의 저항을 막지 못할 때 노동자들의 참정권과 조직들을 마지못해 허용해, 그 지도자들을 자본주의 국가의 일부로 통합해 전투성과 급진성을 억제하고 체제에 순치시키는 정치 체제이다. 이는 자본주의적 민주주의가 정치 영역과 경제 영역을 분리시키는 경향과도 연관돼 있다.
이와 관련해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민주주의와 맺는 관계도 살펴봐야 한다.
시장은 생래적으로 반민주적이다
지배적 상식과 달리, 자본주의 시장경제와 민주주의는 서로 친하지 않다. 자본주의 시장경제는 첫째, 착취에 기초해 있다. 둘째, 무질서하고 조율되지 않는다, 셋째, 인간을 소외시켜 자유를 박탈한다. 따라서 민주적 시장경제는 용어(김대중 전 대통령이 매우 좋아한 말이기도 하다)와 사뭇 다르게 비민주적이다.
시장에서의 권리와 자유는 소득이 있어야만 가능하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에서 대다수의 사람들은 노동력을 판매하지 않는다면 생활을 이어갈 수단을 갖고 있지 못하다. 반면, 자본가들과 그들의 국가는 생산수단들을 통제하고 있다. 인구의 다수인 노동자들이 소득을 얻으려면 노동력을 팔아 자본가에게서 임금을 받아야만 한다. 이런 근원적 불평등 때문에 자본가들은 지불할 임금보다 더 많은 노동을 정해진 시간에 시킬 수 있다. 이것이 마르크스주의가 말하는 착취다. 모든 임금 노동자는 자신의 자본가에게 임금으로 지불되지 않는 노동을 착취당한다. 이런 착취로 이어지는 노동력 판매 자체가 시장에서 이뤄진다. 그리고 이런 착취는 더 큰 불평등으로 구조화된다.
노동자는 소비자로서도 별 힘이 없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진정한 힘을 가진 구매자(소비자)는 투자자인 자본가와 국가이다. 그 과정에서 생산과 유통을 갈수록 대기업이 지배하게 된다. 마르크스는 이 과정을 집적과 집중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했다. 그래서 오히려 현대 사회에서 갈수록 두드러지는 것은 ‘소비의 표준화’ 현상이다. 스마트폰을 예로 들어보자. 화려한 광고들 속에서 우리가 갑이 돼 기종을 선택하는 듯하지만, 실제로는 겨우 두세 개 대기업이 제조한, 디자인만 살짝 다른 비슷한 폰들 사이의 선택이다. 오히려 자주 사용하지도 않는 기능들 때문에 갈수록 가격은 오르고, 더 비싼 최신 폰으로 계속 갈아타야 하는 유혹에 노출된다.
자본주의 시장의 무질서는 시장이 각 개별 주체들(특히 기업들)의 이윤 획득 경쟁으로 움직이기 때문이다. 사회 전체에 무엇이 필요한지, 그 필요를 해소하려면 어떻게 자원을 배분하고 역할을 분담할지 등이 민주적으로 토론돼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어느 때는 자동차가 과잉생산되고, 그 때문에 철강의 과잉생산이 일어나고, 그러다가 자동차 산업에 불황이 오면 철강 산업도 불황에 처한다. 그래서 멀쩡한 새 자동차와 기계, 철강 등이 버려진다. 자본주의 시장은 주기적인 경제 위기로 사람들을 일자리에서 내쫓고 필요한 상품의 생산을 중단시킨다. 이 때문에 삶의 안정성은 더욱 훼손된다. 요컨대, 시장은 민주적 결정(그런 게 있다면)을 간단히 무력화시킨다. 자본주의 국가는 이런 자본주의 시장경제 질서를 보호하는 구실을 하므로 시장에 대한 민주적 통제라는 것은 불가능하다.
자본주의 시장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노동자들은 고된 노동과, 언제 일자리를 잃을지 모르는 불안감에 시달린다. 경쟁으로 내몰릴수록 사회 경험은 갈수록 더 파편화하고, 이는 사람들에게 개인의 여가 생활을 삶의 의미의 원천으로 보도록 만든다. 이는 마르크스가 말한 소외 현상의 일부다. 만연한 무관심과 이기주의는 이처럼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사람들을 육체적·정신적 녹초로 만들어 버린 결과다.
이런 조건 하에서는 민주주의의 기본 전제인 다수의 지배, 다수의 집단적 자기통치를 지향하는, 즉 자력 해방을 의식적으로 추구하는 능동적 노동계급 대중이 존재하기가 어렵다. 현대에 와서 자본주의적 민주주의 체제가 형식적으로 보통선거권을 보장해 민주적으로 운영되는 듯하지만, 실상은 전혀 다른 근본적 이유이다.
