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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스리스’ 20년 전보다 3배 증가:
성생활을 막는 것은 무엇인가?

한국의 성인 3명 중 1명은 지난 1년간 성생활을 하지 않거나 못한 것(‘섹스리스’)으로 조사됐다(‘2021년 서울 거주자 성생활 연구’). 20년 전의 다른 조사와 비교해서 3배 이상으로 증가한 것이다.

특히 20대 남성은 다른 모든 세대에 견줘 ‘섹스리스’ 비율이 가장 높았고, 20대 여성의 경우에는 60대 다음으로 높았다. 또, 남녀 모두 소득 하위층에서 ‘섹스리스’ 비율이 높았다. 하위층은 파트너를 찾지 못해서 성관계를 갖지 못하는 비율이 높게 나타났다.

사회 곳곳에 성적 이미지가 범람하지만 정작 적잖은 사람들은 성생활을 하지 못하고 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걸까?

성 상품화

성은 인간 본성의 중요한 일부이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보통의 사람들이 의미 있는 관계를 발전시키고 성을 즐길 수 있는 정서적·물질적 여유를 앗아간다. 장시간 노동이나 육아에서 오는 스트레스, 온갖 경쟁과 구직 압박 등 삶에 가해지는 고통이 큰 상황에서 사람들은 성적 흥미를 잃기도 한다.

자본주의는 보통의 사람들이 성을 즐길 수 있는 정서적·물질적 여유를 앗아간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또한 충족되지 않은 성적 욕망을 이용해, 성을 인간에게서 떼어 내어 상품으로 만들어 우리에게 다시 판매한다. 상품 구입을 통해 성적 욕망을 만족시킬 수 있다는 생각이 부추겨진다.

게임이나 자동차·주류 광고는 물론이고 아이스크림 광고까지 여성의 몸을 이용한 광고가 만연하고, 거대한 포르노 시장이 유지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마르크스는 노동자가 삶의 큰 부분을 지루하고 반복적인 노동을 하는 데 보내는 데다 자신의 노동과 삶을 전혀 통제하지 못하는 상황을 ‘소외’라 불렀다. 그리고 이런 소외가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도 왜곡한다고 지적했다. 오늘날 성이 상품화되는 모습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 관계가 얼마나 왜곡되는지를 보여 주는 중요한 사례다.

그러나 소비로 성적 욕망을 진정으로 충족시키기는 불가능하다. 가령 아무리 자극적인 포르노라 할지라도 실제 인간 관계에서 얻을 수 있는 상호 교감과 온기, 풍요로움을 대체할 수는 없다.

오히려 성 상품화는 여성은 외모가 섹시해야 한다거나 남성은 성기가 커야 한다는 따위의 성에 대한 편협한 인식과 강박을 부추겨 사람들이 성을 즐기기 어렵게 만드는 데 일조한다.

최근에는 글램, 틴더 같은 데이팅 앱으로 사람을 만나는 일이 크게 늘었다. 국내 데이팅 앱 시장 규모는 약 2000억 원으로 추산된다. 지난 6년 사이 4배 이상으로 성장했다.

이런 앱을 이용해 사람을 만나는 것은 전혀 나쁜 게 아니다. 특히, 요즘처럼 코로나19로 사람을 만날 기회가 극히 적어진 조건에서는 데이팅 앱에 의존하는 게 자연스럽다.

그런데 데이팅 앱 사용이 증가하는 배경에는 노동계급의 삶이 타격을 받고 있는 상황이 있다. 특히, 청년들은 열악한 주거와 실업, 저질 일자리, 학비 부담으로 고통받아 왔다. 청년들이 노동시장에서 자리 잡기가 더 어려워진 상황이 연애에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정서적 여유를 누리기가 더 어려워지고, 연애 상대를 만날 기회 자체도 줄었을 것이다. 다른 세대보다도 20대 사이에서 ‘섹스리스’ 비율이 높은 것은 이런 조건의 영향일 수 있다.

