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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징어 게임〉 ─ 자본주의 게임, 절망과 희망

〈오징어 게임〉이 넷플릭스 역대 최대 흥행작이 됐다. 전 세계 수억 명이 불과 3주 만에 이 시리즈를 봤다.

대본 작업은 원래 2008년 경제 공황 중에 시작됐지만 이 드라마는 거의 10년 동안 제작사를 구하지 못했다.

넷플릭스는 다른 히트작에 비해 훨씬 적은 액수인 200억 원으로 〈오징어 게임〉을 제작해서 기업 시가총액을 28조 원이나 늘렸다.

넷플릭스가 모든 수익을 가져가는 것이나 다름없다. 과연 강자독식이다.

〈오징어 게임〉은 생존 게임 장르의 드라마로, 자본주의와 경쟁, 계급을 다루고 있다.

부채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456억 원의 상금을 노리고 ‘오징어 게임’에 참가한다. 그런데 탈락의 대가는 죽음이고, 부자들이 게임의 진짜 주인이다.

물론, 참가자의 과반수가 원한다면 게임을 중단시킬 수도 있다. 하지만 너무나 처지가 절박한 사람들이 모여서 사실상 선택권은 없는 셈이다.

노동자 성기훈(이정재 분), 탈북민 강새벽(정호영 분), 이주노동자 압둘 알리(아누팜 트리파티 분)도 ‘오징어 게임’을 그만뒀다가 결국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생존 경쟁 경제적 강제와 국가 폭력은 노동자들의 집단적 도전을 가로막는다 ⓒ출처 넷플릭스

〈오징어 게임〉을 본 수억 명의 시청자들도 이렇게 경제적 강제에 매인 삶을 살아갈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매우 불공정하고 경제적으로 힘든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특히 팬데믹 이후로요. 불평등이 심해지고 경쟁이 심해지고 더 많은 사람들이 생계의 가장자리로 내몰리고 있습니다. [따라서] 현재 전 세계 90퍼센트 이상의 사람들이 이 시리즈가 묘사하는 인물들의 곤경에 어떻게든 연결되고 공감할 수 있을 것입니다.”(황동혁 감독)

주인공 성기훈은 극중 “드래곤 모터스” 노조의 점거파업(2009년 쌍용자동차 점거 파업과 매우 닮았다)에 참가했던 노동자다. 점거파업 도중 희망퇴직자가 된 것으로 보인다.

쌍용차 파업에서 그랬던 사람들은 끝까지 남아 싸운 해고자들보다 죄책감과 고립감 등 정신적 고통이 더 심했다. 자살하거나 돌연사한 쌍용차 노동자의 다수가 이들이었다. 한 아버지는 선처해 준다는 말만 믿고 아들을 설득해 점거파업을 그만두게 했는데, 나중에 희망퇴직을 한 아들을 보고 괴로워하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쌍용차 노동자들이 공장을 점거하고 싸운 77일 동안 공장에서는 물이 끊어지고, 전기도 끊어지고, 용역 깡패들이 폭력을 휘두르고 밤잠을 못 자게 방패를 두들기며 공포를 일으키고, 헬리콥터가 최루액을 살포하고, 경찰들이 테이저건을 쐈다. 노동자들의 PTSD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 비율은 그 어떤 참전 군인보다 높았다.

대량 해고 사태, 국가와 회사의 끔찍한 탄압은 30명이 넘는 노동자와 그 가족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그러나 정의당 류호정 의원의 10월 12일자 〈중앙일보〉 칼럼 ‘목숨 걸고 핥은 달고나…456번 성기훈씨, 행복합니까?’는 〈오징어 게임〉의 화제성을 이용하는 데 급급했다. 노동계급의 고통과 정서에 대한 공감과 이해가 없다. 그러면 풍자가 아니라 조롱이 된다.

아쉽지만 〈오징어 게임〉에서 이 위대하고 가슴 아픈 노동자 투쟁과 같은, 야만에 맞선 집단적이고 계급적인 도전을 볼 수는 없다.

대신 우리는 끔찍한 생존 경쟁에 짓눌리다 죽어 가는 동료와 친구들을 보며 울분을 삼켜야 한다. 가장 슬픈 6화에 이런 장면이 잘 나오는데, 〈배틀로얄〉(2000)의 장단점을 모두 계승하는 듯하다.

이런 경우 무엇을 얻어갈지는 당시 사회적 분위기와 시청자 개인의 세계관이 더 중요하게 작용한다.

깡패들

성기훈의 팀과 대립하는 팀은 깡패(조직 폭력배)가 주축인 팀이다.

깡패는 게임 바깥에서도 살인을 한 경험이 있고, 게임 안에서도 너무나 자연스럽게 살인을 한다.