자본주의적 일상이 대중을 무기력하게 만든다는 점 때문에 오히려 노동계급이 자본의 지배를 집단적으로 거부하고 저항할 때 능동성과 의식성이 활성화되고 노동자 민주주의의 씨앗이 성장할 수 있다.
노동자 민주주의를 향하여
국가 주도적이었던 한국 경제는 성장의 결과로 1980년대부터 변화를 겪게 된다. 자본 축적에 성공해 민간 자본이 커지고 고용된 노동계급이 대규모로 성장하면서 국가와 자본, 노동 사이의 관계에 변화가 생긴 것이다.
자본이 원한 경제 자유화는 국가와 자본의 관계 재편을 뜻했다. 이는 이전의 정경 유착 관계의 재편, 규제 완화를 둘러싼 긴장과 갈등을 새롭게 야기했다. 하지만 권위주의적 일당국가 체제를 자본주의적 민주주의로 실제로 전환케 한 동력은 아래로부터의 노동자 투쟁과 그 조직들이었다.
자본은 원하는 자유화를 이뤘지만, 그것이 노동계급의 가열찬 투쟁에 의한 것이었기에 노동운동을 적대했다. 1987년에 개정된 선거제는 도시와 농촌의 인구당 국회의원 비율이 달라서 도시 노동계급에 대한 계급차별 성격을 띠고 있다. 인구의 다수이기도 한 노동계급을 달래면서 억눌러야 했기에 자본주의적 민주주의로의 전환 과정은 매우 불안정했고, 주기적으로 격렬한 갈등을 수반했다.
국가 형태의 전환 과정에서 노동운동 지도자들의 개혁주의도 국가 구조 안에 자리 잡기 시작했다. 개혁주의 지도자들은 체제와 기층 대중의 모순된 압력 속에서 동요한다. 노련한 개혁주의 지도자들은 이 모순을 화해시키려고 하며 가끔 성공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에게 자본주의적 민주주의는 거부의 대상이 아니라 개혁주의 전략의 전제 조건이 된다.
지금 노동운동 안에서 이런 전략을 대표하는 것은 확고하게 주류 사회민주주의 전략을 채택한 정의당이다. 의회민주주의 아래서 집권해 진보 개혁을 추진하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들을 “헌법 내 진보”라고 표방했던 것이다. 한편, 진보당은 사회민주주의 정당이 결코 아니지만, 스탈린주의 전통에 따라 남한 정부의 대북 화해 정책들의 매개로 개혁주의적 노선을 추구하고 있다.
정치적 민주주의를 넘어
그러나 이런 개혁주의 전략은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공상적이다. 오늘날은 특히 다음의 측면에서 부적합하다. 지금의 경제적·사회적 위기는 자본주의 체제 자체의 위기를 보여 준다. 지금의 코로나 팬데믹, 경제 장기침체, 기후 위기 등 복합적 위기는 자본주의를 정조준하고 해체해야만 해결의 단초를 마련할 수 있다. 세계 도처에서 개혁주의는 이런 복합적 위기들을 해결하는 데서 실패하고 무능을 드러내며 그 자체로 위기에 처해 있다(타리크 알리가 말한 “극단적 중도”).
한국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자본주의 위기에 맞서려면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식이라며 국가를 개혁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바깥에서 대중 투쟁으로 맞서야 한다. 이 과제를 자본가 정당인 민주당과 함께할 수는 없다. 민주당은 자신들이 한국의 (자본주의적) 민주주의를 대표한다고 표방하지만, 그들은 자본주의적 민주주의 전환에서조차 행위자가 아니라 수혜자였다. 그들은 또한 민주주의의 발전에 이해관계가 별로 없다. 그걸 통해 얻을 정치적 이익을 대부분 얻었기 때문이다.
물론 정치적 민주주의를 위한 노동자들의 투쟁이 무의미하다는 뜻은 아니다. 선거제도 개혁 등으로 진보 정당이 집권한다거나 국가보안법을 조건없이 폐지하는 일들은 아직 경험해 보지 못했다. 그러나 이런 과제들이 최우선 순위를 점하는 상황은 더는 아니며 또한 그런 과제들을 어떻게 수행할 것이냐가 중요하다.
첫째, 주로 노동계급의 정치사상, 조직, 결사의 완전한 자유와 관련된 민주적 권리가 민주화의 남은 과제라는 것은 한국에서 민주주의에 근본적인 이해관계를 가진 사회 세력이 노동계급이라는 것이다.
둘째, 따라서 민주주의 투쟁조차 노동계급의 계급투쟁적 방식으로 수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선거를 통한 집권 그 자체보다는 투쟁 속에서 활성화될 노동자 민주주의의 싹이 더 중요할 것이다. 한국 노동계급의 전략적 과제는 자유주의 부르주아 세력과 협력하는 민주 개혁 투쟁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자체(따라서 그것의 수호기관인 자본주의 국가)에 도전하며 노동자 권력을 추구하는 것이 돼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