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 개혁은 신기루이고 사기극이다(그럴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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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12월 28일 같은 주제로 진행한 노동자연대 온라인 토론회(영상 보기)의 발표문이다
지난해 검찰이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을 수사하면서 불거진 검찰 개혁 논란이 1년을 훌쩍 넘겼다. 제도 개혁은 별로 쟁점이 되지 않았다. 문재인 정부의 문무일·윤석열 전·현직 검찰총장들이 모두 제도 변경에 별로 반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문재인 정부 고위 인사들에 대한 여권의 수사 방해와 ‘윤석열 찍어내기’가 더 두드러졌다.
이것이 실패하면서 지금 문재인 대통령의 레임덕 위기가 사실상 시작된 듯하다.
민주당이 던진 검찰 개혁 의제는 대략 3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①수사권 축소 또는 수사와 기소의 분리, ②민주적 통제: 선출된 권력의 통제, ③공수처 신설: 부패 수사, 검찰 견제 등.
그리고 민주당의 대전제는 ‘검찰은 구악이자 적폐 세력으로서, 촛불 개혁 정부를 좌초시키려고 한다’는 것이다. 이것의 한 면은 진실이고, 한 면은 진실이 아니다. 검찰의 부패와 억압적 성격은 분명하다. 사람들도 모두 그렇게 생각하고 크게 반감을 갖고 있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의 위기는 검찰 때문이 아니다. 본질적으로 문재인 정부의 위기는 감히 “촛불 정부” 운운하며 “진보”를 참칭하고는 개혁 염원을 배신한 결과이다. 청와대와 검찰의 갈등이 문재인 뜻대로 되지 않고 있는 것은 결국 대중이 정부 여당의 위선에 더는 속기 싫다고 등을 돌렸기 때문이다.
지난해 〈오마이뉴스〉가 의뢰해 조사한 2019년 국가사회기관 신뢰도 여론조사를 보자.(2018년에도 했는데, 올해는 발표하지 않았다.)
검찰은 경찰(신뢰도 2.2퍼센트), 국회(2.4퍼센트) 다음으로 가장 믿지 못할 기관(3.5퍼센트)으로 선정됐다. 2018년에 실시한 같은 조사에서는 국회(1.8퍼센트)-검찰(2.0퍼센트)-경찰(2.7퍼센트) 순이었다.
그동안 스폰서 검사, 떡값 검사 등 검찰에 대한 온갖 추문이 끊이지 않았다. 약촌 오거리 사건 등 억울한 사람들의 한이 풀린 유명한 재심 사건들에는 검찰의 조작이나 명백한 증거 무시, 계급 차별적 행태나 편견이 반영된 수사와 기소 등이 매번 등장한다.
최근 국가정보원이 연루된 홍강철 씨 간첩 혐의 사건도 무죄 판결이 났다. 이와 똑같은 조작 사건이 유우성 씨 사건이었는데, 당시 유우성 씨 수사 검사는 국정원 요원에게 증거 조작을 지시하기까지 했다. 그런데도 제대로 처벌받지 않았다. 같은 검사들이 봐주기를 한 것이다.
검찰은 2008년 온라인 논객 ‘미네르바’ 구속 사건이나 2013년 진보당 해산 사건 등 공안 탄압에도 적극 앞장섰다. 반면 부패한 기득권이나 반노동자적 기업주들에 맞서 정의를 구현하는 데에는 결코 그 힘을 발휘하지 않는다.
이런 행태는 검찰 조직의 본질적 성격이 자본주의 국가의 억압적 기관이기 때문이다.(그래서 검찰의 민주적 개혁은 공상이라는 게 고전적 마르크스주의의 기본적 논제였다.)
체제 수호 기관, 검찰
검찰이 가진 수사권과 기소권은 기본으로 국가가 독점한 형벌권의 일부이다.