밤에 서로 죽이는 장면을 두고 인간 본성에 따라 행동한다든가, 누구나 저렇게 된다고 생각할 문제는 아니다. 사람은 사람을 쉽게 못 죽인다. 총도 칼도 없이 말이다.

전문가(범죄 조직원)가 거기 있고 선동하고 지휘한다. 주최측은 그걸 계산하고 리얼리티 TV쇼에서 흔히 그렇게 하듯이 이용한다(주최측 대사에도 나온다).

주최측은 갈등을 유발하고 조작한다. 반면, 성기훈은 바리케이드를 치고 사람들을 독려하고 조직한다.

깡패, 범죄 조직의 폭력배는 자본주의적 존재다. 현실에서 어떤 식으로든 체제 유지에 기능한다. 역사적으로 이들은 노조와 파업을 파괴하고 운동을 공격하면서 성장했다.

제2차세계대전 직후 마피아, 야쿠자, 삼합회, 깡패가 전쟁 말기에 부상한 좌파와 노동운동을 공격하는 데 동원됐다.

당시 미국과 소련은 파시스트와 전범들의 권력을 좌파가 대체할까 봐 노심초사했다. 노동운동이 고무받는 것도 극도로 싫어했다.

그래서 이탈리아, 일본, 대만, 한국에 들어선 친미정부는 범죄 조직에 무기와 관직을 내주며 투사들을 살해하게 했다.

그러나 노동계급의 대중운동이 크고 강력하면 범죄 조직(마피아)은 감히 정면에서 그 운동을 공격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들이 운동의 지도자를 암살해도 장례식은 곧 마피아 반대 시위로 변했다. 오히려 하층계급 출신의 일부 조직원이 운동에 가담했을 정도다.

파리대왕

생존 게임 장르의 기원은 소설 《파리대왕》(1954)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이들이 섬과 야생에서 생존 경쟁을 벌인다는 설정은 〈배틀로얄〉(2000)과 〈헝거게임〉(2012)까지 그대로 이어진다.

‘리얼리티’ 서바이벌 TV쇼도 갇힌 공간에서 진행되는데 특히 섬을 배경으로 할 때가 많다.

《파리대왕》은 섬에 표류한 아이들이 탐욕과 지배욕에 빠져들어 다른 아이들을 고문·살해하고 마침내 섬을 불태우다 구조되는 이야기다.

《파리대왕》은 금세 청소년 필독서가 되었고 후에 작가 윌리엄 골딩은 노벨문학상까지 수상했다. 그는 인간 본성에 관심이 컸다. 하지만 다음과 같이 썼고, 말했다.

“우리가 깨끗한 상태에서 시작한다고 해도 우리는 그것을 망쳐 놓는 본성을 가지고 있다.

“벌이 꿀을 생산하는 것처럼 인간은 악을 생산한다.

“나는 언제나 나치를 이해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내가 본래 그런 부류의 사람이기 때문이다.”

《파리대왕》은 오늘날 TV 오락물의 주류가 된 리얼리티 TV쇼에도 큰 영향을 줬다.

1999년 네덜란드 TV의 리얼리티 쇼 〈빅 브라더〉가 히트를 친 이후 이런 프로들은 최근까지도 번성하고 있다. 참가자들은 생존 게임쇼에 스스로 참가하고 최종 승자는 상금이나 보상(백만장자와의 결혼 등)을 차지한다.

〈오징어 게임〉처럼 승자독식, 강자독식, 무한경쟁, 서바이벌이다. 매회 탈락자를 정하고, 오늘의 친구가 내일의 적이 된다. 이런 TV쇼가 세계화되던 시기가 바로 신자유주의의 팽창기였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리얼리티 서바이벌 쇼의 전제는 인간이란 제멋대로 행동하게 내버려두면 짐승이나 야만인처럼 군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거짓말과 협잡, 배신과 편 가르기, 적대감 유발하기 등을 제작진이 유도하고 조작했다는 폭로들이 나왔다.

〈오징어 게임〉의 황동혁 감독처럼 이러한 생존 경쟁의 이유를 주로 자본주의나 ‘현대 사회’에서 찾는 사람들이 있고, 반대로 오직 인간 본성으로 파악하는 사람들이 있다. 대부분은 그 중간에서 둘 다를 생각할 것이다.

과연 인간은 본성적으로 이기적이고 공격적이고 폭력적인가?

흔하고 지배적인 입장은 사실 지배자들의 입장이다.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인간 본성

환경 파괴, 기후 위기, 여성 차별, 인종차별, 파시즘, 불평등, 전쟁, 학대, 범죄, 실업, 가난, 부패, 독재, 자본주의에 대한 대답은 하나다. “인간 본성이 원래 그래.”

