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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민 수용에 인색한 문재인 정부

코로나 이후 난민들의 삶은 더 나락으로 빠졌다. 2020년 12월 기준 유엔난민기구 통계를 보면, 전 세계 난민은 7950만 명으로 사상 최대에 이른다. 시리아(660만), 베네수엘라(370만), 아프가니스탄(270만), 남수단(230만), 미얀마(100만) 순이다. 전쟁과 기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고향을 떠나야 했던 이들 중 3000만~3400만 명이 아동이다.

제국주의 국가들이 난민 발생에 1차적 책임이 있다. 가장 많은 난민이 발생한 시리아는 아사드 정권의 제거/유지에 상충된 이해관계를 가진 외부 강대국들(미국, 러시아, 프랑스, 터키, 사우디아라비아 등)이 경쟁적으로 전쟁에 개입하면서 악화일로를 걸었다.

그러나 난민 발생에 가장 큰 책임을 져야 할 국가들은 난민 수용을 사실상 거부한다. 그 결과 난민 최대 수용국들은 터키(360만), 콜롬비아(180만), 파키스탄(140만), 우간다(140만) 등이다.

각국 지배자들은 수용 여력 부족을 운운한다. ‘유럽 국경 및 해안 경비대’(프론텍스Frontex)의 예산은 2020~2027년 사이 120억 유로가 늘어난다. 이 액수는 유럽연합이 2014년부터 2020년까지 7년 동안 쓴 이민통합기금 약 31억 유로의 네 배에 이른다.

프론텍스는 폭력적인 난민 저지 작전인 ‘푸시백’ 작전을 벌인다. 난민들을 태운 고무보트나 나룻배, 뗏목 등을 터키 영해 쪽으로 밀어내는데 그 과정에서 무수한 난민들이 목숨을 잃는다. 그래서 저명한 기아 문제 연구자인 장 지글러는 프론텍스가 난민을 저지하는 폭력 집단이라고 일컬었다.

유럽 경찰들은 난민 색출에 인공위성과 무인기 감시 데이터, 각종 최신 드론을 동원한다. 난민들이 망명 신청서조차 내지 못하게 하려고 온갖 첨단기술을 동원하고 있는 것이다.

공항에서 난민 신청 자체를 차단하는 경우도 빈번해졌다. 인천공항에서 287일 동안 노숙한 난민 루렌도 가족이 그런 사례다. 얼마 전에는 한 난민이 인천공항에 무려 423일 동안 억류돼 있다가 인권 변호사들의 도움으로 겨우 입국하기도 했다.

난민이 아니라 인종차별을 막아야 한다 ⓒ조승진

난민 수용을 거부하는 지배자들은 국내 안전 운운한다. 그러나 난민이 범죄를 일으킨다는 뉴스 대다수는 가짜 뉴스다. 2016년 한 난민을 베를린 트럭 테러범으로 몬 보도나 스웨덴 난민의 ‘성폭력 범죄’도 모두 가짜 뉴스였다. “난민 혐오를 조장하는 거짓 정보가 뉴스와 인터넷을 잠식하고 있다.”(국가인권위, 카드뉴스 ‘가짜 뉴스가 난민을 죽입니다’, 2019)

난민들이 대단한 혜택을 받는 것도 아니다. 난민 신청자가 받는 생계지원금은 취업이 금지된 초기 6개월 동안만 지급될 뿐이고, 1인당 21만~43만 원에 지나지 않는다.(지급액은 2018년 이후 3년째 동결됐다.) 이조차 법이 그렇다는 것일 뿐, 실제로는 2019년 기준 지원금 신청 대상자의 2.5퍼센트만이 평균 3.2개월 동안 지원받았다.(난민인권센터, ‘간단히 보는 국내 난민 처우 현황’, 2019년 12월 31일 기준) 난민 신청자는 의료보험 지역가입도 불가능하다.

왜 연대해야 하는가

난민은 마치 일자리와 경제를 위협하는 존재로 그려진다. 그러나 경제와 일자리에 영향을 미치는 주된 요인은 자본주의의 경기 변동이다. 오히려 유럽연합의 한 통계에 따르면 최근의 난민 유입으로 유럽연합 경제성장률은 단기적으로 0.1~0.2퍼센트 증가했다. 난민 유입이 가장 많았던 독일의 경우 단기적 성장률 증가 효과가 0.4~0.8퍼센트에 이르렀다는 추산도 있다.(박복영, ‘난민이 해외수용국 경제에 미치는 영향’, 2018).

한국에서도 난민들은 국내 노동자들의 일자리를 빼앗아가지 않는다. 내국인들이 가장 꺼리는 힘들고 위험한 일을 난민 노동자들이 하고 있다.

그런데도 지배자들은 난민을 배척하거나 난민을 터부시하는 생각을 조장한다. 여기에는 중요한 정치적 이유가 있다. 난민 이주민에 대한 경계심 조장은 ‘분열해서 지배’하는 정치적 효과를 내기 때문이다. 지배자들은 ‘한국인이라는 자부심’을 만들어 내고, 이를 난민·이주민에 대한 차별로 뒤틀어 내면화시키려 한다. 그럼으로써 대중이 겪는 고통의 책임을 엉뚱한 데로 돌리고, 계급의식과 연대 정신을 무디게 하려는 것이다.

사실, 한국인들도 난민의 고통을 겪은 역사가 있다. 예컨대 4·3 제주 항쟁 때 많은 제주도민들은 목숨을 건지기 위해 일본으로 밀항을 시도했고 다시 강제 추방을 당하기도 했다. 추방을 모면하면 타국 땅에서 멸시와 차별에 시달리기도 했다. 물론, 그후 한국은 난민을 만들어 내기보다는 난민이 들어오는 국가가 됐다. 그러나 한국 지배자들은 오랫동안 난민을 배척해 왔다. 문재인 정부도 그 ‘과거’를 이을 테세다. 한국을 찾아온 난민들에게 똑같은 고통을 강요하는 것은 도덕적으로도 맞지 않을 뿐더러 노동자들의 연대 의식에 해악적이다.

난민을 거부하는 거짓말들을 폭로하고 난민에 연대하는 일은 노동계급의 사기를 끌어올리는 데서 중요하다. 미국과 유럽에서는 난민·이주민에 대한 정부의 공격이 극우와 파시스트들이 성장하는 중요한 자양분을 제공했다. 한국이 그와 같은 상황은 아니지만, 자본주의가 낳는 경제 위기와 지정학적 불안정 증대 속에서 난민·이주민을 속죄양 삼는 일도 잦아질 가능성이 있다. 이에 효과적으로 맞서지 못한다면 사회 분위기가 우경화될 수 있다.

이에 맞서는 일은 가능하다. 1980년대 유럽 전역에서 우익이 난민에 대한 적개심을 퍼뜨리기 시작했을 때 인종차별에 맞서는 운동이 벌어졌다. 네덜란드에서 20만 명이 참가한 서명 운동이 추방 위협을 받고 있던 난민들을 구했고 영국에서는 수천 명이 난민 학생들의 추방을 막는 캠페인을 조직했다. 독일, 네덜란드, 이탈리아, 스페인 등지에서 난민에 연대하는 지역 네트워크들이 생겼다.

난민과 이웃으로 살아가고 이들과 함께 연대하는 경험은 다른 여러 편견을 녹이는 데도 좋은 영향을 줄 수 있다. 난민에 대한 연대는 난민들에게 큰 희망과 위안이 될 뿐 아니라 자본주의가 뿜어내는 차별과 천대를 끝장내는 투쟁을 구축하는 장기적 과정에도 기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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