국가는 지배계급의 피억압 계급 지배를 위한 무장한 정치조직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그래서 자본주의 국가는 자본주의 질서를 지키는 것을 목적으로 처음 세워졌고, 그 목적에 맞게 조직됐다. 자본주의가 제대로 기능하려면, 개별 자본들이 혼자서는 하기 어려운 일들을 대리해서 사회 전체에 강요하는 조직이 필요하다.
자본가들의 투자와 거래, 계약이 물리적·법적으로 보장돼야 한다. 그리고 노동력을 쉽게 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또 체제 질서에 순응할 준비가 된 노동자를 계속 만들어 내는 것이 필요하다.
국가는 상품 유통과 노동력의 이동을 위해 도로, 철도 등 교통망을 깔고, 산업 시설과 노동자 집중을 위해 도시를 건설하고 상하수도, 전기 등의 제반 시설을 마련한다. 또한 영토 내의 자본주의 질서를 국경 안팎의 위협에서 보호한다.
자본주의 국가는 자본주의가 성장하면서 새롭게 등장하거나, 기존 국가가 새 질서에 맞게 재편되며 등장했다. 자본주의 국가의 영토 주권은 특정한 지역 안에서 물리적 힘을 독점하고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와 그에 따른 정치·경제·사회적 질서를 사회 전체에 강요하는 것을 뜻한다.
계급 편향성
자본주의 국가의 사법 제도는 국가가 체제 유지를 위해 하는 일련의 과정을 법제화해서 운영하는 것이다. 의회가 체제 수호를 위한 법을 만들면, 그것을 행정부가 집행한다. 경찰이 수행하는 치안 기능은 이런 질서 유지 기능을 일상적으로 하는 것이다.
질서를 어기는 일이 벌어지면, 수사(와 구금)-기소-재판-형벌집행의 과정이 진행된다. 이 과정에서 기능하는 기관들이 경찰, 검찰, 법원, 교도소 등이다.
이 과정은 강제를 통해 질서를 준수하도록 대중을 훈육하는 것이다. 동시에 체제 유지 질서를 정당화하고 따르게 하는 과정이기도 하다.(가령 사적으로 누군가를 감금하거나 때리거나 죽이면 위법으로 처벌 대상이지만, 국가가 사법 절차를 통해 누군가를 가두고 교수대에서 죽이는 것은 합법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 강제와 동의의 효과를 모두 발휘한다.)
이 과정에서 기능하는 기관들은 기업인들의 경제 권력을 비롯해 지배계급의 권력을 보호하는 현대 자본주의 국가의 핵심 기구들이다.
사실 웬만한 사람들은 검찰과 법원에서 법(법안부터 그에 따른 행정조처, 수사와 재판, 판결 등)이 계급에 따라 차등 적용된다는 걸 잘 안다. 기관의 행태와 관행, 기관을 운영하는 자들의 언행 속에서 이런 계급 차별이 만연한 현실은 법원과 검찰 같은 핵심 권력기관들의 진정한 성격을 보여 준다.
따라서 일련의 연결된 과정의 일부로 존재하는 수사권과 기소권이 어느 기관에 있느냐는 피억압 계급들에게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후자를 위한 정의와 공정이 구현되는 개혁이 전혀 아닌 것이다.
검찰의 수사권·기소권 문제를 둘러싸고 평범한 사람들에게 진짜 문제가 되는 것은 억압적 기관으로서 검찰이 갖는 (확고부동한) 계급 편향성 문제다.
가령 2008년부터 10년간 산업재해 사망자가 연평균 2000명이 넘는데도 산업재해(산업안전보건법 위반) 사건에서 사용자에 대한 정식기소율은 일반 사건의 절반에 못 미친다. 구속기소는 9명에 불과했다(대부분 약식기소 벌금형). 부당노동행위 등 사용자의 위법행위에 대한 기소율도 검찰 평균 기소율의 절반밖에 안 된다. 판·검사의 범죄에 대한 기소율은 그보다 더해 일반인 기소율의 수십 분의 일이다.
그런데 일단 기소를 하면, 거의 유죄다. 2018년 1심 무죄율은 0.79퍼센트다. 그러나 같은 시기 검찰은 접수된 사건에서 42.3퍼센트만 기소했다. 달리 말하면, 유죄 나올 것만 기소했다는 뜻이다.