그러나 데이팅 앱에서 사람들은 자신을 가장 매력적으로 ‘마케팅’해야 한다는 압박을 받는다. 사람들은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어떻게 생겼는지 등에 대해 ‘양념’을 쳐야 한다는 유혹을 받기 쉽다.

심지어 어떤 데이팅 앱은 자신이 정한 ‘이상적 조건’에 맞지 않는 사람들은 아예 회원으로 받지 않는다. 가령 국내 데이팅 웹사이트 ‘골드스푼’에 가입하려면 남성은 연봉이 7000만 원 이상이거나 ‘의료인·법조인 등 전문직’, ‘수입 차량 보유’, ‘강남 3구 거주’ 기준을 충족시켜야 한다. 여성은 외모 평가를 통과해야 한다.

이런 과정을 거쳐서 데이팅 앱에서 사람들은 단순히 소비자가 아니라 상품의 일부가 된다. 끔찍하게도, 소외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노력에서조차 자본주의와 시장의 논리가 작동하는 것이다.

가족 제도

자본주의 사회는 사람들이 누구와 어떤 관계를 맺을지도 제약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자본 축적에 필요한 노동력 재생산의 임무가 개별 가정의 부담으로 떠넘겨져 있다. 가정에서 주로 여성이 수행하는 가사와 육아는 노동계급의 여성과 남성에게는 막대한 스트레스와 부담이 되지만, 소수 지배자들인 자본가 계급에게는 커다란 이득을 안겨 준다. 현재와 미래의 노동력인구를 값싸고 안정적으로 길러 낼 수 있기 때문이다.

가족 제도는 성과 섹슈얼리티에 대한 사람들의 기대와 상상력을 협소하게 하는 데도 영향을 미친다. 1:1의 배타적이고 영속적인 남녀 관계와 그 자녀로 이뤄진 가족이 정상적이고 옳은 것으로 여겨지게 한다. ‘완벽한 가족’이라는 이상이 현실과 동떨어져 있음에도 가족 제도에 대한 자본주의의 의존 때문에 이런 이상은 계속해서 부추겨진다.

동성애가 ‘정상적’이지 않은 섹슈얼리티라며 차별받고, 여성의 낙태권이 제약되고, 한부모나 이혼 가정에 대한 차별과 편견이 지속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모순이게도 지배자들은 가정 가치관을 부추기면서도 정작 노동계급의 삶을 공격해 노동계급이 안정적으로 가족을 영위하기 어렵게 한다.

그러나 성에 대한 이런 불만족스러운 상황이 영원히 불가피한 것은 아니다. 오늘날 우리가 경험하는 성의 모습은 인간 사회의 보편적 특징이 전혀 아니다.

100년 전 노동계급이 권력을 장악한 러시아 혁명의 경험은 (국내외의 군사적·경제적 압박으로 10년 뒤 실패하기 전까지는) 성 해방의 가능성도 보여 줬다. 노동계급은 구 체제를 폐지하고 자신들의 국가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기존 사회의 억압적이고 차별적인 측면 모두에 도전했다.

모든 것이 도전받는 과정에서 사람들 사이의 관계도 변했다. 동성애가 합법화되고, 이혼이 자유화되고, 여성의 요구에 따른 낙태가 합법화됐다. 무엇보다 집 안에서 여성이 하던 일들을 사회가 맡게 되면서 여성이 집안일에서 해방되고 삶이 크게 변했다. 개인들 사이의 관계는 그저 그 자신의 일일 뿐, 국가가 간섭하고 규제할 일이 아니게 됐다.

러시아 혁명이 결국 실패하면서 성 해방 조처도 역전했지만, 러시아 혁명의 경험은 성의 왜곡에 맞서 싸우려면 대중의 욕구와 필요가 우선되는 사회가 건설돼야 하고, 그러려면 소수가 아니라 다수의 보통 사람들이 자신의 삶과 사회를 통제할 수 있는 사회를 건설해야 한다는 점을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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