달리 말하면 인간의 지배욕, 인간의 소유욕, 인간의 정복욕, 인간의 이기심, 인간의 경쟁심, 인간의 배타성, 인간의 공격성, 인간의 가학성, 인간의 살인 충동 등이 문제라는 것이다.

인간 본성이야말로 《암흑의 핵심》(Heart of Darkness) 인가?

그러나 너무 유리하고 편리한 논리다. 지배자들, 즉 문제의 원인 제공자들에게 말이다.

인간이 문제라면 타노스는 절반이나 옳은 것일까? 그가 문제의 절반이나 제거하니까 말이다. 그보다 ‘하찮은’ 대량 학살자들 이를테면 히틀러, 루즈벨트, 트루먼, 존슨, 부시는 어떨까? 인간이 문제면 인간이 사라져야 할 텐데. 그런데 그 끝줄에는 전두환도 있다.

지배계급이 게으른 분석을 열심히 밀고 나가는 데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본성이 문제면 변화의 가능성은 없기 때문이다. ‘너희는 변할 수 없어’, ‘세상도 변할 수 없어.’ 따라서 ‘우리의 통제(사실은 지배)를 받아야 해.’

세상 모든 지배계급에게 아름다운 이론 아닌가.

그러나 자본가의 공장과 조선소와 발전소는 노동자들이 협동심을 발휘하는 덕분에 돌아간다. 노동자들이 서로의 뒤를 봐주는 덕분에 죽음의 공장에서도 산재가 덜 나온다. 간호사들이 스스로를 혹사해 팬데믹에서 우리를 구한 게 그들의 이기심 때문일까? 부모가 자녀를 다 버리고 자기만 생각한다면 자본주의가 하루라도 굴러갈 수 있을까?

자본가들은 매일매일 우리의 협동심, 이타심, 성취욕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다.

1963년 이래 700여 건의 재난 현장을 연구한 결과(델라웨어대학 재난연구센터, 2006)에 따르면, 재난이 벌어질 때 살인·강도·강간 등 범죄율은 감소하고 사람들이 물품과 서비스를 분배하는 등 이타적 행동은 증가했다.

그러나 지배계급은 다들 인간성이 자기 같다고 여기는 경향이 있다. 평범한 사람들도 자기만큼 비열할 거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흔히 군대와 경찰부터 무장시키고 대비시킨다. 2005년 미국의 허리케인 카트리나 현장이나, 2018년 인도네시아 쓰나미 현장에서처럼 생존자들에게 총질을 일삼는다.

HBO드라마 〈체르노빌〉을 봐도 지배자들과 평범한 사람들의 행동은 전혀 달랐다. 소련 관료들은 비열한 짓을 서슴지 않았지만, 수많은 어린 사병들, 툴라 광산에서 온 광부들, 참전 군인들, 발전소 노동자들은 죽거나 죽을병에 걸릴 줄 빤히 알면서도 “100만 명을 구해야 한다”, “200만 명을 구해야 한다”며 아무런 보상도 없이 목숨을 걸었다. 인간 본성이 자본주의적이라는 얘기와 거리가 너무 멀다.

2010년 칠레에서 한 광산이 무너져 33명이 69일 동안 지하 갱도에 갇혔다. 이 기간 내내 그들은 서로 협력하고 도왔다. 유일하게 다툰 적은 누가 먼저 구조되고 누가 남을지 결정할 때였다. 서로 먼저 나가겠다고 다툰 게 아니다. 동료들이 나보다 먼저 구조돼야 한다고 저마다 고집을 피웠다.

인간의 행동은 그 행위가 어떤 조건에서 일어나는지에 따라 달라진다. 우리를 경쟁하게 만들고 출세를 위해 남을 짓밟게 만드는 것은 자본주의다.

진짜 놀라운 것은 이런 체제에서도 자기 희생과 사회적 연대의 사례가 자주 목격된다는 점이다.

세월호에서 친구들을 구하기 위해 다시 객실로 내려간 양온유 반장, 11명의 순직 교사들, 국가를 대신해 학생들을 구한 어부들, 학생들을 구하고 트라우마에 시달린 “의인들”, 민간 잠수사들 등.

팬데믹 재난 상황에도 지난해에 거의 모든 개인 기부가 늘었다. 자선단체가 모은 기부액은 사상 최대이거나 평년보다 늘었다. 서울시가 모은 개인 기부액도 5배나 늘었다. 그에 비해 기업의 기부액은 1.4배밖에 늘지 않았다. 심지어 액수 자체도 개인 기부액이 더 증가했다.

자본주의의 일상은 이렇듯 절망과 희망이 뒤섞여 있다. 그러나 수많은 죽음과 아픔, 울분과 슬픔을 갚을 길은 오직 자본주의를 끝장내는 혁명 외에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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