결국 노동계급 사람들에게는 검찰이 누구는 기소하고 누구는 기소하지 않는지, 검찰의 그런 판단이 왜 법원의 판단과 거의 일치하는지가 중요하다. 수사권·기소권의 소재가 아니라 사법 절차를 진행하는 기관들의 계급 편향성이 진짜 문제다.
인적 연계
국가 기구들을 운영하는 상부 구성원들로는 소수만이 매우 엄격하게 선발된다. 그들은 선발과 동시에 엘리트 취급을 받으며 지배계급으로 이어지는 인적 연결망으로 통합되기 시작한다. 물론 그 연결망 내부에서도 족벌, 학벌, 지역 출신 등을 따지며 서열화·분화가 일어나고 경쟁이 생긴다.
이런 관행 속에서 각 권력기관들이 사회 전반을 관장하면서도, 정작 그 핵심 구성원들은 폐쇄적인 이너서클을 이루고 상명하복으로 권력을 공유한다. 검찰, 법원 등의 막강한 권력이 바로 이들 “신성가족”을 묶어 주는 울타리이자 힘이다.
이 네트워크 안에는 선출된 정부와의 관계도 포함돼 있다. 그렇기 때문에, 검찰과 경찰은 체제 수호 기관임과 동시에 수십 년 동안 정권의 앞잡이, 몽둥이 구실을 해 왔던 것이다. 그리고 그런 라인들을 서로 형성하려고 때로는 은밀하게 때로는 공공연하게 쟁투를 벌여 온 것이다.
어느 나라에서도 이런 기관들의 최고위 대표들은 선출되지 않는다. 고위 공직자 인사청문회가 있지만, 본질적으로 이 과정은 지배자들 사이에서 합의가 될 만한 인사들이 임명되도록 돕는 작용을 한다. 물론 분열이 심각하면 일부 인사를 놓고 합의를 이루지 못하고, 다른 자들로 대체해야 한다. 우리 나라 정치에선 이런 일이 자주 일어난다.
자본주의 국가의 내분과 갈등
자본은 착취와 억압 문제에서 단결하지만, 서로 경쟁하기 때문에 자주 분열해 현실에서 자본주의 국가에도 이런 분열이 반영된다.
자본주의 국가는 자본주의 질서를 지킬 뿐 아니라 자국 영토에 기초한 자본의 경쟁력을 돕는다. 국가의 힘이 되는 조세 수입(재정)이 경제 번영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개별 자본들과 국가들은 자국 영토 내 노동자 착취 문제에 이해관계가 일치한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생겨난 잉여가치 몫을 두고, 또는 더 효과적인 착취·억압 방식을 둘러싸고 자본 간(때로는 자본들의 경쟁과 얽힌 국가 간) 경쟁도 치열하게 진행된다. 자본주의는 자본들 간 경쟁에 기초해 돌아간다. 자본들의 경쟁적 축적은 경제 위기를 부르기도 한다. 그러므로 자본 간 경쟁과 위기, 분열은 자본주의의 구조적 문제다.
체제가 안정적일 때는 이것이 흔히 “협치”라고 불리는 자본주의적 민주주의 내 정당 간 경쟁으로 수렴되지만, 위기 시기에는 극심한 분열과 대립을 부르기도 한다.
이런 경쟁이 노동계급을 분열시키기도 하고, 때로는 체제 위기와 분열을 야기해 노동계급이 저항에 나서고 성공할 조건을 만들기도 한다.(이것이 한줌의 단합된 과두 지배층이 다수를 단지 속이고 세뇌하며 음모적으로 지배한다고 보는 포퓰리즘적 서사와 마르크스주의의 자본주의 분석의 차이다.)
한국 지배자들은 1987년 이후, 군사독재 일당국가를 자본주의적 민주주의 형태의 국가로 전환하도록 강제한 노동계급의 조직과 힘에 걱정과 두려움을 갖고 있다. 세계 시장에의 통합도가 높아질수록 경쟁력을 높여 경제를 더 효율화해야 하기 때문에 노동운동을 유화적으로만 다루기는 쉽지 않다. 노동운동에 몽둥이도 휘두르고 싶지만, 눈치도 봐야 한다. 몽둥이가 먼저냐, 포섭이 먼저냐를 두고 지배자들끼리 자주 갈등을 벌인다.
자본 축적 방식을 둘러싼 이런 주된 모순들 속에서 한국의 자본주의적 민주주의는 불안정하게 발전해 왔다. 국가기관들 사이에 그리고 그 내부에 긴장이 일상화돼 있다. 여야 갈등은 거의 언제나 첨예한 배경이다.
그래서 한국 지배자들은 매우 소심하면서 또한 표독하다. 가령 지배계급의 품위까지 훼손시킨 박근혜를 미련없이 버리고 정치 안정을 위한 구원투수로 문재인을 선택했지만, 막상 문재인의 포퓰리즘 전략이 자칫 노동계급의 행동을 고무할까 봐 걱정하며 비난한다.
특히 지금은 경제·코로나 위기 속에서 정치 안정을 위한 방식을 두고 의견이 날카롭게 갈리고 있다. 청와대와 민주당은 자신들이 진보진영 지도자들이 저항에 나서지 않도록 붙잡고 있으므로 현 정부를 위태롭게 하는 것에 반대한다. 반면 검찰 수뇌부와 많은 검사들은 여야 가릴 것 없이 부패 수사를 벌여야 대중을 달래고 정치가 안정될 수 있다고 봤다. 둘의 갈등은 지금 전반적인 정치 안정을 해치고 있다. 경제 침체와 코로나 등 생태 위기와 기후 위기, 국제질서의 불안정이 상호작용하면서 불안정과 분열이 더 심각해지고 있다. 정치적 정당성과 안정성 문제로 불거진 갈등은 개혁 배신으로 인한 정권의 레임덕을 앞당기는 데 크게 일조하고 있다.
자본주의 하의 민주적 통제가 허상인 까닭
앞에서 사법 절차가 강제와 동의를 만들어 내려고 한다고 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절차적 개혁에 대한 아래로부터의 압력이 개입할 여지가 생긴다. 그러나 그 효과는 잠정적이다.
사법 절차가 전 과정에서, 그리고 늘 예외 없이 권력자와 사용자 편향적이면 노동계급은 이런 기관들(나아가서는 국가 자체)을 불신할 테고, 그런 정당성 위기는 안정적인 계급 지배를 위협할 것이다.
그래서 개선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체제의 정상적 작동이 어렵다고 여겨질 때 쓸 만한 내용이 일부 포함된 절차적 개선이 이뤄진다. 따라서 진정한 개혁을 원한다면 민주당에 의한 검찰 개혁이라는 공상을 지지하기보다 문재인 정부와 결별하고 체제를 흔들고 도전하는 아래로부터의 투쟁을 만들어 내려고 애써야 한다.
1987~1989년 노동자 투쟁과 사회 운동의 고양기와 그 직후 시기에 그나마 보통의 사람들, 투쟁하는 노동자들과 좌파들에게 도움이 되는 사법 절차 개선이 일어난 것은 결정적인 교훈이 돼야 한다. 가령 경찰에서 진술한 것의 증거 능력을 인정하지 않거나 다른 증거 없는 자백은 무효, 위법적 증거 수집을 인정하지 않는 문제, 미란다 원칙의 고지 같은 변화 말이다.
최근 사례로 보면, 박근혜를 퇴진시킨 운동 속에서, 또는 그 여파가 지속된 기간에 박근혜의 탄핵이 보수적인 헌법재판소에 의해 인용되고, 박근혜와 이명박이 구속된 일, 사법 농단으로 정당성 위기를 겪은 후에 나온 낙태죄 헌법불합치 판결 등도 그런 사례다.
그러나 투쟁이 혁명적으로 고양되지 않는다면 이런 변화는 자본주의적 민주주의의 일시적, 잠정적 변화 이상이 되지 못할 것이다. 예컨대, 일상적 자본주의 질서 하에서 보통의 사람들이 밀실에서 검사나 형사들 앞에서 묵비권을 행사하기는 쉽지 않다. 인맥이나 돈도 없는 이들이 즉각적으로 변호인 조력을 받거나 심문 과정에서 변호사를 대동할 권리를 이용하기는 쉽지 않다.
쟁점이 된 검찰의 수사지휘권은 비대한 경찰 권력의 견제라는 명분으로 1953년 한국의 형법과 형사소송법이 생겨날 때부터 있었다. 그러나 법보다 주먹이 먼저인 독재 정권들 아래서는 그런 견제조차 무용지물이었다. 실질적으로 경찰에 대한 견제가 관행화된 것은 일당국가가 대중 항쟁에 밀려서 좀 더 민주주의를 늘리는 방향으로 후퇴해야 했던 1987년 이후이다. 검찰공화국 담론의 시작점을 노태우 정부 때로 잡는 이유이다. 그럼에도 경찰 견제가 기껏해야 검찰의 경찰 지휘로 한정된 것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사법 개혁?
안전기획부(국정원의 전신) 국내 수사권도 국가 형태의 자본주의적 민주주의 전환 속에서 잠시 폐지됐지만, 다시 부활했고, 지금까지 이어져 왔다. 최근 개정안에서도 국정원의 수사권은 없어진 것이 아니라 경찰에게 이전된 것일 뿐이다.(보안에 능란한 국정원 요원들이 경찰 수사관들에게 영향을 미치면 된다.) 그나마도 3년을 유예했으므로, 확정적인 것도 아니다.
이런 일들이 그다지 진보적 변화가 아니었음을 지금은 누구나 안다. 따라서 이 기관들 안에서 견제와 균형을 제도화하기, 공수처 같은 검찰2를 만들어서 수사권과 기소권을 주기 같은 제도 변경들이 부패 근절을 전혀 할 수 없다는 것도 쉽게 유추할 수 있다.
공수처는 기껏해야 옛 대검 중수부나 옛 서울중앙지검 특수부를 독립기관화한 것일 뿐이다. 그런 부서들이 집권당의 대규모 정치자금 일부를 고리로 고위 정치인들과 유력 재벌들 몇몇을 구속한 적도 있지만, 부패는 없어지지 않았다. 검찰 자신이 부패 고리의 한 사슬이 되기도 했다.
게다가 공수처 설립의 맥락도 검찰의 정권 수사를 막으려고 긴급하게 만들어지는 것인 만큼 신뢰와 정당성은 이미 훼손됐다. 파죽지세 같은 윤석열 팀도 국정원을 뒤져야 하는 세월호 수사, 기무사 계엄 검토 수사 등을 흐지부지했고, 조국의 민간인 사찰 의혹 건은 불기소 처리한 바 있다.
자본주의 국가의 억압적 기관들끼리의 견제는 늘 이럴 수밖에 없다. 따라서 비슷한 기관들끼리의 견제와 균형, 중립성 모두 신화에 불과하다. 그 중립성은 기껏해야 경쟁하는 기업들, 지배계급 분파들, 주류 정당들 사이에서 중립을 뜻하는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검찰·경찰은 물론이고 법원(사법부)도 노동계급에 이롭게 바꾸는 것(진보적 사회 개혁)이 불가능한 기관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기존 시스템 안에서의 민주적 통제도 허상이다. 선출된 행정부나 의회도 본질적으로 체제 수호를 위해서 작동하므로 또 다른 국가기구인 검찰, 경찰, 법원을 통제한다는 것은 (용어만 좌파에서 훔쳐 온 것이지) 진정한 민주주의적 통제와 관계가 없다.
그렇다고 그런 주장을 하는 민주당이 마찬가지로 선출된 정부였던 이명박, 박근혜 정부의 검찰 통제를 지지했던 것도 아니다. “권력은 시장에게 넘어갔다”던 노무현의 후예들이 민주적 통제 운운하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노무현의 이 말은 개혁 배신을 정당화하는 핑계였다.)
결국 민주당이 말하는 민주적 통제는 민주당의 통제이고, 민주당의 부패 의혹 수사를 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나 아래에서 보듯이, 민주당의 통제는 민주 개혁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민주당은 민주화 수혜자일 뿐 민주화 주체 아님
민주당은 자본주의적 민주주의로의 전환 과정에서 행위자가 아니라 수혜자였다. 1997년 1월 민주노총 파업이 준 타격과 김영삼과 이회창이 이끈 집권당의 부패 스캔들과 그해 11월 IMF를 부른 경제 공황의 충격 속에서 광범한 대중의 지지로 김대중이 집권을 했고, 그 이후로 민주당은 지배계급이 선택하기도 하는 정당으로 확실하게 그리고 착실하게 변모해 왔다.
어디에서나 그랬듯이, 한국 국가가 자본주의적 민주주의로 전환된 동력은 노동계급의 투쟁과 조직 덕분이다. 1990년대 민주노총이 합법화되며 노동조합 설립이 더욱 자유로워지고, 합법적 노동계 진보정당이 생기고, 상대적으로 자유롭게 좌파들이 합법 공간을 이용할 수 있게 된 것은 노동계급의 투쟁과 조직 덕분이었다.
1990년대 말과 2000년대 초에 민주당이 처음 집권해, 국민의힘의 전신들이 지배하던 검찰, 경찰, 국정원 등과 긴장을 형성했던 것은 아직 지배계급의 제1선택지가 못 됐기 때문이었다. 민주당이 구 집권당과 동등한 집권 경쟁 세력이 되려는 과정에서, 그 사이 강력해진 노동계급에게 양보가 불가피했다. 민주당은 양보의 대가로 노동계급이 경제 위기의 고통을 받아들이도록 노동계와 사회운동 지도자들을 포섭해 양보를 이끌어내려고 했다. 중도파로서 왼쪽의 압력을 이용해 오른쪽을 견제하며(오른쪽 압력을 이용해 왼쪽을 침묵시키려고도 한다) 자신들의 우위를 확립하는 시도를 했고 가끔은 성공했다.
결국 자본주의적 민주주의는 지배자들이 더는 아래로부터의 저항을 막지 못할 때 노동자 조직들을 마지못해 허용하며, 대신 그 대중적 지도자들을 자본주의 국가의 일부로 통합해 전투성과 급진성을 억제하고 체제에 순치시키려는 체제이다.
김대중 정부가 김영삼 정부보다 더 많은 노동자를 구속하고, 집권 첫해에 이전 두 정부의 집권 첫해보다 더 많은 국가보안법 구속자를 양산한 것이나, 노무현 정부가 노동법 개악·이라크 파병·신자유주의 정책을 가열차게 펼치며 노동운동을 약화시키려 하고 국가보안법 탄압을 지속한 것은 민주당이 (민주화 과정의 수혜자일 뿐 아니라) 노동자 민주주의의 싹들을 억제하는 데에 진정한 이해관계가 있음을 보여 준다.
박근혜 퇴진 운동 덕분에 집권해서는 개혁을 배신하고 부패를 은폐하며 그것을 검찰 개혁으로 포장하는 문재인 정부도 앞선 민주당 정부들과 다르지 않다. 엔지오 지도부 등에 포퓰리즘적 기반을 두고 이를 생색내듯 활용하지만, 민주당은 본질적으로 자본가들의 정당이었고, 지금도 그렇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경제·안보 위기가 심해지면서 민주당은 이제 자본주의적 민주주의 체제 안에 있는 노동자 민주주의의 싹을 온갖 연막과 둘러대기, 달래기로 억제하는 것에 더 노골적이 됐다.
그러므로 민주당을 도와서 민주주의를 더 진전시킨다는 것은 공상이다. 민주당 발 검찰 개혁론이 (필연적으로) 희화화된 이유다. 진보진영 일각의 착각과 오해는 이제 교정돼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